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2화 (192/200)

카핑을 하는 수고가 덜어진다면 제작 과정을 더 길게 가져갈 수 있다.

나는 데세르토 가죽을 가지고 룸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들려오는 환호의 소리에 정신이 멍해졌다.

“대단합니다. 차진혁 디자이너.”

“와아!”

“아리raM은 재료 선택에서 만점을 가져갑니다.”

* * *

에릭은 대회장을 빠져나와.

LVMH 본사로 향했다.

“가만두지 않겠어.”

분명 아르노가 아니었다면 디자이너가 될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얽매여 자신을 숨기며 평생을 살아갈 수는 없었다.

에릭은 평생 그의 노예가 될 것 같은 불안감에 새로운 선택을 하기로 결심하고 어느덧 그의 발은 아르노 사무실 앞에 도착해 있었다.

그때 아르노 회장의 비서가 말을 걸어왔다.

“어쩐 일로?”

비서 또한 에릭의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이기에 큰 거부감은 없어 보였다.

에릭은 그녀를 속이기 위해 거짓말을 이었다.

“회장님한테 전해드렸던 디자인 북이 사무실에 있다고 해서요. 가지러 왔습니다.”

“아 그러셨군요. 잠시만요. 회장님에게 다시 한번 확인하겠습니다.”

‘멍청하긴….’

자신의 안일함에 혀를 찼다.

‘받지 마!’

아르노는 대회장에 있다.

연락이 닿는다면 순식간에 이번 일은 물거품이 될지도 모른다.

더 안 좋은 상황만 만들어질 뿐이었다.

에릭은 제발 통화 연결이 되지 않기를 바랐다.

뚜루루루― 뚜루루루―

“안 받으시네요. 총괄 비서님도 안 받으시고….”

에릭은 천당과 지옥은 순식간에 넘나들었다.

그리고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다시 한번 둘러대기 시작했다.

“회장님이 직접 지시하셨어요. 빨리 가져오라고.”

“아 그래요… 그럼 빨리 가지고 나오세요. 아니면 저 혼나요.”

“네. 알겠습니다.”

에릭은 가슴을 쓸어넘기며 아르노 회장의 사무실 문을 열었다.

그리고 USB 하나를 컴퓨터에 꽂아 넣었다.

“제발 빨리!”

그는 컴퓨터 안에 있는 아르노의 탈세 파일을 찾기 시작했다.

“어디 숨겨둔 거야!”

분명 자신이 알기론 이 컴퓨터 안에 탈세와 비리 장부가 담겨 있다.

명품회사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진 검은돈이 정치권과 조직에 흘러 들어갔다는 걸 알고 있다.

고가의 가방과 귀한 원료를 돈으로 다시 바꾸고 거래 대금으로 사용하며 그걸 다시 체인화된 브랜드에 되파는 물타기 형식의 돈세탁.

그리고 작은 기업들의 이윤을 착복하고 배를 불리는 일도 서슴지 않았기에 그 많은 돈들이 분명 아르노의 배만 불린 것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확실한 증거는 아르노와 총괄 비서의 대화를 집에서 들은 적이 있었다.

똑똑!

파일을 찾고 있는 그때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아직이세요? 저 잠시 들어갈게요.”

그리고 문이 열렸다.

이상한 눈빛으로 에릭을 바라보는 그녀.

“여기 있네요.”

에릭은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책상 위에 있는 디자인 북 하나를 들어 올려 비서를 안심시켰다.

그리고 다시 컴퓨터 화면을 살짝 바라봤다.

간절했고 긴장되는 순간.

이 순간을 놓친다면 절대 다시 기회는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때.

이때까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몽롱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스치듯 환한 빛이 비켜 지나갔다.

“저건….”

마치 자신이 찾는 그것이 여기 있다는 듯이 나에게 알려주는 기분.

화면 아래 일그러져 있는 파일 하나가 보이기 시작했다.

투명화 기능을 시켜놓은 메일 이미지의 아이콘.

에릭은 마우스에 조심스레 손을 올려 투명화를 풀었다.

‘역시!’

그리고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비서관을 속이기 위해 다시 한번 거짓말을 이었다.

“잠시만요. 디자인만 확인할게요.”

‘암호가 걸려있어.’

한 번에 모두 들고 나간 뒤에 암호를 풀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빠르게 세워졌다.

데이터 양이 꽤 큰 편이라 시간이 더 필요했다.

시간을 끌어야 한다.

“네.”

에릭은 디자인 북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젠장 이건 또 뭐야 디자인 북이 아니잖아.’

에르맥스 세계대회에 대한 보고서.

‘심사위원들을… 비열한 영감탱이.’

에릭은 데이터가 모두 옮겨진 걸 확인하고 USB와 디자인 북을 들고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이제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언론사? 아니야….”

파리에 있는 언론사에 그룹의 영향권에 들지 않는 곳이 없다.

세계적인 언론사나 잡지사 모두 LVMH 그룹의 눈치를 본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적에게 이 자료를 넘기는 것이다.

에릭은 다시 디자인 북 파일을 꺼내 펼쳤다.

디자인 북에 숨겨진 결재 파일 원본.

이곳에는 심사위원들에게 여러 브랜드의 평점을 지시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역시 아리raM을 배척하려 하네.”

예측은 했지만 아리raM과 무슨 일이 있는 게 분명했다.

“차진혁 디자이너… 아버지의 동생이란 말이지.”

에릭은 모든 파일을 들고 택시를 잡아탔다.

* * *

“무슨 일이야?”

“회장님 에릭이 사무실에 다녀가셨습니다.”

“응?!”

“회장님이 시키신 파일이 있다고 하던데… 지시하신 거 아니신가요?”

“…….”

“회장님!”

“아니야. 보안 담당이랑 불러둬 당장 들어갈 테니까.”

“네….”

순간 비서는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보안 담당이라니 에릭이 무슨 짓을 저질렀다는 소리로 들려왔다.

“에릭! 개자식.”

비서는 자신이 속았다는 걸 뒤늦게 알아차렸다.

.

.

.

아르노는 대회가 끝이 나기도 전에 회사로 들어왔다.

에릭이 무슨 생각으로 자신의 사무실을 무단으로 들어왔는지 알 수 없었기에 더 불안했다.

그를 이용하기에 더 가까이 뒀고 많은 비밀을 알고 있을 수밖에 없는 위치였다.

“젠장!”

아르노는 사무실 소파에 앉아.

소리를 질러댔다.

그 소리에 비서관과 보안 담당은 움찔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이상 없어?”

아르노의 질문에 보안 담당이 말을 이었다.

“파일이 빠져나간 게 확인되었습니다. 회장님이 직접 확인하셔야 할 거 같습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화면을 바라봤다.

그리고 깨달았다.

자신이 숨겨둔 비자금 내역과 거래 장부가 통째로 에릭의 손에 들어갔다는 걸.

“파일마다 비밀번호가 걸려있어서 그나마 다행인 거 같습니다.”

“그게 무슨 다행이야! 마음만 먹으면 쉽게 풀 수 있는 비밀번호일 텐데.”

“그건 그렇지만….”

아르노는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유리컵을 벽으로 강하게 집어 던졌다.

이 파일 안에는 세탁된 자금과 정치인들에게 빨려들어 간 자금 그리고 작은 회사들을 착복해 세금을 탈루한 정황이 모두 담겨 있었다.

큰 죄목들이 여러 개 섞여 있는 판도라의 상자와 같았다.

“빨리 에릭 찾아!”

아르노는 총괄 비서에게 소리쳤고 그는 빠르게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배은망덕한 새끼! 찾아서 죽여버려.”

마음만 먹으면 에릭을 찾는 건 시간문제다.

하지만 파일의 행방이 문제가 될 수 있다.

정말 세상에 알려진다면 엄청난 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

오랜 세월 시간이 흘러 세계 곳곳에 흘러 들어가 있을 게 분명했다.

마치 피라미드처럼 형성된 네트워크에 균열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이 파일을 어떻게 찾아간 거야!”

에르맥스 세계 패션 대회 본선 3.

* * *

제작이 이루어지는 과정은 매우 정교하게 이루어졌다.

대회에 참여하는 브랜드들 모두 신중을 기해 디자인과 제작을 이어가는 모습이 비쳤다.

그중 단연 인피니티가 압도적인 속도로 디자인과 제작을 이어갔다.

최소한의 인원으로 최고의 효율을 보여주는 모습이다.

“인피니티 대단하네요.”

“그러게요. 준비한 디자인 수정할 부분도 없어 보이고 바로 제작에 들어가는 거 같아요.”

디자인 수정에 따른 시간도 상당히 소모되기에 앞서나간다고 볼 수 있었다.

“다니엘, 가죽 상태는 어때.”

다니엘은 내가 선택한 선인장 가죽을 이리저리 살피며 일부를 재단해 피할하기 시작했다.

생소한 가죽이기에 제작을 들어가기 전 시험해볼 사항이 존재했다.

“나쁘지 않아. 일반적인 가죽이랑 크게 다른 게 없기는 한데 피할하는 과정 중에는 좀 조심해야 할 거 같기는 해. 미세한 입자로 이루어진 가죽이라서 조금만 실수해도 손상이 크게 오는 거 같거든.”

“조심해서 재단해야겠네.”

“3mm 정도 여유를 주고 재단해 줘. 피할하고 나서 다시 수정 재단하는 게 깔끔할 거 같거든.”

“알겠어. 이 부분만 마무리하고 가방 제작 들어갈게.”

“나도 여기 얼른 마무리하고 가방 제작 시작해야겠다.”

다니엘은 이번 아리raM의 디자인 컨셉에 가죽이 상당히 들어가기 때문에 의상 제작에 참여한 상태다.

주제명 – 아틀란티스.

사람들이 상상하는 아름다운 바다 그 안에 또 다른 도시이자 세계를 의미하는 아틀란티스 우리는 이 주제를 의상에 담기로 했다.

다니엘이 만들고 있는 가죽 의상은 건축물을 표현해 줄 것이며 원단으로 만들어진 의상은 아름다운 바다의 도시를 재현해줄 것이다.

“가방 패턴은 내가 만들어둬야겠네. 디자인 수정부터.”

생각하던 주제가 아닌 재료 자체가 달라졌기에 아주 디테일한 부분은 제외시키는 게 시간과 제작에 유용하다.

그런 의미에서 약간의 디자인 변경은 어쩔 수 없었다.

“바로 변경하는 게 좋겠지.”

디자인 용지에 하나하나 수정하기에는 시간이 없다.

패턴을 재단하는 순간순간.

감과 이때까지의 노하우로 그것은 모두 커버해야 한다.

내가 가죽 패턴 용지를 꺼내 선을 그려나가기 시작하려는 그때.

구두 디자이너와 제작자인 안정원과 김형준이 나에게 다가와 말을 이었다.

“대표님 가죽 부분 너무 약한데요. 가죽이 사람이 걸을 때마다 실리는 순간적인 힘을 받을 만큼 더 질겨야 하는데 너무 늘어납니다.”

“…….”

큰 문제가 발생했다.

가죽을 선택할 때 구두도 분명 유념했다.

가죽은 얇게 피할해 여러 겹 덧대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다니엘이 말했듯 피할 자체부터가 까다로운 가죽이었다.

그렇다면 다른 방법을 찾아내 내구성을 끌어올려야 한다.

분명 심사기준에 내구성도 상당 부분 차지할 것이기에 모양만 찍어낼 수는 없었다.

“잠시만… 아까 전에 내가 가져온 다른 가죽 확인해 봐.”

“다른 가죽이요?”

“한지 원단 같은 가죽 있을 거야. 제일 아래에 있는 가죽 가져와 봐.”

“네.”

김형준은 가죽 더미를 들쳐 가장 아래에 있는 가죽을 들었다.

그는 가죽을 멍하니 바라보며 이리저리 만져보기 시작했다.

“얼른 안 가지고 오고 뭐 해!”

“아… 네.”

“이거면 될 거 같은데. 피할해서 내피로 보강해봐.”

“네. 근데 이 가죽 뭔가요? 엄청 까칠할 느낌인데. 질감이 진짜 종이 같네요.”

“하우지라고 한국 회사가 만든 가죽이야.”

“하우지?”

하우지(Haungi) 한지 원료인 닥나무에서 생산된 면을 혼합해 만들어진 친환경 가죽이다.

재료를 모두 선택하고 룸에서 빠져나오기 전 내 눈에 뜨였다.

닥나무가 원료여서인지 매우 질기면서도 탄성이 좋은 가죽인 대신 질감이 다소 거친 면이 없지 않아 존재한다.

“다행이다. 가지고 오길 잘했어. 하우지가 있을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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