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말을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라고 생각이 들지만 이야기가 너무 자신의 생각과 맞아떨어진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김서진 디자이너의 혼외자식이라는 이 소년은 동서양 혼열의 느낌이 강한데다가 은근히 진혁과도 많이 닮아 있었다.
그리고 늘 진혁에게 느껴지는 알 수 없는 이 강한 기운마저 가지고 있는 게 아닌가.
“그래서 네가 김서진 디자이너의 아들이라는 거지.”
“네… 어머니가 그러셨어요. 직접적으로는 아니지만 말이죠.”
“그럼 네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네. 그럼 진혁이 네 삼촌이 되겠고. 하…… 이게 우연이라기에는 너무. 뭐라고 말해야 하나. 왜 이 새끼는 이런 일을 혼자!”
“몰랐을 겁니다. 제가 누구인지. 저도 신기해요. 그 상황에 그 자리에 차진혁 디자이너가 있었다는 게 그리고 저를 구한 사람이 차진혁 디자이너라는 게.”
에릭은 푹 숙인고개를 들지 못했다.
미안함과 혼란스러운 감정이 한데 엉켜 슬픔마져 느낄 수 없게 만든 거 같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에릭의 이야기에 다니엘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아르노 회장이 다시 찾아올지도 모릅니다. 그럼 차진혁 디자이너도 위험할 수 있어요.”
“아르노라니 그건 무슨 소리야.”
“제가 LVMH 총괄 디자이너니까요. 저를 놓아주지 않을 겁니다. 제 능력을 알고 있거든요.”
“LVMH 총괄 디자이너도 있었나? 브랜드마다 총괄이 따로 있잖아. 그리고 능력은 또 뭐고.”
“그렇기는 한데. 능력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습니다. 양해 부탁드려요. 차진혁 디자이너가 깨어나면 모두 말하겠습니다.”
“어련하시게. 진혁이나 너나.”
에릭은 능력에 대한 이야기를 제외한 지금 자신이 처한 사정을 다니엘에게 상세하게 설명했다.
왜 도망쳤고 지금 같은 일이 왜 일어났는지.
모두 자신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며 자책하고 있었다.
“이 미친 영감탱이가 어린애를 이용했단 말이야. 하… 열받네. 진짜 인간 이하인지는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다니엘은 아르노가 김서진이 죽은이후.
에릭에게 접근했다는 이야기에 모든 톱니바퀴가 맞물리는거 같았다.
김서진을 죽인 아르노회장 그리고 에릭에게 친근하게 다가간 아르노.
모든게 계획적이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져 들게 했다.
“네 잘못은 아니야. 어른들이 잘못된 거지. 그리고 진혁의 일고 일어날 일이었어. 진혁이 그곳에 있었고 바른 판단을 내린 거뿐이지. 나라도 그랬을 거야. 그러니 자책하지 마. 그러니까 네가 LVMH그룹 전체 디자인을 총괄하는 디자이너라는 소리지.”
“네, 믿기지 않겠지만 진짜입니다.”
“아니야. 믿어.”
“네?!”
“아… 진혁이랑 생활하다보면 신기한 일들이 많았거든 김서진디자이너는 보지 못했지만 그도 대단하다고 들었고 그 피가 어디가겠어. 괜히 이해하려 하면 나만 힘들지 그냥 받아들이면 편해.”
“아… 네.”
다니엘을 에릭의 어깨를 두드리며 함께 들어가자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에릭은 잠시 고민했다.
자신이 저기에 있어도 될 사람인지 말이다.
실수로 인해 진혁을 저렇게 만들었다는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듯했다.
“가자.”
에릭의 불편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는 다니엘이 다시 한번 그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잡아끌었다.
“네… 감사합니다.”
* * *
아르노는 에릭을 놓쳤다는 말과 불미스러운 일에 한은샘이 휩싸였다는 소리에 분노가 차올랐다.
“이런 병신 같은 새끼! 꼬마 놈 하나를 못 잡아서 이 사달을 일으켜.”
“죄송합니다.”
“그리고 너는 거기서 왜 그런짓을 만약에 에릭이 다치기라고 했으면 어쩔 뻔했어 이새끼야!”
아르노는 화를 참지 못하고 책상 위에 놓여 있던 물컵을 한은샘에게 집어던지면 분노했다.
“윽!”
“아픈가 보지 벌레만도 못한 새끼. 에릭이 너 같은 벌래새끼보다 천만 배는 아까워 당장 내 눈앞에서 꺼져!”
한은샘은 머리를 감싸며 아르노에게 고개 숙인 이후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그는 물컵에 맞은 머리보다 아직도 진혁을 차로 치였다는 생각에 마음과 머리가 더 복잡하고 힘들었다.
그게 걱정인지 야망의 걸림돌인지 생각하는 자기 자신 또한 구역질이 날 정도로 말이다.
“만약 죽으면… 어쩌지.”
자신이 살인자가 되어버리고 만다.
브랜드Han이 LVMH에 합병도 무산이 될 것이고 평생 범법자로 낙인찍힐 게 분명했다.
“먼저 나서야 해… 나 혼자 뒤집어쓸 수는 없어.”
한은샘은 또 다른 다짐을 하고 건물을 빠져 나왔다.
.
.
.
아르노의 직무실에는 대화가 한창 이어지고 있었다.
“에릭의 행방은?”
“현재 차진혁이 입원해 있는 병원에 있는 걸로 확인됩니다. 잡아오려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아니야. 때가 좋지 않아. 괜히 나섰다가 일만 더 커질 거야.”
“그런 어떻게?”
“자네 그렇게 머리 안 돌아가나.”
“죄송합니다.”
“차진혁… 그놈 이번 기회에 없애버려 사고로 위장하기 딱 좋잖아. 그리고 그 뒤에 에릭은 구워먹던 삶아먹던 하자고.”
“네, 그리고 회장님 한은샘 저놈은 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 비밀을 너무 많이 가져가면 안 좋을 거 같습니다.”
“이번 대회까지 쓰고 버릴 패야. 최종본선에 들었으니 두고 보자고 얼굴이 알려졌으니 무슨 짓은 못 할 거야.”
“예.”
아로노와 한은샘 둘 모두 자신이 추구하는 방향으로 틀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모를 것이다.
최종본선이 시작된 이후 많은 것이 바뀔 거라는 걸 말이다.
* * *
진혁의 사고 소식에 대회를 마무리 지은 류미리와 김형섭, 안정원을 비롯해 모든 직원들이 병원으로 이동했다.
“정 디렉터 저기 있네.”
“어디요?!”
여사님의 말에 류미리가 뛰어가며 그녀에게 안겼다.
“어떡해요. 대표님 어떡해요.”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네요. 근데 정신이 언제 돌아올지 모르겠다고 그러더라고요.”
“흑 흑.”
“류 디자이너 그만 울어요. 괜찮으실 거예요.”
“그렇겠죠. 깨어나시겠죠.”
“그럼요. 강한 분이신데.”
모두 중환자실 앞에 모여 닫혀있는 문만을 바라볼 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한국에 계시는 대표님 부모님한테 알려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건 다니엘 씨가 연락한다고 했어요. 언론에서도 지금 뉴스로 내보낸다고 연락 왔고요.”
“그렇죠. 언론보다야….”
“차형만 장인님도 아직 회복 중이신데. 걱정이네요. 파리에 오신다고 하실 거 같은데.”
“그러게요.”
둘의 대화가 끝이 날때쯤.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김형섭이 말을 이었다.
“지금 같은 상황에 기쁜 소식인지는 모르겠는데. 최종본선 들어갈 거 같아요.”
장희정은 그 말을 듣고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멈출 생각이 없어요. 다니엘 씨도 저랑 같은 생각이에요. 분명히 대표님도 그러길 원할 거고요.”
“디자인이 문제에요. 최종본선은 즉흥디자인이에요. 제가 해도 상관없지만 베스트일지는 저도 장담할 수 없어요. 대표님보다 능력이 부족한 것도 사실이고요.”
“대표님 자리가 크게 느껴지네요.”
그때 다니엘이 축 처진 어깨로 중환자실 앞에 나타났다.
그의 옆에는 에릭이 함께 서 있었다.
“전화하셨어요?”
“네….”
“잘하셨어요.”
“충격이 크신 거 같아요. 그리고 비행기표 두 장 본사에 준비 좀 해달라고 하세요. 최대한 빠른 걸로.”
“…네. 전달할게요.”
다니엘은 정희정 옆에 서 있는 류미리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본선은 어떻게 되었어요?”
“큰 이변이 없으면 최종본선 진출할 거 같아요. 대회종료 될 때까지 투표순위가 1등이 샤네르, 2등이 에르맥스, 3등이 우리고 4등이 인피니티 5등이 루이바통이었어요. 최종결과는 내일 나올 거 같아요.”
“나쁘지 않은 성적이네요.”
“근데 옆에 있는 분은 누구시죠?”
“아…….”
다니엘은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 말을 이었다.
“진혁의 조카라고 하는 게 맞겠네요. 인사하세요. 에릭이에요.”
“아… 이분을 구하려다.”
에릭은 류미리의 말에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누구 하나 에릭을 나무라지 않았다 원망도 할 수 없었다.
진혁이 어떤 사람이고 옳은 선택을 했을 거라 믿기 때문이다.
“죄송은요. 본인 잘못도 아닌데요. 대표님의 선택이었잖아요. 그럼 저희는 믿거든요. 대표님 선택을.”
“아… 네.”
류미리의 말에 에릭은 흠칫 놀랄 수밖에 없었다.
LVMH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유대감이었다.
만약 이들과 함께 자신의 능력을 발휘했다면 많은 것이 바뀌어 있었을 거라는 생각마저 들게 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말을 뱉어냈다.
“부럽네요.”
“네?!”
“아 죄송해요. 그냥 차진혁 디자이너가 부러워서요. 자신을 믿어주는 사람들과 함께 일한다는게.”
“그만큼 신뢰를 보여주셨으니까요.”
둘의 대화가 점점 무겁게 느껴질 때쯤.
정 디렉터가 다니엘에게 말을 이었다.
“최종본선 디자인 어떻게 할지 의논 중이었어요.”
“기존에 만들어놓은 디자인 있잖아요.”
“있기는 한데. 주제와 상황이 바뀌니 그리고 대부분 대표님 손을 거쳐 간 거라서요.”
둘의 대화를 이어 류미리가 말을 이었다.
“대회진행은 차질이 없을 거예요. 근데 베스트 디자인이라고 장담하기는 힘들어요. 그리고 샤네르와 에르맥스, 루이바통, 인피니티를 상대로 어설픈 디자인으로 상대했다가는 분명 입상도 못 할 거요. 이미지만 안 좋아질 거예요.”
류미리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니엘은 다른 방법이 없다며 자신의 생각을 전달했다.
“최종본선 3일 뒤에요. 일단 모든 디자인의 경우를 계산하고 준비해주세요.”
“역시 그 방법뿐이겠죠.”
“아리raM 파리, 이태리, 한국지부 디자이너들 모두 불러들이세요. 3일 동안 진혁이 대신해서 최선을 다해야 할 겁니다.”
“네.”
굳은 결심이 굳혀지고 이제는 진혁을 대신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때였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에릭은 다니엘의 옆에 함께 서며 미소 지었다.
디자이너.
* * *
아리raM 디자이너와 의류, 가방, 구두 제작자 모두가 한걸음에 달려와 한자리에 모였다.
“모두 상황은 들어서 알 겁니다. 대표님이 없이 결승을 진행해야 할 거 같습니다.”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하죠.”
“기존에 만들어놓은 디자인이 있습니다. 새로운 디자인도 좋지만 수정을 하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근데 주제가 바뀔 수도 있지 않습니까. 결승은 더 획기적으로 진행될 텐데.”
“그걸 모두 감안해서 여러 방면의 디자인을 만들 생각입니다.”
3일의 짧은 시간을 최대한 활용해.
여러 경우를 생각한 디자인을 만들어 내야 한다.
최소한의 시간으로 최대한의 효율을 끌어내기 위해 디자인과 제작이 수시로 이뤄졌다.
이로써 완성도를 높일 수 있었고 제작과 디자인에서 발생하는 오류를 보완해 나아갔다.
그렇게 모든 시간이 소비되어 갔다.
“여기까지 하죠. 내일이 결승인데 컨디션 조절도 해야죠.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하… 아직 멀었는데.”
“마무리 지어주세요.”
정희정의 한마디에 모두 작업을 멈추었다.
조금 더 조금 더 하다가는 컨디션이 엉망이 될 게 뻔했다.
모두 기지개를 피고 굳어가던 목을 스트레칭해 가며 3일을 버텨온 것이다.
정말 지옥 행군이나 다름없었다는 걸 그들의 표정에서 느낄 수 있었다.
“아… 쉬고 싶다.”
“저도요. 척추 좀 펴고 싶네요.”
“다들 피곤한 거 알겠는데. 앞에 레스토랑 예약해뒀으니까. 식사하고 호텔로 들어가서 쉬세요 끼니도 제대로 못 먹었잖아요.”
“네! 배고프던 참이었어요.”
“저도.”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
작업실을 빠져나가려는 그때.
망부석처럼 한 자리를 지키는 사람이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다니엘이 말을 이었다.
“에릭 가자.”
“아… 네.”
에릭은 이틀 동안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자리만을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이 얼마나 간절한지 느낄 수 있었고 자신이 도움을 주고 싶다는 마음이 더욱 커져만 갔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마치 불청객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고 모두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았기에.
하지만 이대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그의 옆에는 항상 다니엘이 있어 주었다.
“뭐 해? 어서 가자니까.”
“잠시만요.”
다니엘의 눈에는 그저 어린 소년이었다.
마음의 상처가 깊다는 걸 알기에 마음이 쓰일 수밖에 없었고 자신이 아니면 이 아이를 챙길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다.
오해와 갈등은 종이 한 장의 차이라는 걸 늦은 나이에 알게 된 자신이 과거를 얼마나 후회하고 있는지 알기에 에릭만큼은 그러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도 없지 않아 존재했다.
“에릭?!”
오늘따라 에릭의 행동이 이상했다.
안절부절못했고 순간순간 자리에서 엉덩이를 들어 올리는 행동을 취하는 게 아닌가.
“그건?!”
“한 번이면 됩니다. 한 번!”
3일 동안 자리만 지키던 아이가 불을 내뿜을 거 같은 눈빛으로 자신에게 부탁 아닌 부탁을 하고 있었다.
“최종 디자인. 보고 싶은 거야? 보는 거야 상관없지만….”
“그럼 꼭 보게 해주세요. 부탁드립니다.”
모두 내색은 하지 않고 있지만 LVMH의 디자이너인 에릭을 경계하고 있었고 진혁의 조카라는 물증이 없었기에 어느 정도의 거리감과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었다.
다니엘이 멀리 걸어가는 정희정과 류미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조심스레 에릭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최종 디자인을 확인해도 좋다는 의미였다.
모두가 빠져나간 사무실.
에릭은 디자인이 쌓여 있는 공간으로 발을 내디뎠다.
“젠더리스가 컨셉트네요.”
“맞아. 특별한 주제를 찾다 보니 젠더리스가 가장 적절하다는 판단을 내린 거지. 트랜드하기도 하고 가방도 핸드백이 아닌 서류 가방을 변형시킬 생각이야.”
“좋은 아이디어네요. 하지만 부족한 거 같아요.”
패션의 경계선을 무너트리는 컨셉트 젠더리스 그러기에 더 자극적이고 눈이 갈 수밖에 없다.
여성복의 아름다움과 남성복의 중우하면서 깔끔함을 합친 디자인이 주를 이룬다.
남성도 아름다워질 수 있고 여성 또한 강한 모습을 느낄 수 있게 만들어주는 패션.
하지만 양날의 검처럼 잘 만들지 못한다면 성 정체성을 불러일으킬 수 있고 이상해질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