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0 어른이 될 테야 =========================================================================
로이는 수혁의 대답에 잠시 주춤했다.
“예. 알겠습니다. 선배님.”
자신이 예상하던 것과 전혀 달랐다. 분명 어린 자신에게 선배라고 부르는 걸 열 받아 하고, 화내고, 인간성이 바닥이라는 걸 보여줘야 하건만 감독 앞이라고 너무 이미지 관리 했다.
거기다 늙은이에게 선배님이라고 들으려니 뭔가 굉장히 많이 자신이 개쓰레기 인간 같고, 엄청 성격 안 좋아 보이고, 서열이나 따지며 군기 잡는 좀스러운 인간으로 보이니 안 될 듯싶었다. 할 수 없이 로이는 농담이었다 말하고 수혁의 옆구리를 꼭 찌르며, 어서 이 남자를 꼬셔 게이라는 기사를 일본까지 퍼트려주마 잔뜩 기합을 넣어 그와 팔짱을 꼈다.
“형아, 로이랑 사진 찍어요.”
핸드폰을 들어 그가 사준 코코아를 들고 다정한 연인 사이인 듯 수혁의 품에 들어간 로이는 그가 자신을 백허그하는 듯한 포즈를 취한 채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바로 SMS로 그 게이삘 나는 사진과 함께 ‘수혁 형아가 코코아 사줬어요. 아, 짱 맛있어♥’라는 떡밥을 날렸다. 크크크. 이 바보 같은 게이가 자신을 아주 사랑스럽다는 듯 눈깔에 꿀을 발라놔서 리트윗이 속도가 엄청 났다. 거기다 자신이 쫌 많이 귀여운 척 했더니 다들 뻑이 가 또 난리가 났다.
이슈 메이커는 인터넷 세상의 반응을 매우 흡족하게 바라보다가 감독이 ‘꼬맹이 장난 그만치고 촬영하자. 화장하고 와.’라는 소리에 얼굴에서 웃음기를 걷어내고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감독님.”
그런 자신의 반응에 수혁이 놀랍다는 듯 한쪽 눈썹을 들어올려, 로이 테일러가 아이돌이기 전에 배우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 그녀는 숨 한번 몰아쉬고 대마법사 카렌 역에 감정이입했다. 금발머리와 푸른 눈동자는 한국 드라마와 영화에 출연하기 적합하지 않았다. 그래서 야망의 눈물을 찍을 때도 검게 머리를 염색하고 렌즈를 껴야해, 촬영 들어가기 전 눈에 뭘 넣는 게 무서워 도망간 어린 자신을 잡기 위해 삼촌이 쫓아와 사탕을 쥐어주곤 했다. 그런데 전혀 연기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 장면에서도 머리색과 눈색이 완전히 다르니 이미지 변신이라는 둥, 완전히 배역에 몰입했다는 소리를 해주며 사람들은 성공적인 연기였다 하였다.
하지만 처음으로 로이 테일러의 본 모습에 가까운 배역을 맡자 시청자들은 첫방 때부터 붉은 장미가 가득 채워진 관 속에 잠들어있는 대마법사의 모습을 보고 ‘로이 너무 예뻐.’ ‘로이 뮤직 비디오 보는 것 같이 멋져.’라는 식의 반응밖에 해주지 않았다. 그건 무지 열 받는 일이었다. 자신은 여태까지 진지하게 연기하고, 언제나 최선을 다하는 데 그들은 고작 자신의 외모만을 보고 있었다니 자존심 상했다. 최선을 다할 것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자신의 드라마를 보며 무대 위에서 춤추는 아이돌을 떠올릴 수 없게 해버릴 거다.
로이는 교회 앞에 쳐놓은 천막으로 가 메이크업 아티스트에게 안색은 창백하게, 눈밑은 어둡게 화장해달라고 했다. 가수로서 자신이 섹시했다면 대마법사 카렌은 모든 것에 자조적인 고독한 불멸자이니 말이다. 그녀는 촬영에 들어가기 전 분주한 스텝들을 보며 대본을 펼쳐들고 대사를 곱씹어 봤다.
그런데 그때, 수혁이 검은 정장을 입고 살인청부업자가 되어 나타났다. 다정한 이미지의 배우는 살벌한 살인마가 되어 입술을 꾹 다문 채 무시무시한 검은 오로라를 뿜어냈다. 누가 저 남자를 대한민국 최고의 미남 스타 김수혁으로 알겠는가. 그저 모르는 사람이 지금 모습을 봤더라면 그는 그냥 잘생긴 마피아 두목이었다. 로이는 완벽하게 준호 역에 몰입한 후배를 보며 자극을 받았다.
더 이상 자신도 아역 배우로 취급받고 싶지 않았다. 분하기는 하지만 적어도 저 남자처럼 멋진 성인 배우가 되어서 얼굴이 아닌 연기력으로 사람들을 웃고, 울게 만드는 존재가 되고 싶었다. 로이는 스타일리스트가 건네는 하얀 와이셔츠와 검은 바지를 들고 화장실로 향했다. 그런데 민호가 화장실 칸막이에서 나온 자신에게 화려한 십자가 목걸이를 건네 ‘너는 모든 삶에 대한 의욕을 상실한 우울증 환자가 자신을 꾸밀 것 같아?’라며 대본을 이해하지 못한 죄로 혼 좀 내줬다.
천 년 전 믿었던 제자의 배신으로 사랑하는 연인을 잃게 된 대마법사는 자신이 죽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에 영원한 잠을 택했다. 그리고 그가 잠들어있는 관을 여러 조직들이 차지하기 위해 한 세기 동안 치열한 전쟁을 벌이던 중, 새로운 세력의 개입으로 카렌이 한국의 낡은 교회에 안치되게 된다는 게 템페스트의 1화 내용이었다.
물론 세월이 너무 많이 지나 그의 존재를 기억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너무나 오랫동안 검은 관 하나를 차지하기 위해 모두가 싸워 왔기에 권력자들은 자신들이 왜 그것을 차지해야 되는지도 모른 채 전쟁을 벌일 뿐이었고, 그러다 항간에 그 상자를 열면 인류가 멸망한다는 말이 떠돌아 바티칸 비밀 결사대가 카렌의 관을 한국인 추기경에게 처리하라 맡기면서 그가 이 나라로 오게 되었다는 설정이었다. 그래서 1화 초반에 잠깐 얼굴을 내비치고 대마법사의 출연이 여태 없었다. 관에서 잔다고 하니 뭘 어쩌겠는가. 그저 누가 깨우러 오기 전까지 기다려야지.
그런데 더 열 받는 건 자신 빼고 방송이 나갔던 문제의 편수들에서 준호가 너무 멋지게 나온다는 사실이었다. 추기경에게 의뢰를 받고 관을 파괴하러 심부름꾼이자 킬러인 사내가 저 혼자 멋지게 적들에게 총질을 하고, 추적을 따돌리기 위해 도시 한복판에서 자동차 묘기를 부리는 데 지금 누가 주인공인가 싶었다. 분명 감독이 자신보고 템페스트의 주인공이라 했는데, 3편에서도 수혁 혼자만 나와서 전투 중 다친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웃통을 홀라당 벗고 멋진 식스팩을 드러낸 채 산속 별장에서 무기를 점검하는 장면으로 멋진 킬러의 면모를 뽐내더니만, 자신을 암살하러 온 떡대들과 다시 맞닿으려 화려한 액션 배우로 거듭나셨으니 젠틀맨 김수혁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했다는 게 지금 템페스트에 대한 시청자들의 평이었다.
로이는 수혁을 노려보며 대사를 연습을 했다. 오늘은 준호가 모든 추적자들을 다 따돌리고 추기경과 약속된 장소로 와 관을 열어보고 그 안에 잠들어있던 대마법사와 만나는 장면이었다. 드디어 4화만에 자신이 출연하는 것이다.
그녀는 교회 안으로 들어가 단상 위에 올려진 검은 관속에 들어갔다. 어디서 이런 교회를 섭외했는지 모르겠지만 두 번째 보는 건데도 깨진 스테인드글라스 사이로 불어 닥치는 바람 소리가 구천을 떠도는 혼령의 비명처럼 그로테스크 했다. 게다가 바닥에 굴러다니는 유리 조각은 사람이 지나갈 때마다 모든 것이 조용하기만 한 교회 안에서 큰 발자국 소리가 되어 자신의 심장을 철렁 내려앉게 만들었다.
물론 폐 교회의 이런 음침한 인상은 일부로 만들지 않아도 자연적으로 저번 보다 현저히 많이 늘어난 거미줄들이 건물의 모서리 부분에서 깨진 유리 틈 사이로 나오는 실바람에 처녀 귀신이 매달려 하얀 치맛자락을 잔잔히 휘날리는 것 마냥 보이는 탓이 컸다. 뭐 이러한 점들이 화면에서는 멋져 보일 테니 장소 섭외한 것이겠지만, 그래도 명색이 추기경이 가져왔는데 좀 고급 호텔 안에 관을 보관하면 어디가 덧난단 말인가.
“그럼 관 닫겠습니다.”
“헉! 잠깐만.”
로이는 FD의 손을 급히 잡고 울먹이는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계속 내 곁에 있어야 해. ……가 아니고 내 스타일리스트 좀 불러줄래요? 민호 형!”
자신이 급히 찾자 민호가 달려와 왜 그러냐고 했다. 그래서 얼른 십자가 목걸이 좀 내놓으라고 하니, 아까 안한다고 하지 않았냐고 잔소리를 해대 어서 닥치고 가져오라고 했다. 로이는 화려한 로사이오를 목에 걸고 그것을 손으로 꼭 쥐었다. 조금 안심이 됐다.
“그럼 시작하시죠.”
금발의 미소년은 털썩 장미꽃 속으로 파묻힌 채 눈을 감았다. FD는 그 모습에 피식 웃으며 로이 테일러가 어리긴 어리구나 싶었다. 두 눈을 질끈 감은 아이는 어두운 관 속에 혼자 있을 거라는 생각에 잔뜩 겁에 질려 있어 텔레비전에서 제 몸뚱이를 상품으로 사용하던 섹시한 모습 보다 호감이 갔다. 그러다 그는 감독이 어서 나오라고 소리를 쳐, 관 뚜껑을 닫았다.
조연출은 슬레이트를 들고 음향 감독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마이크를 들고 있던 사내는 ‘스픽.’하며 마이크가 정상적으로 돌아가고 있음을 알려줬다. 이어 카메라 감독이 ‘롤.’하며 카메라 테이프가 돌아갔음을 알려왔다. 배우들의 모습을 찍을 스텝들의 준비가 모두 끝난 것이다. 그래서 조연출은 ‘래디!’라 외치고 슬레이트를 치며 씬과 컷, 테이크 번호를 읊어 촬영의 시작을 알렸다.
교회 문을 열고 준호가 들어왔다. 그는 방금 전까지 추격을 따돌리느라 많이 지친 상태다. 그러나 비틀거리며 걷는 남자의 발걸음은 전혀 방심하지 않았다는 걸 알리듯 소리가 없다. 청부업자는 곧장 단상으로 올라섰다. 추기경에게 받았던 간단한 의뢰가 이렇게 복잡한 일인지는 몰랐지만, 잔챙이 처리에 대한 추가 비용은 따로 받으면 될 터였다.
재킷에서 권총을 꺼낸 그는 발로 관 뚜껑을 차버렸다. 그런데 그 안에 금발의 소년이 잠들어있다는 것을 보고, 킬러는 순간적으로 심장이 내려앉는다. 감정이 없던 남자를 망설이게 할 정도로 잠든 아이는 아름다웠다. 준호는 잠시 총을 내리고 죽은 자의 하얀 뺨을 만져보았다. 아직 살아있는 듯 그는 따뜻한 온기로….
“컷! 야, 로이. 너 그따위로 할래?”
감독은 지금 배우가 잠든 척 하는게 아니라 진짜 잠들었다는 걸 기가 막히게 알아내고 윽박을 질렀다. 그러자 잠자는 관속의 왕자님 로이가 한품을 하며 아직 촬영 안 끝났냐 했다. 컴백 무대가 끝났다는 생각에 긴장이 한 순간에 풀렸던 모양이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꿀잠이었다.
“내가 그랬지. 초 비관적으로, 마치 죽고 싶은 데 죽을 수 없어 자는 거라 보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뚝뚝 떨어지게 누워있으라고. 네가 그래야 준호가 동정심을 느끼고 살려주는 게 말이 되지. 그럼 이건 그냥 너 예뻐서 첫눈에 반한다는 내용의 게이 드라마 밖에 더 돼?”
“감독님. 그게 어떻게 가능합니까. 자는 사람한테 무슨 표정이 있다고. 전 배역에 몰입해 잔 것이지 결코 피곤해 잔 것이 아닙니다.”
조금 양심의 가책이 들었지만, 자는 연기에서 진짜 잤으니 자신은 완전 배역과 혼연일체 했다 할 수 있겠다.
“어쭈? 지금 많이 컸다 이거지? 지금 감히 감독한테 배우가 말대답이야? 야, 너 나와.”
삼촌이 오늘 따라 세게 나갔다. 분위기가 살벌해져 매니저가 오줌 마려운 강아지 마냥 발을 동동 굴리고 있었다. 그러면서 주안이 어서 자신에게 사과하라며 안달복달을 하더니, 결국 저가 감독에게 허리 숙여 죄송하다며 구십도 인사를 해댔다. 정말 저런 사장을 믿고 계약을 하다니, 소속사 연예인으로서 쪽팔려 죽겠다. 로이는 관에서 나와 눈을 부라리며 ‘그럼 때려치우든가!’라며 막장 드라마를 연출하였다. 당근 자신이 빠질 수 없다는 걸 알아 던진 말이었다.
그런데 순진한 한류스타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지 털보와 자신 사이가 급격하게 나빠지자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감독에게 자신의 연기력이 모자랐던 것 같다며 다시 한 번 가자고 해 남의 자존심을 자근자근 밝아주셨다. 꼭 말리는 시누이가 더 미운 것과 같은 이유였다.
“아니, 문제는 수혁씨가 아니라 로이에게 있는 거지.”
일에 관해서는 누가 엄마 동생 아니랄까봐 순둥이 돼지에서 무서운 호랑이로 변신하는 정우 삼촌이 자신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밀면서 ‘대가리에 똥만 들어 반반한 얼굴 믿고 깝치나 본데, 이거 한순간이다. 아이돌 노릇을 천년만년 할 것 같지?’라는 것이다. 로이는 입술을 꾹 깨물고 울면 지는 거라는 생각에 눈을 감아 눈물을 감추어냈다. 그러자 감독이 바로 촬영 들어가자는 거다.
씨발.
그의 말대로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는 아이돌은 그것을 자신이 부정할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 분해 관속에서 눈물을 꾹 감았다. 그런데 왜 자신이 이런 취급 받으며 드라마 찍나 싶었다. 다른 데만 가도 왕자 노릇하며 칭찬만 들을 수 있는데 말이다. 완전 서글퍼 드라마 따위 다 때려치우고 집에 가고픈 마음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럼 이것도 연기 못해 드라마 하차 했냐는 대중의 질타를 받을까봐 그럴 수도 없었다. 그녀는 눈꺼풀 안 가득 차오르는 눈물을 억지로 삼켜냈다.
“오케이 컷! 거봐, 하면 되잖아.”
뭔 헛소리인가 싶어 눈을 뜨자 수혁이 수고 했다면서 손을 내밀었다. 그것을 물끄러미 보다 손을 잡으니 그가 팔을 끌어당겨 자신을 일으켜 세우고 옷에 달라붙은 장미 잎들을 하나하나 일일이 떼어주었다. 이상하게 향기 진한 꽃에 파묻혀 있는데도 이 남자의 체취밖에 안 났다. 로이는 왜일까 싶어서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다 그녀는 온신경이 꽃잎 떼기에 가 있는 남자 배우의 내리깔린 속눈썹이 예상 외로 길어서 그만 넋을 놓고 보고 말았다. 대마법사는 난생처음 보는 신기한 생명체의 등장에 ‘너는 누구지?’라 물었다. 감독이 컷을 외쳤는데도 자신도 모르게 연기가 나와 버린 거였다. 그러자 자신의 파트너가 다시 준호가 되어 ‘아무것도….’라며 꺼질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카렌은 그런 인간을 보며 동정심을 느꼈다. 피 냄새 진하게 나는 그이의 주위에는 죽은 자들의 절규가 가득해 검은 남자는 자신처럼 불행해보였으니깐. 그는 그래서 이 불쌍한 자를 자신이 돌봐줘야겠다 싶었다. 그런데 그건 잠든 대마법사의 모습을 보고 킬러가 살려낸 이유이기도 했다.
카메라 감독은 두 배우 사이에 흐르는 아련한 분위기를 운 좋게 자신이 다 잡아내고 있다는 사실에 조용히 쾌재의 미소를 지었다.
“그럼 나랑 같군. 이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할 의미가 없게 되어버린 거 말이야. 앞으로 그대의 이름은 미슐란. 나의 종이 되어라.”
“건방진 꼬마로군. 난 그대를 죽이러 온 사람이야.”
“그런가. 그거 듣던 중 참 반가운 소리군. 부디 당신이 날 죽일 수 있었으면 좋겠어.”
“그렇다면 난 너를 죽이지 않을 거야.”
“내가 죽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나?”
대마법사의 질문에 잔혹한 킬러는 흐릿한 웃음으로 그의 금발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내가 죽이지 못할 존재는 이 세상에 없어. 하지만 죽고 싶은 사람을 죽여주는 것만큼 큰 선물이 없다는 걸 아니 넌 살아서 괴로워해야겠어.”
“그렇군. 그대의 말이 옳아. 나는 평생 고통 속에서 그녀를 그리워하며 죽음만을 바랄 테니깐. 혹시 내가 원한을 지었다면, 그편이 더 효과적인 복수야.”
준호는 모든 것을 달관한 소년의 말을 듣자니, 이상하게 그 말을 반박하고 싶었다. 삶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희망차다고, 생각 보다 괜찮다고…. 자신이 미친 모양이었다. 매일 죽음밖에 안하던 주제에 무슨 생각을 하나 싶었다. 더러운 바닥에서 생활하다보니 그저 사람 목숨을 돈으로만 계산했는데, 그래놓고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믿게 된 것이다. 이상하게 이 금발의 아이를 보고 있자 그토록 찾았으나 자신을 구원해주지 않았던 신을 영접한 기분이었다. 살인청부업자는 아름다운 벽안을 향해 물었다. 너는 혹시 나를 버렸던 그 신이 아니냐고.
“네 이름은 뭐지?”
“카렌 드 미슈라. 이 세계의 인과율을 조율하는 마법사이다.”
“재미있는 소리를 하는군. 꼬마.”
“그대, 나는 꼬마가 아니야. 모든 진리를 깨달은 신이 만든 위대한 대마법사지.”
“그래, 그럼 카렌. 나는 정준호라 한다. 준호라 부르면 돼.”
“준호라. 이상한 이름이군.”
“그건 너도 마찬가지야. 꼬마.”
금발의 마법사는 킬러가 자신을 부르는 호칭이 마음에 들지 않아 인상을 찡그렸다. 하지만 준호의 눈에는 그런 카렌의 모습이 귀여워 보여 살포시 웃었다. 언제나 무표정으로 살던 남자라고는 믿기지 않는 밝은 감정이었다. 그는 이래서 다들 이 꼬마를 차지하려 했나 싶었다.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신께 사랑받고 있는 것 마냥 모든 걱정과 근심이 사라지고 희망적으로 변했다. 그래, 마치 살아있는 네잎클로버 같이 말이다.
“그대는 나의 말을 믿지 못하는 군. 전형적인 인간의 형상을 띄고 있어. 준호, 너는 인간인가 보군.”
“그래. 나는 인간이지. 그런데 너는 그렇지 않다는 듯 말하는데 모두가 널 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벌이는 이유와 관련이 있나?”
“그거 참 어리석은 질문이야. 날 차지해봤자 사랑하는 연인 하나 구하지 못한 무능력한 남자가 무얼 할 수 있겠어. 그저 마법사란 살아서 숨만 쉬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 버러지야. 그대도 알 텐데, 이 덧없는 존재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기력함을….”
어린 배우는 한 번의 휴식도 없이 대사를 이어나갔다. 놀라운 집중력이라 할 수 있었다. 로이는 살짝 옆으로 고개를 숙인 채 피식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그렇다면 인간인 나와 함께 지내보는 게 어때? 오 놀랍구나! 인간은 정말 아름답구나! 참, 찬란한 신세계로다! 세익스피어의 템페스트에 나오는 대사야. 인생은 악의와 불신, 배반으로 얼룩져 있더라도 한번쯤은 살아볼만한 가치가 있다는 내용의 극작품이지.”
“…그건 정말 허무맹랑한 이야기야. 삶이 그렇지 않다는 걸 그 세익스피어라는 자는 몰랐나 보군.”
“뭐, 그건 나도 그렇다고 생각해. 하지만 우리는 가끔 말도 안 되는 희망을 바라지. 가령 숙부의 반역으로 외딴 섬에서 마법사에게 키워지던 공주가 자신을 키워준 아버지의 마술로 나폴리 왕자와 결혼을 한다는 식의. 그 하나만으로 모든 극의 갈증이 해소되고, 사람들에게 비극이 행복한 내용으로 인식되지.”
“그 템페스트라는 게 그런 내용인가 보지?”
카렌은 잠시 곰곰이 고민해봤다. 그녀를 죽인 자신의 제자를 용서하기에는 너무나 괴롭지만 할 수 있다면 이제 이 분노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 말도 안 되는 극 속 희망, 마술이라는 걸 자신도 경험해보고 싶었다. 그리고 자신의 몸에 흐르는 마법사의 피는 이 남자가 ‘그 마술’이라 말하고 있었다.
대마법사는 신이 자신의 피조물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인 사랑을 자신이 다시 받을 수 있을까 싶었지만, 사랑의 종류는 너무 다행해 남녀의 감정 말고도 부모와 자식, 친구, 동료, 키우는 동물과의 사이에서도 생겨난다는 했던 플로리아의 말이 떠올랐다. 그 놀라운 마법은 대마법사인 자신조차 할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치료해준다 하였다. 이건 그녀가 말해주었던 것이니 분명했다. 카렌은 자신에게 템페스트를 언급한 이 자가 그 마법을 자신의 연인만큼 잘 알고 있겠거니 싶었다.
“좋아, 준호. 그럼 그 있을지도 마술을 함께 찾아보도록 하지.”
“……오케이 컷!”
정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쳤다. 연극배우처럼 한 치의 대사 실수도 없이 완벽한 무대를 만들어낸 훌륭한 두 배우를 위해서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좀 만 더하면 더 좋은 얼굴들을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연출자로서의 욕심이 생겨났다.
“한 번 더 가자.”
로이는 그런 감독의 말에 고개를 떨어뜨리며 다시 관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밥 먹고 살기가 이렇게 힘든 거였다. 누가 청소년 노동법 좀 바꿔줬으면 좋겠다. 자신이 어제 3시간밖에 못 잤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