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아이돌이다-11화 (11/104)

00011  어른이 될 테야  =========================================================================

로이는 우울증 대마법사를 연기하느라 일부로 눈 밑을 어둡게 할 필요가 없었음을 깨달았다. 준호와 달리기만 하면 되는 역이라 저절로 다크 서클이 내려왔던 것이다. 지금 카렌을 잡기 위해 각 나라의 정부조직들이 움직이기 있었다. 그런데 제작비는 한정되어 있어 추격자들의 인원이 많아 보이기 위해 옷 갈아입은 보조 출연자들을 다양한 각도에서 찍어야 해, 같은 장면만 여러 번이었다.

나중에 그래픽으로 몇 배 뻥튀기되어 늘어날 30명의 엑스트라들이 그렇게 야산을 뛰어다며 자신들을 잡기 위해 열심히 빵야 빵야 총을 쏘아댔다. 그러니 자신은 죽기 살기로 킬러에게 손목이 붙잡힌 채 2시간째 등산 중이었다.

그녀는 감독이 ‘컷, 다시 한 번 가자.’라 말하는 걸 들으며 아무리 그가 삼촌이라 할지라도 언젠가 죽여 버려야겠다 싶었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면서 왜 나를 도와주겠다는지 모르겠군. 그대를 이해할 수 없어.”

“꼬마, 잔말 말고 제대로 뛰기나 해.”

그러면서 수혁이 마치 처음 달리는 것처럼, 그리고 진짜 총을 든 적들이 쳐들어오는 것처럼 긴박하게 달렸다. 정말 체력 하나는 기가 막히게 좋은 사내였다. 배우가 아니라 마라톤 선수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럼 자신이 1등 하라고 응원도 해줬을 거다.

로이는 너무 힘든 나머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다시 비탈길을 오르며, ‘이 드라마가 20부작이랬지? 아무래도 안 되겠어. 카렌을 중간에 죽이든가, 비중을 줄여야 해.’ 라는 생각으로 헉헉거렸다. 나름 여배우인데 아무도 그걸 몰라, 아주 마구 굴리고 있었다. 그래도 다행이라면 수혁이 잠깐 쉬자며 짬짬이 자신을 챙겨주고 있어 버틸만 하다는 거였다.

그는 사람이 아닐지도 몰랐다. 어떻게 전속력으로 질주를 하고 상큼한 미소로 자신에게 ‘조금만 힘내면 끝날 겁니다.’라며 음료수를 건넬 수 있단 말인가. 이건 필히 CF를 노리는 사악한 계략이렷다. 정말이지 무서운 후배였다.

로이는 거칠게 광고 라이벌에게서 음료수 캔을 빼앗았다가, 이것도 잘하면 기사가 되겠다 싶어 수정을 불러 메이크업을 정돈한 후 그가 준 복숭아 맛 탄산을 들고 사진을 찍었다. 이러다 광고 하나 얻어걸리는 거 아니겠는가. 요즘은 자기 PR 시대였다. 이렇게 해서 자신이 계약한 광고가 무려 3건이나 되었다.

『템페스트 촬영하다가 잠깐 쉬는 중. 에고. 피곤해라.ㅜㅠ 음료수 마시면서 파워 업!』

그리고 그녀는 수혁의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간단하게 남자의 화장을 고쳐주는 장면을 찍어 트위터에 올렸다. 어째 후줄근한 정장을 입고 있는데도 스타 포스가 나는지 모르겠다.

『템페스트에는 이런 대사가 있어야 함. 준호야, 조금만 쉬자! 난 할아버지지 말이야.』

물론 농담이지만 어째 천년 동안 잠을 잤는데 머리도 안 떡지고, 입 냄새도 안 나고, 몸이 경직되지도 않아 벌떡 일어나는지 모르겠다. 아주 이 드라마가 리얼리티는 쌈 싸먹은 모양이었다. 그런데 잠자는 숲속의 공주도 양치질 안하고 백년이나 잠을 잤는데 왕자가 키스하고 결혼할 생각까지 한 걸 보면 템페스트도 그 과가 아닌가 싶었다. 그냥 생각 없이 대리만족을 위해 만들어진 이야기 말이다.

어쩐지 다친 주제에 준호가 웃통을 벗고 팔굽혀 펴기를 하는 게 좀 돌아이 같다 싶었다. 이런 걸 야망의 눈물 같은 명작을 만든 감독이 찍고 있으니, 이제 우리나라의 드라마는 트렌드만 쫓고 작품성 따위는 없는 거였다. 물론 자신은 유명 작가가 대본 맡은 외주 제작 드라마를 찍을 것이다. 그게 방송국 제작 드라마에 비해 몸값을 터무니없이 많이 주니 말이다.

……뭐 일단 그렇기는 한데 요즘 방송국 대부분이 드라마를 외주로 돌려 편하게 처리하겠다는 마인드라, 갈수록 내용이 자극적이고 상업성 위주로 가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사실 외주제작이라는 게 문제가 많았다. 자신이야 이런 방송계 흐름에 따라 배우들 몸값이 천정부지로 올라가니 좋은데, 이러면 스텝들이 돈도 못 받고 일하는 경우도 허다하고 제작사가 망하는 경우도 종종 있어 공생 관계가 깨짐으로 장기적으로 봤을 땐 배우들에게도 안 좋았다. 결국 연기자란 누군가가 뒤에서 서포트해 자신을 촬영해줘야 방송에 나갈 수 있는 거니 말이다.

거기다 자꾸 유명 스타를 캐스팅하기 위해 제작사들이 무리수로 출연료를 불러댔다가 미지급되는 경우가 너무 왕왕 있어 이렇게 개고생하고도 돈 못 받을까봐 걱정됐다. 로이는 변절자 감독을 째려보며 ‘이거 분명 외주 제작이지?’라고 물었는데, 그가 헛소리 말고 다시 촬영 들어가했다. 괜히 말 걸었다.

그렇게 산을 달려서 도망가는 씬 찍고, 자동차 타고 도망가는 씬 찍고, 준호의 집에 도착하는 씬까지 하루에 다 몰아서 찍었다. 너무 일정이 타이트한 거 아니냐고 따지니 ‘너랑 수혁씨 스케줄 맞추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알아? 널널하게 찍고 싶으면 드라마만 하던가.’라는 말해 결국 새벽 3시까지 촬영을 해야 했다. 앞으로는 일할 때 삼촌한테 말 걸면 안 될 듯싶었다. 계속 본전도 못 찾으니 말이다.

로이는 드디어 촬영이 끝났다는 사실에 이제 치킨을 먹을 수 있는 건가, 하며 뚱땡이 털보를 바라봤다. 그러자 그가 손가락을 동그랗게 말고 오케이 싸인을 보내 자신의 떨거지들을 어떻게 털어낼까 고민해봤다. 뭐 의외로 간단할 듯싶었다.

“매니저, 나 엄청 피곤하니깐 아메리카노 좀 사다줘. 엄청 찐하게. 이 시간에 어디서 사오냐는 변명 따위는 하지 마. 길거리에 24시간 커피 집이 널리고 널렸어.”

그리고 황량한 새벽거리로 커피 집을 찾아 머나먼 길을 떠난 주안이 돌아오기 전, 로이는 자신의 스타일리스트와 메이크업 아티스트에게는 퇴근하라고 했다. 주안이야 한집에 사니 그만 보내버리면 만사 오케이였던 것이다. 그녀는 스텝들을 향해 수고했다 인사를 하고, 매니저가 올 때까지 같이 기다리겠다는 수혁에게 피곤할 테니 어서 가보라고 했다. 정말 눈치 없는 후배님이었다.

로이는 슬금슬금 장비를 정리하는 현장을 빠져나갔다. 그러자 곧이어 정우 삼촌도 따라 나와 하루 종일 한 일이라고는 달리기밖에 없어 엄청나게 늘은 도망치기 실력으로 같이 새벽 거리를 질주하였다.

“헉. 헉. 삼촌, …치킨. 치킨.”

옆 동네까지 도망친 자신이 숨을 헐떡거리며 치킨을 부르짖자 그가 지금 시간에 연 곳은 호프집밖에 없다며 그곳에 들어가자고 했다. 물론 자신은 초특급 유명한 스타인지라 삼촌이 쓰고 있던 야구 모자를 벗어 머리에 씌워줬는데, 그 모자의 정체가 밤샘 촬영으로 씻을 시간이 없어 냄새 막기용으로 쓰이고 있던 지라 땀 냄새로 죽을 것 같았다. 이러다 자신의 찰랑찰랑 머리카락이 썩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그것도 잠시, 영업하는 호프집에 들어가 기름에 치킨이 튀겨지는 바삭한 소리와 맛있는 냄새를 한꺼번에 경험하게 되자 감독의 꼬랑내는 참을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로이는 잠자코 가장 구석진 자리에 앉아 가게 아저씨가 치킨을 튀겨내는 걸 구경하였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모습에 삼촌이 ‘너 이제 세 달만 있으면 대학가지? 학교 정했어?’라 물었다.

“그냥, 너무 유명한데는 안 가려고. 연예인 특혜라고 엄청 까대잖아. 이미지로 먹고 사는 직업인데 그냥 소신 있게 공부를 안했으니 안 가겠다, 학업에 집중 못할 것 같으니 포기하겠다, 뭐 이렇게 말하는 걸 개념 발언이라 하니 그에 맞춰줘야지. 거기다 몇 번 가지도 못할 대학 때문에 비싼 등록금 내고 학교 행사 꼬박꼬박 공짜로 다녀야하는 것도 영 싫고.”

“에구. 우리 꼬맹이가 생각이 아주 많아. 후회하지 않겠어? 학교에선 공부만 배우는 게 아니라고.”

정우 삼촌이 자신의 정수리를 꾹 누르며 너무 남 눈치 보지 말고 살라 했다. 정말 웃긴 감독이었다. 연예인이 어떻게 대중의 시선을 고려하지 않고 산단 말인가.

“맛있게 드세요.”

로이는 테이블에 따끈따끈한 치킨이 올라오자, 가까이 다가온 직원에게 얼굴을 보이지 않기 위해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닭 날개를 선점해 뜯어먹었다.

“여기 맥주 5000cc요.”

그런데 삼촌의 주문에 호프집 알바가 잔을 두 개나 가져다 줬다. 그래서 자신이 필요 없다 말하니, 삼촌이 ‘네 나이면 마실 때도 됐어.’라며 한잔 따라줬다. 누굴 사회면에 등장시키려고! 어느새 김수혁의 끄나풀이 된 모양이었다. 모자창 안에서 눈만 굴려 대략적인 센 손님은 3명이었다. 여기서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 사람은 당연히 없고 말이다.

그녀는 철저히 자기 관리를 하는 연예인으로서 이미지 차원에서 맥주잔을 반납했다. 그러자 정우가 피식 웃으며, 알바에게 술이랑 치킨을 포장해달 하였다.

“하여간 너도 참 피곤하게 산다.”

뭐 그런 거 같기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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