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미리는 살짝 웃어 보이며 둘을 바라봤다.
둘은 서먹해 보였지만 마음만은 또 다른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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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raM의 의상은 에릭의 새로운 아이디어를 거쳐 한복의 느낌을 물씬 머금었다.
전형적인 명주 원단이 아닌 가죽, 면, 린넨, 폴리에스터, 울 같은 일상에 흔히 쓰이는 재료와 코튼, 실큰, 플리츠, 트위드도 사용되며 여러 방향은 제시했다.
그리고 여러 가지 패션 소품을 이용해 한복의 자유도를 알리고 있었다.
예를 들자면 비니[Beanie]와 트래퍼[Trapper], 필박스[Pillbox] 같은 모자를 포인트로 주어 전통과 트렌드를 합치기도 했고 귀금속과 전자시계를 부착해 과거와 현재를 공존하게 했다.
“에릭, 대단하네….”
무대를 바라보는 정희정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였다.
“저도 딱 그런 반응이었어요. 한복 치마에 면 폴라 그리고 가죽조끼, 시스루 위에 다시 한번 면 조각을 붙이질 않나. 더 놀라운 건 저 액세서리들 너무 잘 어울리지 않나요? 하나 잘못하면 엄청 어색해 보일 텐데. 전혀 그런 게 없어요.”
“그러게요. 정말 대단하네요.”
에릭이 만든 디자인은 틀을 벗어난 한복이지만 그렇다고 하여 한복이 아닌 디자인은 만들지 않았다.
누가 보아도 한복이라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었기에 그의 능력이 더 빛을 발했다.
“마지막 모델이에요.”
이제 메인 의상 하나만을 남겨 놓은 상태.
무대의 열기는 더욱더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 * *
대회 시작 전.
신지혜와 여러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의료용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여보… 진혁이 깨어나겠지.”
“당연하고말고 나도 깨어났는데. 진혁이는 나보다 강한 아이야. 그러니 걱정하지 말아.”
차중만은 아내를 달래며 진혁이를 살짝 내려다보았다.
순간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릴 거 같았지만 입술을 살짝 깨물며 참아냈다.
현재로서 자신마저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한국에 도착하면 당신은 집에 가서 쉬고 있어. 진혁이는 내가 볼 테니까.”
“무슨 소리예요. 내가 옆에 있을 거야. 당신은 회사에도 들어가 봐야 할 거 아니야.”
“회사가 문제야.”
“당신은 가서 일해야지. 우리 아들이 힘들게 만들어놓은 회사인데.”
“알겠어. 그러면 지금이라도 좀 쉬어.”
차중만은 진혁을 다시 내려다보며 한숨을 내뱉었다.
자신이 아니라도 회사는 돌아가겠지만 진혁이 만약 깨어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지 막막했다.
그 순간 진혁의 손가락이 살짝 움직이는 게 아닌가.
“뭐지?”
“왜요?”
“손가락이 움직였어… 닥터!”
차중만의 소리에 동승한 의사가 달려왔다.
“무슨 일이시죠?”
“손가락을 움직였어요. 이거 깨어날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네?! 잠시만요.”
의사는 가슴에서 볼펜 모양의 라이트를 꺼내 진혁의 눈동자에 비추었다.
“어, 잠시만요.”
의사는 양쪽 눈을 확인하고는 말을 이었다.
“예측하기는 이르지만 코마에서 벗어난 거 같습니다. 한국에 도착하면 정밀 검사 실시하고 상황을 살펴보시죠. 하지만 큰 기대는 마시구요. 코마를 벗어났다고 해서 바로 깨어나는 건 아닙니다. 언제 깨어날지는 정확히 말씀드리기 힘들고요. 그래도 희망은 있네요. 축하드립니다.”
의사의 말에 둘은 기쁨에 차올랐다.
혼수상태였던 아들이 깨어날 수도 있다는 희망찬 말에 차중만은 참고 있던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 * *
아득하기 끝이 없는 하얀 방에 갇혀버린 거 같은 이 느낌에 나는 하염없이 걸을 수밖에 없었다.
끝도 보이지 않는 길이지만 분명 나아간다면 닿을 거라는 믿음이 들었다.
“여기가 끝인가.”
그렇게 아득한 시간을 걸어 하나의 문 앞에 멈추어 섰다.
아득한 하얗고 하얀 방 끝에는 검고 이질적인 느낌의 문 하나가 덩그러니 자리하고 있었다.
“열어야겠지.”
이 문을 열어야만 결론이 날 거 같았기에.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넌?”
그리고 문 반대편에는 내가 그곳에 서 있었다.
김서진.
그곳에서 오랜 시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환한 미소로 나를 바라봐 주었다.
그리고 위로라도 하듯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을 이었다.
“고생했어. 그리고 고마워.”
그렇게 나는 검붉은 빛에 사로잡히며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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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님!”
눈을 뜨니 익숙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작고 아름다운 여자 사람이 내 손을 잡고는 눈물을 도르르 흘리고 있는 게 아닌가.
“누구?”
이 여자는 내 질문에는 아랑곳하지 않았고 뒤이어 흰색 가운을 걸친 의사로 보이는 사람이 달려왔다.
“환자분 제가 누구로 보이죠? 정말 기적이네요. 정신이 이렇게 빨리 돌아오다니.”
“의사?”
“네, 맞습니다.”
의사는 고개를 돌려 모두에게 긍정의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나를 꽉 안으며 달려온 두 사람.
“엄마. 아버지. 여기는 어떻게?”
정신이 몽롱한 나는 흐느끼며 울고 있는 부모님을 향해 말을 이었다.
“왜 이래요. 무슨 일인데?”
“너 차 사고 났잖아. 기억 안 나?”
“차 사고라니? 나 회사 끝나고 술 마시는데……윽!”
순간 느껴지는 고통과 기억의 쓰나미.
이질적인 기억들.
“대표님 저희 알아보시겠어요?”
작고 이쁜 여자가 나를 보며 대표님이라고 한다. 그리고 옆에 있는 노랑머리의 사내는 나에게 혼내듯 말을 건넸다.
“뭐야. 기억상실증에라도 걸린 거야?”
“다니엘?”
“뭐야 기억상실증 아니네. 이름 부르는 거 보니 멀쩡한 거 같네. 아픈 척 그만하고 일어나라 차진혁. 너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다니엘 씨 대표님한테 왜 그래요. 방금 깨어난 사람한테.”
아름다운 여자와 노랑머리가 아니지 다니엘이 싸우고 있다.
‘나 때문인가?’
“아, 제가 죄송합니다.”
“갑자기 웬 존댓말?! 아프기는 아픈가 보다.”
그리고 다시 옆에 있는 작고 이쁜 여자가 자신은 누구냐며 말을 이었다.
“흠… 류미리 디자이너.”
“오오오! 맞아요. 기억상실은 아니네요. 휴 다행이다.”
모두에게 무슨 말을 건네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 순간 나를 더욱 놀라게 한 건 달력의 날짜.
‘미친! 3년이 흘렀어.’
하지만 3년의 공백의 시간은 모두 이미지화되어 머릿속에 가득하다.
그리고 자신을 대신해 3년을 살아온 타인이 자신의 형이라는 사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생각하려던 찰나 불현듯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그날 분명히… 택시 운전사가 전한 음료수를 마신 뒤부터 기억이 없어.’
브랜드Han의 회사.
그날 거하게 술을 마시고 난 택시를 탔다.
그리고 운전사가 전한 음료수 한 모금을 마신 후 정신을 차려보니 지금인 것이다.
여러 생각에 잠겨 있는 그때.
병실 문이 열리고 또 다른 아리따운 여성이 발을 내디뎠다.
“차진혁! 차진혁 회장.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요?”
자신에게 달려오는 신지혜 총괄 디렉터.
“엇! 디렉터님.”
“응?”
신지혜는 잠시 침대 앞에 멈춰서더니 크게 웃는 것이 아닌가.
“하하하, 뭐야. 옛날 생각나게. 뭐야 기억상실증이야?”
그녀는 놀라 주위의 사람들을 바라봤다.
“아니에요. 기억상실증.”
“하… 놀라라.”
신지혜는 다시 진혁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저 누군지 알아보겠어요?”
“신지혜 켈링 회장님이요?”
‘하… 피곤하네.’
모두를 바라보며 의심받을 짓을 해서 좋을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때도 차진혁이고 지금도 차진혁이다.
형인 김서진이 내 몸에 있었다 한들 지금의 나는 차진혁이기에 다시 나는 내일을 살아가야 한다.
그리고 가장 적절한 질문을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대회는 어떻게 되었죠?”
“눈 뜨자마자 대회 생각하기예요? 다들 얼마나 걱정했는데.”
“아… 죄송합니다.”
“뭐. 결과야 대단했죠.”
* * *
메인 의상 한 벌을 남겨 놓은 상태.
“화이팅입니다. 출발해주세요.”
에릭은 마지막 모델에게 파이팅을 외치며 무대로 나아가라는 신호를 보냈다.
마지막 무대를 장식할 모델은 남자로 남성미가 가득한 근육을 가지고 있었다.
모델이 스테이지를 걸어 나가는 순간.
무대 밖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은 것같이 냉랭해졌다….
“왜 아무 소리도 안 들려? 분위기 이상한데.”
조금 전과 너무 다른 반응에 류미리는 놀라며 무대 뒤 공간으로 달려왔다.
“무슨 일이야?”
“보세요.”
에릭은 류미리에게 밖의 상황을 보라며 자리를 비켜주었다.
“와….”
그곳에 모여 있던 사람들의 말문이 막혀 있었다.
조명에 비친 관객들의 표정이 그걸 대변해주고 있었다는 게 더 맞는 거 같다.
화려하지 않지만 새로운 패션디자인이라는 생각마저 들게 했기에 보이는 행동이 아닐 수 없다.
크고 번쩍이는 번개가 치고 뒤이어 들려오는 우렁찬 천둥같이 순식간에 터져 나오는 관객들의 함성 소리!
류미리와 에릭은 전신에 소름이 끼쳐 왔다.
“성공이네.”
“아직이죠.”
“아직이라니.”
남자 모델이 입은 메인 의상은 얇은 실크와 명주 원단을 겹겹이 쌓아 올린 치마로 이국적이면서도 한국의 미가 곁들어진 디자인이다.
상의 아우터는 가죽과 펄을 이용해 풍성하면서도 강력한 남성미를 가득 심어 넣었고 숄더백마저도 남성스럽기 그지없다.
모델이 메인 스테이지를 도착하는 순간.
“지금이에요.”
무선 마이크를 통해 에릭이 누군가에게 신호를 보냈다.
모델의 이어지는 퍼포먼스.
메인스테이션에서 모델이 순식간에 웅크리더니 하늘 위로 강하게 뛰어올랐다.
그 뒤로 펼쳐지는 현란한 쇼.
마치 와이어라도 단 것 같이 높이 뛰어올랐고 체공 시간도 상당하게 느껴졌다.
정희정과 에릭의 아이디어가 빛나는 무대 연출이었다.
어둠과 빛을 이용해.
마치 공중에 떠 있는 거 같이 연출한 것이다.
뒤이어 의상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실크와 명주천으로 만들어진 조각들이 바람에 휘날리며 모델 주위를 맴돌았다.
“저건 뭐야?”
“특별한 디자인이죠.”
원단이 떨어져 나간 치마 안에는 또 다른 치마가 존재했다.
“데님?”
“네, 여러 세대를 아우를 수 있고 가장 젊은 아리raM을 표현하고 싶었거든요.”
“데님으로 한복의 치마를 표현했네. 멋지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에릭은 류미리의 칭찬에 머쓱하다며 머리를 긁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