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46 반하게 만들겠어 =========================================================================
앞뒤 안보고 겁 없이 일 치르긴 했지만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그와 교실을 빠져와 사랑의 도피를 하기는 했는데, 수혁이 그 고상한 생김새랑 다르게 오토바이를 타고 와버려 그 뒤에서 십대 양아치 마냥 ‘오빠 달려~.’라 외쳐야 할 판국이었고, 자신은 헬멧이 하나밖에 없다는 핑계로 그의 매니저가 올 때까지 기다리자고 했다. 어쩐지 너무 빨리 왔다 싶더니만, 자동차 사이를 이리저리 빠져나오며 퀵서비스 기사 마냥 달렸을 거라 예상되었다.
잠시 그의 매니저를 기다리는 동안, 학교 앞에 쭈그리고 앉아 떡볶이 가게를 구경했다. 맛있는 냄새가 솔솔 풍겨와 ‘나는 저거 먹으면 짐승이다.’라 암시를 걸었다. 아무리 자신이 여자아이돌로 활동하는 건 아니라지만 스키니진 입고 춤추려면 빡세게 살 빼야 했다. 그런데 수혁이 ‘로이 떡볶이 먹을래요?’라고 물어 침 꿀떡 삼키며 ‘아니, 싫은데?’라 앙칼지게 대답하고 말았다. 그러자 그가 자신의 손을 잡고 가게 안으로 끌고 들어가 뭐 먹고 싶냐고 물었다.
“나 안 먹는다고 했잖아!”
참으려고 하는 자신을 상대로 수혁이 자꾸 인내심을 실험해 기껏 꾹꾹 눌러 담았던 감정이 터져 나오고 말았다. 이거 먹고 돼지 되라 그러냐, 막 뭐라고 따지자 떡볶이 아줌마가 기분 나쁜지 주걱으로 철판을 딱 쳤다.
“아줌마 떡볶이 2인분이랑 순대랑 1인분, 튀김 종류 별로 주시고요. 어묵 5개요.”
“……나 안 먹어.”
“예, 먹지 마세요. 저 다 먹을게요.”
자기도 배우면서 관리 안하나 싶은데, 하도 웃통 벗고 근육 뽐내는 화보 많이 찍은 인간이라 그냥 팔짱끼고 입술 꼭 깨물었다. 기름에 튀김이 퐁당 빠지자, 튀김옷에 기포가 달라붙는 소리와 고소한 기름 냄새가 하모니를 이뤄 노래를 불렀고 그것의 제목은 ‘네가 날 안 먹고는 못 베기지.’였다. 고추튀김과 오징어 튀김, 김말이, 고구마튀김, 새우튀김이 코끝을 간지럼 피우며 자신을 약 올렸다. 아줌마가 따끈따끈한 오뎅 국물에 파 송송 썰어 넣고 테이블에 올렸다. 수혁이 국물을 수저로 떠 후르르 마시고 오뎅을 건져먹는데, 그렇게 얄미울 수 없었다. 주먹 꼭 쥐고 ‘나 사랑하는 거 아니지?’라 물으니 그가 ‘그냥 먹어요.’란다.
하긴 지금 자신은 연예인을 그만 둘지도 몰랐다. 게이설 퍼지면 아이돌 인생 끝나는 거였다. 지금부터라도 소녀 마냥 샤랄라 원피스도 입어보고, ‘홍홍홍홍, 수혁오빠도 참~, 로이 오뎅 다 먹으면 죽일 테얏.’라며 귀여운 척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싶었다. 그래도 사람 일이라는 건 모르니 일단 은퇴한다고 기자회견 열기 전까지 참아보기로 했다.
식욕을 참는 단계는 3단계. 그것이 먹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침을 넘어갈 뿐이고….) 맛없다고 암시를 건다. (맛있다는 건 혓바닥이 병신 아니라면 안다,) 최후의 수단, 이거 먹으면 돼지 되니 운동 토할 때까지 해야 한다는 걸 명심한다. (……까짓것 먹고 토하자.)
로이는 자신에게 내민 오뎅을 앙 물었다. 수혁이 웃으면서 잘했다고 칭찬해줬다. 너무 말라서 항상 안쓰러웠어요, 라는데 그거야 일반인들이나 할 소리고 패션쇼 설 때마다 디자이너들은 옷빨 죽이는 환상 몸매라며 환장을 했다. 그런데 여기서 또 순대를 만나다니, 요즘 자주 만나는 것 같아 그 아이에게 갈수록 애정이 갔다. 폐랑 간 많이 달라는 자신의 말에 정말 많이 준 아줌마 덕으로 3인분 같은 1인분이 나왔다. 연예인 특혜가 발동된 것이다.
기름진 내장을 떡볶이 국물에 신나게 찍어 먹고 있는데, 수혁이 젓가락을 안 놀리고 미끄럼이 자신을 흐뭇하게 바라봐 이 인간이 혹시 나 살찌워서 엿 먹으려는 건가 싶었다. 상대방과 주변 인물들에게 착한 사람으로 기억되며 동시에 경쟁자 제거하는 방법으로는, 조금 찌찔하고 사소하기는 하지만 그게 최고였다. 할리우드 대표 말라깽이 오드리 햅번은 살찌기 싫으면 주변 사람과 먹을 거 나누라고 했다. 그 할머니가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지 않았으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녀도 연예인이었다.
어쩌면 일본 아줌마들의 대통령 김수혁이 제 미모를 이용해 의도적으로 자신에게 접근하고 자신의 이성을 마비시켜 골로 보내버린 걸 수도 있었다. 게이설이라니. 그건 본인도 위험한 데 역시 연예계의 거성을 잡기 위해서는 그 정도 이미지 타격은 감수하겠다는 마음가짐인지 몰랐다.
하긴 영원한 1인자인 로이 테일러를 죽이고 싶어 하는 밑의 것들이 너무 많았다. 2인자인 수혁 또한 자신에게 튀김을 집어 건네는 게 아주 수상쩍었다. 그런데 이 집 튀김이 정말 짱 맛나네. 카레 가루가 들어가서 느끼한 맛을 잡아줬다. 저 놈의 식스팩을 내가 무너트리리라 고기가 듬뿍 들어가 고추 튀김을 그의 입에 밀어 넣어주자, 톱스타는 좋아라 웃으며 ‘우리 농산물 고추, 최고예요.’라며 고추 CF를 찍어주셨다. 허름한 분식집에 어울리지 않는 스타 광채 미소라 김수혁 주변에 오로라가 뿜어져 나오는데, 기름 묻은 입술이 립 클로즈 바른 것 마냥 반질반질 빛이나 한창 혈기왕성한 십대 소녀의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했다.
이제 그만 먹어야지 싶어 젓가락을 쪽쪽 빨고 있자, 수혁이 떡볶이를 집어서 자신에게 먹였고 그래서 자신도 김수혁 살찌라고 먹여줬다. 그러자 그런 연예계의 치열한 경쟁을 보고 아줌마가 ‘이제 준호랑 친해진 거야?’라 물었다. 어쩐지 많이 주더니만 템페스트 시청자였던 거다.
그런데 이런 혈투를 다정한 모습을 보이다니 신통방통한 일이었다. 그가 자신의 턱에 흘러내리는 떡볶이 국물을 엄지로 닦더니 쪽하니 빨아먹었다. 허허. 참으로 야한 아저씨로군.
로이는 괜히 쓸데없이 멋있게 노는 수혁 때문에 연예인으로서 승부욕이 발동했다.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자신이 아직도 활발하게 활동하는 거 아니겠는가. 등받이가 없는 의자를 조금 뒤로 빼고 다리 한번 꼬아준 채 턱을 치켜들었다. 떡볶이 하나 집어먹은 다음 혀를 내밀어 입술에 묻은 떡볶이 국물을 핥아먹고 있으니, 아줌마가 자신의 등짝을 후려치며 ‘어린 것이 요사 떨면 못 쓰지. 바나나 우유줄까?’라 했다.
저번에 찍은 게 방송 나간 모양이었다. 하도 바빠서 모니터를 못했는데 이런 반응은 템페스트가 재미있었다는 뜻이었다. 그녀가 배역에 자신을 대입하고 있다는 게 그 증거였다. 오늘 자기 전에 확인해봐야 할 듯싶었다. 현장에서 모니터를 체크하기는 했지만 드라마를 시간상대로 촬영한 게 아니라 장소 이동과 배우들 스케줄에 따라 뒤죽박죽 찍어서 흐름 파악은 잘 안됐다.
떡볶이 아줌마가 재료 넣는 냉장고에서 바나나 우유를 꺼내서 자시더러 먹으라고 줬다. 이거 자신의 감이 조만간 CF 들어올 것 같다 말하고 있었다. 빨대 꽂아 쪽쪽 빨아먹고 있자 뉘 집 아들인지 아가씨 마냥 곱다며, 자신의 엉덩이를 토닥여 우유 뿜을 뻔했다. 다행히 코를 조금 넘어오기는 했지만 스타 체면은 차릴 수 있었다.
“사장님. 저랑 손 한번만 잡아주시면 안되겠습니까.”
갑작스러운 수혁의 부탁에 아줌마가 발그레하게 상기되어 두툼한 손을 내밀었고, 그는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아아, 로이 엉덩이라니.’라는 변태 같은 소리를 했다가 자신한테 오뎅 꼬치로 옆구리 찔렸다. 어떻게 이 남자를 자신이 어른스럽고, 젠틀하며, 섹시하다고 여겼나 싶었다. 방송의 폐해라는 게 이런 거구나 절실히 느껴졌다. 우리 서로 친하지 않던 때로 돌아가 ‘선배님. 후배님.’하며 지낼까 물으니 그가 억울하다는 듯 상상도 못하냐며 꿍얼거렸다. 지금 자신이 말한 거는 그게 아닌데 또 찔리는 상상을 했나 보다.
자켓 안에서 진동이 느껴져 확인하니 김게이였다. 방금 신나게 먹은 걸 다 토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벌써 게이라는 거 퍼졌나 싶어 전화 받으니, 주안이 ‘학교 앞에 차 대기 시켰어. 그거 타.’라며 오랜만에 등장해주셨다. 돈 많은 한류 스타한테 계산하라고 한 뒤 검은 밴까지 뛰어가 문을 열자,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그가 너무 침착하게 자신에게 잘 지냈냐고 물어와 불안했다. 수정은 자신한테 아무 말도 안하고 앞만 봤다. 이 어색한 분위기를 타파하고자 병원 가서 감감무소식인 자신의 스타일리스트 안부를 물어봤다.
“민호는 괜찮아?”
“어.”
주안은 짧게 단답형으로 답하고 ‘사진 뿌려졌어.’라 했다. 하여간 계집애들이 손가락 하나는 기가 막히게 빠르다.
“그리고 기사 막았지. 선택해. 미국 가서 활동할래, 아니면 다른 놈들 스캔들로 덮을까.”
“……다른 건 없어?”
“까불지 마. 너 하나 살리자고 다른 놈들 보내버리려는 거니깐. 걔네들한테 미안한 줄 알아.”
“……………그런 거 하지 마.”
“네 어깨에 Reve 식구들 밥줄 달렸고, 네 후배들 너 믿고 계약한 놈들이야. 그거 너도 아는 줄 알았는데 로이 테일러 실망이다. 대책 없이 날 뛰는 게 너도 별수 없는 애새끼 맞구나. 그거 알아? 너 아직 성인 되려면 3달이나 남았어. 지금 김수혁 미성년자랑 사귀는 거라 아주 골로 보내버릴 수 있지. 난 너 게이라고 밝히고 지켜낼 자신 있어. 그런데 그 놈 입장은 좀 다를 걸? 다시 조폭하라고 하던가. 내가 보기에는 그쪽이 더 어울린다.”
스네이크 사건으로 김사장이 무서운 인간이라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냥 여자라는 거 밝히면 안 되냐고 묻자, ‘그럼 너 누가 좋아해줄지 알아?’란다.
“네 팬들이 너 계속 좋아해줄 것 같아? 걔네 그냥 철새야. 아이돌이 그렇게 많은데 너 하나만 좋아하겠냐? 노래 콘셉트 좋으며 우르르 울 오빠 사랑해, 라는데 자기 취향 아니면 그냥 후두둑 떨어져. 너 지금 드라마 인기 있는 것도 네 힘 아니야. 그거 슈렌이 좋은 거지 네가 좋은 거 아니니깐 착각 마. 그들이 보는 건 네 덧없는 환상이야. 네가 연기를 잘해서 좋아, 라는 것도 결국 그 배역의 힘이야. 네 인기 거품인거 모르도록 해외 투어 나가고, 일본 가서 오리콘 차트 1위 했다고 기사 내보내는데 그러고 나서 회사 이익 얼마나 남는지 알아? 그거 그냥 네 브랜드 값 높이려고 하는 돈지랄이야.”
로이는 부정할 수 없는 현실에, 자신이 느끼고 있던 불안감을 건드린 남자의 말에 울면서 소속사 사장을 노려봤다. 그러자 주안이 ‘내가 너 때문에 못 살겠다.’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말 심하게 해서 미안하다. 지금 나도 패닉이라…. 더군다나 너 자기 관리 철저한데 이런 식으로 뒤통수 칠 줄 몰라서 그만 도가 지나쳤다.”
“됐어. 내가 잘못한 거니깐 그런 말 들어도 싸.”
그녀는 소매를 끌어 눈물을 닦고 이제 어떻게 처리할 거냐고 물었다. 그러다 주안의 계획을 듣고 고작 내가 연예인 계속 하자고 다른 사람 인생을 그렇게 망가트려도 되는가 싶어, 갑자기 자신의 위치가 너무 무서워졌다. 로이 테일러라는 이름이 이렇게 감당하기 힘든지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