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아이돌이다-5화 (5/104)

00005  선배라고 불러  =========================================================================

로이의 살짝 내리깐 금빛 속눈썹은 움직일 때마다 눈 밑 애교살에 긴 그림자가 생길 만큼 숱이 풍성하고, 그 우아한 날갯짓 속에 숨겨진 두 개의 사파이어가 치켜뜬 눈꺼풀 사이로 들어날 때면 무척이나 투명하고 정교하다는 게 신의 한수였다. 형광등 불빛에 연한 녹빛으로까지 보이는 그녀의 푸른 눈동자는 한국인과 달리 홍채가 금색이라 그 자체가 화려한 장식구였다. 거기다 의도하는 건지는 몰라도 가만히 있어도 시선이 가는 그녀의 가느다란 하얀 목덜미는 매끄러운 곡선으로 저도 모르게 한번 만져보고 싶은 인상을 주었다.

그저 평범한 면 티셔츠를 입었을 뿐인데 금발의 스타는 빛이 났다. 로이는 이것이 진짜 아이돌이구나 싶은 존재였다. 그녀는 굵은 웨이브진 자신의 금발을 쓸어 넘기는 습관이 있었다. 자신의 하얀 이마를 들어낸 채 오만한 눈빛으로 다른 사람을 깔보는 건 로이 테일러의 전매특허였다. 그러다 종종 그녀는 붉은 혀를 내밀고 아랫입술을 핥는 위험한 버전이 등장하기도 했는데, 그건 자신의 스타가 엿 먹으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었다. 모두의 앞에서 상대방을 발기시키기 위해서 말이다.

금발의 아름다운 나르키소스는 자신이 얼마나 위험할 정도로 매혹적인지 잘 알고 있었고, 손짓 하나만으로 대중들을 홀려내는 타고난 끼를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가 자신을 아무리 잔인하게 괴롭혀도 반항할 권리는 로이가 결정해주는 거였다.

주안은 로이 테일러가 Reve에 있어야하는 이유 100가지에 대한 저술을 책임지겠다는 싸인을 하라며 건네는 펜을 받아들였다.

“왜 내가 거기 싸인 하냐.”

“싫음 오늘 은….”

“알았어. 알았다고.”

지갑을 찾으러 왔다가 졸지에 자신의 스타와 계약을 하게 된 소속사 사장은 그것이 어떻게 자신의 발목을 잡을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녀의 성질머리를 생각해 순순히 지장까지 찍었다. 그리고 다시 매니저가 된 주안은 눈물을 머금고 방송국 앞 포장마차에서 떡볶이를 사왔는데, 로이가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며 전혀 먹을 생각을 안 해 오만한 왕자님께 공손히 떡 조공을 올렸다.

“헐~, 김 사장. 나 이제 그만 먹을래.”

“왜? 지금 이거 한입 먹자고 나 심부름 시킨 거야?”

“왜 그래. 까칠하게. 오늘 생리해?”

이걸 누가 여자라 볼까 싶었다. 매니저는 그 사실이 너무나 다행스러웠으나 가끔 자신마저 로이가 여자라는 걸 깜빡 잊어버리곤 해 여간 곤란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액정을 내밀었다. 그러나 포털 사이트의 창에서 뭘 보라는 건지 주안을 알 수 없었다.

“봐! 여기, 여기 내가 오늘 컴백하는데 실시간 검색어 2위가 김수혁이야. 오늘 그 놈이 팬싸인회 해서 내가 발렸다고.”

“………로이야. 1위가 너 컴백일이잖아. 그럼 됐지 뭘 바래.”

“장난해? 당근 1등도 내꺼, 2등도 내꺼, 3등도 내꺼, 4등도 내꺼, 다 내꺼야 하는 거 아닌가. 그딴 식으로 구니깐 내가 자꾸 김수혁한테 CF 뺏기는 거 아니야. 사장이면 똑바로 협상을 해서 재계약을 따와야지. 어째 족족 뺏겨.”

“무슨 CF를 빼앗겨. 그냥 너 계약기간 끝나서 그 다음 모델로 김수혁 쓰는 것뿐인데. 요즘 그 놈이 얼마나 잘나가는 줄 알아? 그리고 네가 재계약 못한 제품들은 다 10년 동안 광고 했던 거잖아. 너무 오래해서 회사에서 이미지 변신으로 하는 것 갖고 곡해하지 마.”

“그게 빼앗기는 거거든. 2등이야. 무려 2등이나 했다고. 사장 말이 맞았어. 난 영원한 탑이 아니었던 거야.”

그러면서 로이는 벌떡 일어나 갑자기 팔 굽혀펴기를 하고, 윗몸일으키기를 했다. 질투의 화신은 미친 듯이 운동을 하며 근육을 펌핑시켰다. 덕분에 메이크업을 해야 하는 수정은 몸에 열이 나면 화장 안 먹는다고 그녀 옆에 쪼그리고 앉아 부채질을 해댔다. 그렇게 가수는 무대에 서기 전 미친 듯이 운동을 하고 소파에 가 대자로 누워버렸다. 배를 만져보자 긴장이 된 복근이 단단해진 것 같았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배를 까봤고, 허리 자체가 얇기는 하지만 일자 복근이 완벽하게 자리해 흡족하게 웃었다. 살짝 청바지를 밑으로 내리자 치골 라인이 죽여줬다.

“나 오늘 제복을 입겠어. 역시 섹시 판타지는 유니폼 아니겠어? 그럼 나 조낸 섹시하겠지?”

“로이야, 너 타락천사 콘셉트라 했잖아. 튜닉이 얼마나 섹시한지 알아? 약간 헐렁하게 목 부분 끈 푸르고 검은색 에나멜 바지 입으면 완전 게임 끝이야. 거기다가 천사 날개 제작하는데 돈이 얼마나 많이 들었는데 갑자기 제복이야. 노래가 루시퍼잖아. 루시퍼. 너 타락천사가 제복입는 거 봤어?”

매니저의 말에 잠시 생각해보니 루시퍼가 제복을 입는 건 영 아닌 것 같았다. 그런데 컴백을 위해 열심히 만든 자신의 복근이 너무 아까웠다. 천이 얇아 몸태를 따라 흘러내리기는 하얀 튜닉은 피팅 때 예뻐 보인다 싶었지만 너무 임팩트가 작았다. 요즘 다른 여자 아이돌들은 배꼽티를 입고 허리 돌리기를 해대고, 남자 아이돌들은 민소매만 입고 마지막에 길게 찢어내는데 자신만 꽁꽁 싸매면 뭐란 말인가.

그래서 로이는 바지라도 찢자 싶어 메이크업 아티스트에게 눈썹 칼을 얻어 에나멜 천을 그어냈는데 생각과 달리 청바지처럼 자연스러운 찢김이 아닌 단점이 깔끔하게 잘려가나 민호의 눈치를 보며 조용히 바지를 돌려주었다.

“……로이, 이거 협찬인데 죽고 싶어? 의상 반납할 때 하자있으면 내가 다 물어줘야 한단 말이야. 그냥 네 이름 대고 쌩깔까? 그리고 로이 테일러가 디자이너 테러가 했다고 욕 좀 먹어볼래?”

“미안. 그 바지는 내가 살게.”

자기 딴에는 잘해본다고 한 거였지만 자신의 스타일리스트는 그럼 바지 뭐 입고 올라갈 거냐며 다그쳤다. 그냥 가까운 매장에서 바지 하나 사와 입고 가겠다고 하니, 그럴 거면 뭐 하러 한 달 전부터 치수재고 피팅해서 의상 맞췄냐며 길길이 난리를 피워댔다. 로이는 끄응, 앓는 소리를 내며 그럼 핫팬츠로 만들어버리자고 했다. 이양 찢어진 거 솜씨를 발휘해 예쁘게 잘라보라고 민호에게 말하니, 그가 ‘한국 남자가 핫팬츠 입고 돌아다니는 거 봤어? 게이도 아니고 그게 뭐야!’라며 화를 냈지만 손은 부지런히 놀려 말과 다르게 햇팬츠를 만들어냈다.

그런데 바지가 짧아지니 전에 골라놓은 정장구두가 전혀 안 어울렸다. 그런데 때마침, 로이의 눈에 유일하게 하이힐을 신고 있는 키 작은 수정이 가보시를 잔뜩 넣은 신발 위에서 공중으로 14cm 떠있는 게 보였다. 마침 검은색이라 핫팬츠와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자신의 의견을 들은 사장이 미친 짓이라며 다른 여벌 의상이 있으니 그거 입으라고 했다. 하지만 고집이 쎈 스타는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촉이 왔다.

“타락천사는 그대로 가. 그런데 신의 사랑을 의심해 추락한 고독하고 외로운 천사가 아니라 섹스를 알게 된 루시퍼야. 그는 쾌락에 미쳐 지옥에 떨어졌지.”

“민호, 미안한데 생방까지 시간 아직 많이 남았으니 열나게 뛰어 다시 협찬 받아와. 천사이니 새부리 모양의 주세페 자노티에서 새로 나온 킬힐. 그리고 너무 그물이 촘촘하지 않은 망사 스타킹, 가죽소재의 튜닉은 다른 종류의 소재도 같이 있는 걸로 무거워 보이지 않도록 고르고, 악세사리는 볼드한 해골 목걸이가 좋겠어. 모든 색은 검게 통일할 거니 알아서 잘 구해와. 바지는 네가 만들어준 거 입을 게.”

“미쳤어? 그걸 지금 날더러 그것들을 다 어디서 구해오라고! 1시간밖에 안 남았단 말이야!”

로이는 자신의 명령에 반항하는 민호를 보며 씨익 웃었다.

“보험이 있잖아. 너 방송 전에 안 돌아오면 여벌로 가져온 거 입고 나갈게. 코디해주고 가.”

스타일리스트는 가수의 말에 소속사 사장을 바라봤다. 그러자 그가 한숨을 내쉬며 우선 로이가 원하는 걸 해주라 허락을 내렸다. 민호는 씨발, 씨발하며 천사 모형에 깃털이 필요 없다며 뜯어내는 자신의 스타를 노려봤다. 내가 쟤 때문에 진짜 미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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