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4화 (194/200)

“이제 컬렉션이 열리나 보군.”

주위는 온통 암흑이었고 컬렉션의 시작을 알리는 음악 소리만이 잔잔하게 흘러나올 뿐이었다.

에릭의 귓가에 Second Maze ― Hysics 음악이 흘러나오며 화려한 조명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배경과 무대는 모두가 함께 쓰지만 음악과 조명, 효과는 브랜드가 창작하고 만들어 내야 했다.

컬렉션이 시작되는 순간.

에릭은 무대로 눈이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내가 만든 디자인!”

첫 번째 컬렉션 참가자는 브랜드 인피니티였다.

자신의 영감과 아이디어가 오롯이 담겨있는 디자인이 세계 대회에 첫 발자국을 내딛는 순간.

에릭은 오묘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무언가 끓어오르는 감정에 코끝이 찡해졌다.

하지만 이런 감성을 느낄 시간이 없었다.

최대한 차진혁이라는 디자이너에게 접근해야 했고 자신의 신변을 보호해야 했다.

자신을 도와줄 사람은 오직 진혁뿐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히는 순간이었다.

“기다리자. 아리raM의 컬렉션이 시작되면 분명 무대 뒤에 나타나겠지.”

그는 자신의 아이디어로 창작된 의상과 가방, 구두를 다시 바라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저 부분은 저렇게 표현했으면 안 되는데… 그대로 베껴버리다니. 멍청한 새끼! 최고의 디자인을 저렇게 망치다니.”

인피니티의 디자인은 V―neck과 Asymmetri[비대칭]을 합친 디자인으로 가슴이 훤히 드러나는 섹시 콘셉트가 한껏 묻어 있다.

만약 에릭이라면 이 부분에 얇은 실크를 사용해 은은한 섹시미를 표현했을 것이다.

에릭은 한은샘의 디자인 능력에 매우 실망했다.

그래도 하나의 회사를 운영했다는 메인 디자이너의 실력이 아주 형편이 없음을 이제야 알게 된 것이다.

인피니티의 무대가 눈 깜짝할 사이 끝이 났고 모델이 무대를 빠져나가는 순간.

뜨거운 박수 소리가 온 광장에 울려 퍼졌다.

하지만 에릭은 그 박수 소리마저 자신을 놀리는 거 같았다.

‘이제는 뺏기지 않을 거야.’

그는 다짐했다.

자신의 것을 지키기로 그 누구에게도 뺏기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

* * *

인피니티 다음으로 아리raM의 차례가 다가왔다.

아리raM은 모델부터 무대까지 몽환적인 느낌을 주기 위해 노력했다.

아틀란티스라는 전설적인 소재를 어떻게 표현하는 게 관건이었으며 모델 또한 평범한 모델이라면 재미가 없을 거라는 판단에서다.

“잘 부탁해요.”

“네.”

그녀는 당당하게 대답을 하고는 무대로 걸어 나갔다.

그녀는 유전적인 증상으로 색소 결핍으로 인해 온몸이 하얀색으로 변하는 증상을 가진 알비노 모델이다.

머리 색부터 눈썹, 피부까지 모두가 백옥같이 하얗다.

그녀는 몽환적이면서도 시원한 바다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다.

“조명!”

내 사인에 맞춰 우리가 요청한 조명의 빛이 비가 쏟아지듯 뿌려졌다.

에메랄드색과 스카이블루가 결합된 바다의 색상.

그리고 무대 아래에서 뿜어져 나오는 증기.

그 무대 사이로 우리가 만든 의상을 입은 모델이 걸어 나갔다.

“와!”

“미쳤다.”

“어디 브랜드야!”

“와아!”

증기 속에서 그녀가 등장하는 순간.

모두가 함성을 지르며 환호했고 이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해낸 아리raM의 이름을 외치기 시작했다.

“아리raM! 아리raM”

마치 우승이라도 한 듯한 분위기가 지속되었을 무렵.

모델이 메인 스테이지 위에 올라섰다.

“지금이에요.”

우리는 새로운 컬렉션 기법으로 3D 프로젝트를 채택했다.

3D 프로젝트는 레이저를 이용해 현실적인 느낌을 구현해 냈다.

“바다 안을 느껴보라고.”

3D로 진짜 같은 물을 형상화시켜 냈다.

마치 모델이 물속에 빠져있는 듯한 이 모습에 주위 사람들은 흠칫 놀랐다.

그리고 이어지는 모델의 연기.

사람들은 그녀가 진짜 아틀란티스의 공주처럼 움직이는 모습에 다시 한번 감탄사를 연발했다.

우리의 의상은 이 영상 안에서 더 빛을 발했고 창작성이 가득한 연출을 발휘할 수 있었다.

“반응 좋은데요.”

류미리가 환한 미소로 나에게 말을 이었다.

나는 미소로 화답했다.

내 미소를 뒤로하고 모델이 무대를 빠져나왔다.

“고생했어요.”

“제 일인 걸요.”

그때 우리가 대기실로 이동하려는 순간이었다.

“환상적이었어요. 무대 연출이랑 합쳐지니까. 우리 의상이 최고인 거 같아요.”

“아직은 모르죠. 다른 브랜드들도 이를 갈고 있을 텐데.”

“김빠지는 소리 마세요. 잠시라도 만끽하고 싶으니까.”

류미리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대기실로 들어갔고 모델도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그때였다.

한은샘이 무엇에 홀린 듯 미친 듯이 어디론가 뛰어가는 것이 아닌가.

“뭐지? 류 디자이너 먼저 대기실 가 있어요. 바로 갈 테니까.”

“어디 가시려고요.”

“잠시면 돼요. 잠시 이유는 갔다 와서 설명할 테니까.”

“네, 빨리 오셔야 해요.”

나는 묘한 기분에 그의 뒤를 조심히 따라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을 이동한 한은샘과 나는 대회장을 훨씬 벗어나 도시의 중앙에 위치한 새로운 광장의 끝부분에 도착했다.

“대회장을 벗어날 만큼 중요한 일이라는 건가?”

순간 나도 모르게 그의 인근까지 접근했다.

그런데 한은샘의 발자국이 서서히 느릿하게 변해가더니 자리에 멈추었다.

‘젠장. 들킨 건가?’

나는 몸을 틀어 건물 외벽에 몸을 숨겼다.

그리고 몇 초의 시간이 지나 다시 고개를 내밀었다.

‘다행이네. 들킨 건 아닌가 보네.’

내 예상과는 다르게 한은샘은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대회가 끝난 것도 아닌데. 어디까지 가는 거야? 미치겠네.’

나는 잠시 고민했다.

다시 대회장으로 돌아갈지 계속 한은샘의 뒤를 밟을지 말이다.

‘조금만 더 가보자.’

다시 200m를 더 가서야 한은샘의 발걸음이 멈추었고 거기에는 엄청난 일이 벌어지는 듯했다.

“너 이 새끼! 대회 망칠 셈이야. 왜 이제 와서 이러는 거야!”

“이제 와서라니 당신이 날 얼마나 봤다고.”

“하… 어린 새끼가.”

한은샘은 버럭 화를 내며 누군가에게 윽박을 질러댔다.

그리고 손이 머리 위로 올라가는 순간.

검은색 양복의 사내가 한은샘의 팔을 낚아챘다.

“그만하시죠.”

“뭐야!”

“그만하라고. 내 말 못 들었어?”

한은샘은 한순간에 자신의 행동을 멈추었다.

검은 정장의 사내는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이 공간 안에서 가장 힘이 있는 사람 같아 보였다.

그리고 그는 쪼그려 앉아 말을 이었다.

“또 도망갈 생각 안 하는 게 좋아. 너 찾는 건 식은 죽 먹는 것보다 쉬워. 그리고 도망친다 해도 너 같은 거 도와줄 사람은 한 명도 없어.”

검은 정장 사내의 말이 끝나고 내 눈이 바닥에 묶여 있는 소년에게 돌아갔다.

“그 소년이잖아….”

유리 룸 앞에서 나와 눈이 마주친 소년.

이상하리만큼 이질적이었고 누군가와 많이 닮은 소년이 그곳에 잡혀있었다.

운명.

* * *

한은샘은 에릭을 바라보며 울화통이 터질 거 같아 감정이 쏟아냈다.

이 한 놈 때문에 많은 인력이 고생했고 자신은 엄청난 압박감에 시달렸다.

“너 이 새끼! 왜 이때까지 말 잘 듣다가 대회 시작하자마자 이러는 거야. 본선만 잘넘기면 무사히 끝날 일을.”

“저기요. 동양인 아저씨 그딴 실력으로 이번대회 무사히 못 넘겨요. 세계에서 놀 실력이 아닌데 왜 욕심을 부리시나. 한국이라는 나라에서나 먹힐 만한 실력이라고 당신은.”

“이 새끼가 말이라고!”

한은샘은 돌아서려는 발걸음을 멈추고 다시 에릭에게 다가갔다.

싸대기를 한 대 갈겨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그 장면을 지켜보던 검은 정장의 사내가 한은샘의 앞을 가로막았다.

“대회 아직 진행 중인데 가봐야 하지 않겠어? 여기 일은 우리한테 맡기고 빨리 돌아가봐.”

“큼….”

그 순간.

달빛을 가리고 있던 구름이 걷히며 검은 정장을 입은 사내의 얼굴이 뚜렷하게 내 뇌리에 들어왔다.

“아르노의 비서….”

아르노가 저 소년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이 상황을 비추어보아.

정당한 방법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귀를 기울여 그들의 대화에 집중했다.

“이놈 어떻게 하시려고요? 말도 안 듣는 놈인데.”

“회장님의 지시가 내려오기 전에는 우리가 데리고 있을 거다. 네가 신경 쓸 게 아니야.”

“신경 쓸 게 아니라고?! 결선에서 이놈의 능력이 필요하다고 나는 위로 올라가야 한단 말이야!”

“하하하하.”

순간 비서의 큰 웃음소리가 퍼져울렸고 비웃음을 한가득 머금고는 말을 이었다.

“잘 들어 동양인. 네까짓 게 위로 올라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살려주는 걸로 감사하라고.”

“하지만 회장님이….”

“뭐 회장님은 약속을 지키시겠지만 위가 아닐지도 모르지. 하여튼 대회장으로 가보는 게 좋을 거야.”

“……저딴 놈 때문에.”

“잠깐 내 말 잘 들어 너보다 100배 아니 1000배는 뛰어난 아이야. 현재 LVMH의 대부분의 메인디자인이 이아이의 머리에서 나온 거라고 저딴 놈이 아니란 소리야.”

“…….”

한은샘은 얼굴이 빨개지며 고개를 떨구었다.

에릭을 비롯해 여기 모인 사람 모두가 자신을 깔보고 있다는 게 느껴져서였다.

“빨리 가봐!”

한은샘에게 한마디 말을 남긴 비서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모두가 무방비해진 상태가 된 것이다.

“에릭! 잡아!”

그 틈을 노린 소년이 자신을 잡고 있던 사람들의 손을 뿌리치고 다시 내 달리기 시작했다.

그곳에 있던 아르노의 부하들은 화들짝 놀라 에릭을 잡기 위해 달려나갔다.

나는 본능적으로 저 아이를 구해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내가 먼저!”

그렇게 긴 추격전이 시작되었다.

피렌체는 골목 굽이굽이 숨어들 곳이 많은 도시다.

숨어버린다면 찾기 쉽지 않다.

놓치기 전에 빨리 찾아야 한다.

* * *

에릭은 앞만 보고 달려나갔다.

잡혔다가는 쉽게 넘어가지 않을 게 분명했고 더 잔인한 방법을 사용할지도 모르는 인간들이다.

사람 목숨을 파리처럼 여기는 놈들이 수두룩했다.

“저놈들 손에 놀아날 수 없어.”

한참을 달렸을 무렵.

턱 끝까지 숨이 차올랐고 정신이 혼미했다.

마치 자신의 주위의 산소가 고갈된 거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그 순간.

자신의 몸을 숨길 만한 작은 공간을 발견했다.

‘저기에 숨어 있자.’

에릭은 몸을 쑤셔넣듯 구겨 벽과 벽 사이 공간에 몸을 집어넣은 후.

그 안에 있던 작은 틈새로 쪼그려 앉아 몸을 숨겼다.

“하… 조금만. 조금만 쉬자.”

그렇게 시간이 지나가고 자신을 찾던 무리의 발소리가 들려오지 않을 무렵.

에릭은 조심스럽게 그 공간을 빠져나왔다.

“개자식들!”

에릭은 주위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다시 움직였다.

“저 길만 건너면 신시가지야.”

신시가지까지만 가면 항공과 교통을 이용해 멀리 도망칠 수도 있다.

진혁에게는 시간이 지나 안전을 확보한 뒤에 접근하면 된다는 판단이 섰다.

그렇게 미로 같던 골목을 조심스레 빠져나와 큰길을 건너려는 그때.

에릭의 눈에 비서의 얼굴이 들어왔다.

“젠장! 길목을 지키고 있는 거야….”

에릭의 눈에 비서와 그 무리가 들어왔다.

그들은 에릭이 어떻게 움직일지 훤히 알고 있다는 듯이 큰 길목을 지키고 있었다.

그는 잠시 혼란에 빠졌다.

자신의 계획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어 버렸으니.

“어쩌지….”

그렇게 생각에 잠겨 있던 에릭은 다시 몸을 돌려 다시 왔던 곳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