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사람이 한가득 모여있는 곳이 안전할지도 모르고 이들이 다시 자신을 찾는다면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알려버릴 생각이었다.
에릭은 저벅저벅 무거운 발을 움직이며 이동하려는 그때.
멀리에서 키가 크고 친근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 사람이잖아. 여기는 어떻게?!”
자신의 아버지의 동생인 차진혁 디자이너가 보인다.
아주 어두운 밤거리였지만 실루엣의 걸음걸이만으로 그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에릭은 본능적으로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미친 듯이 그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진혁에게 닿기만 한다면 자신은 자유를 얻을 수 있을 거 같았기에.
그런데 이상하게 미친 듯이 달렸지만 진혁에게 닿지 않았다.
에릭은 심리적인 문제라고 생각해 더욱더 힘을 내 뛰기 시작했다.
그 순간.
에릭을 발견한 비서의 부하가 소리쳤다.
“에릭! 에릭 저기 있다.”
그 소리에 비서의 부하들이 한순간에 몰려들었고 한은샘도 허겁지겁 뛰기 시작했다.
또다시 추격전이 시작된 것이다.
“으악!”
진혁을 향해 뛰어가던 에릭의 눈앞에 밝은 빛과 검붉은 빛이 공존하며 시야를 가려졌다.
단 한 번도 없던 일이었기에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멈추면 안 돼!”
에릭은 자신을 잡으러 오는 부하들이 있다는 걸 알기에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앞으로 걸어나갔다.
그런데 그 순간!
누군가가 자신의 몸을 강하게 밀치는 촉감과 충격이 느껴졌다.
“누구야?!”
“다행이야….”
흐릿하게 들려오는 누군가의 목소리.
‘뭐가? 다행이라는 거야.’
에릭은 가려진 시야 속에서 소리쳤다.
그리고 뒤이어 들려오는 굉음에 눈을 질끈 감겼다.
쾅!
“허허헉.”
에릭은 몰려오는 과호흡에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
어느덧 에릭의 가려진 시야가 돌아왔고 눈앞에는 좌절만이 가득했다.
“안 돼…….”
* * *
아르노의 부하들은 현장을 한참 벗어난 곳에서 상황을 주시했다.
에릭을 놓쳐버렸기에 아르노의 분노가 이만저만이 아닌 데다가 다시 잡아올 수도 없는 상황이 도래했다.
주위는 경찰들이 한가득 모여 있었기에.
“젠장! 왜 하필….”
그리고 비서의 옆에서 벌벌 떨고 있는 한은샘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반쯤 얼이 나가 있는 그를 보고 있자니 한숨도 아까웠기에.
“멍청한 새끼!”
한은샘은 에릭을 발견했다는 소리에 주위에 있던 시동이 걸린 차량에 눈을 돌렸다.
그리고 차에 올라탄 그는 골목 반대편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는 많이 지쳐 있었고 이 상황을 빨리 마무리 짓고 대회장에 돌아가고 싶었다.
“개자식 이번에 잡히면 죽여버릴 거야!”
악에 받쳐있던 그는 이성의 끈을 반쯤 놓아버렸고. 자동차의 기준 속도가 한참을 벗어나 몰고 있었다.
근데 여기서 큰 문제가 발생했다.
예측했던 것과 다르게 에릭이 무엇에 홀린 거마냥 인도를 넘어 차도까지 들어온 것이다.
“미친놈아!”
보통이라면 빠르게 달려오는 차를 피하기 마련인데 에릭은 죽기를 각오하듯이 도로 한중간까지 걸어나왔다.
한은샘은 빠르게 제동을 걸었지만 이미 늦어버리고 말았다.
차의 속도 때문에 제동거리가 훨씬 길어진 탓이었다.
그리고 들려오는 굉음.
쾅!
한은샘은 핸들에 머리를 박고 앞을 바라보지 않았다.
고개를 들면 자신이 마치 살인자가 되어버릴 거 같았기 때문이다.
“야 이 새끼야!”
누군가가 한은샘의 목을 잡아끌었다.
그는 어디론가 상대의 손에 끌려갔고 고개를 돌린 순간.
자신이 친 사람이 에릭이 아닌 진혁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
“빨리 여기서 벗어나야 한다고 정신 차려.”
“…….”
그렇게 한은샘은 비서의 손에 끌려 도망치듯 그 장소에서 빠져나왔다.
잠시 후.
사고 현장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 * *
대회의 컬렉션이 막바지에 다다를 때쯤.
대회장 반대편 블럭에서 싸이렌 소리가 울려퍼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무슨 소리야?”
다니엘은 주위에 있던 정희정과 류미리에게 말을 이었다.
“그러게요. 무슨 사고 일어났나 봐요. 아까 전부터 계속 들리던데.”
“이 밤에 사고 날 게 뭐가 있지.”
이곳에서 오래 머문 다니엘은 의야해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피렌체의 밤은 생각외로 치안이 안정적이다.
그리고 관광객이 많기에 큰 사고가 일어날 일이 드물다.
“마피아 놈들이 여기서 총싸움이라도 했나보죠.”
“무슨. 피렌체는 안그래. 남부나 뒷지방만 그렇지.”
그 순간.
대회 스태프가 헐레벌떡 아리raM 부스로 뛰어 왔다.
“저기….”
“무슨일이시죠? 컬렉션 끝났나요?”
“그게 아니라. 지금 최고책임자 누구시죠?”
정희정은 총괄디렉터로서 앞으로 나아가 말을 이었다.
“제가 현재로서는 최고 책임자입니다. 대표님이 자리를 잠시 비우셔서.”
“아…… 신원확인좀 부탁드립니다.”
스태프의 말에 주위에 있던 모두가 안 좋은 느낌이 강하게 들기 시작했다.
“신원확인이라니요?”
“반대편 블록에서 교통사고가 발생했는데 피해자가 아리raM 차진혁 디자이너 같습니다.”
“사고?!”
“사고라니?”
다니엘과 류미리 그곳에 모여있던 아리raM 직원들 모두 사고라는 말에 표정이 굳어졌다.
“제가 갈게요.”
“류미리 디자이너는 여기 남아주세요. 만약이지만. 진짜 대표님이라면 대표 디자이너 한 명은 여길 지켜야 할 거 아니에요.”
“……네.”
정희정은 냉정하게 상황을 직시했다.
그리고 이어 주위에 있던 직원들에게 자리를 지키라는 말만을 남겨두고 다니엘과 둘이 대회장을 빠져나왔다.
“정확한 정보에요? 지금 피해자는 어딨어요?”
“근처 병원으로 옮겼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신원은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 장소에 있던 외국인 소년이 피해자가 아리raM 차진혁 디자이너라고 말했다더군요.”
“소년이라니… 하 미치겠네.”
뜬금없는 인물의 등장에 둘은 답답함을 숨길 수 없었다.
정희정과 다니엘은 대회 측에서 제공하는 차에 올라탔다.
“아니겠죠? 아닐 거예요. 갑자기 대표님이 왜?”
냉정하던 정희정의 손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모두의 앞에서는 강한 척했지만 그녀 또한 불안한 것이다.
“괜찮을 겁니다. 만약 진혁이라고 해도 강한 사람이니까. 아무 이상 없을 거예요.”
다니엘은 고개를 떨구며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피렌체의 밤에 차 사고라니… 신시가지도 아닌 구시가지에서 이렇게 큰 사고가 일어날 수 있단 말이야.’
의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좁은 골목길과 1차선 도로로 이루어진 구시가지에서 사고라니.
피하려면 충분히 가능한 공간일 게 분명했을 것이다.
.
.
.
병원에 도착해 둘은 빠르게 응급실로 달려갔다.
실려온 사람이 진혁이 아니길 바라며 말이다.
“전화도 안 받으세요. 진짜…….”
정희정은 오는 내내 진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니엘은 그런 그녀를 보며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응급실 저기예요!”
그렇게 둘은 응급실로 발을 내디뎠다.
“대표님….”
“진혁….”
긴 호수를 목에 꽂은 상태로 누워있는 진혁을 바라보는 다니엘과 정희정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때 진혁의 앞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보이고 있는 소년이 눈에 들어왔다.
“누구시죠?”
정희정은 소년에게 말을 이었다.
“누구냐고!”
아무 말이 없는 에릭에게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상황이 그만큼 심각하다는 소리였다.
에릭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정 디렉터 잠시만요.”
“잠시 같이 나갈까?”
에릭은 다니엘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삶과 죽음의 선택.
* * *
누군가 큰소리로 소년의 이름을 부르는 게 아닌가.
나는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살폈다.
그때 에릭이라는 소년이 나를 향해 뛰어오는 게 아닌가.
“내가 있으면 저들도 마음대로 할 수 없을 거야.”
나도 그를 향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상하다.
짧은 순간이지만 에릭의 몸놀림이 더뎌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어디 다친 건가?”
그의 뒤에는 멀리서 검은 정장의 사내들이 빠르게 접근하고 있었다.
“안 돼!”
나는 온 힘을 다해 그를 향해 달려갔다.
무조건 먼저 낚아채 보호해야 한다.
이번이 아니라면 저 소년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게 분명하다.
내가 왜 이러는지 저 소년을 만나게 된다면 진실을 알게 되겠지라는 하나의 생각으로 말이다.
빵아앙!
순간 오른편에서 빠르게 달려오는 차량에서 강한 클락션 소리가 들려왔다.
“에릭….”
그때 골목을 빠져나온 소년은 마치 달려오는 차에 몸을 내던지는 듯 도로 중간까지 걸어나오는 게 아닌가.
순간 나는 내가 바라보는 시선을 의심했다.
절대 그럴 소년이 아니라 생각했는데 왜 갑자기 저런 돌발행동을 하는 것인가?
죽을 생각이었다면 저들의 손에서 도망치지도 않았을 게 분명하다.
“구해야 해!”
저 소년을 꼭 구해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나는 몸을 강하게 던졌다.
죽음과 삶에 단 한 번 있을 법한 짧은 순간이 아주 길게 느껴지는 순간.
나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어쩌면. 내가 동생의 몸에 들어온 이유가 조상의 원한을 풀기 위해서가 아니었다면 내 꿈을 위해서가 아니었다면 나는 저 소년을 구하기 위해서 지금 여기 있는 걸지도 모르겠네.’
그렇게 생각이 정리될 때.
딱딱한 쇠붙이와 내 살이 부딪치는 이질적인 감각에 정신을 잃어버렸다.
짧은 순간이지만 저 소년을 구했다는 안도감에 행복했다.
“다행이다.”
내 짧은 한마디를 들었을지는 모르겠지만 너가 살아서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렇게 내 눈은 어느 때보다 찬란한 빛에 사로잡혔다.
* * *
다니엘은 에릭의 말에 헛웃음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