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49 다 보여줄게 =========================================================================
로이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새롭게 찍게 된 리얼 예능 ‘KISS ME.’를 위해 회사가 준 대본을 보고 ‘이거 나보고 정신병자 하라는 소리지!’라 버럭 했지만, 주안이 위기에는 동정표가 최고라며 제발 해달라고 무릎을 꿇어 할 수 없이 띨띨이 하나를 연기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하루 24시간을 관찰 당하는 스트레스가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드라마에서 새로운 맡은 배역을 카메라가 찍는 거라면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건 사람들에게 로이 테일러의 진짜 모습이라며 나가는 거라 다들 이 모습이 진짜라 믿을 걸 생각하니 거짓 모습을 연기하는 스스로가 가증스러워 힘들었다.
수혁은 그 사건이 있은 뒤 Reve에 찾아와 더 이상 로이를 남장 시키지 말라 사장과 싸웠었다. 이 노예 계약에서 자신을 구해주겠다며 김주안을 고소하겠다고 해, 그거 말리느라 사람들 몰래 뒤에서 볼 뽀뽀 좀 해야 해 힘들었다. 솔직히 자신이 여자라는 거 밝혀져도 절대 무너지지 않을 거라 믿는 그의 절대적인 신뢰를 보고서 꿈속에 사는 도련님이다 싶었다.
그는 연예인이 아니라 온실 속 철없는 왕자님이었다. 하긴 무명이라는 게 없었으니 얼마나 위로 기어 올라가는 게 힘든지 모르겠지 싶다. 자신은 어린 시절부터 오디션 돌아다니며 개고생 했는데 김수혁은 그런 것 없이 바로 남주였고, 그 작품이 바로 대박쳐 일약 스타덤에 올라섰으니 얼마나 뜨기 힘들지 모르는 게 정상이었다. 그가 무슨 환경에서 자라났을지 상상이 됐다. 한 번도 실패하지 않는 평탄한 삶에서 과연 이 잘생긴 도련님이 사람들의 별 의미 없는 악의(惡意)를 볼 수 있는 눈을 제대로 가지게 되었을지 의문이다.
잘나가면 사람들이 백이면 백 다 칭찬해주는 줄 아는데 결코 아니었다. 그저 잘나가기 때문에 아니꼽게 보는 사람도 많고, 어떻게 해서든 트집을 잡아 밑으로 끌어내리려 하는 게 남 잘나가는 거 보기 싫고 사돈이 땅 사면 배 아픈 사람들의 심리였다. 그래서 자신이 수입의 일부분을 꼬박꼬박 기부하는 거였다. 물론 어느 정도 세금 감면을 받고 이미지를 좋게 만들려는 꼼수였다. 얼굴도 한번 안 본 아프리카 아이들을 먹여 살릴 만큼 자신이 착한 인간은 못 됐다.
김수혁이 처음 데뷔했을 때가 아직도 생생하다. 너무 열 받아 주먹으로 땅을 치고, 알고 있는 욕이라는 욕은 다하며 고래고래 지르고 왜 저딴 게 갑자기 뛰어나와 가뜩이나 밥 먹고 살기 힘든 나를 더 힘들게 하냐 주안의 머리채를 쥐어뜯으며 성질을 냈었는데, 그 늙은 후배 놈을 골로 보내버리려 했던 게 엊그제건만 얼렁뚱땅 사귀게 되어 그가 자신을 보호하겠노라 외치고 있다니 정말 인생은 아이러니였다.
거의 모든 방송국에서 자신을 엄청 포장해서 띄어주는 터라 요즘 자신의 신격화가 장난이 아니었다. 이런 게 가능할 정도면 그 할배가 방송국 국장 수준이 아니라는 의미일 텐데, 지금 울 학교 교장인걸 보면 이상했다. 그래서 조폭이라 하기에는 너무 착한 검은 룡룡이의 정체가 점점 더 미스터리로 빠져들었다.
‘괜찮아요. 로이, 제발 저희를 믿어주세요. 저희는 로이가 남자라서 좋아한 게 아니라고요. 당신의 빛을 따라 우리는 꿈을 꿨습니다. 로이가 보여준 반짝반짝 빛나는 세상을 보고 저희는 동경한 거라고요. 노래 잘 하잖아요. 춤도 잘 추고 무대 매너도 끝내주게 좋아 다들 로이한테 열광하는 거예요. 연기도 갑자기 눈물 펑펑 쏟아낼 만큼 수준급이라 로이가 찍는 드라마랑 영화 보고는 거고, CF에서 나오는 사랑스러운 모습에 현혹돼 물건을 사는 게 아니라 우리들한테 안 좋은 거 추천 안한다는 거 믿고 사는 거예요. 다들 처음에는 혼란스러워 하겠지만 분명 사실을 밝히고 속여서 미안하다고 하면 용서해줄 거예요. 우리는 로이를 너무 너무 사랑하거든요.’
그는 자신이 로이 테일러 팬인양 승냥이들과 자신을 싸잡아 ‘우리.’라 했었다. 마치 자기가 자신의 팬인 양 말이다. 그래서 수혁의 감동적인 대사에 자신은 ‘너 게이라는 거 소문나기 싫어서 그러는 거면 내가 헤어져주마. 난 영원히 아이돌 해먹을 걸거든. 후배님, 꺼져줄래?’라 했다. 그러자 수혁은 뜬금없이 자신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그렇게 소문이 두려우면 자신은 다른 남자랑 사귄다고 기사 내겠다며 가버렸다. 그리고 진짜 톱스타 김수혁의 에로틱 게이설이 신문과 잡지, 뉴스에 대문짝만하게 나왔다.
한류스타가 남자 연인과 호텔 들어가는 사진이 언론을 통해 공개되고 대한민국은 자신의 게이설을 떠올리지 못할 만큼 들썩해졌다. 그러자 그는 곧장 일본으로 날아가 ‘로이는 저의 친한 동생일 뿐. 전 바텀이라 그와는 성적으로 안 맞습니다. 애초에 로이는 노멀입니다.’라며 개막장을 찍어주셨다. 그러니 일본 대통령이 이제 망조로구나 에헤레디야하며 좋아해야하는데 김수혁이 너무 바보라서, 그러다 연기력 쩌는 그의 호소력 짙은 언론 플레이에 왠지 대머리와의 사랑을 축복해줘야 할 것 같고, 내가 진짜 저 남자랑 사귀는 거 연막탄으로 써먹힌 건가 싶어 눈물이 막 나와 울고 있는데 그가 한일 생방송 기자 회견을 끝내자마자 국제 전화로 자신한테 오해하지 말라고 했다.
‘오해하지 마세요. 저한테는 로이밖에 없습니다. 제 사랑의 처음과 끝은 오직 로이입니다.’
이거 자기랑 사귀는 여배우 야동 돌려고 하니깐 기자한테 더 큰 거 터트려주겠다며 마약하고 감옥 간 주 선배 생각나게 하는 짓이다 싶었다. 그런데 그 선배가 결국 다른 여자랑 결혼했는지라 이 인간도 이러고 딴 놈한테 시집가는 거 아닌가 싶어 당장 그 게이랑 떨어지라 하니, 수혁이 ‘지금 상철이 걱정하는 겁니까.’라며 자기도 머리 밀었는데 왜 그렇게 상철이를 예뻐하냐 했다. 그 문어 아저씨 이름이 상철이였나 보다.
그나저나 자신 때문에 수혁을 주인공으로 한 에로 동인지가 나돌고 있어 큰일이었다. 키 190도 만화랑 팬픽 속에서는 초랄 귀여운 앙탈 꽃수로 돌변해 대머리 밑에서 앙앙 거리는지라 요즘 자신의 심기를 참 불편했다. 왜 그걸 보고 있느냐 물으면 수정이 좋아해서 같이 본다고 변명하겠다. 야동에 한번 꽂히더니 지 동생만큼 음란대마왕이 된 그녀는 하앍하앍 발정난 동인녀가 되어 김수혁팬이 되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처음 야동의 시작은 금발 미녀였는데 순식간에 게이 그룹 섹스까지 발전하게 된 걸 보면 야동의 세계란 한번 발을 들으면 빠져나올 수 없는 것 같아 자신도 이제 조금만 보기로 했다.
어쨌든 일본 대통령에서 국민 꽃수로 등극한 김수혁 덕분에 자신은 탈 게이화 됐고, 이상하게 게이가 되니 섹시미 폭발하여 김수혁이 더 잘나가는 것 같아 배 아파 나도 게이하겠노라 외쳤다가 주안에게 꿀밤을 맞기는 했지만-그의 말에 따르면 김수혁은 한국과 일본 미디어를 장악한 검은 손이라 가능하단다.-, 로이 테일러의 이상 행동에 대한 변명은 필요로 했음으로 사장의 계획대로 영화 데뷔작 ‘아빠가 아니야.’ 20년을 맞이하여 자신의 24시간을 관찰하는 리얼 예능을 촬영하게 되었으니 지금 침대에서 눈을 뜰까 말까 상당히 고민 중인 거였다.
집 곳곳에 설치된 무인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신경 쓰였다. 로이는 가만히 주안이 깨우러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KISS ME의 로이 캐릭터를 되새겼다. 자신이 살짝 정신 나간 거는 맞는데 그 정도로 미친년은 아닌 건만, 주안이 자꾸 미친놈으로 나오길 주장해 이렇게 방에서 편히 잠도 못 자는 지경이 되어버린 거였다.
노크 소리가 똑똑 들리고 그의 발걸음이 자신에게 다가왔다.
“로이야, 일어나야지.”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듯 대답을 안 하다가, 또 한 번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칭얼거리며 주안의 품에 파고들었다.
“어서 일어나. 밥 먹고 템 촬영가야지.”
요즘 KISS ME에서 자신이 보이는 귀여운 모습과 템페스트의 카렌의 모습이 시너지를 일으켜 다시 국민 남동생이 되고 말았다. 이건 한국 연예사에서 최초로 있는 일 아닐까 싶었다. ‘국민.’이라는 칭호에는 절대 부정적인 이미지가 있어서는 안됐다. 그런데 스캔들로 얼룩진 자신이 다시 섹시를 완전히 배제하고 완전무결하게 순수해야만 되는 캐릭터를 또 맡고 만 것이다. 분명 오랜 세월 아역의 땟국을 벗기 위해 노력했던 것 같은데 ‘국민 아가, 국민 남동생.’은 평생 자신이 안고 가야 하는 멍에인 듯싶었다.
주안은 섹시 콘셉트로 더럽혀졌던 이미지를 개선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여기는 듯했다. 그가 자신을 일으켜 세우고 ‘로이야, 일어나.’라며 마구 흔들어댔다. 로이는 눈을 비비며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요즘 단짝이 된 곰돌이의 팔 한 짝을 잡고 거실로 걸어갔다.
이리저리 까치집이 된 금발이었지만 단정한 모습 보다 더 정감이 가고 귀여운 모습이었다. 무대 위에서 섹시한 노래를 부르던 아이돌은 화면 밖에서는 아직도 아기 마냥 보살핌이 필요한 존재였다. 이게 KISS ME의 로이였다.
의자에 무릎을 세운 채 앉은 금발의 미소년은 낡은 인형을 꼭 끌어안고 포크로 방울토마토를 찍어먹었다. 로이가 가지고 있는 곰인형은 어린 시절 헤어진 아빠가 준 마지막 선물이었다.
“밥 제대로 안 먹지? 형한테 맴매 맞기 전에 어서 씩씩하게 먹어.”
“싫어! 맛없어. 촬영할 때 과자 잔뜩잔뜩 먹을 거야. 템 너무 좋아. 로이한테 과자 막 주고. 못된 형은 베베한테 혼날 거야.”
방울토마토가 들어가 빵빵해진 볼을 우물거리며 로이가 곰인형의 팔을 움직여 자신의 의견을 대변했다. 그리고 그 모습에 익숙한 듯 주안은 ‘베베야, 로이가 야채 안 먹으면 병 걸려서 그래. 형 봐줄 거지?’라며 어울렸다.
“뭐 그렇다면 한번 봐주기로 하지. 로이, 어서 토마토를 먹어. 이따가 우리 과자 먹자. 병 걸리면 안 돼. 헤어지는 건 너무 슬퍼.”
로이는 다시 인형을 팔 안에 움켜 안고 우적우적 토마토를 먹었다. 주안은 천재일지 몰랐다. 아빠가 준 인형을 가지고 ‘헤어지는 건 너무 슬퍼.’라고 말하는 아이돌을 보고 그의 성장 과정을 다 지켜본 시청자들은 무엇을 떠올릴까. 혹여나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할 이들을 위해 친절하게 자막으로 ‘어쩌면 로이는 아빠가 그리운 것이 아닐까?’라 나가기로 했으니, 이거 아주 대국민을 상대로 사기 치는 거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김수혁이 게이 된 것 만큼이나 리얼리티 쩌는 게 감동 포인트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러기에 왜 김수혁은 여친 한번 안 사귀고 살았는지 모르겠다. 모두들 그의 커밍아웃에 그럴 줄 알았지, 라 말했던 게 참으로 안습이었다. 너무 사생활이 깨끗한 것도 흠이라면 흠이었다.
덕분에 치킨 할배로부터 내가 다 잘못했다며 울 손자랑 제발 사겨달라는 말을 듣기는 했는데, 그의 게이 선언이 연애 방해하는 것 때문에 그랬다는 오해는 굳이 풀어주지 않았다. 그저 얻어 걸렸으니 ‘어, 할배. 이상하네. 나 싫어하지 않았던가? 아, 내가 반말 한다고 싫은 건 아니지? 내가 친한 사람한테는 막 말을 놔서. 싫으면 어쩔 수 없고.’라 하니 친손녀 같아 너무 좋다며 할배가 울어 조금 불쌍해서 그냥 다시 말을 높여줬다.
방울토마토를 다 먹고 이제 바나나 먹을 차례라 껍질을 벗기고 있자, 수정이 ‘헬로~ 로이.’라며 상큼하게 등장해주셨다. 야동에 빠져 살던 그녀가 다시 인간이 되기까지 차승주의 노고가 컸다고 봤다. 역시 욕구 불만은 실천으로 풀어줘야 하는 거였다. 그런데 자신은 아직까지 야한 팬픽이나 읽으며 대리만족을 하며 사니 그야 말로 슬픈 미자(미성년자)였다.
“누나아아~.”
로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녀의 조그마한 품에 안겨 어리광쟁이 소년이 되어줬다. 숨겨진 카메라를 의식한 아이돌은 수정의 볼에 뺨을 부비며 귀요미 짓을 부리다가 ‘보고 싶었어.’라며 쪽 뽀뽀를 했다. 그 모습에 주안이 자기도 해달라며 볼을 내밀어 선심 써서 해줬다. 이따가 민호 병간호 하러 병원 가려면 고생이니 말이다. 스타일리스트의 위가 안 좋아 수술을 했다고 그가 고백해 엉엉 우는게 전편의 하이라이트였다. 리얼이라지면 역시나 각본이 따로 준비되어 있는 방송이었다. 그렇게 방송국에서 써준 대략적인 대본과 Reve의 세심한 설정 놀이에 경이로운 시청률을 세워 나가는 로이 관찰기 KISS ME는 오프 더 레코드를 빙자한 로이 테일러 PR 드라마였다.
============================ 작품 후기 ============================
2일 쉬는 동안 여태 못잔 잠을 참 열심히 잤답니다. 음...제가 인터넷 연재뿐만 아니라 글쓴 경력이 벌써 8년인데 아직도 발솜씨라 슬럼프에 빠졌었음. 어째서 이렇게 인기가 없는 걸까 고민해봤는데 역시 인터넷 독자님들의 원하는 글을 못 쓴다는 결론이...재능이 없는 것 같기도..ㅜㅠ
그래도 단순한 인간이라 노력하면 언젠가 인기 작가도 되겠지 싶어서 다시 설정 연재 돌입할게요. 다음에는 꼭 대세물을 도전해야겠습니다.^^
아...아이돌물도 대세물인데...숨길 수 없는 마이너 향기ㅜ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