00056 다 보여줄게 =========================================================================
로이는 갑자기 자신을 지그시 바라보는 수혁이 손을 뻗어 머리카락 깊숙이 찔러 넣자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상하게 그의 입술만 보이는 게 아무래도 지금 자신은 제 2의 김수정이 된 모양이었다. 발정난 동인녀 말이다. 하도 벌거벗은 꽃수가 앙앙 거리는 걸 봤더니, 부작용으로 왠지 자신이 그를 깔아야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로이…….”
목이 메는 듯 그의 목소리가 말려들어가 자신마저 애잔해지고 말았다. 수혁의 깊은 검은 눈동자가 점점 자신에게 다가왔다. 그러더니 자신이 키스 할 때 혀 넣는 걸 그렇게 구박을 했건만 룡룡이라 그런지 또 혀로 자신의 아랫입술을 핥더니, 입안에 넣고 볼 안쪽을 간지럼 피웠다. 이런 건 처음이라 무척 낯설고 불편했다. 어떻게 반응해야하는지 몰라 치과 진료 받는 것 마냥 혀를 어쩌지 못하고 뻣뻣하게 굳은 채 가만히 입을 벌리고 있자, 그가 턱에 흘러내리는 침을 엄지로 닦아주며 자신의 가슴을 만졌다. 로이는 너무 놀라 그를 밀쳐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그 덕에 수혁이 문고리에 등을 찍혀버리고 말았다.
“크흑.”
“미안.”
“괜찮습니다.”
무지 아픈 모양이었다. 처음으로 자신의 앞에서 이미지 관리 안하고 인상을 찡그리니 말이다. 언제나 웃는 모습만 보여주더니만, 이제야 사람 같았다. 아무리 자신이 좋아도 그렇지 아무 때나 해실거리며 착한 척하는 거는 아주 배알이 꼬여서 이편이 더 마음이 들었다.
“계란으로 문질러줄까?”
“아니요. 괜찮습니다. 점심을 차리겠습니다.”
갑자기 밥 차리겠다고 수혁이 부엌으로 가버렸다. 아까부터 왜 이렇게 자신에게 밥을 먹이지 못해 안달인가 싶었다. 그런데 그가 냉장고를 열어 계란이랑 우유, 팬케이크 가루를 꺼내더니 반죽을 만들었다.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얇게 부쳐주는데 설마 이게 KISS ME 찍기 전 ‘점심으로 팬케이크 먹고 싶다.’라 트워터에 올렸던 것 때문인가 싶었다.
“나 지금은 팬케이크 안 땡겨.”
“역시 제가 진작 매니저가 되어 챙겨드렸어야 했는데.”
수혁이 시무룩해져서 팬케이크를 뒤집었다. 아, 그런데 어째서 저 남자는 저 순간조차 광고 같은 거지? 왠지 CG로 그려놓은 것 같아 열 받았다. 이거 보통 여자들 반응은 아니겠지 싶다. 이 죽일 놈의 라이벌 의식이란. 그래도 조금 마음이 놓이는 것은 그가 자신을 무척 좋아해서 나중에 등에 칼 꽂지는 않을 거라는 사실이었다. 뭐 연예계라는 게 워낙 급변하는 물살이라 오늘의 연인이 헤어지면 토크쇼 나와서 내일의 원수가 될지도 모르는 바닥이기는 하지만, 김수혁이라는 캐릭터 자체가 신사이고 이건 비밀 연애이니 적어도 그런 일은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로이는 태우지 않고 골고루 익힌 팬케이크 위에 설탕 시럽이 뿌려지는 걸 보고 침을 꼴깍 삼켰다. 혹시 자신이 올 줄 알고 미리 만드는 연습한 것 아닌가 싶었다.
그녀는 포크로 팬케이크를 조금 잘라 한입 먹어봤다. 행복하다. 어째서 이렇게 기분이 좋아지는지 모르겠다. 자신은 조울증이 아니라 당분 부족 환자일지 모르겠다. 수혁은 자신이 먹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맛있냐고 물었다.
“어, 캡이야!”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주자, 요리사는 그거 다 먹으면 게임하자고 했다. 블루마블 사놨다며 ‘로이, 그 게임 좋아하지요?’라고 살살 눈웃음치는 게 완전 꾼이다 싶었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척척해주는 게 본래 드라마 속 남자주인공이라지만 그거야 작가들의 농간이고, 현실은 사기쳐먹으려는 제비들이나 돈 뜯어내려고 사모님들한테 잘 대해주는 것이니 말이다.
“뭐 바라는 거 있어?”
“전 그저 로이가 기뻐해주는 것만으로도 좋습니다.”
왠지 이상했다. 자신의 19금 촉이 이 남자가 바라는 건 그게 아니라고 마구마구 레이더를 세운 채 뭐라고 하는데, 순수한 의도로 자신을 두 눈을 반짝이며 바라보는 순수한 양이라고 하기에는 그는 너무 화장실 출입이 잦은 늑대였다. 로이는 다시 한 번 진짜 원하는 거 없냐고 물었다. 있으면 들어줄 테니 뜸들이지 말라 하자, 수혁이 그럼 3달 뒤에 자신의 소원을 들어 달라 했다. 음~.
“내 생일?”
“네.”
“생일 파티하려고?”
“뭐 그것도 있고, 드디어 로이가 어른이 되니 축복도 해주고. 뭐 그런 거죠.”
뭔가 위험한 남자라는 느낌이 확 풍기는데 워낙 꽃청년이라 그런지 위화감이 없어서 저절로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분명 저 입술은 맛있는 삼겹살을 보고 침 흘리는 돼지 백민호를 닮아 아주 굶주려 보이는 인상인데, 케이크를 혼자 다 먹겠다는 건가 싶기도 했다.
“좋아. 그때 부탁 들어줄게. 그런데 형은 스케줄 없어? 진짜 내 매니저하려는 거야?”
“네. 어차피 연예인 생활에 그다지 미련 없습니다.”
허걱. 지금 자신이 완전 재수 없는 소리를 들은 것 같다. 남들은 오디션을 발바닥 불나도록 보고 실패와 좌절감, 온갖 슬픔을 맛보며 역을 맡는데 순식간에 수직상승해 톱스타의 반열에 올라서다 못해, 스타들의 우상인 한류의 제왕이 되었으면서 매니저가 되고 싶단다. 열정도 없는 것이 괜히 이 바닥으로 기어들어와 뭔 지랄인가 싶다. 그가 배역을 안 맡았으면 그걸 대신 맡아 빛 봤을 연예인들은 뭐가 되게 말이다. 로이는 기분 나빠서 그냥 자리에서 일어나버렸다.
“너 그런 정신머리로 살지 마라.”
“왜 그러십니까. 로이? 제가 무슨 말실수라도 한 겁니까. 기분을 상하게 했다면 정말 죄송합니다.”
자신이 조금 성질냈다고 바로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해오는 후배님의 태도는 아주 정중했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전혀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아니 잘못된 생각을 하고 사는지 모르고 있으니 저건 아무리 미안해해도 가짜다. 지금 자신에게 사과를 할 게 아니라 자기 때문에 기회를 얻을 수 없었던 다른 연예인들한테 미안하다고 해야 하는 거였다. 그들에게 미안해지지 않기 위해서는, 그들 위에 당연하다는 듯이 있는 게 아니라 나 또한 최선을 다했고 열심히 살았노라 보여줘야 하는 거였다.
그저 운이 좋아서 톱스타면서, 인생을 걸고 연기하는 자들을 이렇게 비참하게 만들어서는 안 되는 거였다. 자신도 처음부터 잘 나가서 뭐라고 말할 처지는 못 되지만, 그래도 오디션 돌면서 탄탄하게 기초를 닦았다. 20년 동안 연극판 돈 선배가 드라마에서 고작 죽은 시체역으로 나오는 거 보며, 실제로는 따라갈 수 없는 연기력을 가진 분인데 자신은 주인공이고 그는 잠깐 스쳐지나가는 엑스트라라 알몸으로 차가운 해부대에서 미동 없이 누워있는 역을 위해 특수 분장을 2시간동안 받는 프로정신을 존경해, NG없이 찍으려고 온 신경을 곤두세운 채 촬영했었다. 자신을 받혀주는 역학을 위해 고생하는 그분의 노고가 헛되지 않게 말이다.
“그래, 그런 생각이면 진작 그만 두는 게 네 아래에서 위로 기어 올라가려고 발버둥치는 나머지들을 위해 좋겠다. 너 연예인 하지 마. 그거 얼굴만 잘났다고 되는 직업 아니고, 딴따라라고 부를 만한 일도 아니야. 이 일 무시하지 마.”
선배의 따끔한 경고에 그제야 그녀가 화난 이유를 깨달은 후배는 다시 한 번 허리를 숙였다.
“정말 죄송합니다. 선배님.”
수혁은 입술을 깨물었다. 왜 다들 로이 테일러를 최고로 치고, 십대들이 좋아하는 어린 가수를 뜻하는 요즘의 의미가 아닌 진정한 ‘우상.’이라는 본래의 의미를 담아 아이돌이라 말하는지 자신이 그 누구보다 잘 알건만, 그런 그녀 앞에서 실수를 해버린 것이다. 아니, 이건 실수가 아니라 잘못이었다. 그는 다시 열심히 연기를 해보이겠노라 외쳤다. 그러자 로이가 ‘그건 네 일이니깐 당연한 일이고.’라며 조금 수그러진 기색으로 자리에 앉아 팬케이크를 먹었다.
아무리 인기가 많고, 팬이 생기고, 연기를 해도 자신이 연예인이라는 느낌이 없었는데 수혁은 이제야 내가 연예인이었구나 싶었다. 그것도 대선배를 사귀는 연예인이 된 것이다. 갑자기 로이를 어떻게 대해야될지 알 수 없게 되어버리고 말았다. 분명 자신의 여자가 맞는데 그렇게만 남기에는 그녀는 너무 크고 버거운 존재였다.
“형, 선배들한테 기합 한 번도 안 받아봤지?”
“기합이요?”
“히히히. 내가 그럴 줄 알았다. 아, 젠장. 이런 사기캐는 재수 없는데 어쩌다 이렇게 귀여워 보이게 됐는지 몰라.”
로이는 자신한테 몇 마디 들었다고 바짝 고개를 숙인 채 대기하고 있던 후배에게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하라고 했다.
“보통 다들 선배들한테 이런 말 무지 들으면서 크는 거야. 나는 아역이라 대선배님들한테 예쁜 받으면서 컸는데 그래도 혼나면서 연기 배웠어. 감독이 너 같은 건 나이 먹으면 사라질 거라고 막 뭐라 하니깐, 다섯 살짜리가 깡다구 있어봤자 얼마나 있었겠어. 자꾸 혀가 꼬이고 대본을 못 읽겠는 거야. 그래서 왕의 아들에서 내가 돌연사했다는 거 아니야. 하하하하. 웃기지?”
“……그 새끼 조져버리게 이름 데세요.”
“헐~, 농담이지? 정 감독님이 그렇게 말해줘서 내가 열심히 노력할 수 있었던 거라고. 솔직히 쩐하, 문앙인사 왔사옴미다. 그건 내가 봐도 아니었다고. 이거 무지 고마운 일이었어. 그냥 관심 없으면 아무 말 없이 다음 화에서 작가랑 말해서 잘라버릴 수 있는데 기회 준 거잖아. 그런데 요즘 얘들은 나쁜 말 조금만 들어도 소속사에 쪼르르 달려가 징징거리고, 촬영 끝나자마자 밴에 들어가 다른 스텝들이랑 이야기도 안 나누고, 자기 찍을 시간에만 딱 맞춰 왔다가 그냥 가버리고. 아, 젠장. 이제 울 연예계는 글러먹었어. 연기에 깊이가 없는 게 다 그것 때문 아니겠어. 오죽하면 개콘에서 아이돌 연기는 가로 열고 가로 닫고, 라며 놀려. 내가 다 쪽팔린다고. 연기 선생이랑 대본 연습하는 것만으로는 연기하면서 진실성이 안 묻어나. 우리들이 일반인들처럼 고생을 해본 것도 없고, 경험도, 혼자 할 줄 아는 것도 하나도 없는데 그런 일이라도 없으면 어떻게 연기해.”
“연예계 기합이라면 저도 들어봤습니다. 찬성하는 쪽이신가 보군요.”
“물론 잘못도 없는데 군기 세우겠다고 욕하고 폭력 휘두르는 건 잘못된 거야. 하지만 선배로서 후배가 잘못된 길을 가고 있고, 옳지 못하면 따끔하게 충고해줘야 한다고 생각해. 능력 없으면 자연 도태되어 사라져버리니, 경쟁자 하나 사라져서 좋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결국 누군가 상대를 해줘야 연기도 하는 거잖아. 드라마에 주인공 하나만 달랑 나오면 그건 그냥 배우 PR이지 드라마가 아니야. 드라마의 가장 큰 핵심은 갈등이잖아. 그런데 갈등(葛藤)은 칡나무랑 등나무가 서로 얽히는 것처럼 서로 다른 인물과 사건, 의견들이 출동한다는 의미라고. 물론 영화도 마찬가지야. 모든 스토리가 들어간 영상에는 갈등이 꼭 필요하고, 그럼 내가 칡이 되기 위해서 등나무도 필요로 해. 그런데 그 상대 등나무가 허접하면 어떻겠어. 나까지 삼류로 보이는 거고, 작품도 삼류 되는 거야. 우리들이 아무리 경계하는 관계라고 해도 서로 도우면서 사는 건 그런 의미야. 나를 더 독보이기 위해. 이기적이기는 하지만, 그게 진정한 스타 아니겠어?”
“멋지십니다. 로이.”
수혁은 어린 나이임에도 참으로 알차게 자라난 아이돌을 보며 자신도 언젠가 후배가 생기거든, 이런 말을 해주는 존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작 영화 몇 편과 드라마, 광고를 찍고 인지도가 생겼다고 로이에게 가까이 다가간 줄 알았는데 아직도 자신은 멀은 듯싶었다. 일본 흑룡회의 두목 야마구치의 하나뿐인 아들로 태어나 고이 자라난 도련님 켄이치로는 무한 로이교의 신자로서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박수를 쳤다. 만약 그와 똑같은 위치에 선 다른 연예인이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면, 아무리 선배라 해도 초반부터 자존심 문제 때문에 기싸움이 일어났을 텐데 말이다. 세상 돌아가는 거와 달리 아직 때 묻지 않은 건 19살의 그녀나 29살의 그나 다 똑같다 싶었다.
“하여간 오바는. 킥, 뭐 날 계속 찬양해도 좋아.”
건방진 표정으로 로이는 ‘움화화화.’ 웃었고, 방안에 있던 조폭들은 한숨을 쉬었다. 울 도련님 그렇게 연애에는 내숭이 최고라고 가르쳤건만, 너무 허당인거 보여줘서 큰일이었다. 저건 연애가 아니라 그냥 끈끈한 의형제의 관계 같지 않는가. 당분간도 노총각 히스테리를 받아내야 될 것 같아 슬픈 예감이 드는 그들이었다. 나중에 울면서 자신들이나 안 팼으면 좋겠다.
============================ 작품 후기 ============================
음....이쯤에서 깜찍 귀요미한 외전을 한편 나갈까요? 아니면 다음챕터에 에로 마왕 왕이 등장하면, 우리 수혁이도 에로에로해지는데 바로 본편을 달려볼까요?^^ㅎㅎ
다음챕터는 이 노블이 존재하는 의미라지요...아...더럽다고 화내지 말아주세요ㅜ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