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리고 알 수 있었다.
김서진.
자신과 아주 많이 닮은 사람이 그곳에 서 있다는 걸.
외모로 보아 20살도 채 되어 보이지 않는 이국적인 외모를 가진 소년이다.
나를 놀라게 한 건 그 소년의 머리 색이었다.
내가 알고 있는 저 황금빛이 은은하게 피어나는 머리 색상은 그녀밖에 없기 때문이다.
“대표님! 무슨 생각하세요.”
“죄송해요.”
순간 나도 모르게 걸음걸이가 그 소년을 향해 움직인 듯했다.
놓치면 안 된다는 간절한 마음마저 들게 할 정도로 무의식적으로 몸이 움직였다.
하지만 류미리가 내 팔의 옷깃을 잡고 끌어당기며 나를 말렸다.
“왜 그러세요. 정말 집중!”
“아…….”
나는 류미리의 말을 흘려버리고 저 많은 인파 속에 서 있는 소년을 놓치지 않기 위해 고정시켰다.
그때 한은샘이 무대 위로 올라왔고 사회자는 다음 차례로 아리raM을 외쳤다.
“다음 차례는 아리raM입니다. 누가 대표로 나가시겠습니까.”
사실 이번에는 다니엘을 내보낼 생각이었다.
본선에는 가죽 소재가 많이 들어가기에 내린 결정이지만 나는 앞으로 나가는 다니엘의 팔을 잡고 말을 이었다.
“다니엘 미안한데 내가 나가게 해줘.”
“뭐 상관은 없지. 너라면 원단도 볼 수 있을 테니까. 근데 왜 그래?”
“갔다 와서 말해줄게. 미안.”
나는 빠르게 무대 아래로 내려와.
은은한 빛이 사라진 소년 앞에 멈추어 섰다.
“혹시 제 형과 관련된 사람이신가요?”
“네?!”
“많이 닮은 거 같은데. 혹시 김시현 디자이너와 무슨 관계인지 물어보는 겁니다.”
소년은 나를 빤히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런 답을 내지 않았다.
그러고서는 잠시 고민하더니 빠르게 몸을 돌려 수많은 인파 속을 파고들었다.
“잠시!”
내가 손을 뻗었지만, 그는 어느덧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분명… 나와 그녀 사이에서.’
이제야 왜 그녀가 사라졌는지 알 거 같았다.
‘저 아이 때문에… 나를 위해서.’
나는 웅성거리는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죄송합니다. 제가 아는 사람을 본 거 같아서.”
사회자는 고개를 끄덕인 이후.
“빠르게 룸으로 입장해주시기 바랍니다. 차진혁 디자이너.”
그렇게 나는 룸의 문을 열고 발을 내디뎠다.
* * *
에릭은 혼란스러웠다.
얼핏 보기에 하나도 닮지 않은 사람이 나에게 자신의 형과 관계가 있냐니.
이게 무슨 소리인가.
“그러고 보니.”
최근 1년 사이 아르노에게 많은 일이 있었던 걸 그도 알고 있다.
한국에 가는 일이 잦았고 자신에게는 많은 걸 숨기고 있다는 것도 말이다.
그리고 어느 날은 자신의 직무실로 불러 누더기 같은 옷을 보게도 한 사건 이후.
자신을 경계하고 이용하기 시작했다.
특정한 물건이 있으면 꼭 자신을 불러 보게 했으니 이상할 수밖에 없었다.
‘그 커다란 가운에서는 은은한 따뜻한 빛이 타고 흘렀었지. 그 일과 관련된 걸지도 모르겠네.’
그 옷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 옷을 볼 때마다 뿜어져 나오는 은은한 빛은 자신을 평온하게 만들어 주었기에 시키지 않아도 핑계를 만들어 몇 번이나 찾아간 적이 있기에 알 수 있었다.
“그 사람 분명 김서진 디자이너를 형이라고 했어… 그럼 김서진의 친동생이란 말이야? 성이 다른데….”
에릭은 복잡한 생각에 빠져들었다.
한국의 차진혁이라는 디자이너가 자신의 아버지의 동생이라면 자신에게는 삼촌이지 않은가.
아르노에게 벗어나 가족이라는 존재를 얻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쯤 다시 한번 이어폰의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디 간 거야! 에릭!”
에릭은 다시 이어폰을 귀에 끼고 말을 이었다.
“무슨 일이죠?”
“이제 시작해. 디자인 설명해달라고.”
“아…….”
에릭은 알 수 없는 감정에 휘말리듯.
한은샘의 말을 거부하고 싶어졌다.
“어쩌지….”
그 순간.
이어폰에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릭! 뭐 하는 거야 배은망덕한 놈 당장 말하지 못해!”
“네….”
버럭 화를 내며 따져 묻는 사람은 아르노였다.
아까 전에 있었던 일과 지금 나의 모습까지 감시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는 철두철미했기에 자신을 절대 놓아줄 리가 없었다.
에릭은 다시 무대 근처로 이동해 말을 이었다.
“빨리!”
한은샘은 굳은 표정으로 펜과 디자인 북을 들고 있었다.
시작도 못 한 것이다.
‘어떻게 하나의 브랜드를 만든 사람이란 말이야.’
에릭은 혀를 차며 이어폰으로 말을 이었다.
“가장 강한 빛이 났던 건 마로 만들어진 오가닉 린넨이었습니다. 그리고 가죽은 파란 물결을 입혀놓은 거 같은 토고가죽이고요. 의상은 디자인 북 43번, 가방은 154번이면 될 거 같아요. 가장 재료와 어울리며 트렌디하면서 자연적인 느낌이 강합니다. 의상의 느낌은 23번이랑 58번을 참조하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에릭의 말이 이어지는 순간.
원단과 가죽이 결정되었고 디자인까지도 결정되었다고 보면 된다.
마치 치트키를 치듯이 일사천리로 디자인을 만들 수 있게 된 것이다.
한은샘은 이어폰으로 흘러나오는 소리에 디자인 북을 펴 마치 자신이 미리 준비해둔 디자인인 거처럼 스케치를 시작했다.
그도 나름 회사를 운영하는 대표 디자이너이기에 에릭의 디자인을 보고 완성형 디자인을 만드는 건 식은 죽을 먹는 것보다 쉬웠다.
“고마워.”
한은샘은 짧은 말을 남기고 이어폰의 연결을 끊었다.
에릭은 순간 끓어 오르는 분노에 이어폰을 바닥에 내던졌다.
“이대로는 안 돼!”
순간 깨달은 동시에 마음의 결심을 굳혔다.
아르노의 손을 벗어나기로 말이다.
그렇게 에릭은 많은 인파들 속에 파고들어 아르노를 피해 어디론가 향했다.
에르맥스 세계 패션 대회 본선 2.
* * *
투명한 유리 안은 여러 가지 시스템이 들어서 있었다.
가죽과 비싼 원단을 보호하기 위해 온도, 습도, 자외선 차단까지 최적화된 보관 공간이다.
“신경 많이 썼네. 이럴 때가 아니지.”
재료를 고를 수 있는 제한 시간이 존재하기에 분주하게 움직여야 한다.
주위를 살피는 그때 눈에 띄는 원단을 발견했다.
밝은 청색의 두꺼운 종이 같은 질감의 원단으로 우리가 만든 디자인과 아주 어울릴 만한 원단이다.
“좋은데.”
하지만 내가 손을 가져대는 순간 원단에서 검붉은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마치 자신을 만지지 말라는 경고성 메시지를 가득 담고 있었다.
‘능력이 재료도 알려주는 건가?’
검붉은 빛이 뿜어져 나온다는 건 부정적인 의미가 강하다.
그렇다는 건 빛이 뿜어져 나오는 것만 고르지 않는 게 답이라는 소리.
나는 빠르게 능력에 대해 눈치채고 모든 원단을 만져 보기로 결정했다.
“하 지치네.”
어찌 된 일인지 한쪽 벽면 전체에서 검붉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내가 의아한 건 확신이 있는 마 재질의 원단조차도 검붉은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이건 분명 오가닉인데!”
슬슬 짜증이 몰려왔다.
내가 알고 있는 브랜드의 원단마저도 검붉은 빛이 튀어나왔기 때문에 능력에 오류가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전광판 시계의 초침이 빠르게 움직이는 걸 확인했다.
“능력에 치중하지 말자.”
그렇게 다짐을 하며 천천히 원단을 다시 고르기 시작했다.
“이거다.”
크림색을 가진 실크로 오가닉 제품으로 유명한 회사의 원단이다.
안이 훤히 비치는 아주 얇은 원단으로 우리가 만든 디자인에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손으로 잡는 순간.
검붉은 빛이 다시 한번 피어올랐다.
“아씨!”
내가 짜증을 입으로 뱉어내는 그 순간.
“으악!”
룸 안에 있는 나와 밖의 많은 인파의 시간이 어긋나듯 모든 게 멈추었다.
“뭐지?”
이변의 연속.
영상이 아닌 시간만을 살짝 비튼 거 같이 모든 사물이 멈추었다.
나는 심호흡을 가다듬고 다시 원단을 매만졌다.
“아… 알았다!”
조화.
친환경 소재도 여러 종류의 습성과 특징을 가진다.
100% 모두가 친환경이지 않다는 소리다.
빛은 그걸 나에게 알려주고 있다.
그리고 마침내 검붉은 빛이 아닌 원단 몇 개를 발견했다.
누에에서 바로 뽑아낸 실로 만든 거 같은 아주 부드러운 명주 천으로 염색 또한 친환경 천연 염색을 한 듯 보였다.
은은하게 빛나는 푸른빛이 아주 아름다운 원단 두 개를 골랐고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눈여겨 봐온 원단 가까이 다가갔다.
“플라텍스.”
재활용을 이용해 만들어진 친환경 원단.
보통 일반적으로 50% 이상 원료를 재사용해 만든 원단을 친환경 원단이라 인증해 부르게 된다.
하지만 플라텍스는 100%의 재생원료를 사용해 만들어진다.
투명한 PT병을 잘게 조각내 다시 원사를 뽑아낸 형태로 만드는 원리로 원단의 두께를 정할 수도 있고 색을 입히기에도 매우 친환경적이다.
리사이클한 원단 중에서도 매우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었다.
“두께감도 적당하고 나쁘지 않네.”
나는 천연 염색된 명주 천과 플라텍스를 골라 들었다.
아리raM의 디자인과 아주 어울릴 만한 원단 두 개를 겨우 찾은 듯하다.
그에 호응하듯 두 원단에서 밝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좋았어!”
원단을 모두 찾았고 다음은 가죽만이 남은 상태다.
“카프스킨이 필요한데.”
우리에게는 생후 6개월 미만의 어린 송아지 가죽이 필요했다.
자연 친화적인 디자인이라는 주제에 맞게 이번 의상에는 푸른 청색과 부드러운 가죽을 접목시킬 생각이기에 많은 양의 가죽이 필요하다.
하지만 귀한 재료이기에 무두질 또한 친환경일 수가 없다.
특유의 색과 촉감을 만들기에는 전통적인 방법이 유용하기 때문이다.
“대체품을 찾아야 하나… 부드러운 가죽이어야 하는데.”
가죽 공간으로 이동해 꼼꼼히 가죽을 확인했다.
카프스킨이 아니더라도 부드러운 소재의 가죽은 무수히 많다 하지만 친환경이라는 단어가 붙는다면 선택의 폭이 좁아지기 마련이다.
웬만하면 제작비를 줄이기 위해 화학 약품과 전통 방식 제조 공정을 거치기 때문이다.
“찾았다! 데세르토(Desserto) 가죽이야!”
아주 미세한 부드러운 질감과 이때까지 느껴보지 이질적인 촉감의 가죽.
만지는 순간 이것이라는 직감이 들 정도로 부드러웠다.
데세르토(Desserto) 가죽은 친환경 소재의 가죽으로 선인장으로 만든 가죽이다.
선인장은 본래부터가 척박한 환경에서 물이 많이 필요하지 않은 식물로 풍부한 섬유질을 가진 식물이다.
그러한 이유에 선인장을 가루로 만들어 이를 섬유화하는 원료와 혼합해 만든 가죽으로 천연가죽과도 매우 흡사하기로 유명하다.
가죽의 수명도 천연가죽과 흡사하며 친환경 소재로 각광받고 있다고 알고 있다.
“제조사가? 알질로! 멕시코 회사야.”
데세르토 가죽 자체가 멕시코에서 개발되었다.
“그렇다면 확실하네.”
대부분 무두질 과정은 동남아시아권이나 이태리 권역에서 이루어지기에 멕시코일 수가 없다는 나의 판단이다.
“데세르토라면 친환경 소재이기도 하고 가죽과 가장 흡사해.”
천연가죽을 염색할 필요도 없어졌다는 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