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아이돌이다-32화 (32/104)

00032  아이돌은 괴로워  =========================================================================

로이는 고개를 돌리는 척 슬쩍 카메라가 돌아가는 걸 확인하고, 감독이 아무 말도 안 한다는 사실에 설거지를 하는 수혁을 바라봤다. 놀라는 연기가 뭐 대단하겠냐만 실제 사람이 놀라는 정도로는 화면을 통해 시청자들이 받아들이는 체감력이 떨어졌다. 약간 과도하다시피 과장해줄 필요가 있었다.

슈렌은 입을 벌린 채 ‘맙소사!’라 작게 탄식을 내뱉었다. 그는 헐레벌떡 뛰어가 수도꼭지에서 깨끗한 물이 나오는 걸 손을 만져보고 이 마법을 네가 부린 것이냐 물었다. 그러자 준호가 이것은 마법이 아니라 수도꼭지라는 거다, 라며 물을 잠그고 트는 것을 보여줬다.

“하수관이라고 땅에 아까 본 것과 같은 거대한 빨대를 심어 넣고 물을 흘려보내는 거야. 그럼 굳이 네가 살던 시절처럼 우물에 가지 않아도 편히 설거지를 하고, 목욕을 하고, 마실 수 있지.”

“이것은 신의 힘이 아닌 모양이군.”

“그래, 인간의 힘이야. 고작 이런 걸로 놀라지마. 21세기는 네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신기한 게 많으니깐.”

남자는 앞치마에 젖은 손을 닦아내고 마법사를 거실로 데려갔다. 그리고 그는 리모컨으로 텔레비전을 틀었다. 그러자 카렌이 엉덩방아를 찧고 덜덜 떨며 자신의 다리에 매달렸다.

“사악한 마물이….”

영화 프로에서 좀비들이 걸어 다니고 있었다. 금발의 꼬마는 겁에 질린 채 자신의 다리 사이로 화면을 바라보다가 ‘어찌하여 저 유리관에서 나오지 못하는 것이지? 준호, 네가 잡아넣은 게야?’라 물어왔다. 그런데 아무래도 이 우스꽝스러운 말투는 고쳐야할 것 같았다.

“카렌, 아마 네가 나와 같은 시대를 살아가려면 그 고풍스러운 어조는 바꿔야할 거다. 넌 이 나라에서 보기 드문 금발에 푸른 눈인데, 생긴 것도 무척 화려하거든. 그런데 특이한 말투까지 사용하면 더 주목받을 거야. 그건 널 노리는 자들이 있는 이상 좋지 않은 현상이지. 앞으로 끝에 요를 붙여봐.”

“……준호, 그럼 그대도 그 말투를 고쳐라. 요. 나는 그대의 주인이다. 요.”

준호는 오만한 표정의 대마법사가 요를 붙여 말하는 게 의외로 귀여워 크게 웃어버렸다.

“웃지마라! 요. 나는 대마법사 카렌 드 미슈라다! 요.”

“하하하. 미안. 그런데 카렌, 네가 마법사라는데 도대체 그게 뭐지? 손에서 불을 뿜어내는 건가?”

“…그건 신이어도 불가능하다. 요. 마법사는 인과율을 조절한다. 요.”

“인과율이라. 원인이 있으면 결과는 따라오는 거라지만 그걸 네가 결정하는 거였다니…….”

남자는 이런 어린 아이가 과연 뭘 할 수 있을까, 별로 쓸모 있어 보이는 능력도 아닌데 왜 다들 카렌을 차지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나 싶었다.

“어때? 존경스럽나.”

“…뭐 우선 그 말투나 고쳐라. 꼬마.”

준호는 어서 나를 찬양하는 듯 바라보는 꼬마 마법사의 정수리를 붙잡고 꾹 눌러줬다. 아직 어색한 말투인 카렌이었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과 대화 한번 제대로 나눠본 적 없는 자신이 좋은 선생노릇을 해줄 수는 없을 테니, 텔레비전으로 공부를 시켜야겠다 싶었다. 준호는 그에게 어린이 만화를 틀어주고 다시 설거지를 하기 위해 부엌으로 이동했다. 간간히 등을 젖혀 카렌을 확인하자 ‘오호! 귀엽구나. 펭귄. 제법이야. 어린 것이 벌써 연인이 있다니. 기특하군.’이라며 그 내용에 푹 빠져 있었다.

남자는 뒷정리를 다 끝내고 가구의 밑과 위, 뒷면을 모조리 확인해 자신이 없을 때 침입자들이 들어와 심어놓았을지 모르는 도정장치를 확인했다. 문의 경첩 마다 자신이 끼어놓은 머리카락들은 자신들이 열기 전에 모두 제자리에 있었지만, 킬러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는 이상 신중해야 했다. 아무리 자신이 사람을 죽인다 한들 그들의 삶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그러니 완벽한 임무 수행을 한다 할지라도 타깃의 주변인들 중 자신의 정체는 모르지만 복수하기 위해 다른 청부살인업자한테 의뢰를 맡겨 동료들에게 쫓겨 다닌 적도 있었다.

인과율이라……, 이런 걸 말하는 건가.

자신은 살인을 했다는 불안감에 하루도 편안히 잠들 수 없었고, 잦은 이사와 집안의 유리는 모두 방탄유리로 바꿔 끼운 채 두꺼운 커튼으로 집안을 가리고 살았다.

“준호, 뭐 먹을 거 없어?”

벌써 만화를 보고 말투가 달라진 카렌이었다. 과연 마법사라는 말이 어울리는 빠른 속도로 현대인의 말투를 학습해냈다. 자신이 냉장고에서 바나나 우유를 하나 건네니 그가 좋다고 빨아 마시며 ‘키키키. 저 방귀 뀌는 모습 좀 봐.’라며 제법 21세기 어린이 같이 굴었다. 그러다 꼬마는 소파에 앉아 꾸벅꾸벅 좋기 시작했다. 준호는 우유병을 꼭 쥔 채 잠든 어린 마법사에게 다가가 봤다. 왜 이렇게 자신이 카렌의 앞에게 인간적으로 변하는지 모르겠지만, 자신은 이 아이가 좋았다.

남자는 조심스럽게 그의 이마에 달라붙은 금발을 떼어주려 하다 멈칫했다. 살짝 벌어진 입술에서 달달한 바나나향이 났다. 분홍빛 뺨은 어린 것들 특유의 사랑스러움이 묻어나 있었다.

수혁은 조용히 눈을 감은 로이를 바라봤다. 김 작가에게 미리 스토리를 들어놔 자신이 맡은 중요한 임무를 알고 있는 상태였다. 앞으로 밝혀질 비밀들에 대한 복선을 최대한 감정 연기로 표현해내야 했다. 배우는 소파에 올려진 자신의 새끼손을 살짝 그녀에게 닿게 했다. 그리고 자신 또한 소파의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카렌의 옆에서 ‘그 인과율이라는 게 진짜 있다면, 너와 난 전생에 만났던 사이일지도….’라며 중요한 대사를 읊조렸다. 그 다음 괴로운 듯 코끝을 살짝 찡그리며 눈을 감았다. 비극적인 분위기를 뽐내기 위해 몸에 힘을 완전히 풀고 무기력한 인상을 만들어냈다. 텔레비전이 번쩍번쩍 빛을 뿜으며 자신들의 얼굴 음영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 눈을 감고 있어도 지금 감독이 자신을 클로즈업해 미세한 표정들을 잡아내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오케이 컷!”

정우는 이례적으로 안 끊고 갔는데 군말 없이 자신을 믿고 잘 따라와 준 두 배우가 고마웠다. 이 작품을 통해 자신은 로이를 진정한 연기자로 만들어낼 것이다.

이 아이는 달랐다. 평범한 그저 그런 연예인과는 급이 달랐다. 반짝반짝 빛나는 무언가가 있었고, 그저 소녀팬들이 좋아하는 아이돌이라 하기에는 깊이 있는 연기도 가능한 진정한 연기자였다. 검은 렌즈 끼는 게 무섭다고 엉엉 울던 꼬마를 사탕으로 달래 카메라 앞에 세우니, 로이는 언제 울었냐는 듯 환히 웃으며 ‘엄마, 울 아빠는 언제 와?’라는 대사를 했는데 소름이 돋았었다.

아주 별 볼일 없고 그냥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넘어갈 수 있는 말이었으나, 로이는 눈빛만으로 자신뿐만 아니라 시청자들에게도 ‘저 아이……아빠가 버렸다는 걸 알고 있어.’라는 인상을 심어줘 시청자 게시판은 난리가 났고 시청률은 두말 하면 잔소리로 역대 최고 수치를 갱신했다.

드라마는 대사로 이뤄진 대본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상물이었다. 그러니 대사는 별로 없고 인물들의 심리 묘사가 중요한 템페스트는 치명적인 약점을 지니고 시작하는 작품일지도 몰랐다. 그런데 토막토막 대사를 외우고 순간적인 기억력으로 연기를 해내는 여타의 배우들과 다르게 그들은 오케이를 받아내지 못하자, 자신들이 진짜 카렌과 준호인 양 그들의 세계에서 생활해나갔다. 자신들은 그 순간만큼은 그들에게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이들이었다. 그리고 스텝이 아닌 시청자였다. 자신의 조카라 대단하다는 게 아니라 로이는 연극배우도 아니면서 그 바쁜 와중에 완벽하게 대본을 숙지하고 왔음을 자신에게 확인시켜줬다.

넌 반드시 큰 시련이 닥쳐와도 이겨낼 수 있을 거다. 시청자는 바보가 아니야. 너의 진정성이 묻어난 연기를 보고도, 네 잘못도 아닌 걸 용서해주지 않을리 없어.

감독은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가냐고 묻는 금발의 아이돌을 보며 ‘됐어. 유명인사들 한 자리에 모으기도 힘드니 이동한다. 플로리아도 아직 안 가고 있으니깐, 카렌이랑 재회씬 찍자. 모두 이동해.’라며 촬영팀을 멘붕으로 만들었다.

“감독님, 정말 원 씬 원 컷으로 가요? 그러다 장면 예쁜 거 안 나오면 어쩌려고 이러세요. 저희 나중에 재활영 안합니다. 신중하게 결정하시고 이동하세요.”

깐깐한 조카놈이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노려봐 왔다. 하여간 얘는 이미 보통 연기자는 아니었다.

정우는 수혁과 수연이 자신의 말에 그냥 자리를 뜨려한 것과 자신의 조카의 행동을 비교하며 흐뭇함에 올라가는 입꼬리를 급히 내렸다.

“됐어. 장면 나왔으니깐 옮겨.”

“……아 씨! 자기가 무슨 임상순 감독인줄 아나. 이거 칸 갈 능력은 있어?”

건방진 아이돌이 발로 다 마신 바나나 우유병을 뻥뻥 차며 자신을 대놓고 깠다. 이러니 사람들이 자신과 로이가 삼촌과 조카 사이라는 걸 예상하지 못하는 거였다. 둘이 너무 공과 사를 구별할 줄 알았다. 이렇게 작품을 위해 치열하게 싸우는데, 제 핏줄이면 실력 없어도 배역 쫓아주는 이 바닥에서 과연 자신들의 관계를 알아차릴 수 있겠는가. 아니, 이 행동들 자체를 이해할 수나 있을까 싶었다.

“야, 어린 것이 감히 감독을 앞에서 까? 너 그 싸가지 어디서 배웠냐. 네 사장이 처신 잘하라고 교육 안 시키든. 네가 지금 잘나간다고 평생 갈 것 같아?”

정우의 말에 시건방이 줄줄 흐르는 스타는 ‘어, 안 배웠다. 너나 그딴 식으로 촬영시키지 마. 네 말대로 나 인기 떨어질까 봐 존나 골 아파. 빠방한 스폰 붙어서 대작될 줄 알고 기어왔는데 졸작이면 내 이름 먹칠되니깐, 감독 바꾸기 전에 열과 성의를 다해 찍어야 할 거다.’라며 아무리 조카라지만 이런 개싸가지가 어디 있나 싶을 정도로 말해와, 순간적으로 감독은 ‘우리 로이, 삼촌이 훌륭한 연기자 만들어줄게.’ 에서 ‘씨발, 뭐 이딴 애가 있어?’로 눈앞에 있는 존재가 누군지 알아보지도 못할 정도로 열이 뻗치고 말았다. 그리고 로이는 자기 나름대로 다른 드라마 촬영 방법과 다른 정우의 연출 때문에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원 씬 원 컷? 그거 작품 흐름 안 깨니 좋을 수 있다. 그런데 미장센 (시각적 요소들을 배열하는 작업.) 측면을 두고 봤을 때 과연 한 정우 감독이 영화의 잔뼈가 굵은 대거장들이나 하는 촬영 기법으로 완벽하게 영상미를 뽑아냈을까 의심스러웠다.

템페스트가 톱스타들의 출연으로 주목을 받았다면 연출력과 구성력, 스토리로 그 인기를 유지해내야 했다. 시청자는 재미없으면 그냥 버튼 하나 눌러버리는 걸로 떠난다. 그들을 50분 동안 잡아내려면 역시 작품이 좋아야만 했다.

수혁이 자신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봤다. 그는 그저 시키며 무조건 하는 수준이었다. 과연 초보다웠다. 하지만 자신은 어렸을 때부터 여러 감독과 다양한 종류의 작품을 해왔고, 꼼꼼히 모니터 체크하면서 어떤 각도로 얼굴이 나와야 예뻐 보이고 목소리의 높낮이에 따라 얼굴 표정과 다른 감정이 있을 수 있음을 터득해낸 현장에서 연기 배운 연기자였다. 이 정도는 자신도 참견해서 요구할 권리가 있었다. 아무리 배우가 훌륭한 연기를 해도 그걸 못 잡아내는 감독은 자신들이 방송에 나올 수 있도록 도와주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들의 이력에 해악의 존재일 뿐이었다.

“모니터 확인 들어갈게요.”

여기가 할리우드도 아니고 배우들한테 자신들이 어떻게 나왔는지도 안 보여주다니, 정말 삼촌만 아니었으면 자신한테 죽었다. 로이는 모두가 자신 때문에 긴장했다는 걸 알았지만 모니터 앞에 앉아 감독이랑 촬영된 내용을 확인했다.

“여기 수혁이 도청장치 있나 확인하는 장면, 이거 아이 레벨 쇼트로 찍었는데 템은 대사도 없고 설명도 없어서 화면으로 말해줘야 합니다. 시청자가 인물에 감정이입해 상황을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객관적인 판단을 내릴 장면도 필요하다고요. 앞선 촬영에서는 액션 씬이라 별 상관 안했지만 이번 편부터가 진짠데 세부화해서 촬영해도 모자랄 판에…휴~. 우선 옷장 확인할 때 버즈 아이로 내려다봐야 합니다.”

“웃기지마. 거기서 왜 버즈 아이를 써. 수혁의 시점에서 어둠 속을 바라보는 장면이 나아.”

“예, 그건 저도 인정합니다. 앞에 추가를 하라는 겁니다. 그는 지금 자신이 누군가로부터 감시를 당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시청자들이 보기에는 설거지 끝낸 준호가 가구 뒤적거리는 것뿐이라고요. 이 드라마가 친절하게 배우들한테처럼 작가 지문을 자막으로 넣어줄 거 아니면 닥치고 CCTV로 보는 듯한 장면을 여러 각도로 넣으십시오.”

모두는 생각보다 로이 테일러가 전문적인 영상 지식을 갖춘 프로라는 사실에 평범한 아이돌은 아니구나 싶었다. 하긴 그는 자신들 보다 촬영 경력이 월등이 많은 베테랑이었다.

“그래, 그럼 여기서 준호의 독백은 어떻게 할까. 이대로 클로즈업 써?”

“이것도 추가가 필요합니다. 우선 전체 샷 넣고, 로우 앵글로 인물 심리를 더 부각시켜야합니다. 설명이 없는 드라마니 영상이라도 조각조각 쪼개야죠. 그는 지금 두려움, 혹은 후회일지도 모르는 감정을 느끼고 있는 것처럼 연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얼굴만 시선이 가니 그 사실을 확실히는 알아도 분위기는 화면 밖으로 밀려나 시청자는 볼 수 없습니다. 멀리서 한번 전체적인 피사체를 잡아주며 줌인하며 들어와 사각 앵글로 비스듬히 인물의 불안정성을 표현해내는 게 좋겠군요.

아, 저도 사각 앵글이 비행기 추락 사고에나 어울리는 구조인거 압니다. 그런데 마치 큰 사고라도 당한 것 마냥 심리적 긴장과 불안한 심리로 준호가 급격하게 변모했다는 걸 알려줘야 합니다. 제가 김 작가한테 템의 뒷내용을 들어보지는 않았지만 대충 그림이 그려지네요. 준호가 플로리아 죽인 제자의 환생체죠?”

정우는 자신이 의도한 대로 로이가 따라주고, 예상했던 것보다 너무 잘해내줘 볼에 쪽 뽀뽀를 하고 턱으로 뺨을 비벼댔다. 꼬맹이, 넌 진짜 역사에 길이 남을 배우가 될 거다. 하마터면 저 싹수없는 말투 때문에 계획을 그르칠 뻔했지만, 역시 싸가지 없어도 되는 실력이었다.

“아 쫌! 수염 때문에 완전 아프다고. 화장 지워진다. 뚱땡아. 카렌 학습 능력 빠르다는 설명 없으니깐, 준호 시점으로 카렌이 혼자 중얼중얼 따라하는 것도 넣어야 한단 말이다. 제대로 알기나 해? 야망의 눈물은 우연이었어?”

“에구구. 우리 예쁜 내 새끼. 그랬쪄요?”

감독은 어린 배우의 엉덩이를 토닥여주며 잘 했노라 칭찬해줬다. 모니터 확인도 안 하고 넘어갈 그녀가 아니었고, 그럼 자신이 차근히 일반적인 배우는 고려치 않는 카메라 앵글에 따른 캐릭터의 심리 반영에 대해 알려줄 참이었는데 자신이 ‘이때는 이것이 필요해.’라 말하기 전에 로이가 먼저 정답을 말해버렸다. 누구 조카 아니랄까봐 이렇게 똑똑하나 싶었다. 이제 그녀가 모자랐던 부분을 자신이 추가 설명해주기만 하면 됐다.

“잘 봐. 말이 없으니 최대한 시간의 공백을 이용해야 해. 준호가 카렌를 보잖아. 그럼 그의 시점에서 토막 난 신체 분위를 차례대로 보여주는 거야. 우선 아래에서부터 올라가는 게 좋아. 긴장감을 살려야 하니깐. 일종의 페티시즘을 이용한 전략이라 할 수 있지. 성감대는 아랫도리와 가슴만이 아니야. 준호가 카렌의 발가락을 쳐다봐. 그리고 복사뼈, 매끄러운 종아리 사이로 길게 시간을 끄는 거야. 하지만 허벅지로 올라가서는 순식간에 탕! 사진 한 장 던지 듯 강한 임팩트를 넣어주고 재빨리 지나쳐가는 거지. 그는 널 이성으로 여기고 있다는 게 여기서 밝혀지는 거라고.

그 다음 준호의 시선은 어디로 옮겨질까. 가슴? 아니. 그는 네가 이미 남자라는 걸 알고 있어. 그런데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으니, 너의 목젖을 다시 확인해볼 거야. 목덜미에 맺힌 앵글은 제가 고개를 움직이면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에 가지. 그는 지금 너의 머리카락을 만지고 싶어. 하지만 그러면 네가 깰 것 같아 허공에 멈춰선 자신의 손을 바라보지. 그리고 그럴 수 없다는 감정을 네 손으로 초점을 옮기며 나타내는 거야. 이때, 준호는 어떻게 하지? 너와 손가락이 닿을락 말락 움직인다고. 그럼 너희 손만 카메라로 잡아도 그게 심리 연기가 되는 거야. 그걸로 모두는 준호가 카렌에게 성적 매력을 느끼고 있다는 걸 감지해낼 거야.”

“……뭐야. 다 알고 있으면서 왜 그따위로 군거야. 그런데 이거 게이물이었어?”

로이는 한풀 성질이 죽어 감독을 바라봤다. 그러자 뚱보가 ‘그야 네가 진정한 배우가 될 수 있나 테스트 해본 거지. 공부 좀 시켜줄려고.’라 답하더니만 잠시 침묵하고 ‘그런 건 아니니 너무 걱정 말고 지금처럼 찍기나 해.’라며 수상쩍은 태도를 취했다. 그들의 박 터치는 대화에 얼어빠져 있던 이들은 뭔가 싶었지만 저도 모르게 박수를 쳤고. 감독은 ‘들었지? 이런 꼬맹이도 아는 사실이다. 템은 토 나올 정도로 아름다워야 산다. 동양화에는 여백의 미가 있고, 그것은 많은 것들을 그려낸 서양화에서는 담을 수 없는 걸 나타낸다. 우리 템의 여백이 어떤지 제대로 보여주자고. 각자 위치로!’라 외쳐 자신의 말만 듣고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던 스텝들을 재정비시켰다. 이것들이 어째 아이돌만 못했다. 뭐…이게 다 로이 테일러이니 가능한 일이지만 말이다.

그나저나 다른 감독들한테도 이러면 어쩌나 걱정됐다. 그런 자신의 표정을 읽었는지 조카가 ‘삼촌.’이라며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웃어보였다. 그래, 내가 삼촌이니 이렇게 연기 공부도 시켜줄 수 있는 거고 로이도 그것을 아니 마음대로 날 뛴 거다. 하여간 영악한 녀석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