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4 아이돌은 괴로워 =========================================================================
수정이 스네이크 숙소 나온 자신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잘했어.’라 칭찬했다. 혹시 사장이 쟤네들 가지고 논거 알았냐고 물으니 그녀가 어깨를 으쓱하며, ‘글쎄~.’라는데 기분이 찜찜한 것을 보니 정말 호박씨 제대로 까는 김 오누이였다. 뒤늦게 헐레벌떡 뛰어나온 아이들이 ‘선배님 살펴 가십시오.’라며 인사를 해와 그냥 뒤도 안 돌아보고 들어가라 손을 휘저어주자, 역시 로이 선배는 뭐가 달라도 다르다며 자신의 손짓조차 너무 멋지다며 아부를 떨어댔다. 이것들이 이제 연예계 헤쳐 나가는 법을 알게 된 모양이었다. 또 임시 매니저가 자신을 급 공경하며 ‘로이님, 차에 올라타시죠.’ 굳이 길 안내 안 해줘도 눈에 다 보이는 차까지 자신이 봉사인 양 에스코트 해줬다.
로이는 피곤해서 눈 좀 붙이겠다 말하고 뒷좌석에 있는 목 베게 하고 잠잤다. 왜 이렇게 사는 게 힘든지, 19년이 아니라 39년을 산 것 같았다. 다시 눈을 뜬 건 얼굴에서 느껴지는 차가움 때문이었다. 수정이 얼린 생수를 사와 자신의 얼굴에 문대고 있었다. 그거 잤다고 부어서 붓기 빼야한다고 말이다. 하품하며 얼굴 마사지해주는 걸 받고 있자, 운전석에 있던 임시 매니저가 ‘우와~ 하이안이다.’라며 감탄을 했다. 뭔가 싶어 창을 내리자 쫙 달라붙은 청바지와 블라우스에 붉은 하이힐을 신고 걸어오는 여배우가 자신을 향해 ‘로이님.’이란다. 맞다. 재도 승냥이였다.
그래도 하루 종일 여배우로 위장한 승냥이 한 마리를 미리 보고 와서 이제 적응이 잘 됐다. 반갑다고 손 한번 들어주니, 이안이 제자리에서 폴짝 폴짝 뛰며 ‘멋져요~ 로이님~.’이라 해 주변 사람들 멘붕시켰다. 그리고 여배우는 자신이 들어오라는 말을 안 해 차 문짝에 매달려 ‘이거 로이님 밴 아닌데 새로 바꿨어요?’라 물었다. Reve가 모든 연예인들한테 카니발 리무진을 돌리는지라 이건 자신의 차번호까지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역시 하이안도 그냥 팬이 아닌 모양이었다. 하긴, 자신의 팬들 중 스토커 아닌 애들이 없었다.
수정이 턱밑에 손수건으로 말은 생수병을 대주며 ‘하이안 언제 알았어?’라 물어왔다. 솔직히 아는 사이도 아니고, 그저 김수혁이랑 같은 영화 찍고 영화제 무대 인사 때 쭈구리 되는 굴욕 당하는 게 너무 불쌍해 도와준 거였지만, 자신은 너무나 겸손하고 팬은 사랑하는 스타라 환히 웃으며 ‘우리 이안이 몰라? 콘서트에 응원해주러 오고, 누나도 엄청 봤잖아.’라 하니 그녀가 긴가민가하며 ‘어……생각난다. 봤던 거 같아.’란다. 하여간 사람들이란. 이래서 아니 뗀 굴뚝에 연기 나는 거였다.
로이는 자신을 초롱초롱한 눈으로 바라보는 하이안이 ‘로이님. 절 기억해주시다니 너무 감동이에요. 제가 살을 많이 빼기는 했는데, 역시 로이님은 알아봐주시는 군요. 제가 편지도 매일 3통씩 쓰고, 생일 때 분홍색 기타도 선물해드렸잖아요. 저번에 팬 싸인 때 들고 나와서 이안이 넘 기뻤어용.’ 양 볼을 감싼 채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애교를 부리는 데 애가 참 귀엽네, 싶다가 그 기타는 백돼지가 준거라 다시 한 번 의학의 힘이란 놀랍다는 걸 깨달았다. 아주 환생을 해서 나타났다.
너무 놀라 벙쪄 있자, 수정이 그런 자신에게 광고 시안 읽어보라며 건네줬다. 내려간 창문에 매달린 여배우가 빙그레 웃으며 ‘오빠 사랑해요.’라는 데 소름이 쫙 돋았다. 한류 스타 김수혁이랑 첫 데뷔작을 찍을 정도이니 대단한 빽이 있겠다 싶었지만 이 정도인지 몰랐다. 그녀가 새빨갛게 달아올라 부끄럽다는 듯 눈을 가리는 데, 입술을 오물거리며 ‘이제 로이님은 이안이꺼.’란다. 그런데 CF 몸값이 얼마인가 계산하니 1년에 10억이라 그냥 해야 할 것 같았다.
자신은 프로였다. 그까짓 키스 정도야 마음을 다 잡고 하면 잘할 수 있었다. 남들과는 다 하던 연기를 이제 와 ‘저는 못해요. 그녀는 내 팬이라고요.’라는 식의 말을 하는 것도 우스웠다. 우선 청바지 광고이니 옷을 갈아입어야 했다. 차에서 내려 분장실로 이동하자, 이안이 자신의 뒤를 졸졸 쫓아와 안에 들어오지는 못하고 문에 매달렸다. 재……, 자신이 그때 괜히 도와준 것 같다.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헤어디자이너와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로이이이~ 루시퍼 짱이야. 노래 너무 좋더라. 대박.’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형제끼리 팀을 만들어 활동하는 듀엣이었는데 이 바닥에서 제일 나가라는 전문가들이었다.
“어, 형들 오랜만.”
“우리 로이 갈수록 예뻐지는 것 봐. 형아, 마음 설레는 거 알지?”
“즐~. 게이는 사장만으로 족함.”
행거에 걸린 하얀 와이셔츠를 보고 오늘은 무슨 화이트 셔츠 데이 인가 싶었다. 템에서도 그렇고, 역시 이 고전적인 아이템이 섹시 심볼인 모양이었다. 로이는 이번에 찍을 광고 제품과 셔츠를 챙겨 천막 안에 들어가 갈아입고 나왔다. 살짝 헐렁한 와이셔츠가 단추 2개를 풀렀다고 쇠골이랑 복장뼈가 다 들어나 보였다.
“울 스타, 또 그 표정. 형아들 유혹하기 있기 없기?”
호식이 의자에 앉아 멍하니 거울을 보고 있던 자신에게 라텍스 스펀지를 톡톡 두드리며 요사를 떠는데, 그게 거북할 수도 있지만 그냥 장난이라는 걸 알아 피식 웃었다. 그런데 그걸 오해하고 하이안이 문고리를 꼭 잡은 채 이를 아드득 깨무는데 직장 동료가 아니라 그저 팬 같아 귀여워보였다. 핑크 기타가 워낙 특이한 선물이라 그녀도 자연스럽게 기억에 남았는지라 진짜 열심히 살 뺐구나 싶어서 기득했다.
이런 게 아이돌이구나 싶었다. 자신이 그녀의 운명을 바꾸고, 스타의 꿈을 키우게 했다. 그래서 앞으로 더 행동 조심하며 팬들에게 모법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는데……역시 너무 피곤했다. 이안이 자신에게 달려와 ‘오빠, 게이 아니죠?’라며 울먹거렸다. 아니라고 하니, 역시 울 오빠는 너무 예뻐서 게이 놈들이 꼬리치는 것 같다며 자신이 철통 경비를 해야겠다는 데 제발 푸른 소나타에서 보여준 청순하고 애틋한 분위기의 효주가 되어줬으면 싶었다. 그런데 이 누나가 자꾸 오빠 오빠해서 자신이 급 늙어 보이는 거는 아이돌이니 어쩔 수 없는 거겠지만, 무릎 꿇고 자신의 팔에 매달려 있는 거는 아무리 팬이라도 아닌 것 같아 일으켜 세웠다. 그녀는 오늘 자신과 같이 촬영할 여배우였다. 파트너인데 동등한 관계로 잊어야지 한쪽이 저자세면 그 비굴함이 다 영상에 담기는 거였다.
“이안씨, 우리 오늘 광고 촬영 함께할 거잖아요. 그쵸?”
자신이 진지한 얼굴로 이안에게 물으니,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런데 우리 오늘 콘셉트가 섹시한 연인이에요. 그러니 저기 앉아서 어떻게 하면 섹시해보일까 고민하고 계세요.”
자신의 말에 하이안이 분장실에 마련된 의자에 앉았다. 이제 됐다 싶어 얼른 호식에게 메이크업을 받았다. 속눈썹이 금색이라 골드 쉐도우로 스모키를 했는데 그냥 자신의 본래 눈 라인 마냥 눈매가 더 깊고 강인한 것처럼 보여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파운데이션으로 색을 지운 입술의 중앙에 살짝 붉은 틴트를 찍은 그가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립 메이크업을 하고, 브라운 계열의 쉐도우로 얼굴 외곽에 쉐딩을 넣었다. 호식이 전체적으로 자연스러운 인상을 주기 위해 하이라이트 없이 픽스 미스트를 뿌려 화장을 고정했다. 그 다음 태식이 고데기로 자신의 금발에 웨이브를 넣으며 머리칼을 부스스하게 만들어냈다.
앉아서 가만히 치장 받는 일도 힘들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며 기지개로 뻐근한 몸을 이완시켰다. 로이는 아직도 생각 중인 여배우에게 이만 촬영 들어가 보자고 했다. 얼른 광고 촬영하고 다음 스케줄 하러 가야 했다. 거울을 보며 손으로 머리 좀 더 매만지고 스튜디오로 이동했다. 자신이 오기만을 기다리던 감독과 촬영팀들이 ‘시간 없으니깐 최대한 빨리 끝내줘.’라며 부탁해 피식 웃었다. 어딜 가도 자신이 하면 다 잘해낼 거라 생각하니 이거 그 기대에 부흥해줘야겠다.
금발의 아이돌은 붉은 장미가 뿌려진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하이안이 광고 시안대로 그 위에 올라타 자신을 내려다봤다. 엉덩이를 들고 허리를 낮춰 S라인을 부각, 하중은 무릎에 실은 채 욕조 밖으로 양 다리의 각도를 달리 내뻗어 길어보여야 한다는 점에서 여배우는 지금 고난이도 곡예를 부리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이거 무지 힘들 테니 빨리 끝내줘야 했다. 이안이 사탕을 꺼내 입에 넣었다.
“준비 됐습니다.”
“오케이. 슛!”
감독의 지시에 카메라가 돌아가고, 자신과 그녀는 서로를 끈적끈적한 눈빛으로 응시하다가 입맞춤을 했다. 대부분 사진이나 영상은 왼쪽 얼굴을 찍었다. 다들 오른손잡이라 그쪽 턱을 덜 써서 예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자신은 오른손을 들어 이안의 긴 머리카락을 측면에서부터 반대쪽으로 잡아당겨야 하는 거였다. 이때 자신은 손을 깊숙이 파트너의 모발에 파묻어 다섯 가닥의 선을 만들어냈는데, 이 미세함이 그냥 머리채를 잡는 거와는 확연한 차이를 만들어줬다. 남자와 여자가 강렬하게 키스를 한다는 느낌을 주니 말이다.
그녀의 붉은 입술이 살짝 벌어지고 자신은 혀를 내밀어 이안의 혀끝을 맞닿게 했다. 빨간 알사탕이 자신에게로 굴러왔고, 자신은 다시 그것을 돌려주며 살짝 고개를 꺾어 카메라를 보고 붉은 색소로 물든 혀를 내밀어보였다. 이때 눈빛이 강렬해보여야 함으로 턱을 당긴 채 카메라의 붉은 불빛을 노려보니, 감독이 컷을 외쳤다.
“예쁘다. 화면 나왔으니깐 마음 편하게 하자. 살짝 몸 옆으로 눕히고, 그래. 역시 로이야.”
그의 칭찬에 하이안이 움찔했다. 가장 화면의 구성을 차지하고 있는 것도, 힘든 포즈를 하는 것도 그녀이니 속상한 것이리라. 그 마음 이해가 돼 살짝 머리를 토닥여주자, 승냥이가 ‘감독님, 저는 이거 100컷 찍고 싶어요.’라는 거다. 생각 보다 자신이 너무 이 아이를 좋게 본 모양이었다.
그때 여배우의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광고 찍으려고 열심히 굶어서 그런 거였다. 그런데 그게 하이안만 그런 게 아니라 다른 여자 연예인들도 다 그래 새삼스럽게 웃기거나 그러진 않았다. 타이트한 흰 블라우스는 조금이라도 군살이 있었다가는 그대로 굴욕을 겪는, 의외로 소화하기 힘든 의상이었다. 특히 옆라인을 찍혀야 하는 거니 기본적으로 등에 지방이 적어야 상체가 얇아 보였다. 배에 힘주고 사탕을 뱉어낸 하이안이 새 사탕을 입에 넣었다. 그렇게 그 짓을 몇 번 반복하고, 현장에서 풍선껌으로 키스해보는 건 어떠냐는 제안이 나와 껌 20개를 동시에 씹어 서로 풍선 키스하는 장면도 즉석해서 만들어냈다. 15초 광고를 찍으려고 입술 부르트도록 여자랑 키스하려니 참 세상 참 뭣 같고, 이거 혹시 룡룡이가 알면 난리 나는 거 아닌가 싶기도 했다.
파트너 꼬르륵거리는 소리를 BGM로 무지 섹시한 키스씬을 완성하려니 아무리 자신이 베테랑이라 해도 힘들었다. 원래 뚱뚱했던 애라 그런지 억눌린 식욕을 자신에게 쏟아 붇고 있어 완전 후덜덜 했다. ‘누나, 로이 한번만 봐주세요.’ 라 간곡히 바라보는데 자신의 입술을 쪽쪽 빨아먹으며 내가 식사를 못하니 너라도 잡아먹어야겠다는 듯 배고픈 승냥이 한 마리가 허겁지겁 달려들었다. 이 청바지 브랜드가 키스라 광고도 주제도 키스인데 이러다가는 섹스로 발전할 판국이었다. 광고 모델이 자기 마음대로 제품 이름 바꾸려 들면 안 되는 거였다.
자신이 그녀의 밑에서 거의 잡아먹힐 듯 몰리자 감독이 ‘컷, 하이안. 무심한 듯 멋있게. 아주 애를 잡아먹어라. 여기 모텔 아니다. 너 광고 촬영 중이니깐 정신 차려.’라 경고를 했다. 로이는 어느새 자세가 무너져 자신의 위에 완전히 몸을 포개고 있던 이안에게 ‘끝나면 밥 사줄 테니깐, 집중해.’라 했다. 그러자 여배우의 눈빛이 달라졌다. 계속 욕조 틀에 다리 올린 채 한 자세로 있기 힘들어 선택한 떡밥이었다. 뭐 하이안만 하겠냐만은 엉덩이도 베기고 허리도 아픈지라 지금 여자랑 키스한다는 게 문제가 아니고, 얼른 끝내버리고 싶었다. 분명 이딴 식으로 자신들 개고생시키고 첫 장면 쓸 거면서 광고쟁이들이 무지 부려먹고 있었다. 뭐 계속 찍다보면 더 좋은 게 나올 거 같다는 기대심에 그러는 거겠지만, 원래 Feel이라는 게 중요한 바닥이다.
로이는 조금씩 욕조를 잡은 팔의 각도를 다르게 하는 그녀를 보며 그래도 이 아이가 아예 능력 없는 건 아니구나 싶었다. 그러다 또다시 넘어온 달달한 사탕에 오늘 침 100cc는 나눠 마셨겠다는 생각이 들어 착잡했다. 100컷 찍겠다고 하더니만 정말 키스 백번 하는 하이안을 보며 그녀의 두피에 찔러 넣은 손을 뺐다. 자신의 위에서 일어난 여배우가 욕조를 먼저 빠져나가고, 자신은 쥐가 난 다리 때문에 느릿하게 나왔다.
“수고하셨습니다.”
스텝을 향해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고, 모두들 박수치고 장비 정리했다. 그러자 하수연에 버금가는 거머리 하이안이 자신에게 팔짱을 끼고 어서 밥 먹으로 가잖다. 애, 그냥 도로 살쪄서 연예인 좀 그만 했으면 좋겠다.
로이는 팬들이 자신을 보고 연예인을 꿈꾼다는 게 이런 의미였구나 새삼 깨달았다. 아이돌이라는 거 정말 못해먹을 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