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3화 (193/200)

파리에 오기 전 한지 공방에 갔을 때의 일이다.

한국의 기업 중 한 곳에서 한지 가죽을 개발해 생산 중이며 판매는 아직 미정이라고 들었는데 대회의 재료로 발탁되어 룸 안에 있었다는 게 놀라웠다

“어때?”

“가능할 거 같습니다. 내구성이 상당합니다.”

“오케이!”

다행히 위기를 쉽게 넘기고 다시 작업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거의 끝나가는데. 의상 확인 좀 해야겠어.”

패턴 작업을 잠시 멈추고 류미리에게 다가가 가봉된 의상을 바라봤다.

‘좋아. 좋은데 디테일하지 않아.’

“이 부분은 더 펴주셔야 할 거 같아요. 가죽이 들어가는 부분과 원단의 부분은 재봉으로 경계선 만들어 주세요. 그리고 주름 쪽 여기랑 반대편은 스팀으로 찍어주세요. 고정되게.”

“네.”

아주 디테일해야 한다.

여러 벌이 아닌 오직 한 벌의 의상으로 큰 판가름이 달라지기에 예민할 수밖에 없었다.

‘아틀란티스라.’

상위 의상은 도시와 그 도시를 덮고 있는 아름다운 하늘을 표현하고 있다.

레크라인은 Asymmetri 비대칭 라인을 이용해 경계를 두었고 가죽을 제외한 최상단의 비대칭 디자인은 카울(Cowld) 디자인을 혼합해 부드럽게 떨어지는 푸른 실크가 겨드랑이 아래로 밀어 넣었다.

가죽과 실크의 경계라인이 도시와 하늘의 따로 느끼게 해줄 게 분명했고 부조화스러운 이 조합이 조화롭게 변해 극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해 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나는 류미리를 뒤로하고 치마를 제작하고 있는 3명의 여사님에게 다가갔다.

“여사님들 치마 신경 써 주셔야 합니다. 가장 중요해요. 길이 맥시까지 늘려주세요.”

“알겠네.”

맥시(Maxi)는 스커트의 길이를 표현하는 용어다.

가장 짧은 마이크로(Micro)를 시작으로 허리에서 단 끝까지 105cm가 넘는 풀(Fall)까지 11가지의 길이 용어가 있다.

“원단도 디자인대로 잘 겹쳐주셔야 합니다.”

“알겠어요. 대표님. 정성을 다하고 있습니다.”

“당연하지 이런 큰 대회에 정성을 다해야지.”

“감사합니다.”

이번 디자인은 원피스 형태가 아닌 투피스 형태로 모두 따로 제작되어 하나로 만들어질 예정이다.

‘스커트 디자인은 완벽해.’

스커트는 여러 가지 형태 중 세 가지를 골라 새로운 형태를 탄생시켰다.

변화무쌍한 바다를 표현하기 위해서 말이다.

버블(Bubble)과 고데트(Godet) 그리고 마지막으로 레이어드(Layered)를 합칠 것이다.

버블은 단 끝의 아랫부분이 아래 뒤쪽으로 들어가 있어 볼륨효과를 낸다.

살짝 말려 올라오는 느낌의 아랫단은 파도가 치는 해변을 연상시키며 풍성함을 만들어 줄 것이며 고데트는 삼각형의 헝겊을 이어붙인 듯한 형태로 단 끝 모서리로 갈수록 풍성하게 보이는 치마가 만들어진다.

버블과 고데트의 궁합은 치마의 풍성함을 극한으로 끌어올려 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레이어드로 여러 층의 원단을 겹겹이 겹쳐 현대적이면서도 세련된 미를 줄 것이다.

치마 하나로 여러 가지 아름다움을 표현할 것이며 가장 메인 디자인이라 할 수 있었다.

“류미리 디자이너 최종까지 확인해주시고 틈틈이 보고 해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나는 다시 구두 제작으로 넘어가 상황을 살폈다.

총괄이기에 하나에 얽매여 있을 수 없다.

“어떻게 되어가고 있어?”

김형준은 집중해서 구두를 제작하고 있었고 안정원도 그에 못지않은 솜씨를 발휘하고 있었다.

두 팀원이 굉장한 시너지를 발휘하는 모습에 감탄할 수밖에 없을 지경이다.

“랍스터 형식이라 그런지 특이하긴 하네.”

랍스터(Lobster claw) 알렉산더에서 SS2010에 선보인 구두 디자인으로 랍스터의 집게발을 연상케 하는 형태의 구두다.

디자인의 큰 변화를 주었기에 원조적인 느낌은 많이 벗어났다.

하지만 특이한 디자인일 수밖에 없었다.

안정원은 아틀란티스 콘셉트에 가장 적절한 디자인을 찾는 와중 랍스터 방식을 결합한 최종안 디자인을 가지고 왔었다.

나는 그가 내민 디자인에 매혹되어 최종안을 만들라고 지시했었다.

그의 도전과 열정에 내가 응원을 보냈다고 보는 게 더 맞는 표현인 듯하다.

“랍스터 디자인인 거 같은데. 많이 변형했네요. 이거 평범한 디자인이 아닌 건 알죠? 잘못 디자인하면 전체 밸런스가 다 무너질 거예요.”

“네, 알고 시작했습니다. 랍스터의 특성이 큰 앞굽 디자인을 버리고 새로운 랍스터 디자인을 만들 생각입니다. 지금 디자인은 초안으로 많은 변화를 가져올 겁니다. 믿어주시면 책임지고 만들어 내겠습니다.”

“좋아요. 해봐요.”

시간이 지나 안정원이 내민 최종 디자인은 랍스터의 곡선과 뒷굽의 모양만 가져왔을 뿐.

완전히 새로운 형태 디자인으로 탄생했다.

앞굽은 랍스터와 플랫폼(Platform)을 섞어 얇게 만들었는데 마치 꽃게의 집게 같았고 뒷부분 높이를 다운시켜 웨지(Wedge)로 만들었다.

[플랫폼은 두꺼운 솔이 있는 최소 4인치의 굽을 가진 구두이며 웨지는 발바닥 아래와 발뒤꿈치의 모든 부분을 통틀어있는 굽을 말한다.]

불편해 보이던 곡선의 구두를 아주 편안하게 만든 디자인이었다.

‘끼어들 틈이 없네. 잘해주고 있어.’

“완성되면 말해줘요.”

“네, 대표님!”

이제 곧 의상이 완성된다.

구두와 의상이 마무리 단계까지 왔고 가방은 나와 다니엘이 마무리 지으면 된다.

나는 떨리는 마음을 추스르며 구두칼을 들어 올렸다.

* * *

에릭은 호텔 방에서 오랜 시간 고민에 빠져 있었다.

차진혁이 진짜 자신을 도울 수 있는 인물인지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고민에 빠져 있는 그때.

호텔에 초인종이 울려 퍼졌다.

“누구지?”

인터폰으로 확인한 결과 호텔 직원이다.

“무슨 일이시죠?”

“네, 고객님 룸서비스입니다. 물과 수건 가져왔습니다.”

“시킨 적 없는데요.”

“아… 주기적으로 챙겨드리는 겁니다.”

에릭은 이상한 느낌을 받았고 USB와 종이를 몸 가까이 당겼다.

그리고 예상처럼 마스터키를 이용해 강제로 문이 개방되었다.

그리고 나타난 낯선 인물.

“에릭!”

아르노의 오른팔인 총괄 비서관.

그는 화가 잔뜩 묻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도망갈 데 없어!”

“그렇다고 내가 순순히 따라갈 거 같아!”

에릭은 가까이 다가오는 비서관과 부하 둘과 대치하며 문서와 USB를 주머니에 숨겼다.

“자료 가져와! 네가 감당할 물건이 아닌 거 너도 잘 알잖아.”

“그건 내가 정할게. 아르노의 개야.”

“이 새끼가! 다들 뭐해 잡아.”

순간 덩치 둘이 에릭에게 다가왔고 그는 탁자를 앞에 막아섰다.

그리고 에릭은 탁자 위로 올라가 가슴 품에 있던 총기를 꺼내 들었다.

“총?!”

“이 정도 준비는 해야지. 목숨을 파리같이 여기는데.”

“그 총 내려놔! 어린놈이 가지고 놀 게 아니니까.”

“닥쳐!”

에릭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잡아당겼다.

그 순간 모두 움찔하며 고개를 바닥에 내리꽂았다.

“겁들은 많아가지고.”

쓕욱!

순간 총기의 구멍에서 막대한 양의 가스가 분사되었다.

실탄 총이 아닌 호신용 가스총.

하지만 에릭이 구입 당시 개조를 한 터라 가스 분출량이 어마어마했다.

잘못하다가는 질식사할 정도의 분사량을 가지고 있었다.

에릭은 미리 준비한 휴대용 방독마스크를 착용하며 가스가 가득한 공간으로 파고들었다.

“에릭 이 개자식!”

바닥에 나뒹구는 모두를 보며 에릭은 다시 도망치기 시작했다.

“어떻게 알아낸 거야….”

에릭은 빠르게 비상구를 통해 호텔을 빠져나왔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할까? 역시 거기뿐인가.”

고민은 사치가 되어버린 상황이다.

“그래, 믿어보자.”

에르맥스 세계 패션 대회 본선 4.

* * *

사회자가 제작 종료를 알려왔다.

“브랜드 관계자분들은 모든 작업을 멈춰주세요! 종료를 알립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시간을 확인했다.

아리raM은 간발의 차이로 의상, 가방, 구두를 만들어 냈다.

“다행이네요. 아슬아슬했어요.”

“그러게요. 가방이 생각 이상으로 시간을 많이 잡아먹었네요.”

가방을 만드는 과정에서 많은 시행착오가 발생했고 우리는 빠르게 수정과 제작을 반복해야 했다.

그중 가장 큰 문제는 역시 가죽이었다.

바느질 장력에 의해 가죽의 타공 부분이 손상되기 일쑤였고 애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다행히 다니엘이 기지를 발휘하며 그 부분을 타개했다.

“완성 상태도 양호하고 아주 좋아. 우리가 생각했던 디자인 그대로 만들어졌어.”

“고생했어. 이번만큼은 인정한다.”

“인정은 무슨. 너보다 내가 가죽은 한 단계 위거든.”

“그런가?”

“아오….”

다니엘은 만들어진 가방을 보며 만족한 듯 미소를 보였다.

나 또한 그의 미소에 화답해주듯 환한 미소로 답했다.

“그건 그렇고 다른 브랜드 분위기는 어때?”

끝까지 가방 제작에 집중한 다니엘의 첫 질문이었다.

종료를 알리는 순간부터 일정 부분 판가름 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우리의 기대와는 다르게 류미리가 가까이 다가와 걱정 가득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다들 굉장해요. 표정들이 벌써 우승한 사람들 같아요, 진짜 아시아 어워드 때랑은 차원이 다른 거 같아요. 오트 쿠튀르를 한곳에 모아놓은 거 같달까?”

“그 정도야?!”

아시아 패션 어워드부터 지금까지 많은 경험을 쌓은 류미리가 감탄을 터트릴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아시아 패션 어워드와는 스케일이 다르다.

중·소기업에서 작은 공방까지 실력을 갖추지 못한 브랜드도 참여한 게 아시아 패션 어워드다.

그만큼 엉성했고 상당수가 실력이 부족했을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여기는 세계 대회의 본선이다.

예선 자체도 작은 기업은 살아남을 수조차 없었고 2차전만 해도 세계적인 심사위원들이 모여 우리를 평가했다.

분명 극명한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다.

다니엘은 제작 부스를 빠져나와 타 브랜드의 완성된 의상과 가방을 천천히 살피기 시작했다.

“다들 이를 악물고 만들었네. 가방만 봐도 상당한 퀄리티야. 이 짧은 시간에 이 정도라니.”

“모두 세계적인 제작자들이야. 이 정도는 생각했었어.”

“진혁! 샤네르 부스 봐봐.”

“왜?!”

“저 손잡이 엄청난 고급 스킬이 들어갔어. 저것만 한 사람이 지금까지 만들었을 거야.”

다니엘의 말에 샤네르의 가방에 눈이 돌아갔다.

“그러네… 손잡이만 해도 한 명이 오랜 시간 동안 만들었겠는데.”

크로스 of 크로스, 원형 타공을 이용해 실로 디자인을 만들어 내는 땀의 방식이다.

실이 가는 방향에 따라 그림이 달라지듯 마치 손잡이에 샤네르를 집어넣어 놓은 모습이 비쳤다.

손잡이에 예술을 집어넣은 듯했다.

그리고 나는 옆에 있는 샤네르의 의상이 들어왔다.

‘장난 아니네… 이 짧은 시간에 저게 가능하단 말이야?’

샤네르의 가방의 포인트인 체크 누빔을 드레스에 접목시켰고 체인 또한 사용되었다.

차가운 느낌이 강한 블랙을 더 강조해서 만든 디자인.

마치 자신들의 메인 가방을 의상으로 새로이 탄생시킨 거 같았다.

“긴장되긴 하네. 결선에 올라가야 하는데.”

“걱정 마. 저 사람들도 우리 가방, 의상 보면 분명 그런 생각할 테니까.”

“그건 그렇지 우리도 뒤지지 않아.”

나는 다니엘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다시 부스로 돌아왔다.

세계적인 디자이너들이 모여 있었기에 군더더기 없는 흐름으로 완성도를 가져올 거라 일찌감치 예상했다.

하지만 내 생각을 조금 더 상회하는 건 분명하다.

‘세계 최고의 명예가 달렸으니 죽기 살기로 하는군.’

분야의 최고들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한눈에 보아도 의상의 디자인과 컨셉트를 알아볼 수 있었고 스토리가 눈에 띄었다.

그 말인즉 재료를 적재적소에 아주 잘 사용했다는 소리.

어느 누가 우승한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퀄리티를 가지고 있었다.

‘이래야 세계 대회지.’

나는 다른 브랜드의 의상을 보는 순간부터 가슴이 더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긴장이 아닌 설렘이 분명했기에 기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보고 오셨어요? 다들 대단하죠.”

“세계 대회니까 이 정도는 예상했어요. 누가 이길지는 끝까지 가봐야 하는 거니까 류 디자이너도 너무 긴장하지 마요.”

“네! 저는 대표님만 믿고 있는 걸요. 다들 그럴 거예요.”

내가 주위를 둘러보자.

제작 장인들이 나를 보며 환하게 미소 지어 주었다.

‘세계의 정상에 함께 서야겠네.’

“다들 수고하셨어요. 이제 컬렉션이 남아있으니 즐기세요.”

마지막이 아니다.

곧 해가 떨어지면 본선의 컬렉션이 열리게 될 것이다.

여기서 모든 게 판가름 날 게 분명했다.

* * *

에릭은 다시 광장으로 돌아왔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처럼 절대 이곳으로 돌아올 거라는 생각은 못 할 거 같았다.

그리고 자신이 만나야 하는 사람이 이곳에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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