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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이돌이다-44화 (44/104)

00044  반하게 만들겠어  =========================================================================

로이는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할까 궁리해봤다. 선택지는 세 개였다. 하나, 미친 듯이 도망친다. 둘, 자신이 로이 테일러가 아니라고 우긴다. 셋, 초특급 멋진 모습으로 팬들을 진정시킨다. 그러나 정작 그녀의 선택은 전혀 머릿속에서 고려하지 않았던 네 번째 문항이었다. 아이들한테 밟고 지나간 자신의 소녀팬을 구하는 것 말이다. 왜 자신이 이런 어리석은 선택을 결심했나 싶기는 했지만, 로이는 자신을 보러 오다가 다친 거니 그게 자신의 책임이라 믿었다.

스타는 코뿔소 마냥 달려오는 육중한 발걸음 소리에 저기 깔려다가는 자신은 죽겠구나 싶었다. 그녀들을 피해 운동장을 가로질러 일어나지 못하는 팬의 상태를 살폈다. 여자 아이인데 이마가 찢어져 피가 나고 있었다. 가뜩이나 못 생긴 아이인데 이러면 나중에 결혼이나 제대로 할 수 있겠나 싶었다. 승냥이들이 밖에서 교문을 넘기 위해 치맛단을 붙잡고 스파이더맨을 찍고 있었다. 리나가 잽싸게 자신은 들어오고 팬들은 나간 타이밍에 맞춰 문을 잠가버린 것이다.

“괜찮아?”

자신의 물음에 소녀는 벌벌 떨며 ‘로이, 로이 목소리가 천상에서 울려 퍼져. 아! 나 죽었나봐.’라며 헛소리를 해 너 살아있다고 말해줬다. 빨리 지혈을 해 병원에 가야할 것 같은데 졸지에 학교 안에 갇혀버리고 말았다. 리나가 실실 웃으며 하얀 손수건을 꺼내 다친 이의 이마를 꾹 눌러 팬은 비명을 질렀다. 하여간 잔인한 돌아이였다.

“야, 나 때문에 다친 애. 미안하다. 계집애들이 이렇게 미칠 줄은 몰랐네.”

로이는 자신의 정체를 발각시킨 괘씸한 양아치가 그래도 양심이 있는지 소녀에게 사과를 하고 119를 부르는 걸 보고 앞 뒤 생각 없기는 하지만 나쁜 아이는 아니구나 싶었다. 그나저나 교문에 매달려 월담을 하는 소녀들의 성공률이 높아지고 있었다. 바닥에 엎드린 아이를 발판 삼아 서로를 위로 올려주고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우리 승냥이들이 하여간 협동심 하나는 끝내줬다. 역시 팬이란 위대하다 싶었다.

자신이 도망치자 그녀들은 스타 다루기에 수준급의 팬들이라 겁먹지 말라며 한 줄로 줄을 맞춰 천천히 다가왔다. 서로 순서를 정하는 걸 봤는데 하도 기가 막혀 내가 그렇게 대단한 인간이었나 싶었다. 10초안에 자신의 노래 제목 10개를 누가 빨리 말하냐 였다. 이거 외울 머리로 수학 공식 외웠으면 울 팬들 다 서울대 갈 텐데 참 안타까웠다. 뭐 자신이 저렇게 만든 죄인이니 그저 조용히 어머님 아버님께 마음 속 깊이 사죄드리기로 했다.

로이는 혹시 서로 대열을 이탈할까봐 허리를 붙잡고 기차놀이로 오는 승냥이들을 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맙소사. 울 반 찌질이가 로느님이었다니.”

“야! 이 계집애야. 넌 그것도 몰라봤니? 난 진작 울 오빠 곁에 다가갈 때마다 향긋한 꽃향기를 맡았다고. 내가 당번해서 아는데 쓰레기 옆에서 아주 우수에 찬 눈빛이 작렬했지. 이 남다른 기럭지 때문에 책상에 다리가 다 안 들어가서 내가 막 설렜다니깐. 어쩐지 자꾸 눈이 가더라.”

“웃기지마. 너 로느님이랑 찌질이가 이름 같다고 막 갈아 마셔버린다고 했잖아. 곁에 가면 쓰레기 냄새 쩐다고 했으면서 구라까지 마. 오빠 앞에서는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순결한 승냥이가 되어야 한다고. 이 호박씨야.”

앞머리가 싸우기 시작해자 기차의 꼬리부분에서도 서로를 헐뜯는 말들이 나왔다. 나는 로느님한테 과학실로 이동하는 거 한번 알려줬다는 둥, 너는 로느님의 신성한 얼굴 보고 더러워서 토 나온다고 하지 않았냐는 둥, 아주 욕을 그렇게 하더니만 갑자기 왜 우리 로느님한테 친한 척이냐, 나는 이미 친구였다. 라는 말들이었는데 다들 자신이 로이 테일러라는 걸 몰랐을 때는 왕따 시켰던 아이들이라 기분이 별로 좋지는 않았다.

“그런데 울 오빠 얼굴에 화상 분장한 것도 넘 멋진 것 같다. 마치 공포 영화 속 잘생긴 좀비 같잖아. 그치?”

“어디 그게 분장으로 가려질 미모니? 왠지 얼굴에 화장 자국있으니깐 사연 있는 비극 미소년이랄까. 하여간 울 오빠, 막 모성 본능을 자극하니깐.”

로이는 전혀 자신인 걸 알아보지도 못했으면서 순식간에 돌변한 팬들의 태도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한데 나 로이 아니야.”

“헐~ 울 오빠 목소리 완전 섹시한 것 봐. 야, 내 볼 꼬집어봐. 지금 나 라이브로 듣는 거 맞지?”

“쓰벌. 완전 죽인다. 오빠 목젖 핥아먹고 싶어.”

이미 자신의 말을 들을 생각도 안 했다. 초롱초롱한 눈으로 한번만 안아달라고 외치는 그녀들에게 한 번씩 포옹해주고, 우리는 같은 학교 친구이지 않느냐며 자신의 폰 번호 따가려고 억지를 부려 난처함에 어색하게 웃었다가, 발정난 승냥이들이 자신을 덮치려고 들어 리나가 이단 옆차기로 그녀들을 날려버렸다.

“너희 지금 완전 웃긴 거 알아? 로이가 로이라는 거 몰랐을 때는 다들 따돌리고 괴롭혔으면서. 너희 로이랑 친구할 자격 없어.”

“흐어어엉. 오빠. 제가 죽을게요. 하늘같은 오빠를 코앞에 두고 알아보지 못한 죄, 달게 받을게요. 대신 저 싸가지 없는 날라리 하나 골로 보내고 다시 착한 승냥이 될게요.”

소녀들이 단체로 울면서 자신에게 미안하다는데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을 내리자 다들 섬뜩한 눈이었다. 그녀들은 리나를 노려보다가, 걸레 주제에 울 오빠를 어떻게 꼬셨냐며 머리채를 잡아 바닥에 던졌다. 자신이 깜짝 놀라 발길질을 하려던 팬을 막아서자 흉폭한 승냥이들은 수줍음 많고 착한 소녀로 돌아와 ‘오빠아~ 다치니깐 어서 나오세요.’라며 배시시 웃어보였다. 나중에 여자라는 거 걸렸다가는 뼈도 못 추리게 맞겠다는 생각이 들어 영장 나오면 진짜 군대라도 가야할 판이었다.

“애 애들아~. 우리 모두 친구지? 사이좋게 지내자.”

팬이 아닌 그녀들은 너무 무서워 목소리가 떨렸다. 자신이 두려움에 가득 차 리나를 가로막고 있자 승냥이들은 요즘 오빠에 대한 헛소문이 너무 많이 돌아서 슬프단다, 저 개잡년이 로이 테일러의 약혼녀라고 해서 날 잡아 혼내주고 감옥 가려고 했는데 그럼 울 오빠가 슬퍼할 것 같아서 꾹 참았단다.

“…어. 그럼 나 무지 슬프지. 너희 감옥 가면 오랫동안 못 보잖아. 그러니깐 우리 그러지 말자.”

로이 테일러가 CF에 나오면 일단 그 제품은 무조건 매진이고 대박이었다. 그건 자신의 팬들은 다른 아이돌 팬들과 수준이 다른 골수분자들이라 쇼핑을 할 때도 자신의 얼굴이 박혀 있으면 무조건 구입하기 때문이었다. 한때 로이 햄버거 팩이라고 패스트 푸드로서는 고가의 세트 메뉴에 약 20종류의 포토 카드를 랜덤으로 한 개씩 줬엇는데, 그것 때문에 십대들의 비만율이 높아져 뉴스에 나온 적이 있었다. 결국 그 기획은 1달에서 15일로 단축되었지만 덕분에 햄버거 사재기 열풍이 불고 포토 카드 거래가 인터넷 상에서 이뤄져 논란거리가 되기도 했다. 그래서 자신의 팬들은 다들 육중한 발걸음이 되었고 그건 다 자신에 대한 사랑의 무게였다.

아마 이때부터 과격분자들이 겉으로 표현하기 시작한 것 같다. 돼지가 되어 현재의 남친 혹은 미래의 남친을 자신 때문에 빼앗겨 버렸으니, 그것에 대한 피해보상 심리로 오로지 자신에게 매달리게 되어버린 게 아닌가 싶었다. 사장은 자신이 아이돌로서의 책임감으로 다시는 햄버거 CF를 안 찍겠다고 말하자 너무 과민반응이라고 했지만, 1년 주기로 치킨 햄버거 피자 광고를 로테이션 할 때마다 예전의 하이안도 그렇고 자신의 팬들 중 승냥이가 아니라 돼냥이들이 꽤나 있어 팬들의 건강을 위해 더 이상 찍지 않기로 결론지었었다.

그렇게 자신의 작은 행동 하나 하나가 그녀들의 인생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치는데, 그런 자신에게 여친이 생겼다는 건 그녀들의 세상인 자신이 완전히 사라져버리는 느낌일 테니 얼마나 배신감을 느끼고 화가 나고 슬펐을까 싶었다. 팬 심리 연구를 꾸준히 해오면서 느낀 건, 오래된 팬이 스타에게 느끼는 감정은 단순히 잘생기고 노래 잘해서 좋아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그를 직접 키워낸 듯한 기분이어서 부모 이상의 애틋함을 가지고 있다는 거였다.

로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발을 벗어던지고 화상 분장을 떼어냈다. 완전히 깔끔하게 떨어지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자신이 로이 테일러라는 걸 알자마자 혐오스러운 얼굴을 보고도 예쁘다고 난리쳐줬던 승냥이들이라, 다리를 후들거리며 실실하는 아이도 개중에 생겨났다. 그러나 자신의 고백에 소녀들은 자신이 좋아하던 스타를 만났다는 기쁨에서 한발자국 물러나버렸다.

“너희들을 배신할 생각은 없었어. 화가 났다면 미안해. 제대로 말도 없이 갑자기 내가 좋아한다는 말로 연애 허락해달라고 한 것도 미안.”

“………….”

역시나 그녀들은 화나 있었다. 소녀들은 입을 꾹 다물고 언제 환호해줬냐는 듯 고개를 돌리고 자신을 모른 척했다.

“사랑해. 이건 진심이야. 리나에 대한 것과 너희에 대한 사랑은 조금 다르지만, 난 너희가 더 소중해. 원하지 않는다면 헤어질게. 하지만 지켜봐줘. 나 절대 실망시키지 않을게. 민희는 당번하면서 한 번도 늦게 책상 끌거나 청소 대충한 적도 없는 성실한 아이고, 경미는 쉬는 시간마다 복도에 나가 친구들이랑 노는 쾌활한 성격이고, 수애는 수업시간에 책 사이에 내 사진 껴놓고 웃는 귀여운 아이고, ………………민아는 우리 반에서 제일 수학 잘하는 똑똑한 아이잖아. 나 다 알아. 너희들은 너무 멋지다는 걸. 그런 너희가 날 좋아해준다는 것도 너무 고맙고, 가끔은 부담스러울 때도 있지만 너희가 날 좋아한다는 사실이 너무 자랑스러워. 그러니깐 너희도 나 좀 믿고 자랑스러워 해줘. 나쁜 짓 안 해. 너희도 알잖아. 나 언론에서 떠는 것처럼 가벼운 남자 아니라는 거. 다들 오빠 믿지?”

일단 반 친구들 이름을 하나하나 언급하며 칭찬해줬는데 이게 청소년 드라마 ‘내 생애 최고의 선생님.’의 마지막 장면이었다. 선생님이 문제아들을 무사히 졸업시킨 날 하는 연설을 조금 따라한 거였다. 그녀들이 코를 훌쩍거리며 ‘오빠 믿어요. 우리도 오빠가 무지 자랑스러운 걸요.’라며 언젠가 헤어질 거라는 걸 아니 기다리겠단다. 참…………이것도 팬이라고.

아무튼 학교 내에서의 리나와의 가짜 연애는 인정받게 된 것 같았다. 그런데 소녀들이 일제히 폰을 내밀면서 ‘번호 불러요. 우리 친구하기로 했잖아요. 카톡 무시하면 이상한 나라의 폴로 만들어줄게요.’란다. 그 만화가 마왕한테 잡혀간 여친 니나를 구하는 내용이었던 것 같은데, 리나. 니나. 둘 다 발음이 비슷해 느낌이 확 왔다.

“010-8XXX-6XXX.”

그러니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래도 자신은 게이라고 소문나는 게 더 나을 듯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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