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화 〉엘프의 마을로 떠납니다.
“이게 무슨 짓이지......”
결국 하이엘프의 성에서 묵게 된 용사는 자신에게 배정받은 방 침대에 앉아 한숨을 쉬며 지금 상황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보았다.
아무래도 엘프와 성녀님에게 진지하게 상식을 가르칠 필요가 있다.
“..........”
머릿속으로 그런 생각을 한 용사는 곰곰이 다시 생각해보곤 자신의 생각을 자신이 스스로 반박하였다.
아니 그게 됐으면 진작에 하고도 남았지.....
애초에 엘프와 성녀는 자신의 말이 제대로 먹히지 않는다.
아니, 그렇다고 본성 자체가 나쁘고 삐뚤어져 용사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었으나 성녀 같은 경우 여신과 관련된 일이면 도무지 이야기를 듣지 않는데다 엘프 역시 평소엔 온순하나 편이나 의외로 고집이 있어 말을 제대로 듣지 않을 때가 있다.
“.........”
그런데 생각해보니 다들 딱히 내 말을 제대로 안 듣지 않아?
엘프와 성녀에 대해 생각하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용사는 다른 일행들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보았다.
마왕 같은 경우는 용사가 조언이나 훈계 같은 걸 할 입장이 아니라 우선 논외라 하지만...
게다가 따지고 보면 마왕이 일행 중 가장 정상인에 속한다. 물론 가끔 용사가 다른 여자와 달라붙어 있거나 할 때 폭주하는 경우가 있으나 그렇다 해도 굳이 행동에 많이 태클을 걸 곳은 없다.
그리고 공주는.... 우선 결혼타령부터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물론 처음에는 공주가 마왕에게 납치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공주를 어떻게든 구해야 하는 사명감에 이후 공주와 결혼하게 된다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였으나 그 납치가 사실 용사와 결혼하기 위해서 라는 걸 알고 나서는 일단 피할 수 있으면 최대한 피하고 싶다.
물론 공주가 용사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은 공주의 돌발적인 행동들과 평소의 공주의 대시로 잘 알겠으나 아직 용사는 제대로 마음의 결정을 내리지 못하였다... 게다가 공주와 결혼하기 위해서는 공주를 납치한 마왕이 아닌 용사를 납치한 마왕을 쓰러뜨린 뒤 마왕성에서 나와 공주와 결혼을 해야 한다.
확실히 이제 슬슬 마왕성에서 나오고 싶긴 하지만 그렇다고 마왕 레비아탄을 쓰러뜨리고 싶은 생각은 없다. 이제까지 함께 있으며 정이 들기도 하였고..... 사실, 용사가 전력을 낸다하여도 마왕을 쓰러뜨릴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기에 가능성도 희박하다. 그렇기에 용사는 공주에게 자꾸만 그 일에서 회피하려 하나 공주가 전혀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은 채 일방통행이다.
또 법사. 사실 법사 역시 그렇게까지 문제는 없지만... 그래도 평소 무표정에서 나오는 생각을 알 수 없는 것과 갑작스럽게 나타나는 돌발행동들은 자제해주었으면 좋겠다. 특히 갑작스럽게 자신에게 매달린다거나 달라붙는다거나 하는 것들.
어리광 부리는 것은 이해해줄 수 있으나 이상하게 유독 식사를 준비할 때 자신에게 달라붙는 것은 좀 자제해줬으면 하는 부탁이 있다. 게다가 불만이 있을 때는 곧장 행동으로 보여주려 마법을 사용하지 말고 이야기를 제대로 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사실 법사가 진심과 전력으로 마법을 사용한다면 용사가 제대로 막을 수 있을지 의문이라 그런 심장 떨리는 일은 자제해 줬으면 좋겠다. 물론 용사가 이야기해봤자 제대로 듣지 않겠지만......
마지막으로 흑룡. 흑룡은 애초에 용사 본인이 주인인데 용사의 말에 따를 의지가 없다. 아무리 본인이 드래곤이고 마왕들과 아는 사이고 하나 그래도 성검의 주인이고 계약까지 했으면 용사 자신의 말을 제발 좀 들어줬으면 한다.
특히 요즘은 애초에 말을 제대로 듣지 않을 것을 전제로 하고 튀어나오면 당장 다시 봉인해버리는 실정이니 흑룡과의 관계가 어떠한지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하아... 뭔가 카리스마를 길러야 하는 건가?”
그러나 애초에 어떻게 해야 카리스마를 기를 수 있는지 평생을 그렇게 살아오지 않은 용사는 알 수 없었다.
평소 카리스마 넘치는 리더이기 보단 좋은 사람, 착한 사람, 상냥한 사람이라는 이미지로 친절을 베풀며 남을 배려하면서도 딱히 누군가의 위에 서 있거나 명령을 내려 본 적 없는 용사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하이엘프가 왕족에 엘프의 왕이기도 하니 그 분은 이런 것을 잘 알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한 용사는 잠시 하이엘프를 만나러 갈까 생각했으나 하이엘프의 옆에 성녀가 찰싹 달라붙어 있는 것을 생각하고는 그만두기로 하였다.
그렇다면 뭔가 카리스마를 가진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그런 고민을 하던 와중 용사는 한 존재를 떠올리곤 당장 그 존재를 만나러갔다.
“마왕님!!”
“꺄앗! 요, 용사?! 가, 갑자기 무슨 일이더냐?”
용사가 마왕의 방에 문을 두드리고 들어가자 마왕은 방금 샤워를 마친 듯 머리에 물기가 아직 촉촉하게 맺힌 채 조금 더운 듯 가슴을 살짝 풀어헤친 상태였다.
“아, 아니... 그.. 조금 물어볼 것이 있어 찾아왔는데.. 바쁘신 것 같으니 이만 나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마왕의 모습에 조금 붉어진 얼굴의 용사가 말하며 방에서 나가기 위해 뒤로 돌자 마왕은 그런 용사의 손을 붙잡으며 용사가 나가는 것을 저지하였다.
“마, 마왕님?”
“벼, 별로 바쁘지 않으니 괜찮다... 그리고 그.. 오랜만에 말인데 머리를 말리고 빗어주지 않겠느냐..?”
“에....?”
용사에게 제안하는 마왕역시 쑥스러운지 고개를 숙인 채 조심스럽게 용사에게 말하였고 그런 마왕의 제안에 용사가 놀라기도 잠시, 어느새 놀란 용사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분위기에 휩쓸린 채 마왕의 머리를 말려준 뒤 마왕의 길고 부드러운 흑발을 머리빗으로 쓸어 넘기고 있었다.
갑자기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에 당황하면서도 용사는 부드럽고 그리고 섬세하게 마왕의 머리를 빗어주었고 마왕은 그런 용사의 빗질을 받으며 평온한 듯 의자에 기대어 앉았다.
“기억나느냐 용사..?”
“네...? 뭐가 말씀이십니까?”
“용사가 마왕성에 온 뒤 가장 처음으로 내게 해 준일 말이다.”
“아. 물론이죠..”
용사가 마왕에게 납치된 후 무기를 빼앗긴 채 자신의 가정부가 되라는 마왕의 제안에 상황파악과 수긍에 빠른 용사는 어쩔 수 없이 마왕의 말에 따르게 되었고 그날 가장 처음으로 마왕에게 명령받은 일이 머리 감겨주기와 이렇게 머리를 말려 빗겨주는 것이었다.
물론 지금껏 여자의 머리를 감겨주거나 말려 빗겨주는 일이 없던 용사였기에 서툰 솜씨로 인해 마왕에게 갖은 구박과 매도를 받았으나 어느새 이렇게 능숙하고 부드럽게 마왕의 머리를 손질할 수 있는 경지에 올랐다.
물론 최근에는 여러 일들이 있었고 일행도 늘어 마왕의 머리를 빗어주지 못했으나 그래도 마왕에게 구박받던 몸이 기억하는 지 용사는 능숙하게 마왕의 머리를 빗고 있었다.
“처음에는 구박도 많이 받았었죠.”
“그건 용사가 나빴다. 아무리 서툴다고 해도 머리를 그렇게 아무렇게나 쥐어뜯어버리면 어떤 사람의 입에서든 볼멘소리가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익숙해졌잖습니까.”
“전부 내 덕분이지.”
“........”
“........”
그런 추억의 이야기를 나누다 이어진 기분 좋은 침묵 속 용사가 마왕의 머리를 빗질하자 마왕은 문득 생각이 난 듯 침묵을 깨며 용사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고 보니 용사. 갑자기 내 방에는 무슨 일이더냐.”
“아.. 그러고 보니 그게... 좀 묻고 싶은 게 있어서 말이죠.”
“무엇을 말이냐?”
“그... 어떻게 하면 카리스마가 느는 것인지...”
“카리스마....?”
“네. 오늘 생각해봤는데 아무래도 제가 카리스마가 별로 없어서 오늘 성녀와 엘프가 떼를 쓰는걸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나 싶어서....”
“너무 마음에 둘 필요 없다. 게다가 그런 것이라면 우리 모두 엘프와 성녀의 억지를 막지 못했으니 우리 모두의 책임이 있는 것이지. 비단 용사의 책임만이 아니야.”
용사의 말에 상냥하게 토닥여주는 말투로 위로하는 마왕의 말에 용사는 마음이 포근해지는 것을 느끼며 마왕의 머리를 계속해서 빗질하였다.
“그렇지만 그래도 카리스마가 조금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런가.. 그렇게도 갖고 싶은가? 용사.”
“본인에게 없는 것은 가지고 싶은 법이니까요.”
“용사는 그대로가 가장 좋다고 생각하는데........! 그래. 그렇다면 용사에게 좋은 훈련이 있는데 어디 한 번 받아보겠나?”
“있는 겁니까?”
용사의 말에 마왕은 신경 쓰지 않는다는 태도로 이야기하다 무언가 뇌리를 스친 듯 조용히 용사에게 제안하였고 용사는 그런 마왕의 제안을 덥석 물었다.
“그래.. 좋은 훈련이 있다.. 대신, 내가 시키는 것을 잘 해낼 수 있겠나..?”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그, 그래... 그렇다면 시작하도록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