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4 선배라고 불러 =========================================================================
대기실에 들어간 로이는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 안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메이크업 아티스트의 허리를 꼭 껴안으며 그녀의 배에 얼굴을 비볐다.
“누나~”
“왜 그래 로이. 무슨 일 있어?”
수정이 자신의 어리광에 우쭈쭈, 거리며 얼러줬다. 그러면 뭐하나. 이제 자신은 거물이 아니라는 데. 로이는 사장이 방금 전 자신에게 한 말을 모두 그의 누나에게 일러바치기로 했다.
“김사장이 나더러 완전 구리데. 늙어서 이제 더 이상 사골 우릴 것도 없는 뒷방늙은이라 짜지래. 한물 간 주제에 개기지 말고 자기 말에 완전 복종하래.”
“야! 로이 테일러! 내가 언제 그렇게 말했어! 자꾸 고따구로 주둥이 놀리래?”
로이는 길길이 날뛰는 주안을 보며 울먹거리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아주 재미있어서 죽을 것 같았다.
“흑. 괜찮아. 나 이제 필요 없는 쓰레기인걸. 앞으로 나 없이 Reve 잘 꾸려봐. 사장 빠빠이. 나 이제 은퇴야.”
“………야아~. 왜 그래. 로이야. 형아가 실수 좀 했어. 너 오늘 컴백인데 무슨 은퇴야. 응? 형아가 잘못 했어. 나쁜 놈. 나쁜 놈. 이런 놈을 맞아도 싸.”
로이는 주먹으로 자학하는 매니저를 보며 이제 리허설이 얼마 안 남아 그만 울기로 했다. 카메라에서 금붕어 눈알로 나올 생각은 쥐알 만큼도 없으니 말이다. 금발의 아이돌은 자신이 Reve를 떠나면 안 되는 이유를 지금 당장 100가지 말해보면 은퇴를 생각해보겠노라 했다. 그러자 주안이 어떻게 100개나 말하냐고 징징거려 ‘그럼 내가 있을 이유도 없는 소속사에 계속 있어야 하나.’라며 언제 울었냐는 듯 고개를 빳빳이 들고 의자에 몸을 깊게 파묻은 채 긴 다리를 꼬았다. 삐딱하게 턱을 치켜세운 로이는 손거울로 얼굴을 체크하고, 사장을 바라봤다.
“말해봐. 들어주지.”
주안은 오만한 스타의 명령에 자신의 누나에게 도움을 청했다. 하지만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나 몰라라 했다. 누가 월급을 주는데 이딴 식이란 말인가. 그는 더듬더듬 가내수공업 소속사 Reve에 최특급 아이돌 로이가 있어야하는 이유 100가지에 대해 프레젠테이션하기 시작했다.
“하나! Reve는 꿈, 환상, 동경의 뜻입니다. 로이는 십대들의 신으로서 그들에게 연예인에 대한 환상을 줍니다. 둘! 로이는 너무 너무 멋있어서 거지였던 정주안을 거대 소속사 사장으로 만들어준 고마운 은인입니다. 셋! 로이는 가내수공업 소속사의 유일한 스타라 로이가 없으면 밥만 축내는 다른 연예인들 때문에 소속사는 망합니다. 넷! 로이가 없으면 사장은 테이트 비용을 벌지 못합니다. 다섯! 그럼 어리고 예쁘고 섹시한 민호는 바람을 피울 것입니다. 여섯! 민호는 호텔 스위트룸이 아니면 같이 안 자서 로이가 없으면 사장은 사리를 키워야 합니다. 일곱!”
“닥쳐. 그러니깐 내가 너희들 스위트룸 비용 데는 사람이라 이거지?”
로이의 말에 매니저는 하얗게 질려 아니라고 손사래 쳤다. 그러면 뭐하나. 이미 열 받은 그녀였다. 그래서 리허설 하겠노라 자리에서 일어나 그냥 나와 버렸는데……, 사실 로이는 그다지 화나있지 않았다. 그저 조금 사장을 골려주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속이려면 완벽하게 속여야 한다고 아이돌 겸 배우는 완벽한 설정 연기로 무대 위에서 설렁설렁 춤을 추고 제 동선만 확인해 음악챔프 김택준 PD에게 한소리 먹었다. 그러나 그딴 거 신경 쓸 로이도 아닌 지라 깔끔하게 무시하고 ‘생방 때 잘하면 되지 뭘 빡빡하게 굴어요.’라는 시건방을 떨어 촬영장 분위기를 싸하게 만들었다.
인기 가수의 컴백이기에 잔뜩 신경이 곤두서 콘셉트와 세트 제작을 한 택준은 ‘그런 썩어빠진 정신 상태면 때려 쳐.’라는 강수를 들었는데, 새파랗게 어린 것이 눈을 똑바로 뜨고 ‘내가 꺼지면 PD님이 곤란해질 텐데 진짜 꺼져줘요?’라고 말해 음악방송 경력 10년 만에 아이돌에게 눌리고 말았다.
이 놈이 잘나가는 게 비록 한순간이라 할지라도, 19년째 잘나가고 있어 로이가 방송에 안 나오겠다면 국장이 달려올 확률이 100%였다. 그는 살아 움직이는 시청률이었다. 이미 로이 테일러의 최초 데뷔 무대라는 타이틀로 방송 전후로 CF가 완판 되어 방송국 수입이 6억 7천만 원이었다. 택준은 PD가 된 이례 처음으로 기를 죽이고 ‘그럼 생방 때는 잘해.’라며 인기 아이돌의 어깨를 토닥여줬다. 더럽고 치사해도 방송계란 그런 거였다. 잘 나가면 장땡이었다.
로이는 어차피 그럴 생각이었음으로 눈꼬리를 접고 알겠노라 사르르 웃어보였다. 그 모습에 택준은 어린놈이 참 야시시하게 끼를 부리는 구나 싶어 얘가 소속사 사장이 그렇게 끼고 돈다고 하더니만 정말 뒷구멍을 대주고 있나 싶었다. 그리고 그 사실이 그다지 이상하지도 않은 게 연예계라는 게 오로지 성공하고 싶다는 열망으로 어린 얘들이 성접대를 나가는 경우가 종종 있는 진흙바닥이었다.
그런데 또 그러기에는 그가 너무 톱이라는 문제였다. 겨우 소속사 사장과 놀아나기에는 스케일이 안 맞는다는 거다. 이 정도 급이면 나라님 전용인데, 로이는 스폰서도 없이 너무 어려서부터 저 혼자 큰 스타였다. 듣도 보도 못한 소속사를 굴지의 회사 키워낸 게 바로 이 꼬맹이이니 말이다.
PD는 절대 고개 숙이지 않는 가수에게 단도직입적으로 ‘야, 너 사장이랑 무슨 사이냐.’라고 물었다. 그러자 금발의 소년은 배시시 웃으며 ‘내 장난감이지.’라고 해 더욱 오리무중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과연 아역스타가 무명의 소속사 사장을 선택해 그를 키워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괜한 궁금증이었지만, 대화를 나눠보니 생각보다 그가 싸가지 없는 건 아닌 것 같다는 인상을 받은 베테랑 스텝은 가수에게 다시 한 번 왜 그랬냐 물으려했다가 무대 위로 뛰어온 그의 소속사 사장이 큰 소리로 선서를 외치는 소리에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스폰의 개념이 아니라 둘이 사귀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나, 로이는 최고의 스타이다. 둘, 로이는 최고의 아이돌이다. 셋, 로이는 최고의 연기자이다. 넷, 로이는 최고의 미소년이다. 다섯, 로이는 편식이 심해서 밥 차려야할 사람이 필요하다. 여섯, 로이는 청소를 해줄 사람이 필요하다. …………아흔 일곱, 로이는 걸어 다니는 기업이라 보디가드가 필요하다. 아흔 여덟, 로이는 미성년자라 운전을 못해 기사가 필요하다. 아흔 아홉, 로이는 잠이 많아 깨워줄 자명종 인간이 필요하다. 온, 로이는 어려운 시절의 김주안을 구원해줬음으로 김주안이 은혜를 갚을 때까지 Reve에 있어야 한다. 이로서 로이 테일러가 Reve에 있어야하는 이유 100가지였습니다.”
로이는 피식 웃으며 자신의 루머 양산에 힘을 써준 사장을 행해 그딴 거 대기실에서나 읊지 왜 무대까지 기어 나와 지랄이냐 가운데 손가락을 내밀어줬다.
“그 이유들이 썩 마음에 들지 않기는 한데 마지막 건 좋군. 김 사장, 애썼어.”
스타의 오만해 말투에 주안은 그제야 안심하고 손에 힘이 빠져 급하게 휘갈겨 적은 선서문을 놓치고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자 긴 다리로 성큼 성큼 걸어 무대 위로 올라온 그녀가 발로 툭툭 치며 배고프니 떡볶이를 사오라고 말 해 벌떡 일어나 문을 향해 달려나갔다. 그러다 매니저는 자신이 바보 같이 지갑도 안 챙기고 나왔다는 사실에 다시 대기실로 돌아갔는데, 그녀가 자신이 적은 100가지 이유를 읽고 있어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사장은 콩닥콩닥 뛰는 가슴을 주먹으로 꾹 누르고 나는 게이인데 왜 로이를 보고 떨리는 걸까 했다가 ‘아…, 또 여자라는 걸 까먹었다.’하며 벌컥 문을 열고 그 완벽한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봤는데, 그 푸른 눈을 보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새빨간 입술을 한쪽만 끌어올리고 자신을 비웃는 이 아이돌을 누가 여자로 보겠는가. 그러기에 로이 테일러는 너무나 완벽한 남자 아이돌이었다. 그것도 어린 놈 주제에 무지무지 섹시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