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아이돌이다-6화 (6/104)

00006  선배라고 불러  =========================================================================

로이는 멘붕으로 갑자기 핼쑥하게 체중감량을 한 사장 겸 매니저의 어깨를 토닥여주며 자신만 믿으라고 했다. 일단 메이크업만 완벽하게 받쳐준다면 섹시 루시퍼야 식은 죽 먹기였다. 그런데 자신을 못 믿는지 주안이 계속 넋 놓고 있어 멍 때릴 시간 있으면 소품실에 가서 검은 가발이나 구해오라고 했다. 역시 이미지 변신으로 가장 쉬는 게 머리 스타일 바꾸는 거 아니겠는가. 거기다가 온통 흑칠해놓을 건데 대가리만 반짝이면 타락 천사가 아니라, 구름 위에서 바게트 빵에 크림치즈를 발라먹으며 ‘맛있어요.’하는 천사 날개를 단 로이 테일러밖에 더 되겠는가.

화장대 앞에 앉아 수정에게 최대한 스모키 메이크업을 진하게 해달라고 했다. 이제 더 이상 소년이 아니에요, 라고 말할 수 있는 성인식 버전이 돼야하니 말이다.

지윤 언니가 그때 참 많이 섹시하셨더랬지. 마치 내가 돌잔치 때 노래에 맞춰 마이크를 들고 엉덩이춤을 췄던 때 같달까. 암~, 그때 내가 최초의 세미누드를 찍었을 때이니 그와 견줄 수 있는 성인식은 90년대 최고의 섹시 뮤비였어.

그런데 정작 현직 아이돌은 자신의 메이크업 아티스트에게 매트한 피부 표현을 해줄 것을 부탁했다. 뮤직비디오 속 물에 젖은 듯 촉촉한 피부 표현을 위해 바세린을 바르고 촬영했다는 가수 지윤과는 전혀 다른 콘셉트인 것이다. 애초에 누굴 따라할 로이도 아니고 말이다.

금발의 스타는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곰곰이 뜯어보며 검은 속눈썹을 붙여 달라고 했다. 가발이 검은 색인데 속눈썹이 금색이면 이상할 테니 한 말이었다. 그런데 수정이 ‘너 원래 속눈썹 안 붙여서 없어.’라며 자기가 붙이고 있던 걸 떼어내는 게 아닌가. 속눈썹 재활용이라니 왠지 눈병에 걸릴 것만 같았다.

메이크업 아티스트는 우선 자신에게 속눈썹 붙이기 전 눈 화장을 하겠다며 눈꺼풀을 뒤집어 올렸다. 화장을 별로 안하는 편이라 처음으로 아이라인을 그리려니 눈이 매웠다. 빨갛게 흰자가 충혈되어 마치 잔뜩 열 받아 뭔가 부르짖을 듯한 인상이랄까?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나름 잘 어울렸다.

사실 연예인 화장이라는 게 거의 분장 수준이었는데, 자신은 거의 맨얼굴로 방송 출연을 하는 특이 케이스였다. 대부분 연예인들은 세 종류로 나뉘어있었다. 방송국마다 전문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있어 그들에게 화장을 받는 부류와, 미용실에서 화장과 헤어를 다 받고 오는 얼굴로 먹고 사는 비주얼계 스타, 매니저나 코디도 없이 혼자서 화장을 하는 열악한 무명으로 말이다.

방송국 직원이 해주는 화장은 말 그대로 그 역할을 맡기 위한 ‘분장술’이었고, 미용실이 해주는 화장은 전혀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변신술’이었다. 그렇지만 둘 다 진한 화장이라는 건 매한 가지였다. 화면에 잘 나오기 위해 이목구비를 확실히 하는 방송국용 메이크업은 ‘나 화장했어.’라는 게 티가 나며 미모 증진이 아니라 시청자들에게 피부가 깨끗해 보일 정도로만 피부결을 정도하고, 시대극이라면 캐릭터 설정에 맞춰 과도한 입체 화장과 눈썹 그리기 등이 들어갔다.

지금이야 워낙 자연스러운 메이크업이 대세라 예전보다 이런 점이 많이 나아졌지만, 모공 하나 안 보이게 하는 첨당동의 분장사들과 달리 방송국 메이크업 아티스트는 한꺼번에 많은 사람들을 화장해줘야 점과 실력이 좋은 분들이기는 하지만 그들이 해주는 건 변신술이 아닌 화장술이기에 HD화면에서 땀이 흐르면 화장이 지워져 피부의 숨구멍들이 다 보여지는, 리얼리티 넘치고 사람냄새 나는 화장이어서 원로 대선배님들과 패널로 나오게 된 비방송인 전문가, 혹은 소속사에서 지원을 받지 못하는 신입들, 엑스트라들이 그들에게 화장을 받았다.

반면에 미용실 쪽은 미모 증진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었다. 그들이 해주는 화장은 땀이 흐리고 물벼락을 맞아도 초근접 촬영에서도 매끄러운 아기 피부로 보일 수 있도록 피부 표현만 2시간 정도 공을 들여 전용 세안제가 없으면 지워지지도 않아, 방송에서 폼클렌징으로 화장을 지웠다는 여배우 치고 그 화장을 받지 않은 존재가 없는 걸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변신술을 두고 업계에는 참 소문들이 많았는데, 그중 한 외국 모델이 화보 촬영 때 한국에서 화장을 받고 일이 끝나 자기네 나라로 돌아갔다가 메이크업을 아무리 씻어내도 지워지지 않아 다시 찾아왔다는 재미난 일화도 있었다,

그러니 자신은 그 어떤 부류에도 속하지 않는 쪽이었다. 연예계 생활을 19년이나 했는데 미용실 친구도 없고, 방송국 사람에게 화장을 받아본 적도 없어 친한 메이크업 아티스트도 없었다. 꼬꼬마 아역들에게조차 파운데이션을 바르는 게 하는 연예계라지만, 자신은 타고나길 갓난아기 마냥 뽀얀 피부여서 오히려 화장하면 얼굴에서 흐르는 자연스러운 광이 사라져버려 최소한의 파운데이션만을 사용하고 있었다. 대부분 개인 메이크업 아티스트를 데리고 다닐 정도면 쉬는 시간마다 화장을 점검하는 떡칠 가부키 인간이었지만 자신은 화장 받을 게 없어서 함께하는 경우였다. 뭐든지 로이 테이러는 남과 다르고 특별한 것이다.

그런데 인조 속눈썹을 처음 붙여 잘 모르겠지만 원래 이렇게 눈꺼풀이 따갑고 불편한 건가 싶었다. 조금 의심스러웠지만 잘 어울리는 것 같아 그냥 꾹 참았다. 눈 화장을 매일 받는 다른 아이돌들이 정말 대견스러웠다. 자신은 이런 거 안 해도 참 예쁘게 태어났으니 신께 고마워해야할 듯싶었다.

그러다 로이는 거울 속 자신이 변해가는 모습에 이런 맛에 분장을 하거나 변신을 하는 건가 싶어 신기하게 바라봤다. 가을 낙엽색의 쉐도우로 얼굴의 바깥 윤곽을 잡아주고, 파운데이션으로 붉은 입술 색을 죽인 다음 버건디 립스틱을 발라준 수정이 자신이 해놓고도 뿌듯한지 박수를 치며 섹시하다 칭찬해줬다. 확실히 화장빨이라는 게 중요한 거였구나, 연예인 경력 19년차 아이돌은 깨달았다. 그동안 자신이 너무 팬들에게 민낯을 보인 모양이었다. 그 이전의 로이가 그냥 연예인이라면, 이 로이는 톱스타랄까.

눈을 깜빡일 때마다 보이던 푸른 눈동자가 금색 속눈썹이었을 때에는 그저 예쁘다는 수식어가 붙었다면, 검은 속눈썹 사이로 보일 때에는 그 전보다 더 색이 짙고 푸르러 보여 시베리안 허스키를 보는 것처럼 고독한 늑대의 눈 같았다. 로이는 턱을 치켜들고 자신의 얼굴을 천천히 돌려보며 완벽한 루시퍼가 된 자신에게 샐쭉 웃어보였다.

때마침 주안이 검은 가발을 가져왔다. 그런데 긴 생머리여서 뭐하는 짓이냐 따지니 전설의 고향 소품 팀에서 받아왔단다. 그것밖에 없었다는데 자신이 보기에는 ‘너도 엿 먹어봐.’ 라는 수작 같았다. 하지만 로이 테일러가 누구인가. 바로 태생부터가 섹시미 철철 넘치는 슈퍼스타였다.

로이는 빗으로 가발을 곱게 정돈하고 뒤집어썼다. 여기서 자신이 여자라는 걸 들키지 않으려면 남자다운 포즈와 눈빛을 해줘야할 텐데, 이상하게도 긴 생머리는 청순한 여자의 상징이건만 이건 그냥 머리가 긴 섹시한 남자였다.

물론 자신이야 본래 성별을 들켜 여자 아이돌이 되고 싶으니, 이참에 여자 아이돌마냥 새끈하게 복근 공개까지 때리고 백댄서들과 광란의 춤을 추면 다들 자신이 ‘긴 생머리 그녀.’라는 걸 알아보지 않을까 싶었다. 크크크. 사악한 웃음을 흘리며 김 사장을 보자 그가 하얗게 질려 ‘너 정말 악마 같아.’란다. 천사 로이가 악마 루시퍼로 변신을 했다는 뜻이니 좋은 의미였다.

아이돌은 오만하게 웃으며 소파에 앉아 테이블 위로 긴 다리를 올려놓고 ‘만 백성들은 들어라. 이제부터 이 구역의 미친년은 나다.’라는 선포를 내렸는데 주안과 수정이 마치 ‘원래 미친 너였어.’라는 시선을 보내 식은 떡볶이 몇 점 집어먹었다. 아까 운동을 너무 과도하게 했더니 식욕이 마구 마구 솟아나는 것 같았다. 로이는 떡볶이를 흡입하며 민호를 기다렸다. 그런데 이 놈의 스타일리스트가 거북이를 타고 옷을 사러갔는지 생방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깜깜무소식이었다.

“루시퍼 폐하, 옷 입어.”

로이는 매니저의 옷 갈아입으라는 소리에 조그만 더 기다려보자고 했다. 지금 눈을 시꺼멓게 칠해놨는데 하얀 튜닉을 입고 청순미를 뽐낼 수는 없는 거니 말이다. 거기다 그랬다가는 아무리 자신이라도 날개를 다 찢어놔 거지 천사를 모면하기 쉽지 않을 듯했다.

검은 루시퍼는 나무젓가락을 쪽쪽 빨며 문을 바라봤다. 한 오 분만 더 기다려보자 하니 사장이 ‘내가 로이 테일러 가면 쓰고 무대 올라갈 테니깐 다 때려 쳐.’라고 소리를 질러 ‘그래주면 고맙고.’라 답했는데, 주안이 찍소리도 못했다. 역시 슈퍼스타는 대체 불가능한 존재인 것이다.

그때, 벌컥 문이 열리고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나오는 가오나시 마냥 검은 물체가 기어들어왔는데 민호였다. 그는 옷 더미를 자신에게 던지고 곧장 휴지통을 붙들고 시원하게 토했다. 더러운 놈.

로이는 바닥에 엎어져 골골거리는 스타일리스트를 차마 손으로 건드릴 수 없어 발로 툭툭 차며 어떤 거 입으냐 물었다. 아주 마구잡이로 집어 와서 상의만 세벌이었다. 거기다 신발도 5켤레에 핫팬츠가 3개, 망사 스타킹은 10개나 되고 자신이 부탁했던 해골 목걸이는 물론 팔지, 개목걸이까지 아주 다양했다.

민호는 좀비 마냥 일어나 굽이 18cm나 되는 검은색 애나멜 롱부츠를 골라줬는데 무릎까지 올라오는 거라 마조히스트를 조련시켜주는 주인님을 떠올리게 하는 신발이었다. 검은 망사 스타킹은 자신이 말한 대로 구멍이 큰 걸로 줬고, 핫팬츠 위에 얇은 쉬폰 소재의 검은 롱치마를 입으라 했는데 치마가 4등분이 되어 걸을 때마다 다리가 드러나게 되는 디자인이라 이걸 입으면 열심히 무대 위에서 달려야할 것 같았다. 상의는 하의에 맞춰 몸통부분이 검은 색 쉬폰이었고 팔 부분은 가죽이라 너무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인상을 줘 개인적으로도 입고 싶은 셔츠였다.

로이는 집에서 입고 온 티셔츠와 청바지를 홀라당 벗고 옷을 갈아입었다. 어차피 대기실에는 게이들밖에 없고, 수정이야 같은 여자이니 말이다. 어째 슬픈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귀찮게 탈의실을 들락거리는 걸 안 해도 되니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는가.

의상을 갖춰 입자 스타일리스트가 검은 가죽으로 된 개목걸이를 목에 묶어주고 사슬이 무거운 해골 목걸이를 길이와 굵기가 각각 다르게 3개나 걸어줬다. 팔찌는 가죽 소재로 얇은 끈들을 주렁주렁 묶어놓은 거라 이건 팔이 아니라 가죽 나무가 된 기분이었다.

그런데 그러고 나니 거울에 완전 딴 사람이 있었다. 자신의 승냥이들이 못 알아볼까봐 조금 걱정이 되기도 했다. 로이는 이제 망했다며 울고 있는 사장을 향해 건방진 천사라는 콘셉트는 무조건 지킬 테니 닥치라고 했다. 그가 바라던 건 아버지에게 반항하는 아들 캐릭터였지만, 그런 거나 좋아하는 사장 때문에 자신을 제외한 Reve의 식구들이 다 망하는 거였다. 정말 이런 구린 안목으로 어떻게 연예기획사를 차렸는지 참 한심스러웠다.

로이는 방송국 스텝이 생방 준비하라는 말에 대기실을 나와 무대 밑에서 대기했다. 다른 가수들은 자기 차례가 오기 한참 전부터 줄을 서서 기다려야하지만, 그런 거는 대한민국 역사상 유일무이한 최고 아이돌인 자신에게는 해당사항 없는 거였다.

“야, 로이 또 늦나보다.”

“놔둬. 걔가 그런 거 한두 번이냐.”

백댄서들이 시안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 자신의 모습을 알아보지 못해 ‘콘셉트 바꿨어. 섹시 천사야. 섹스를 좋아해 아빠한테 졸라 맞고 쫓겨났어. 그러고 너희는 나 꼬시는 악마들이고. 열라 끈적거리게 나 좀 후려봐. 그럼 예뻐해주지.’라 허스키한 목소리로 읊조려줬는데, 다들 이 미친 미모에 뻑이 갔는지 여전히 제정신을 못 차려 ‘오빠앙~ 로이를 위해 무대 위에서 열심히 해주기야. 아잉.’이라 콧소리를 내주고 후드를 둘러썼다. 이제 시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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