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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이돌이다-24화 (24/104)

00024  사랑이 뭐길래  =========================================================================

수혁은 무대인사가 끝나고 로이를 찾아봤으나 이미 그녀가 사라지고 없음을 깨달았다. 오늘 사귀기로 한 기념으로 파티를 열려 했는데 무슨 일이 있나 싶었다. 그는 얼른 차에 올라타 단축번호 041004을 길게 눌렀다. 신호음을 갔지만 받지 않았다. 혹시 또 큰일이 벌어진 건가 싶어 그녀의 매니저에게 연락하니 로이는 지금 바쁘다며 제 말만 해버리고 끊어버렸다.

이걸 확!

성질이 난 남자는 그 재수 없게 생긴 게이를 연안부두에 담가버릴까 했다가 그럼 로이가 자신을 무서워할 것 같아 참기로 했다. 수혁은 그녀를 위해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을 통째로 빌렸던지라 한숨을 내쉬며 부하들더러 자신 대신 밥이나 먹으러 가라 했다. 분명 연애를 시작하면 같이 손도 잡고, 밥도 먹고 더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리라 생각했는데 로이는 너무 톱스타라 그런 건 힘든 모양이었다. 괜히 눈물이 나 조용히 창밖만 바라보고 있자 상철이가 좋은 걸 챙겨다 놨노라 하였다.

“난 약 안한다.”

“아휴~, 아닙니다. 도련님. 제가 어떻게 도련님께 그런 걸 권하겠습니까. 저흰 식사하고 올 테니 집에서 잘 감상하십시오. 사진도 다 인화해냈습니다.”

대머리는 빌라에 차를 세우고 차 트렁크에 둔 박스 하나를 자신에게 건넸다. 수혁은 이게 뭔가 싶었지만 호기심을 억누르고 집안에서 뚜껑을 열어봤다. 그런데 로이의 사진이 한 가득이었다. 주제할 수 없는 미소로 얼른 어떤 사진들이 있나 살펴봤다. 마치 생일 선물을 받은 듯 설레고 기뻤다. 그는 무대 위에서 춤을 추는 로이, 길을 걷는 로이, 핸드폰을 보는 로이, 드라마 촬영을 기다리는 로이 등등등을 보고 이것들이 언제 자신 모르게 그녀를 스토커질을 했나, 이 고마운 것들 하며 금발의 천사가 자신이 없을 때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샅샅이 살펴봤다. 물론 ‘어느 각도에서 보아도 예쁜 나의 님, 어화둥둥. 내님이야.’였다.

수혁은 뾰로통한 표정으로 불만이 가득 차 있는 사진 속 로이의 모습이 너무 귀여워 바닥에 데굴데굴 굴러다니며 그걸 제 가슴에 품었다. 그러다 그는 한참 사진을 살펴보면서 이거 위험한 거 아닌가 싶었다. 처음에는 자신이 없는 그녀의 시간을 공유할 수 있어 기뻤다. 하지만 500장이 넘어가면서는 ‘이거 범죄잖아!’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던 것이다. 아무리 충성심으로 한 짓이라 할지만 자신 몰래 로이의 사생활을 훔쳐봤다는 것으로밖에 안 보였다. 그래서 단체 기합 좀 시킬까 핸드폰을 든 그는 우선 이것들 다 보고 전화 걸지, 라며 잠시 그 일을 뒤로 미루고 이게 나쁜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자꾸 주인의 의지를 배반한 채 사진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못된 눈을 막을 수 없었다.

그런데 상자 안에 다량의 사진 외에도 홈비디오 카메라가 있었다. 그는 이게 뭔가 싶어 얼른 테이프를 되감아 틀어봤다.

“……………씨발.”

침대 위에서 정신을 잃은 로이가 누워있었다. 그런데 그 돼지새끼가 자신의 천사에게 다가와 손을 잡는 거다. 이를 아드득 물고 노려보자 화면 속 스토커는 그녀의 뺨을 어루만지며 헉헉거렸다. 역겨움에 던져버리려다가 참았다. 자신이 이때 함께 있어주지 못한 벌을 받아야 하니 말이다.

그 놈이 자신의 반짝반짝 빛나는 별님을 만지고 있었다. 가슴도 만지고, 손가락에 깎지도 끼고, 위에 올라가 몸도 겹쳐본다. 그게 너무 참을 수 없어 우느라고 놓친 장면을 다시 되감아 봐야했다. 너무 미안해서, 내가 너무 안이해서 저런 일이 벌어지도록 해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었다.

다행히 로이는 금방 깨어났고, 영리한 여인임으로 자신에게 험한 짓을 벌이려는 돼지를 잘 가지고 놀았다. 그나저나 고양이 귀를 끼고 저런 귀여운 포즈를 취하다니……. 수혁은 주먹 쥔 채 볼을 비비며 야옹야옹하는 로이를 넋을 놓고 바라봤다. 심각한 상황인데도 그 모습이 귀여워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았다.

이것을 어떻게 처리할까 싶었다. 모두 불태워버리려니 그럼 자신이 로이를 불태우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그는 상자 안에 다시 사진과 카메라를 넣고 봉인했다. 영원히 이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게 자신의 비밀 서재에 놔둬야할 듯싶었다. 그런데……가끔, 아주 가끔 사진 한 장 정도는 꺼내 봐도 되지 않을까 싶다. 이미 한번 본 것이니 두 번 본다고 큰일 나지는 않을 것 같다.

괜히 찔리는 것이 있어 자기 자신에게 변명을 늘어놓던 수혁은 방으로 상자를 들고 갔다가 고양이 귀를 한 채 찍힌 로이의 사진을 꺼내 다시 바라봤다.

“하아아아~, 로이. 왜 이렇게 귀엽습니까.”

그는 그 사진을 심장에 올리고 두근두근한 제 심박동소리를 들려줬다.

“이러니 제가 밤마다 편히 잠들 수 있겠습니까. 너무 불안해서 살 수가 없네요. 로이가 조금만 덜 예쁘고, 덜 사랑스럽고, 덜 귀엽고, 덜 섹시하고, 덜 인기 있고, 덜 착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수혁은 그게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걸 알기에 스스로를 비웃었다. 로이 테일러는 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천사이니 말이다.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 마음먹었다. 저 아기랑 결혼하겠노라고. 어머니가 한국인이기에 그녀를 만날 수 있었던 것 같아 처음으로 혼혈이라는 사실이 기뻤다. 물론 그 누구도 자신의 태생에 대해 뭐라 하는 자들은 없었다. 하지만 자신은 어머니가 한국을 그리워해 일본에서 보내는 시간보다 자신을 버리고 친정에 가있을 때가 더 많아 혼혈이라는 게 싫었다. 이 한국인의 피만 없었어도 일본에서 어머니가 매일 자신과 함께해줬을 테니 말이다.

아무튼 10살의 자신은 아직도 어미의 품이 그리운 나이라 자주 그녀를 따라 한국으로 놀러왔었다. 외할아버지 댁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던 때였다. 고등학생이 금발의 아기를 안고 젖동냥을 다니는 장면을 리모컨으로 채널을 바꾸다가 딱 보게 되었다. 발가락부터 시작된 전류가 머리끝까지 번져 찌르르 흐르고, 자신은 리모컨을 놓치게 되었다. 영화는 뭔 내용인지도 모르고 봤다. 대략 양아치가 집 앞에 버려진 외국인 아기를 주워 부모를 찾아준다는 이야기였다.

브라운관에 바짝 다가가 입을 오물오물하며 젖을 빠는 천사를 구경했다. 어떻게 이 지구상에 이렇게 예쁘고 사랑스러운 생명체가 있을 수 있는 걸까 싶어 어머니께 물으니, 개봉한지 얼마 지나지 않았음에도 방송으로 틀어줄 만큼 망한 영화는 한류스타의 김주원의 출연으로 그 존재감만큼은 대단하여 그녀는 로이를 알고 있었다.

‘로이라고 해. 엄청 귀엽지? 이 영화로 확 떴잖아.’

‘엄마, 나 나중에 커서 로이랑 결혼할래.’

‘어머, 안 돼. 로이는 아무리 예뻐도 남자 아이인걸?’

그게 무슨 말이냐 했다. 엄마가 어떻게 저 아기가 여자인지 남자인지 아냐 따지니, 영화에서 남자아이로 나오지 않냐며 기저귀 가는 장면을 자신이 봤단다.

‘아니야! 왜 거짓말을 하는 거야. 엄마 바보! 난 로이랑 결혼할 테야!’

‘켄이치로~.’

어머니가 뛰쳐나간 자신을 불렀지만 어린 자신은 첫사랑의 상실감에 엉엉 울며 외할아버지 댁에서 일하는 아저씨들을 마구 때리러 다녔다. 지금은 그녀를 위해 선량한 한국인이 되었지만 그때만 해도 일본 최고의 야쿠자 야마구치의 하나 뿐의 후계자로서 기운차게 살았는지라 대련을 빙자한 폭력을 휘둘렀던 것이다. 그런 자신의 행동에 삼촌들은 맞지 않기 위해 ‘로이 테일러 공물.’이라 하여 그녀가 찍은 CF와 화보, 영화, 드라마 등등의 자료를 하나도 빠짐없이 갖다 줬는데 그 중에서 아침 5시에 하는 생방송 모닝도 있었다.

장모님은 옹알거리는 아기 천사를 안고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딸을 찾아 집으로 찾아온 VJ에게 마치 자신이 스타인양 굴었다. 화면 속 가구랑 소파, 전자제품들이 모두 새것처럼 보였다. 장모님은 우아하게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웃었는데 카메라 앞에서 요즘 인기를 실감한다는 둥, 어쩌고저쩌고 조잘거리다가 VJ가 ‘아드님이 참으로 예쁜 것 같습니다.’라 말하자, ‘어머, 우리 로이는 여자아이에요.’라 답했다. 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앞으로 착하게 살게요.

그 장면을 몇 번을 돌려봤는지 모르겠다. 테이프가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반복해 그 장면이 헛것이 아닌 진실이라는 걸 확인하기 위해 되감아 봤다. 그리고 매일 그 장면에서 외쳤다. 너 나중에 커서 내 신부해라, 하고 말이다.

그 뒤로는 한국 문화에 대해 공부하고, 그들처럼 생각하며, 그들의 음식을 먹고 완전히 한국인이 되고자 했다. 로이는 금발의 푸른 눈의 사랑스러운 한국인이니 말이다. 물론 자신은 그녀를 위해 한국인이 되어 군대도 다녀왔고, 야쿠자를 싫어한다 하여 문신 세기는 걸 거부했다가 아버지께 죽을 때까지 맞아 정수리로 타협을 보고 일반인이 되었다. 이런 자신이 그녀와 결혼하지 못할 리 없었다. 자신은 로이 테일러 맞춤 김수혁이니 말이다.

수혁은 고양이 귀를 한 사진 속 여인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이따 꿈에서 다시 만나도록 해요. 쪽.”

그는 사진 속 아이돌에게 뽀뽀를 하고 서재에서 나와 침실로 향했다.

오늘 꿈에서 자신이 그녀를 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자신이 없는 곳에서 로이가 울지 않게 말이다.

============================ 작품 후기 ============================

후후후..다음편에서 수혁이의 망상이 폭발한다는...열어서는 안되는 상자를 열어버려서.~.~

이것이 무삭제판이 존재하는 이유라지요...

이 늑대가 망상으로 몸부림치기 때문에ㅎㅎ

참고로 삐삐 세대가 아닌 분이 계실까봐 말씀드리면

041004는 영원히 사랑해 나만의 천사, 라는 뜻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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