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아이돌이다-31화 (31/104)

00031  아이돌은 괴로워  =========================================================================

로이는 메이크업을 마치고 준호의 오피스텔에서 동거를 시작하는 씬을 준비했다. 천년동안 잠들어있던 마법사는 21세기의 모든 것이 신기해 어린 아이처럼 사고를 친다는 내용이 앞으로 찍을 스토리였다. 뭐 화장실 변기를 보고 맑고 고운 옹달샘이라며 세수하는 장면이 있었지만, 그건 작가한테 ‘즐~, 엑스트라 쓰셈.’하니 변기물 계속 내리는 걸로 바꿔줬다. 하여간 정신머리가 제대로 박힌 여자 같지는 않았다.

그런데 카렌 잡으려고 여러 조직들이 따라와 총격전도 벌이고, 자동차 추격씬도 넣었으면서 갑자기 왜 이리 평화로워지는 건가 싶었다. 역시 공과 사는 구별할 줄 알았어야 했는데 삼촌말만 믿고 덜컥 출연한 게 문제였다. 어떤 바나나 우유를 쓸까나 고심하던 김 작가에게는 어떻게 하면 그 우유를 자신이 귀엽게 마실까와-정말 지문에 ‘슈렌이 바나나우유를 귀엽게 마신다.’라 나와 있었음.- 그 우유를 마실 자신에게 하얀 와이셔츠를 입히려는 변태스러운 생각밖에 없었다. 하긴 이게 확실히 시청률을 높여줄 거다. 치열한 방송계에서 살아남은 이유가 있긴 있는 거 같다.

그녀는 준호의 와이셔츠를 빌려 입는다는 지문에 ‘김작가를 홍작가로 바꿔야함. 브랜드뉴 홍작가 최고♡.’라 동시간대 라이벌 드라마 작가를 찬양하는 글을 썼다. 그걸 본 수혁이 킥킥 웃으며 볼펜을 빼앗아 ‘홍작가 보다 김연진 작가가 저는 더 좋습니다.’라며 스스로 변태임을 입증했다. 그런데 그 사이에 수연이 끼어들고 싶은지 ‘저도 홍작가님이 좋아요. 로이한테 이상한 짓시키고, 수혁씨랑 자꾸 엮으라고 들어서 정말 짜증나요.’라는 걸 말로 해버렸다.

이 여배우가 약간 정신이 나갔다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지는 몰랐다. 진짜 미친년이었다. 자신이 예언컨대 플로리아의 환상체는 죽을 거다. 언제 죽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죽는다. 작가 성질 건드리고 살아남는 캐릭터는 없다.

로이는 굳이 촬영장에 안 와도 되는데 죽치고 앉아있는 연진과 눈이 마주치자 벌떡 일어나 머리 위로 하트를 만들어냈다.

“작가님 사랑합니다. 하수연 혼자 저러는 겁니다.”

그러자 옆에서 수혁이 자기는 원래 감작가님이 좋았다며, 로이랑 스킨십 좀 더 많이 넣어 달라 했다. 이 아저씨 이제 게이로 전직하고 싶은가 보다. 그런데 방안에 조명 설치하던 스텝이 그런 소리를 듣고도 수혁씨가 소문 보다 재미있는 것 같다며, ‘로이가 짱 귀엽긴 하죠.’란다. 하긴 이 미모가 어디 그냥 예쁘기만 한가, 완전 국보급이라 대한민국에서 날고 긴다는 유명 배우만 섭외한 템페스트에서도 그 꽃미모가 우월해 대세녀 하수연을 쭈구리로 만들 정도이니, 수혁이 자신한테 게이게이스럽게 대한다 한들 다들 그러려니 하는 모양이었다.

“수혁씨, 우리 로이한테 너무 친한 척하지 말아주실래요?”

과연 일본 대통령, 한류의 제왕 김수혁한테 저런 말을 할 수 있는 여배우가 또 어디 있을까 싶었다. 이거 지금 그의 팬들이 들었으면 완전 생매장당할 어록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녹취를 해 인터넷에 뿌리는 건데, 자신은 정신 나간 팬조차 사랑하는 너그러운 스타이니 지금도 늦지 않았다며 폰을 꺼내드는 비매너짓은 안하기로 했다. 하수연은 승냥이로 활동한 걸 영광으로 알아야할 것이다. ……그런데 과거형이 아닌 거 같으니, ‘활동하는 걸.’이라 바꿔야겠다.

“자자, 다들 진정해요. 이상한 걸로 싸우지 말고 분위기 좋게 촬영하자고요.”

자신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수수 커플이 눈싸움으로 자신은 알지 못하는 엄청난 대화를 나누는 것 같더니만, 수연이 자신한테 안겨와 팔에다가 제 가슴을 마구마구 문질러댔다. 이 여자 정말 무섭다. 그러자 수혁이 또 일본어로 뭐라뭐라 지껄이는데 그거 알아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음으로 그냥 개무시 되어버렸다.

“로이님, 이상한 게이가 자꾸 말 걸어서 힘드시죠? 수연이가 지켜드릴게요. 총총해요.”

이거 자신이 트위터에서 써먹는 은어인데, 눈망울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팬들한테 ‘여러분, 총총해요.’라고 하면 팬들은 ‘아, 우리 로이가 부끄러워서 우리 사랑한다고 말 못하는 것 좀 봐. 짱 귀여워.’라 생각하게 되는 골수팬만이 아는 말이었다. 생각보다 로이 덕후질을 많이 한 모양이었다. 그러니 그녀가 여배우에서 팬모드로 변신할 때마다 자신을 로이님이라 부르는 것 같으니 이때 재빨리 도망치기만 하면 될 듯싶었다.

수혁이 그런 수연의 팔을 잡고 뜯어내려했다. 그러자 자신에게 매달린 여배우의 탈을 쓴 팬이 ‘박민하만 골로 보내면 될 줄 알았는데…’라며 자신이 10살 때 그 당시 제일 잘 나가던 아역배우랑 사귀었던 걸 언급했다. 음, 그게 자신의 첫 연애였다지.

그런데 이걸 알정도면 하수연은 조상 승냥이였다. 거의 1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한결 같이 좋아해줬다는 사실에 감동해 무지 짜증나고 귀찮고 떼어버리고 싶지만, 자신은 그녀의 아이돌이니 환히 웃으며 ‘오빠도 우리 수연이 총총해.’라 말해줬다. 그러자 자신을 안 놓으려는 팬 때문에 수혁에게 같이 질질 끌려가던 것이 급 정지해버렸다. 이제 끝났나 싶어 그를 올려다보자 유명배우면서, 그것도 한국에서 제일 잘나가는 톱스타이면서 드라마 스텝들 앞에서 아이 마냥 뾰로통한 얼굴로 ‘로이, 저도 총총해주세요.’라는 거다.

“……어, 형도 총총해요.”

그런데 수연이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엎드려서 절 받으니 좋니?’라는 표정으로 수혁을 깔보는 거다. 얘가 미친년이라 저 룡룡이를 못 알아보고 천방지축 날 뛰는데 이러다 큰일이지 싶었다. 역시나 그녀의 눈빛에 그오오오옥! 하며 마치 검은 오로라를 내뿜으며 사악한 인상으로 변모하는 수혁이었다.

다정하고 젠틀한 톱스타가 검은 머리의 살인마 잭으로 변신하는 모습을 목격하게 된 수연은 자신의 팔에 더욱 꼭 매달리며 ‘로이님, 수연이 무서워요.’라 했다. 하지만 그건 자신도 마찬가지라 동료라 하기에는 너무 거북한 여배우를 부둥켜안고 덜덜 떨고 있자, 누가 조폭 아니랄까봐 이 남자가 주먹으로 쾅! 쾅! 벽을 쳐댔다.

벽이 시멘트로 안 되어있었으면 이 집은 무너졌을지도 모르겠다. 건물을 뒤흔들리는 진동에 하얗게 질려 무시무시한 대마왕 김수혁을 바라보자, 삼촌이 자신들의 촌극을 더 이상 보다 못하겠는지 ‘그만 놀아. 촬영 시작한다. 스탠바이 해.’라는 지령을 내렸다.

그러자 놀랍게도 거대한 지진을 일으키던 룡룡이가 잠잠해져 ‘石いしの 上にも 19年. (원래 속담은 돌 위에서도 3년, 그러나 수혁은 로이를 19년 동안 팬질했으로 19년이라 말한 것임. 속뜻: 아무리 차가운 돌이라도 그 위에 계속 앉아있으면 따뜻해지니 무엇이든 참고 견디면 성공한다.)’라 씨부렁거리더니 여유를 되찾아냈다. 마법의 주문인 모양이었다.

로이는 자신이 나오는 장면도 아니건만 자꾸 카메라 앞에서 얼쩡거리는 수연에게 쫌 꺼지라고 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원래 자신의 승냥이들은 과격해서 당근과 채찍으로 조련해줘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막 식인종 마냥 스타를 잡아먹으려 했다.

그런 자신의 태도에 그녀 또한 익숙한 듯 ‘로이, 촬영 잘하세요~.’라며 손을 흔들어줬다. 어쩐지 그렇게 쌍욕을 하고 꺼지라고 화내도 거머리처럼 달라붙더니만, 이미 자신의 채찍에 맷집이 생긴 골수 종자였다.

드레스 룸에서 옷장을 열고 준호의 와이셔츠를 꺼내 입는 씬이었다. 자신보고 등판 한번만 노출해달라는 변태 작가에게 ‘저 미성년자라 템 방영 금지 됩니다.’라 하니 알아서 찌그러져 다행히 옷을 입은 상태에서 문을 여는 준호와 대화를 나누는 내용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은 회의감으로 하반신 노출을 위해 옷을 갈아입었다. 혹시 압박 붕대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싶지만, 어차피 보여줘도 여자라는 걸 못 알아봤으니 그냥 입기로 했다. 그래도 안에 핫팬츠 정도는 입어줬다. 아직 생리 중이라 대본대로 팬티만 입었다가 여자라는 걸 들키는 날에는 문밖에서 자신을 보기 위해 죽치고 앉아있는 무서운 승냥이 한 마리 정도로 끝나는 게 아니라, 1300만 정도 자신을 죽이러 오지 않을까 싶으니 말이다.

‘네 이년! 감히 이 관료사직을 능멸하고, 사내인척 해? 저 년의 주리를 매우 틀라!’

아…, 어제 보고 잔 퓨전 사극 드라마에서 이런 대사가 나왔더랬지. 여자주인공이 남장을 하고 과거 시험에 합격해 정2품 대제학과 러브러브 모드에 빠진다는 내용의 자신이 좋아하는 궁중로맨스였다. 요즘 한창 둘의 분위기가 무르익어 달달했는데, 남색을 한다는 소문으로 주명진(차승주의 극중 배역 이름.)이 위험에 처하자 이진화(이연희의 극중 배역 이름.)가 여자라는 걸 밝히며 나섰다가 완전 골로 갈 뻔했다.

‘아으으윽, 그분은 아무 죄 없습니다. 다 이 요망한 것이. 아아아악.’

12시까지 잠 안잔 보람이 있었다. 자신은 절대 여자라는 거 말하지 말아야한다는 교훈을 배웠다. 참으로 교육적인 드라마 비밀의 화원이었다.

“다 갈아입었어? 그럼 문 연다.”

삼촌이 노크를 해 알겠노라 했다. 로이는 한쪽 무릎을 약간 굽히고 변태들의 먹이로 자신을 던지기 위해 허벅다리를 살짝 벌렸다. 문이 열리고 카메라가 자신의 하얀 발을 클로즈업해서 쭉 올라와 허벅지 안을 찍고 밑단이 살랑거리는 와이셔츠에 잠시 멈춰 섰다. 그래, 찍어라. 찍어. 어디 이 몸이 내 거냐.

섹시 아이콘은 살짝 무릎을 비비며 안에 아무것도 안 입은 것 마냥 부끄럽다는 듯 옷을 아래로 끌어내렸다.

“……아. 꼬마. 너.”

준호가 자신을 보고 멈칫하더니, ‘여자였냐?’란다. 물론 그게 정답이기는 하지만 카렌은 마력이 다 떨어져 어린 아이로 변한 대마법사임으로 눈썹을 찡그리며 ‘인간, 성별도 제대로 구별할 줄 모르는 걸 보니 그대가 영 못 미덥군. 그래가지고 제대로 날 지킬 수 있겠나.’라 시건방진 목소리로 말했다. 자신의 대사에 그의 시점을 대변하는 카메라가 천천히 올라와 가슴에 맺혔다. 천위로 살짝 젖꼭지가 도드라지기는 했지만 자신의 평면 TV는 명품이라 전혀 굴곡이 없이 편편해 노브라여도 들킬 위험 전혀 없었다.

그 다음 조금 더 위로 올라온 앵글이 단추 2개를 부른 자신의 목을 찍었다. 그런데 자신은 무지 말라서 작기는 하지만 목젖이 있었다. 거기다 노래 연습을 무진장하다보니 목근육이 발달해 아담스 애플은 아니어도 로이스 귤 정도는 됐다. 그래서 아무도 이 성별을 의심 안한다는 슬픈 사연이 있지만, 지금은 그게 너무 유용하게 쓰이고 있어 좋은 게 좋은 거려니 하고 넘어가고 있었다.

준호가 ‘그렇군. 미안하다. 꼬마. 밥 먹게 나와.’라며 문을 닫았다. 그가 카렌의 하반신 노출에 당황했다는 심리를 나타내는 행동이었다. 이런 거 하나는 김연진 작가의 장점이었다. 미묘한 기류를 캐치해내는 힘이 그녀에게 있었다.

자신이 다시 문을 열고 나와 수혁의 등을 바라보는 게 다음씬이었다. 방에서 거실로 이동하는 거니 씬 번호가 달랐다.

『#92 거실

(카렌, 방에서 나온다. 수혁이 자신을 여자로 오해한 것 때문에 기분이 나쁘다. 그래서 식탁 위의 음식들이 맛있어 보이지만 그걸 넙죽 받아먹기에는 자존심이 상한다.)』

이 짧은 대본의 지문이 다음과 같이 현실에서 실현되었다. 식탁에는 따끈따끈한 쌀밥이랑 고깃국, 김치, 계란말이, 동그랑땡이 있었다. 보통 세트로 나오는 음식은 요리 연구가가 만들어 모양도 예쁘지만, 맛도 무지 좋았다. 그래서 소품으로 나온 음식을 다 먹으면 3년이 재주 없다는 징크스를 선배 연기자들이 후배들에게 말하곤 했다. 촬영 중 배우들이 다 먹어버리면 NG가 났을 때 재촬영을 못하니 말이다.

카렌은 침이 꼴딱 넘어갔지만 관심 없는 척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저것들한테서 이상한 냄새가 나. 준호, 그대나 먹어.”

“그렇군. 그럼 먹지 마.”

카렌의 음식 투정에 냉혹한 살인 청부업자가 의자에 앉아 저 혼자 밥을 먹기 시작했다. 이에 금발의 마법사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그런 남자를 노려보다가,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자 얼른 주린 배를 움켜잡고 그의 눈치를 보며 의자에 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준호를 따라 젓가락을 잡았는데 손가락에서 자꾸만 떨어지는 철 막대기가 식탁을 굴러다니며 제 구실을 해내지 못했다. 보다 못한 준호가 계란말이 하나를 집어 카렌의 입에 넣어줬다. 그러자 마법사의 푸른 눈동자가 커지며 ‘우와! 그것을 더 달라. 준호. 어서!’라 제법 귀여운 대사를 했다. 그런 꼬마의 모습에 남자는 심부름꾼이라는 자신의 직업에 맞게 ‘밥이랑 같이 먹으면 더 맛있다.’라며 밥에 계란말이를 얹어 계속 카렌의 입에 날라줬다.

로이는 입 안 가득 음식물을 담고 오물오물 먹었다. 저 바보가 표정을 잃은 캐릭터이면서 아주 눈을 풀리고 입매가 조커 마냥 찢어져 혹시 NG 나는 거 안 날까 싶었는데, 감독이 아무 말도 안 해 자신도 그냥 계속 먹는 연기를 했다. 수혁이 자신에게 따끈한 국물을 떠 입에 넣어줬다. 마침 목이 메던 찰나라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꼬마, 이것도 한번 먹어보겠나.”

“그 동그란 것도 괜찮은 듯 보이는 군. 준호, 어서 그 노란 것이나 다오.”

이제부터 카렌 드 미슈라의 진정한 먹방이 펼쳐질 예정이라 어서 오케이를 받아내야 하는데 삼촌이 아무 말도 안했다. 그래서 그가 자신에게 먹이 조달하는 걸 계속 받아먹다보니 무지 배가 불렀다. 그런데 벌써 밥 한 공기를 다 해치웠건만 감독이 아무 말도 안한다. 설마 이걸 한번에 OK할리 없는데 왜 다시 가자는 말을 안 하나 불안했다.

그래도 자신은 한 감독에게 왜 그러냐는 물음 대신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쪽을 선택했다. 카메라 라인 밖에 있는 자들이 자신에게 OK 해야 로이 테일러로 돌아올 수 있는 거지 그렇지 않으면 자신은 계속 카렌이었다. 준호가 밥을 다 먹은 자신에게 살포시 웃으면서 ‘천년동안 굶어서 그런지 무지 잘 먹는군. 꼬마, 뭐 더 먹고 싶은 거 있나?’ 물었다. 이에 얼른 ‘어, 소화제 좀 줘.’라 답하고 싶은데 그러면 지금까지 선보인 먹보 연기가 망할 테니 ‘단 게 먹고 싶다.’라 다음 대사를 이어나갔다.

“그렇다면 이게 좋겠군.”

준호가 잠시 고심한 듯싶더니 잠깐만 기다리라 했다. 이번 주 대본을 살펴봤는데 카렌이 무지 먹어대 그 칼로리를 어떻게 소비하나 자신의 앞날이 심히 걱정됐다. 하여간 작가라는 것이 그거 먹고 나서 살 빼야 하는 연기자에 대한 배려는 눈곱만치도 안 해주고, 완전 사악한 마녀였다. 그가 냉장고에서 그 문제의 바나나 우유를 꺼내 빨대를 꽂아 자신에게 넘겨줬다.

“이건 뭐지? 노란색이 참 희한해. 호오, 참으로 달콤한 향기가 나. 내 사랑 플로리아에게 선물해주면 좋을 신묘한 꽃병이야. 그녀의 방에도 하나 놓아주고 싶군.”

둥근 항아리 모양 병을 흔들며 빨대에 코를 가져다대 향기를 맡는 마법사가 웃으면서 자신이 가져도 되냐 물었다. 나중에 그녀를 만나거든 선물해주고 싶다는 것이다. 이에 준호가 ‘유통기한이 있어서 그건 지금 마셔야해. 나중에 필요하면 언제든지 새로 사줄 테니 마셔봐.’라 말해, 카렌이 깜짝 놀랐다.

“이게 음료라고? 그럼 이 하얗고 잎이 다 떨어진 갈대는 뭐냐.”

“빨대다. 그 병에 든 걸 마시기 위해 꽂은 거야. 그것을 물고 빨아봐. 계란말이 보다 마음에 들 거다. 꼬마.”

“…그대는 정말 무례해. 나는 꼬마가 아니라 그리 말했거늘.”

카렌은 자신의 구해준 킬러를 째려보며 바나나우유를 쪽 빨아 마셨다. 그는 복어 마냥 양볼을 빵빵하게 부풀린 채 커다란 푸른 눈을 깜빡이며 한 번에 꿀떡 삼켜냈다.

“마시는 방법이 아주 고약한 음료임은 틀림없으나 맛은 넥타르 보다 좋군.”

금발의 마법사는 텅 빈 플라스틱 병을 들고 아쉽다는 듯 계속 바라봤다. 그러자 냉장고 문을 연 남자가 몇 개 더 있다며 자신의 동거인에게 내밀었다.

“많이 있으니 걱정마라 꼬마.”

로이는 자신에게 내밀어진 또 하나의 바나나 우유를 무지 기쁜 듯 입꼬리를 들어 올린 채 받아냈지만, 볼이 씰룩거리며 경련하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템페스트 마지막 회 방영될 때쯤 자신은 돼지 삼촌만한 꼬마 돼지가 되어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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