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아이돌이다-29화 (29/104)

00029  사랑이 뭐길래  =========================================================================

자신의 손을 꼭 붙잡은 수혁 때문에 로이는 제법 찬바람이 불기 시작한 날씨임에도 손바닥에 고인 땀을 그의 바지에 문지르는데 시간을 다 허비하느라 장난 한번 못치고 촬영지에 도착해버렸다. 그리고 삼촌이 자신과 같은 색과 기종의 카니발을 보고 앞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귀여운 조카 대신 드라마 속 살벌한 준호와 찐한 포옹을 하게 되었다지만, 원래 감독과 배우가 사이좋으면 시청률은 자연히 잘 나오는 거니 좋은 게 좋은 거였다. 그런 수혁이 몸서리치며 자신의 털보를 밀쳐냈다가 갑자기 급 팬서비스 버전으로 돌변해 공항에서 하는 한류스타 악수 마냥 공손하게 ‘존경하는 감독님 안녕하십니까.’라 했다. 이거 참 처세술의 대가다웠다.

로이는 그런 톱스타를 보며 이거 인맥 관리로 드라마 비중 늘리려는 것이로군, 이라 생각해 그 얄미운 것을 째려보다가 ‘야망의 눈물’을 제작한 전설적인 감독에게 ‘나의 비중을 늘려놨나. 똥돼지.’라며 그의 배를 주먹으로 퍽퍽 때려줬다.

“당근이지. 우리 꼬맹이. 이따가 삼촌이 클로즈업 잔뜩 때려줄 테니깐 예쁘게 화장하고 와.”

아이돌은 한 감독이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걸 못마땅하게 노려봤다. 저번 촬영의 앙금이 아직 풀리지 않았다. 자신은 마른 오징어 마냥 뒤끝이 질린 수퍼 스타이니 말이다. 로이는 수정에게 ‘턱 좀 깎아봐. 다크써클도 지워. 배역? 그딴 거 상관없으니깐 내가 최고로 예쁘게 해.’라는 주문과 함께 ‘무조건 수혁보다 독보이게.’라는 전제 조건을 달았다. 아무리 같은 작품을 함께하는 식구라지만 배우들 사이에서 시기와 질투가 넘쳐나는 거야 다반사였다. 저 멍청이가 자신이 선배라고 안 그런척하는데 분명 저 혼자 화장빨 잘 받으려고 비싼 메이크업한 게 틀림없었다. 어쩐지 오늘따라 이상하게 더 예뻐 보이더니 틀림없었다. 앙큼한 후배님이었다.

수혁이 감독에게 다가가 꼬리를 살랑거리고 있었다. 힘드시지 않냐며 어깨를 주무르고, 음료수 캔을 따 두 손으로 바치고 있다. 질투 로이는 메이크업 아티스트에게 미용실 집게핀으로 앞머리가 집힌 채 화장을 받다가, 다정하게 어깨를 맞댄 채 낄낄거리는 두 남자를 보다 못해 자리에서 뛰쳐나가 그 사이를 갈라놓았다.

“둘이 뭐하는 거야!”

“아, 로이.”

수혁이 자신을 보고 작게 웃더니, ‘너무 귀여워요.’라는 것이다. 당근이다. 자신은 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스러운 아이돌이니 말이다. 그런데 뭔가 상당히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돼지 삼촌이 들고 있는 휴대폰에서 꼬마 로이가 기저귀만 찬 채 오동통한 주먹으로 땅을 짚고 엉덩이를 들었다 놨다 하고 있었다.

“바우스~ 바우스~ 초코레 내 사라. 바우스~ 바우스~ 다코한 내 여잉~.”

지금 저 혀 꼬부라진 어린 것이 부르는 노래는 90대 최고 히트곡 ‘바운스 내 사랑.’이었다. 금발의 아기가 엉덩이를 실룩거리며 텔레비전에 나오는 섹시 춤을 따라하는데, 이거 이 인류에서 사라져야할 자신의 흑역사임이 틀림없었다.

“내놔!”

로이는 삼촌에게 어쩜 이렇게 자신을 배신할 수 있냐 소리를 지르며 핸드폰을 빼앗기 위해 팔을 뻗었다. 그러자 정우가 뱃살을 출렁이며 도망쳤고, 수혁이 자신에게 ‘로이는 어릴 때부터 남다른 끼를 가지셨군요.’이라 했다. 그런데 절대 칭찬으로 안 들렸다. 이게 하늘같은 선배한테 감히! 그녀는 건방진 후배의 정강이를 한번 차주고 워낙 무거워 별로 달리지도 못한 채 헉헉거리고 있는 털보돼지의 뒷목을 낚아챘다.

“오늘은 특별히 다이어트를 포기하고 멧돼지 바비큐를 먹어주지.”

“헉, 헉. 로이야. 삼촌이. 헉. 잘못했어.”

땀을 뻘뻘 흘리며 비굴하게 웃는 정우의 모습에 조카는 조금 안심을 하고 ‘알았어. 그럼 어서 그거 지워.’라고 했다. 그러자 허리를 굽힌 채 숨을 몰아쉬던 털보가 벌떡 일어나 투수 마냥 핸드폰을 공중으로 던졌다. 그리고 꽤나 멀리 날아간 그것을 수혁이 잽싸게 달려 앞으로 슬라이딩해 잡아냈다. 아스팔트에 팔꿈치가 다 나갔는데 우리나라 최고의 배우가 실실거리며 ‘전송 끝났습니다. 로이, 삭제하시죠.’라며 쩔뚝거리며 다가왔다. 너덜너덜해진 저 옷은 어쩔 것이야. 협찬일 텐데 코디 죽겠군.

그나저나 지금 그 이름 모를 스텝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이제 자신은 이걸 지워도 두고두고 ‘로이 테일러는 꼬꼬마 시절 기저귀만 찬 채 바운스 내 사랑을 불렀다지요.’라는 비웃을 수혁으로부터 살 테니 말이다. 왈칵 눈물이 났다.

“로이….”

그가 자신의 위로해준답시고 손을 내밀었다가 먼지랑 피가 뒤엉킨 더러운 손으로는 자신을 만질 수 없다며 팔을 내렸다. 그러면서 많이 안 다쳤으니깐 너무 걱정 말란다. 누가 자기 걱정해서 그러나. 정말 도끼병 환자가 따로 없었다. 삼촌이 달려와 엉엉 우는 조카 보고 위로랍시고 ‘로이야, 그 나이에 그 정도 부르면 엄청 잘 부르는 거야. 마돈나가 환생한 줄 알았다니깐. 어찌나 춤을 잘 추던지 아주 신이 내린 춤꾼이야.’라는 것이다. 아니, 아직 죽지도 않은 가수는 왜 죽이고 자신으로 만든단 말인가.

로이는 ‘나도 알아! 내가 얼마나 예쁘고 노래 잘하고 춤 잘 추는지! 그런데 그거 내 세미누드잖아. 훌쩍. 하여간 이 에로 아저씨들.’하며 그들을 노려봤다. 그러자 수혁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삼촌의 고물 휴대폰에서 영상을 지우고 ‘아청법으로 여가부에 신고하겠습니다. 감독님!’이라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네 폰에 보낸 거나 지워, 이 변태야.

그녀는 자신에게 순순히 스마트 폰을 넘기지 않는 얼굴만 예쁜 조폭 아저씨를 이때다 싶어 신나게 때렸다. 푸른 소나타 무대인사 때 아주 여자들이랑 잘 놀아났더랬지!

아무튼 울면서 어서 내놓으라 하니, 그가 ‘이거 가지고 감옥 가겠습니다.’라는 것이다. 그래서 무슨 개소리냐, 다친 사람을 상대로 등짝에 스매쉬를 날려줬다. 그러자 한 감독이 김 배우에게 눈을 찡긋찡긋하며 ‘원본 컴에 있음.’이라 입을 뻥끗하는 것이지 아닌가.

“로이. 걱정 마십시오. 지금 당장 삭제하겠습니다.”

수혁이 자신에게 친히 동영상 삭제하는 걸 보여주며 노래를 흥얼거렸다. 바운스 내사랑이었다.

“바운스~ 바운스~ 초콜릿 내 사랑~ 바운스~ 바운스~ 달콤한 내 연인~”

………아무래도 작가를 만나야 할 것 같았다. 카렌이 준호 뺨 때리는 장면 좀 넣어달라고.

로이는 이상하게 나올 필요도 없는데 촬영장에 나온 김 작가한테 ‘선생님, 지금 바나나 우유의 브랜드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왜 카렌이 바나나 우유를 먹습니까. 어서 준호와의 불꽃 전투 장면을 넣어주십시오.’라 간청을 올렸다. 그러자 그녀가 ‘아가, 죽고 잡니? 이게 얼마나 중요한 씬인데. 감히 작가의 영역을 넘봐?’라는 시선으로, 그러나 자신은 초특급 아이돌이라 그 매서운 눈빛과 다르게 아주 상냥한 목소리로 이와 같은 작가 말씀을 하셨다.

“로이, 이거 찍으면 분명 바나나 우유 CF 들어올걸?”

이 여자, 자신을 너무 잘 알았다. 금발의 스타는 현명하고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을 지난 작가님께 ‘제가 바나나 우유를 참 좋아해서 카렌이 엄청 흡입한다는 지문 보고 무지 기뻤습니다. 그런데 앞으로 음료수나 과자도 좋지만 핸드폰, 냉장고, 뭐 그런 거 있지 않습니까. 천 년 전 사람인 카렌이 얼마나 그것들을 신기해하고 좋아할지, 이 천상배우는 감히 상상해보았지요. 특히 카렌은 김치 냉장고를 좋아할 듯싶습니다.’라며 그녀의 어깨를 주물러줬다.

“뭐. 그건 그렇고. 우리 수혁씨 다쳐서 어떻게. 많이 다친 거 아니지? 그런 모습도 있었다니, 의외로 아이 같다니깐.”

로이는 어째서 조폭 룡룡이한테 이렇게 여자들이 꼬여대나 싶었다. 그는 나이도 댑다 많은 아저씨에………물론 키 크고 잘생기고 성격 좋고 돈 많고 몸매 잘 빠졌고 한류스타라지만……그래도……그래도. 힝~

그녀는 김수혁한테서 나쁜 점을 찾아보려했지만 그가 나이 많은 거만 빼면 너무나 완벽한 자신의 이상형이라는 사실에 달려라 로이가 되어 그에게 달려가 등에 업혔다. 그런 자신의 등장에 손에 소독약을 들이붓던 환자가 마치 권총 든 강도를 만난 것 마냥 가만히 양 손을 들어 올린 채 ‘저는 결코 작가님께 카렌과 준호를 러브모드로 써달라고 안 했습니다.’라며 자신은 전혀 몰랐던 사실을 이실직고했다. 언제 그런 걸 또 자신 몰래 말했나 싶었다.

“뭐야? 수혁씨 나랑 러브씬 찍고 싶은 거양? 그런데 어쩌나. 카렌은 일편단심 플로리아인데. 키키. 그리고 템, 게이물 아니거든.”

로이는 속닥속닥 그런 배우의 귓가에 장난스럽게 속삭였다. 그런데 저 멀리서 양반이 아닌 듯 극중 배역 이름 말했다고 하연수가 등장하고 있었다. 하이힐 신고 뛰는 척 걷느라 고생이 참 많다. 나름 여배우라고 늦게 왔으면서 스텝들한테 죄송하다는 말 한마디 없이 행차하고 있다. 스타벅스 커피 들고 아주 잘하는 짓이다.

“로오오이이이~.”

하여간 저 여자, 의외로 참 끈질기다. 그렇게 싫다고 거절했는데 자신에게 또 기어오는 거 봐라. 사람들 앞에서 그렇게 면박 준 게 소용없는 모양이었다.

인기 아이돌은 어떻게 해서든 자신에게 잘 보이려는 그녀의 행동 때문에 수혁의 정수리에 턱을 괴고 하수연이 오든지 말든지 관심 없다는 듯 안 쳐다봤다. 그런데 그녀가 자신들이 있는 곳까지 달려와 ‘수혁씨, 다치셨다면서요. 괜찮으세요?’라는 것이다. 그러자 이 바람둥이 남자가 저 불여시한테 웃으면서 ‘괜찮습니다. 수연씨.’라는 거다. 순간 눈깔이 뒤집히는 줄 알았다. 로이는 ‘그래? 그래에에? 네가 그렇게 나온다지? 이 여자 저 여자 조 여자 그 여자 다 건드린다 이거지?’하며 이 괘씸한 아저씨에게서 떨어졌다. 그리곤 자신이 울려 저번 촬영에 나오지 않았던 여배우를 향해 ‘이 넓은 푸른 바다에 한번 푹 빠져 허우적대봐라.’라는 듯 매혹적인 블루 아이로 지그시 바라보며 목소리를 한층 낮게 깔아 ‘누나, 저번에 안 나와서 걱정했잖아요. 감기는 다 나았어요?’라 로이 테일러작(作) 대사를 읊어줬다.

물론 자신한테 고백 거절당한 거 쪽팔려서 아프다는 핑계 데고 안 나온 거 알았다. 하지만 자고로 여자란 ‘차가운 남자, 그런데 가끔 보여주는 다정함이 좋아.’라는 뻔한 드라마 속 남자주인공 같은 캐릭터에 푹 빠져 사는 법이었다. 로이는 템페스트 여주인공의 오른쪽 뺨에 손을 뻗어 ‘보고 싶었어.’라 오늘 나올 씬을 미리 연기해봤다. 그러자 다리가 풀렸는지 하수연이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어버버거렸다. 자신이 같은 여자가 봐도 참 많이 멋있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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