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9 반하게 만들겠어 =========================================================================
수혁은 로이가 자신에게 아무런 해명도 없이 뚝 통화를 끊어버려 다시 전화할까 싶었지만, 그럼 그녀가 자신을 귀찮은 존재로 여길까봐 그냥 스마트 폰 배경 화면만 바라봤다. 환하게 웃고 있는 금발의 소녀는 누가 뭐라고 해도 천사 같은 존재였다. 그런 로이가 자신과 사귀기로 했으면서 바람을 피울 리 없었다. Natural이야 예능방송이니 친한 게 나온 거지 아무런 사이가 아닐 것이다. 방송에서 바보 같은 게이 따위를 무서워하는 척 했던 그녀이지 않는가. 누가 뭐라고 해도 로이의 스타로서의 프로 의식은 따라올 자가 없었다.
자신은 그런 그녀의 직업을 존중하고, 그녀가 하는 일을 존경했다. 그러니 예능에서 자신이 아닌 다른 여자에게 고백하는 건 남자아이돌 로이 테일러가 하는 일이지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이 그런 게 아니었다. 왜 이렇게 예쁜 내 님에게 자꾸만 파리들이 꼬여드는지 모르겠다. 물론 자신도 그녀에게 꼬여든 한 마리의 파리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우린 연인 사이였다.
만약 로이와 리나가 진짜 사귄다 하더라도 얼마 가지 못할 것이다. 스타들끼리 결혼하는 건 서로의 일을 이해해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일반인이라면 결코 자신의 아내가 드라마에서 다른 남자랑 키스하는 걸 이해하지 못해 부부 싸움이 날 것이다. 거기다 베드씬이라도 찍었다가는 이혼할지 몰랐다. 하지만 같은 연예인 입장에서 봤을 때 그건 아무런 감정이 섞이지 않은, 그저 연기일 뿐이니 조금 질투나긴 해도 참을 수………있을리 없지 않는가!
“으아아악! 뇌출혈 새끼들 뼈와 살을 발라버리겠어! 리나! 리나! 도대체 걔는 왜 여자랑 사귄다는 거야! 어떻게 그게 가능해!”
수혁은 주먹으로 벽을 치며 왜 자신이 이 나이가 되도록 동정으로 살아야 하고, 게이들을 견제해야하는 것도 모자라 여자들로부터 로이를 보호해야 해나 싶었다. 그냥 그녀를 보쌈해 미국으로 도망가고 싶었다. 아, 그런데 로이는 그 나라에서도 너무 유명했다. 거기다 자신의 고국으로 데려가기에는 로이 테일러는 일본에서 아이돌의 신이었다. 그러니 아프리카 같은 데나 가야 둘이 마음 놓고 길거리를 돌아다닐 수 있었다. 이런 건 자신이 꿈꾸던 연애가 아니었다.
왜 있지 않는가. 남친을 위해 부엌에서 앞치마를 입고 ‘식사, 목욕, 아님 나?’ 그러는 거!
아주 정욕이 불끈불끈 솟아오르는데 자신의 아기 천사는 진짜 아기라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왜 자신은 이렇게 나이가 많고 그녀는 어려서 사지육신 멀쩡한 자신이 내시처럼 살아야 되나 싶었다. 그렇다고 로이가 아닌 다른 여자한테 자신의 첫 경험을 주고 싶지 않았다. 그런 불결함으로 나중에 그녀를 안을 수 있을리 없었다. 그는 어떻게 하면 나만 로이를 바라볼 수 있고, 사랑할 수 있을까 고민해봤지만 그건 그녀가 계속 스타로 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그녀의 본질을 부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로이가 다른 연놈들이랑 사귀는 건 죽어도 싫었다.
무기력한 자신에게 너무 화가 나 분해서 울고 있자 방문이 열렸다. 자신의 명령 때문에 머리카락이 다 자랄 때까지 집밖으로 못 나가는 상철이 ‘도련님, 로이 아가씨를 확실하게 꼬시는 법을 생각해냈습니다.’라 했다.
“뭐? 그게 무슨 소리야. 난 이미 로이의 이상형을 완벽하게 연기해내고 있다고. 어른스러운 분위기와 다정해 보이는 미소. 모든 사람들에게 인사성이 밝고 친절하며, 가끔 보여주는 귀여운 행동이 연상이어도 동생처럼 느껴지게 하는, 마치 커피 광고에 나오는 그런 미인이 좋음. 그런데 여기서 뭘 더 하라고!”
수혁은 애꿎은 상철에게 성질을 냈다. 마음 같아서는 리나한테 폭탄 테러라도 하고 싶었다. 그런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는지 그도 다른 말없이 ‘도련님, 로이 아가씨는 사실 미친년. 아니 미친 인간이 이상형이었습니다.’라는 거다. 그게 무슨 말이냐 물으니 그가 인터넷을 확인해보면 안다고 했다. 얼른 노트북을 켜봤다. 그러자 ‘송리나.’가 검색어 1위인데 동영상들이 꽤나 많이 떠돌아다녔다. 송리나의 정체라는데 그것들을 틀어보니……….
“아무래도 내 진정한 정체를 밝힐 때가 온 것 같아. 하긴 로이의 이상형은 방송에서 말한 거니 그저 소속사에서 던져준 대본을 읽은 거에 불과하겠지. 이런 걸 좋아했다니. 우린 정말 천생연분이야.”
“축하드립니다. 도련님.”
상철이 허리 숙여 축하 인사를 했다. 수혁은 오랜만에 오토바이를 타야겠다 싶었다. 터프한 양아치를 좋아하다니. 그거야 말로 딱 자신이었다. 자신이 중학교 때까지 켄구미(賢組, 검은 무리라는 뜻으로 이해하면 될 뜻. 학생들이라 학급과 반을 나타내는 くみ를 사용했던 것임. 수혁의 일본 이름 켄이치로에서 따온 조직이다.)를 다스리면서 지금과 상당한 다른 모습이었는데, 그때가 딱 로이가 좋아하는 모습이었던 것 같다. 그는 오랜만에 앞머리 좀 세워볼까 했다가 그녀가 대머리를 좋아해 빡빡 깎았다는 걸 떠올리고 가발을 벗어던졌다.
“오랜만에 체인 좀 꺼내봐.”
“예, 도련님. 다시 씩씩한 모습으로 돌아오셔서 기쁩니다.”
야쿠자 아들은 어깨에 힘을 딱 주고 13년 만에 특공복을 꺼내봤다. 왠지 손발이 오글거리는 거 같지만, 검은 용이 수놓아진 하얀 유니폼을 보고 있자니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왜 자신이 이 딴 걸 새겨 넣었는지는 모르겠지만 史上最強(사상최강), 暴走天使(폭주천사), 天上天下唯我独尊(천상천하유아독존) 같은 유치한 단어들이 있었다. 밑단에 자신이 제압한 폭주족 리더들 이름이 빼곡히 써져있는데, 이걸 후배들한테 물려줘야했건만 켄쿠미는 오로지 켄이치로의, 켄이치로에 의한, 켄이치로를 위한 조직이었기에 자신이 없으면 무용지물이어서 3년간의 활동 끝에 일본 최고의 폭주족들은 완벽히 와해되고 말았다.
처음에는 그저 로이를 좋다며 팬질하는 자신을 막아보겠다고 중학교를 명문 기숙사로 보낸 아버지에게 반항하려 시작한 활동이었는데, 어쩐지 자신이 뭘 하든 신경 안 쓰더니만 폭주 뛰다 경찰서에 붙잡혀 할 수 없이 그를 부르니 ‘사나이라면 그 나이에 폭주를 뛰어야지. 암~, 내가 네 나이 때 일본 제패를 했단다. 아들아. 우하하하. 역시 넌 내 아들이야.’라며 어깨를 두드려줘 단번에 그만둬버렸다. 가끔 아이들과 오토바이 타고 달리던 밤이 떠오르기는 했지만 누구 좋으라고 계속 한단 말인가. 상철이 체인을 자신에게 건넸다. 특공복을 입고 손에 사슬을 감으니, 그가 ‘도련님, 멋지십니다.’라며 물개 박수를 쳐댔다.
“휴우~, 지금 내가 뭐하는 짓이야. 이 나이에.”
수혁은 그래도 우리 예쁜 로이 놔두고 오토바이 타다가 머리 으깨져 죽을 수는 없어 헬멧을 챙겼다. 그는 붉은색으로 도색한 할리 데이비슨을 끌고 빌라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그런데 얼마 달리지 않아 경찰차가 따라붙어 자동차 틈으로 빠져나가는 추격전이 벌어졌고, 10분 정도 달렸는데 뭘 그렇게 계속 잡으려 드는지 자신을 쫓는 수들이 대폭 늘어났다. 거기다가 어느새 오토바이들이 뒤를 따르고 있었다. 뭔가 싶어 저리 꺼지라 손에 감았던 체인을 풀어 허공에 휘돌리자 라이더들이 환호성을 질러댔다. 그는 안 되겠다 싶어 속력을 높였는데 자신이 켄쿠미인걸 어떻게 알았는지 양아치들이 ‘켄쿠미사마, 윌리 구다사이.’라 했다. 하여간 저 구린 일본어 실력은 뭔가 싶다.
그래도 뜨거운 피를 잠재우기란 오토바이만한 게 없다 싶었다. 수혁은 무게 중심을 뒤로 옮기고 기어 1단에서 클러치를 잡았다. 괴음을 내며 알피엠(회전속도계)이 어느 정도 올라가는 걸 확인한 후, 클러치를 놓으며 악셀을 당겨 앞바퀴를 들어올렸다. 오랜만에 하는 거라 머리털이 쭈삣서며 아드레날린이 분비되는데 완전 뿅 갈 것 같았다. 하는 김에 몸의 중심을 바꿔 뒷바퀴 들고 달려봤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자신을 쫓던 무리들이 뒤쳐져 따라오지 못하고 있었다. 인적이 드문 강변에 오토바이를 세우고 헬멧을 벗는데, 한꺼번에 얼굴을 덮치는 밤바람의 상쾌함이 이루 말할 수 없이 기분 좋았다.
로이를 위해 켄이치로로서의 자아를 버리고 김수혁으로 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니, 그 켄이치로조차 그녀를 위해 살아가는 남자였을 뿐이었다. 어쩌다 그 조그만 금발 아기한테 반해 자신의 인생을 통째로 바치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후회는 없었다. 그는 다시 헐멧을 쓰고 오토바이를 몰아 강변길을 따라 달렸다. 꿈이라는 걸 가져본 적 없었다. 물론 자신의 꿈은 언제나 첫사랑과 결혼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장래희망이 아니지 않는가. 모두들 각자 하고 싶은 것들이 있었다. 너는 무엇일 될래, 라고 물으면 다들 ‘경찰관, 선생님, 과학자. 의사, 공무원.’이라 답하는데 자신만이 ‘로이 테일러랑 결혼하는 거요.’라 말하곤 했다. 그리고 그건 초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웃어넘길 수 있는 꿈이었는데, 중학교에 올라가면서는 절대 가져서는 안되는 꿈이 되고 말았다. 스타 좋다고 쫓아다니면 세상으로부터 정신 나간 빠돌이라 비난 받는 거였다.
아버지와 사이가 틀어진 것도 자신이 제대로 된 인간 구실 못해서였다. 연예인만 좋다고 따라다니는 자식을 부모가 좋아할리 없었다. 아버지한테는 정말 죄송했다. 그가 자신의 방에 붙여져 있던 그녀의 브로마이드를 불태우면서 완전히 등을 돌리게 된 건 자신이 생각해도 정말 철이 없는 행동이었다. 이런 변변치 못한 남자를 로이 같이 멋진 여자가 좋아해줄리 없었다. 단순히 사귀는 걸 허락받았다고 마음 놓고 있어서는 안됐다.
반드시 반하게 만들리. 그 누구보다 멋진 아이돌, 로이 테일러조차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는 매력적인 존재가 되자.
자신이 그녀의 어떤 면에 반하게 된 것인지를 생각해보면, 로이도 자신에게 반한만한 존재가 될 수 있는 단서를 찾지 않을까 싶었다. 자신이 로이 테일러에게 반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녀가 언제나 자신의 꿈을 쫒는 반짝반짝 빛나는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자신은 그렇게 될 수 없음을 알기에 동경했다. 갓난아기 주제에 뭔 연기를 안다고 울음을 터트리는 것조차 감동적이었던 그 놀라운 스타는 점점 커가면서 자신의 목표가 무엇인지 확고하게 보이는 아이돌로 성장하게 되었다. 누군가에게 꿈을 꾸게 하는 건 정말 멋진 일인 것 같았다. 로이는 첫 대면에서부터 자신의 아이돌이었고, 별만을 바라보던 한 존재를 스타로 만들어냈다.
수혁은 오토바이 엑셀을 돌려 속도를 더 높였다. 가로등의 주홍 불빛이 긴 잔상을 남기며 자신의 등 뒤로 빠르게 지나쳐갔고, 도로의 끝은 하나의 점으로 보이며 마치 자신은 새로운 세계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는 그 불빛을 따라 어딘가에 있을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러 달렸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29년 동안 찾지 못한 게 나올리 없었다. 바지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잠시 길가에 멈춰서 메시지를 확인하니 로이로부터 메신저였다.
『자?』
수혁은 그 짧은 물음에 바로 헬멧을 벗고 전화 걸었다.
“로이, 이 늦은 시간까지 안주무시고 뭐하세요. 내일 스케줄도 있는데 어서 주무셔야죠.”
“아우, 아니. 나도 졸린데 지금 심야 라디오 한 땅 뛰고 왔지. 그런데 혹시 설렁탕 좋아해?”
“…설렁탕이요?”
새벽 2시에 물어볼 질문은 아니었다. 하지만 로이가 사주는 거라면 뭐든지 먹을 수 있었다.
“예. 좋아합니다.”
“아, 젠장. 완전 똑같잖아. 그런데 하루 지났음으로 무효야.”
“………무슨 의미인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그녀는 혼자 행동하는 것을 좋아해 자신이 속으로 생각하고 결론을 내리면 그걸 주변 사람들도 자신처럼 다 알 것이라 생각했다. 어찌 보면 그것은 배려심이 없고 자기중심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자신이 보기에는 그저 하나밖에 모르는 외골수라 타인을 생각할 여력이 없어서 그런 것뿐이었다. 그렇게 자기만의 세계가 강한 로이이기에 노래에도 그 독특한 색이 묻어나는 거였다.
“아니, 오늘 운수가 더럽게 좋았거든.”
한국말이 서툴렀던 예전이라면 지금 그녀의 말을 그대로 믿어버렸을지 모른다. 한국어에는 일본어와 달리 오묘한 억양이 있어 문장의 뜻을 완전히 다르게 해석하게 하는 능력이 있었다. 그런데 왜 운수가 안 좋은데 설렁탕을 찾는 것일까. 아직 한국 문화를 자신이 덜 공부한 모양이었다,
“오늘 기분 나쁜 일 있으셨나요?”
“끄응, 뭐 말할 수 없이 많기는 한데. 뭐 됐고. 그건 이제 끝이니깐 언급하지 마.”
그러면서 로이는 툭 던지듯 ‘방송은 방송일 뿐이니 신경쓰지 마.’라 했다. 수혁은 그런 그녀의 말에 알겠노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자신이 고갯짓하는 게 로이에게는 안 보인다는 걸 떠올리고 얼른 답했다.
“네. 로이. 저 신경 안 씁니다.”
“어, 이 아저씨 봐라. 역시 어른이다 이거지?”
수혁은 한숨을 하며 졸리다는 그녀에게 어서 자라고 했다. 사실 꿈같은 거 가져본 적 없는 자신보다 나이는 어려도 하고 싶은 일이 있고 그것을 위해 노력하는 로이가 더 어른스러운데 말이다. 그런데 수화기 너머가 너무 조용했다. 작게 로이의 이름을 불러봤지만 응답이 없었다. 그는 통화 중 잠들어버린 자신의 연인이 깨지 않게 속삭이듯 ‘あなたを 愛して います。(당신을 사랑합니다.) 私と 結婚して くれますか?(저랑 결혼해줄래요?)’라 물었다. 그러자 자는 줄 알았던 로이가 ‘어…. 나도 총총해. 근데 결혼은 나중에 하자.’라며 툭 통화를 끊어버렸다. 아…. 이 정도는 일본 활동을 하는지라 다 알아들어버린 모양이었다. 그런데 총총해라니.
그는 자신의 고백에 그녀가 쑥스러워했다는 사실을 한 박자 늦게 깨달았다. 수혁은 기분 좋은 미소를 머금고 ‘역시 내 꿈은 로이 테일러랑 결혼하는 거면 충분해.’라는 생각으로 빌라로 돌아갔다. 그러고 보니 어렸을 때 여자아이들이 현모양처가 되는 게 꿈이라고 했다. 그러니 자신의 꿈도 꿈인 것이다. 수혁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식솔들에게 오토바이와 체인을 넘겼다.
일단 그러기 위해서는 멋진 남자가 되어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