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아이돌이다-38화 (38/104)

00038  아이돌은 괴로워  =========================================================================

오늘 하루 너무 끔찍해서 그냥 이대로 집으로 고고씽하고 싶었다. 템페스트 촬영하는 내내 수수커플한테 시달렸지, 그거 끝나고 광고 찍으러 가니 하이안이 입술 불어터지게 빨아대지, 짬 내서 인터뷰한 기자는 미친년이라 기분 잡쳐놓고, 예능 찍으러 오니 이딴 게 생방이라며 후배 군기 잡는 거랑 방송 중 자는 걸 온 국민이 다 보게 되어버렸다. 아, 젠장. 오늘 더럽게 운수 좋다. 인력거라도 돼 비오는 날 맨발로 미친년처럼 뛰어다니다가 김수혁한테 설렁탕이라도 한 그릇 사다줘야 할 것 같다.

점입가경으로 다음 코너가 하소연하다, 였다. 세상이 너무 아름다워 보인다. 평정하다에 그런 의미가 있었다니 참 뭐랄까. 쓸데없는 디테일이라 너무 감격스럽다. 아무튼 두 MC는 세기의 아이돌이 망태크 타는 게 너무 좋아 싱글벙글이었다. 이게 만약 홈쇼핑이었으며 쇼호스트는 ‘여러분 완판입니다! 완판!’하며 외쳐댈 상황이니 말이다. 시청률 쫙 쫙 올라가는 소리가 들렸다. 거기다가 하소연하다, 라면서 어린 자신을 상대로 완전 잔혹한 로이몰이하는 내용들만 있었다.

소속사와의 끊임없는 불화설과 Reve는 스타 관리를 잘 안한다는데 그게 정말이냐, 사장님과 스캔들이 있던데 아까 상당히 무서워하더라, 사이가 나쁘냐. 템페스트에서 남주랑 여주 둘 다 스캔들 난 거 어떻게 생각하냐, 부산 레드카펫에서 신인배우 김우리랑 친해 보이던데 어떻게 알게 된 거냐, 잠깐 로이 여친이라 기사 나왔던 일반인 여성분은 진짜 친구일 뿐이냐.

그들은 오랜만에 컴백한 자신이 첫 무대에서 유두 노출한 것까지 다루면서 대본상으로 봐 어느 정도 마음먹고 왔지만 나 고작 19살인데 너무 한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저질 공격을 해댔다. 이걸 자신보고 해명하라는데 왜 느껴지기는 스타 초대해서 모르고 지나쳤을지 모르는 루머 다 끄집어내 정리해주는 걸로밖에 안 보이는 걸까. 이래서 이 프로가 초인기라는 거였구나 싶었다.

로이는 가뜩이나 힘들어 죽겠는데 자꾸 MC들이 몰아붙여서 그냥 ‘으아앙.’ 큰소리로 울어버렸다. 옆에 앉아있던 호연이 자신을 끌어안고 등을 토닥여주는데, 화장 지워질까봐 가슴팍에 얼굴 비비지는 않았다. 아, 이 순간조차 프로 정신을 발휘하는 나라니. 정말 최고다.

자신이 울자 스텝들도 멘붕에 빠지고 MC들은 두려움에 바들바들 떨었다. 자신의 승냥이들이 저 남자를 가만히 둘리 없었다. 그걸 알기에 명훈은 그냥 쳐다만 봐도 저 놈 짱 겁먹었구나 싶을 정도로 동공이 확장된 채 ‘여러분 제가 울린 게 아닙니다.’를 외쳐댔다. 네가 울린 거 맞다.

“흑. 왜 자꾸 그래요. 나 아무것도 안 했단 말이에요. 그럼 넘어진 여자 보고 그냥 지나쳐요? 같은 드라마 찍으면서 사이 나쁘게 지내요? 이안이는 하선생님 딸인데. 왜 제 동생이랑 이상한 소문 만드세요. 그리고 저 게이 아니. 히끅. 아니라고 해도. 훌쩍. 자꾸 남자랑 엮는데. 저 여친 있어요. 나도 이제 연애할 수 있는 나이잖아요.”

호영의 품에서 실컷 울고 있자, 오늘의 묵은 체증이 싹 가시는 것 같았다. 코를 훌쩍이며 이제 그만 울어야지 싶어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하니, 자신을 꼭 끌어안고 있던 후배가 도망 못 가게 얼굴을 잡고 지그시 아이컨택을 해왔다. 뭔가 싶어 이제 괜찮다 말하며 빠져나오려하자, 그는 ‘선배 여친…, 선배보다 예뻐요?’라는 이상한 걸 물었다.

“어. 예뻐.”

“하늘만큼 땅만큼?”

“응, 하늘만큼 땅만큼 예뻐.”

“춤 출 때 이 세상에서 제일 섹시하고, 도도하게 눈웃음치면서 속은 완전 아기라 짱 귀엽고, 장난치는 거 좋아하는 개구진 성격에 눈물도 많고 상처 받기 쉬운 성격이에요? 천사처럼 사랑스럽고 착해요?”

“응. 엄청 예쁘고 발레도 잘하고, 머리도 똑똑하고, 무지 착해.”

“그래요? 그럼 앞으로 선배 애인, 제가 꼬셔볼게요. 그게 제 이상형이거든요.”

로이는 전혀 예상치 못한 후배의 공격에 넋을 놓고 그를 바라봤다. 이 놈이 미친 게 아니라면 선배 애인을 생방송에서 꼬신다고 선전포고를 하지는 않을 거다. 자신이 사귀고 있는데 무슨 소리냐, 절대 안 된다고 하니, 호영이 자신을 놓아주며 ‘그럼 언제 헤어지실 건데요?’라고 물었다. 설마 자신이 헤어지면 사귄다는 건가 싶어 ‘결혼할 거야!’라 외치자 그럼 이혼할 때까지 기다리겠단다. 자신과 그의 이상한 기류에 명훈이 ‘하하하. 농담도 참. 로이씨, 저희가 너무 게이로 몰아서 여친 있다고 한 거죠?’라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줬지만, 호영 때문에 자존심 상해 ‘저 애인 있습니다.’라 외치고 1번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절대 내 여자 안 뺏길 거야. 너 따위한테 넘어갈 리도 없고, 내가 결혼한다면 그건 반드시 그녀일 거다.”

괜히 친구 잘못 만나서 리나의 인생을 망쳐버리는 것 같지만, 그녀는 지독한 남성혐오증이라 어차피 결혼 못해서 자신이랑 하기로 했다. 사람들이 ‘왜 로이는 여자를 안 만나지? 결혼을 왜 안하는 거야?’라는 물음을 가지지 못하도록 말이다. 죽을 때까지 스타로 살고 싶었다. 나이 들어 인기 떨어진다면 할 수 없이 사라지겠지만, 최대한 멋진 아이돌로서 소녀들한테 꿈을 주고 싶었다. 아니, 사실 이건 변명이다. 그냥 사랑받고 관심 받는 게 좋아서였다. 내가 최고라고 추앙해주니 너무 좋고 노래하고 춤추고 연기하는 것도 무지 재미있어 그냥 유일한 친구를 희생양 삼아 ‘너 하나만 동참해주면 우리 모두 행복해질 수 있어.’라는 생각으로 자기 합리화를 하는 것뿐이었다.

“리나야, 미안해. 내가 너무 이기적이어서. 내가 너 불행하게 만든다는 거 아는데 나한테는 네가 꼭 필요해.”

아, 젠장. 왜 하필 첫 영화가 남자아기 역이었을까. 그것만 아니었어도 자신은 여자 아이돌이 되었을지 모른데 말이다. 눈 가리고 울면 화장 뭉개진다는 걸 알지만 자신이 여자라는 게 밝혀지면 받은 비난을 생각하니 너무 무서워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지금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 받고 있어 힘들지만, 그게 과연 미움 받아서 힘들 거에 비할까 싶었다.

로이는 답답한 마음에 매일 봐서 누구보다 친근한 카메라를 향해 하소연을 해봤다. 정말 코너 이름대로 하소연을 하게 되다니, 이 방송 진짜 대박인 듯싶었다.

“난 어떻게 하면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지를 생각해. 그리고 최대한 사람들이 상처받지 않는 선택을 택하게 되지. 그리고 이 선택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나에게 실망을 할까를 생각하면 잠이 안 와. 이건 엄마만의 잘못이 아니야. 그 정도는 알아. 내가 욕심을 부려 지금까지 끌고 온 거니깐. 그런데 나 계속 노래 부르고 싶고 춤추고 싶어. 연기도 너무 재미있고, 학교 가서 친구를 사귈 수는 없지만 팬들이랑 대화하는 게 더 기뻐. 이미 난 평범한 아이로는 돌아갈 수 없게 되어버렸어. 그저 평범한 로이 테일러가 되기에는 연예인이 아닌 나를 떠올릴 수가 없고, 그럼 내가 존재할만한 가치가 있나 의심스러워지지. 그런 나와 함께 해준다고 해서 고마워. 반드시 하나 약속할게. 네가 원하면 반드시 떠나줄 거라는 거. 언제든지 힘들어서 못 견딜 것 같으면 말해. 난…혼자서도 괜찮으니깐.”

모든 걸 쏟아부어버렸더니 기운이 쫙 빠져버렸다. 큰 사고치고 기자 회견이라도 연 듯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그런데 촬영을 하던 감독과 스텝, 출연진들이 모두 박수를 쳐주는 거 아닌가. 뭔가 싶어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그들이 자신더러 최고의 ‘하소연하기.’였단다. 명훈이 ‘월드 스타 로이 테일러의 진솔한 고백! 이렇게 자신의 모든 걸 털어놓을 스타가 그 말고 또 있을까요? 평정하다! 다행입니다. 당신! 100명의 팬들이 올 베스트를 눌렀습니다.’라며 소리치니 세트가 움직이며 숨겨진 방이 드러났다.

로이는 할 말을 잃었다. 명훈이 ‘로이씨, 우리 방송 한 번도 안 보셨죠? 거짓말한 벌입니다.’라 장난스럽게 멘트를 날렸고, 준희는 ‘로이씨 여자친구분 정말 부러워요. 좋은 사랑하시길 바랄게요.’라 했다. 어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승냥이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심장이 벌렁벌렁하게 박수를 쳐댔다. 그런 팬들이 너무 고마워 또 우니, 그들은 ‘우는 것도 너무 예쁜 나만의 천사, 로이. 행복하게 해줄게요, Oh ma boy. 그대가 무슨 사랑하던 너무 예뻐요. 우린 당신이 행복하길 바라죠.’라 노래를 불렀다. 그러면서 그녀들이 마지막에 ‘미소천사 로이! 넌 역시 웃는 게 더 예뻐!’라 소리를 질렀다. 아, 젠장. 나 얘네들한테 반할 것 같아.

“이렇게 사람 감동 먹여놓고 나더러 울지 말라니! 너희, 확 다 뽀뽀해버린다!”

“꺄아아~, 해줘! 해줘요! 로이!”

그 말에 승냥이들이 지랄발광을 하더니 벌써 자신의 앞에 한 줄로 서서 어서 뽀뽀해달란다. 그런 팬들이 너무 귀여워 피식 웃음이 나왔다. 로이는 드문드문 외국인들이 섞인 글로벌 팬들을 쭉 한번 훑으며 여유를 되찾고 금발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리고 그녀는 로이 테일러 전매특허 ‘싸가지 없지만 너무 멋져.’ 미소로 팬들에게 사랑한다 외친 후 이마에 뽀뽀를 시작했다. 물론 포옹은 서비스였다.

다리가 풀렸는지 자신에게 뽀뽀 받으면 소녀 숙녀 아줌마팬들이 일제히 바닥에 주저앉아 뇌출혈놈들이 일일이 세워줘야 했다. 저 스키다시 같은 놈들이 그래도 개념돌이었다. 이 예능 진짜 짱인 거 같았다. 엔딩 멘트를 하는 두 MC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주니, 그들이 ‘오늘 준희! 명훈! 로이 테일러를 평정해버렸습니다. 그럼 다음 주에도 새로운 스타를 평정해버리자고요. 여러분, 다음 주에 또 평정해버려요~.’라며 방송을 끝맺었다.

로이는 ‘이거 몰카인가? 아니지, 몰카라고 해도 너무 수위가 쎄.’라는 생각으로 지금 끝난 거냐고 물었다. 그러자 Natural이 꾸벅 인사를 하며 ‘오늘 하루 수고하셨습니다.’라 하는데 아직도 실감이 안 났다. 스텝들의 인사를 받으며 스튜디오를 나오자 막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엄마를 찾게 되었다. 근데 엄마는 밀라노로 가방을 사러 가서 헐레벌떡 대기실로 뛰어가 그 대신 수정을 찾으니, 그녀가 바나나 우유를 쪽쪽 빨아먹으면서 ‘로이야, 너 오늘 짱 멋있었어. 그런데 언제부터 여자를 좋아하게 된 거야?’라는 실없는 소리를 해 등판을 열나게 때려줬다.

“헐~, 왜? 내가 너무 예뻐서 막 두근거리니? 그래도 안 돼. 난 승주씨가 좋아.”

“아, 이 여자가! 난 남자가 좋다고!”

로이는 자신을 레즈로 모는 수정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Natural은 웃고 있었다.

“선배님, 전 여자가 좋은데 선배님만 특별히 예외입니다. 고로 남자도 가능합니다.”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호영을 뒤이어 영준까지 커밍아웃을 하더니 둘이 ‘다음 주 음악챔프에서 뵙겠습니다.’라며 문 닫고 나가버렸다. 왜 이렇게 아이돌하기가 힘든지 모르겠다. 로이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미친 듯이 진동해대는 폰을 들었고, 수혁이 ‘안 됩니다. 여자는…, 아니 남자도 안 됩니다. 로이!’라 외치는 소리에 그냥 통화를 끊어버렸다. 아무래도 이따가 그에게 설렁탕 한 그릇이나 사다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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