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7화 (197/200)

“블레이저의 치마 바지라. 나쁘지는 않은데.”

분명 좋은 디자인이다.

에릭은 이 디자인에 브랜드 아리raM의 색도 한껏 묻어있고 나쁘지 않다고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이걸로 경쟁 상대를 이길 수 있을지는 의문이 들었다.

획기적이나 획기적이지 않다는 의미.

“이걸로는 이길 수 없어요.”

“응?!”

“이 디자인들로는 절대 우승할 수 없다고요.”

“그게 무슨?”

에릭은 디자인 몇 개를 들어 올려 책상 위에 넓게 펼쳤다.

“서클 치마에 더블 브레스티드 그리고 스코트에 만다린 셔츠. 분명 좋은 디자인이지만 평범해요.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디자인이란 말이죠. 뻔한 디자인에 높은 점수를 줄지 의문이에요. 심사위원들뿐만 아니라 시민 참가자들도 수준이 높아요 쉽게 점수를 주지 않을 거예요. 아저씨. 아니지 삼촌 차진혁 디자이너라면 이렇게 만들었을까요?”

“그건….”

다니엘이 보아도 분명 하나의 벽이 막고 있는 느낌이 강하다.

진혁이라면 더 특별하고 눈에 확 들어오는 디자인을 순식간에 만들어 냈을 게 분명하다.

다니엘은 순간 호기심이 생겼다.

‘분명 LVMH 전체 브랜드의 디자인 총괄을 했던 애야… 능력이 어느 정도일까?’

시험하고 싶어졌다.

에릭이 진짜 김서진의 친아들이고 진혁의 조카라면 이 아이 또한 특별한 힘을 가지고 있을 테니까.

“그럼 너라면 어떻게 했을 거 같아?”

“저요?”

에릭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잠시 눈을 감고 머릿속으로 디자인을 그려 나가기 시작했다.

다니엘은 그의 집중을 깨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자리를 피해주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에릭이 눈을 뜨는 순간.

“보인다!”

다니엘의 눈앞에 무수하게 퍼지는 빛이 들어왔다.

“뭐가 보여? 생각은 다 한 거야?”

“네… 잠시만요.”

“으… 응.”

에릭은 빈 종이를 가지고 와 스케치를 하기 시작했다.

“미치겠네….”

다니엘은 현란한 그의 스케치 솜씨와 색을 사용하는 능력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진혁보다 더 뛰어난 면들이 엿보였기에 온몸에 전율이 감싸는 거 같았다.

그때 울려 퍼지는 전화벨 소리.

― 정희정 디렉터.

다니엘은 전화를 받아 대화를 이었다.

“왜 안 와요?! 음식 다 식어요.”

“아… 그게.”

다니엘은 정희정에게 자세한 상황을 전달했다.

하지만 반응이 썩 좋지 않았다.

“아니 그걸 보여주면 어떻게 해요! 보안 사항인 거 몰라서 이러세요.”

“이기고 싶으니까요. LVMH 전체 총괄디자인을 맡은 아이예요.”

“하지만… 아리raM 직원도 아닌 사람한테….”

다니엘의 한마디에 정희정은 아무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부족하다는 걸.

진혁의 빈자리를 채울 수 없다는 걸 말이다.

“그래서 결과는요?”

“식사 마무리하고 들어오세요. 그럼 알 겁니다.”

* * *

― 아리raM 본선 진출!

― 한국은 대표하는 아니 세계를 주름잡는 브랜드 아리raM.

― 차진혁 디자이너 혼수상태!

― 아리raM의 현재 위치!

― 세계를 주름잡는 에르맥스 세계대회 top 6.

― 본선 시작! 승자는?.

대회 당일 자극적인 뉴스들이 뿌려져 나오고 있었다.

“우리 꼭 이겨요. 파이팅!”

“당연하죠. 사장님 몫까지 해내야죠.”

“너도 한마디 해.”

“아… 저요.”

에릭은 몸을 배배 꼬며 말을 이었다.

“부족한 저를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차진혁 디자이너보다는 부족할지 모르지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잘 부탁해요 총괄디자이너님.”

“아… 네.”

총괄디자이너 에릭.

최종적으로 아리raM을 지탱하는 직원들 모두가 승인한 결과였다.

그날 식사를 마무리하고 온 디자이너 및 제작자들은 수정된 디자인을 보고 그 아무도 불만을 가질 수 없었다.

류미리와 정희정 몇몇 디자이너들은 화를 내며 사무실로 들어왔었다.

“다니엘 씨!”

그리고 정희정은 에릭이 손보고 있는 디자인을 빼앗듯이 낚아챘다.

불만을 몸으로 표현한 것이다.

“네가 뭔데! 이걸….”

“아… 죄송합니다.”

에릭은 버럭 화를 내는 정희정 앞에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말은 하지 않아도 에릭에게 감정이 없지는 않았는데 그게 순간 터진 듯 보였다.

“이 상황을 만든 게 누군데! 우리를 왜 비참하게 만들어!”

“정희정 디렉터! 적당히 해요. 우리를 도와주려고 한 거지 아무런 짓도 하지 않았어요.”

“그러니까요. 왜 단독으로 이런 걸 시키냐고요. 왜?!”

순간 감정의 골이 깊어지는 듯 보였다.

하지만 류미리는 감정 자제하며 에릭의 디자인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디렉터님 손에 들고 있는 거 저한테 주실래요?”

“네?!”

“제가 한번 볼게요. 다니엘 씨 말대로 우리한테 도움이 되는지 아닌지는 디자이너인 저희가 판단할게요.”

“하…… 알겠어요.”

정희정은 에릭을 한번 쳐다보고는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신경 쓰지 마. 저런 분 아닌데 지금 좀 예민해서 그래.”

“이해합니다. 제 잘못이 분명히 있으니까요.”

“그래 이해해준다니 고맙네. 우리가 한번 볼게. 설명이 필요하면 부를 테니 잠시만 기다려줘.”

“네.”

디자이너 10명이 한자리에 모여 에릭이 새롭게 탄생시킨 디자인과 자신들이 이틀 밤을 새워 만든 디자인 수정본을 두고 회의를 진행했다.

“다들 의견 어때요?”

“…….”

선뜻 나서는 이가 없었다.

분명 자신들이 근접할 수 없는 깊이가 깊어진 디자인에 자신들이 쉽게 의견을 제시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때 김형준이 나서서 말을 이었다.

“구두 디자인은 안정원 디자이너랑 같이 수정이 필요할 거 같습니다. 제작 구조가 조금 망가져 보여요. 하지만 디자인적으로는 더 좋아졌습니다.”

“안정원 디자이너는 할 말 없어요?”

그때 유심히 디자인을 바라보고 있던 안정원이 말을 이었다.

“이의 없습니다. 형준이 말처럼 수정이 필요하긴 합니다. 하지만 뛰어납니다. 창의성과 새로움을 추구한다면 이보다 좋은 디자인은 없을 거 같습니다.”

“그래요… 구두 쪽은 그렇다 치고. 가방 쪽이랑 의상 쪽은 어때요?”

모두 조심스레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고 그 의견들 사이에 류미리가 생각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모두 에릭의 수정본과 디자인에 뛰어남을 표현했다.

“그럼 결과는 나왔네요. 이 수정본으로 갑니다. 모두 최선을 다했을 때 하나의 발전을 보여주는 디자이너가 TOP클래스 디자이너가 된다고 생각해요. 최근에는 차진혁 대표님이 우리의 TOP디자이너였고 지금은 저기에 있는 에릭입니다. 그럼 우리는 에릭의 손을 잡아야 해요. 최고의 브랜드가 되기 위해서 말이죠. 이의 있습니까?”

“없습니다.”

“저도요.”

“저도. 최고의 회사의 디자이너로 남고 싶습니다.”

“그럼 시간 없으니 에릭한테 설명을 듣고 수정 작업 들어가죠. 그리고 최종심에서는 변화 없이 이 디자인으로 대회 진행하도록 하죠.”

“네!”

디자인 회의가 끝이 나고 류미리는 에릭에게 다가갔다.

“잘 부탁해요. 총괄디자이너.”

“네?! 총괄이라니….”

“모두가 합의했거든 너의 능력이면 우리를 최고의 자리에 올려줄 수 있을 거 같다고 그러니 우리를 최고의 자리에 올려줘. 그게 우리 조건이야.”

에릭은 뭉클한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운명

* * *

본선 최종은 패션의 메카인 파리에서 진행된다.

수많은 인파가 샤오궁을 기점으로 에펠탑 주변을 에워쌌고 전 세계의 방송관계자들은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경쟁 중이었다.

에르맥스 세계대회 주최 측은 막대한 자금을 쏟아부어 짧은 시간에 무대, 조명, 방송시설 등 각종 설비를 에펠탑 앞 잔디 광장에 만들어 냈다.

과히 입이 떡 벌어질 만한 규모의 시설이라 할 수 있었다.

“대단하네요. 무대에, 조명에, 대형 스피커 수천 개에, 관객석까지 3일 만에 이걸 다 만들어 내다니.”

“돈이면 안 되는 게 없는 세상이잖아요. 프랑스 정부에서도 이렇게 쉽게 허가해준 거 보면 분명 뇌물 먹였을걸. 뭐 그까짓 돈, 수신료나 대회 의상 판매로 몇 배는 더 거둘 텐데 이 정도야 껌이죠.”

“그렇죠. 관광이나 홍보 효과도 어마어마할 테니. 프랑스입장에서도 거부할 필요를 못 느낄 테고.”

“저기 붙어 있는 광고만 해도 수백억은 왔다 갔다 할걸요.”

정희정의 말에 류미리가 주변을 둘러보자.

내로라하는 각종 유명 브랜드들의 광고가 눈에 들어왔다.

그때 아리raM 직원들을 향해 안내 직원이 다가와 말을 이었다.

“관계자분들은 이동해 주십시오.”

“아, 네.”

모두가 설레는 마음으로 안내원의 지시에 따르며 아리raM 전용 부스로 이동했다.

하지만 불안함을 감추지 못하고 사람이 한 명 있었으니 바로 총괄 디자이너인 에릭이였다.

“에릭 무슨 일이야?”

“아… 아니에요. 긴장을 조금 해서 그런가 봐요.”

다니엘의 눈에 에릭의 표정이 썩 좋지 않다.

‘무슨 일이지?’

순간 다니엘이 에릭의 시선이 향하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 불쾌한 인물이 서 있었다.

“아르노 회장?!”

“…….”

다니엘과 눈이 마주친 아르노는 가식적인 미소를 머금고는 자신의 부스를 빠져나와.

아리raM 부스로 천천히 다가왔다.

“이게 누구야. 우리 구면이지 않나.”

“구면이건 초면이건 이렇게 말 섞을 사이는 아닌 걸로 아는데?”

“그렇지 하하하. 뭐 어쨌든 상관없지. 자네가 아닌 저 소년한테 용건이 있어서 말이야. 에릭 안 그래?”

아르노는 에릭을 바라보며 비릿한 웃음을 다시 내보였다.

마치 자신의 먹잇감을 남에게 빼앗긴 야수처럼 언젠가는 다시 뺏어와 잡아먹어 버릴 거라는 악감정이 가득 풍겨왔다.

“역시 차진혁이 네놈이랑 어떤 관계인지 알고 있었나 보군. 그러니 네가 이놈들을 믿고 여기에 발붙이고 있는 거겠지?”

“…….”

“에릭! 실컷 즐기도록 해. 잠깐의 자유는 달콤하기 그지없으니.”

아르노는 협박에 가까운 압박을 해오고 있었고 에릭은 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다니엘이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지 않았다.

“당장 부스로 돌아가.”

“하하하 가야지. 나도 바쁜 사람이거든.”

뒤돌아서는 아르노를 향해 에릭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용기 내어 품고 있던 말을 내뱉었다.

“회장님 거두어 주신 건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시 LVMH에 가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러니 저를 놓아주십시오.”

아르노는 다시 몸을 돌려 말을 이었다.

“놓아 준다라.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젠장! 미친 노망난 영감.”

다니엘은 욕지거리를 뱉어내며 에릭을 붙잡고 부스로 돌아왔다.

상대할 가치도 없는 인간인 걸 잠시 잊은 거 같다며 다니엘은 자신을 탓했다.

“괜찮아? 신경 쓰지 마.”

“아… 네. 별거 아니에요. 속이 시원한 거 같기도 하고 나쁘지 않은 기분이니까. 괜찮습니다.”

“그래 신경 쓰지 말고 대회에만 집중해.”

다니엘의 눈에 에릭의 상태가 더 불안해 보였다.

‘아직 어린애긴 하네 어떻게 하지.’

아르노가 아리raM 부스로 온 것은 일부러 에릭의 불안한 심리를 자극하기 위한 게 분명하다.

다니엘의 눈에 에릭은 집중력이 상당히 흐려졌고 시선 처리 또한 하지 못하는 매우 불안한 상태다.

‘큰일이네.’

.

.

.

사회자의 진행으로 문제없이 대회가 진행되었다.

다행히 특별한 이벤트는 존재하지 않았고 본선 1차와 비슷하게 재료를 골라오는 방식으로 다른 점이 있다면 브랜드끼리의 재료를 겹치게 하지는 않는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면과 가죽이라는 큰 틀에서는 상관이 없다.

“에릭 우리는 뭐로 해야 하지? 디자인대로라면 겹치는 부분이 많아.”

“저희는 면…….”

에릭의 상태가 돌아오지 않는다.

거의 패닉에 가까운 상태인 듯 보였다.

“에릭! 집중 안 해.”

“죄송합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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