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9화 (189/200)

“네, 아리raM은 준비 끝났습니다. 어떤 주제가 떨어질지가 관건이겠지만.”

“그렇군요. 무운을 빌어요.”

“켈링도 마찬가지에요. 결승에서 만나자고요.”

주제에 따라 준비한 디자인을 쓰지 못할 수도 있다.

본선 진출 브랜드 대부분이 메이저급 회사들로 그들도 분명 대비책을 강구했을 것이다.

대회 관계자들도 이 사실을 알고 있을 테니 쉬운 소재로 대회를 진행시키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이때까지 노력한 건 연습일 뿐이었다.

“그럼 대회 때 봐요. 저는 참석자 신청했으니까.”

“네. 그날 보죠.”

그렇게 신지혜가 돌아가고 나는 조용히 룸에 준비된 라운지바에 홀로 앉아 멍하니 야경을 바라봤다.

“드디어 여기까지 왔어”

김시현의 삶에서 죽음까지 그리고 이어진 진혁의 몸에서의 새로운 삶을 되짚어보았다.

평생을 바쳐 이룬 것을 내려놓아야 하는 그 잔혹함에 괴로워했지만 동생의 몸으로 기회가 찾아왔고 다시 달릴 의지가 생겼다.

나는 최고의 브래드가 되기 위해 다시 한걸음 도약해야 했다.

“근데 기분이 이상하네.”

3년의 시간 동안 크고 작은 사건들 하나하나를 해결해 나갔지만, 이때까지 간과한 게 있었다.

회의감.

모두가 기뻐하고 감동하였던 수많은 일에 나는 형식적인 웃음과 기분으로 표현했다.

그리고 생각한 게 있다면 내가 동생의 몸에 들어온 진짜 이유.

그 이유 때문이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 때쯤이었다.

따르릉!

전화벨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 발신자 제한번호.

“누구지?”

나는 수화기를 들어 상대의 목소리를 확인했다.

익숙한 목소리의 한 사내의 전화에 나는 심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네, 네. 알겠습니다. 본선 1차 이후에…. 알겠습니다.”

나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잠시 고민에 빠졌다.

* * *

본선 첫 경기는 이탈리아의 피렌체로 르네상스의 시작이자 유럽의 가장 큰 가죽 시장이 형성된 곳이다.

그만큼 수 장인들이 즐비하고 가죽 소재의 가방, 액세서리, 생활용품들이 발달해 있다.

다니엘은 고향에 온 거 같다며 피렌체에 도착한 이후부터 말이 많아졌고 이동할 때마다 피렌체 곳곳의 추억을 떠올리며 우리에게 말을 이었다.

‘피렌체라.’

나 또한 오랜 시간 이곳에서 학교생활과 장인 생활을 이어왔었다.

작은 골목부터 어느 장소건 추억이 묻어나 있다는 말이다.

그때 내 추억이 가장 아름답게 서린 공방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어! 저기….”

“왜 뭔데?”

이동 중 한 작은 가게를 바라보며 내가 소리치자.

다니엘과 류미리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뭐예요? 가죽공방 같은데.”

“맞아요. 가죽공방.”

“나도 저기 알아. 저기 가죽 액세서리 진짜 이쁜 거 많은데.”

“정말요… 대회만 아니면 구경 가고 싶은데.”

“끝나고 가면 되지. 뭐가 걱정이야.”

“본선 끝나면 바로 파리로 이동해야 해요. 오늘 호텔숙소예약도 안 했단 말이에요.”

“하… 빡빡하네.”

다니엘 말처럼 피렌체의 가죽 공방 중 악세서리가 가장 아름다운 곳이다.

하지만 내가 추억하는 기억과는 다르다.

‘한 번쯤은.’

에르맥스 장인학교 재학시절 만난 그녀.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그녀의 집이 저기였다.

그녀는 어느 날 홀연 듯이 사라졌고 공방을 찾아가도 그녀의 행방을 알 수 없었다.

그렇게 나의 첫 번째 사랑이 끝이 난 것이었다.

‘잘 지내려나….’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첫사랑의 여운을 뒤로하고 나는 대회장을 향했다.

.

.

.

“현재 두오모 광장에 나와 있는 김인필 기자입니다. 조금 있으면 두오모 광장 저편에서 에르맥스 패션세계대회가 시작됩니다. 세계언론들이 집중하는 만큼 취재의 열기가 대단합니다.”

최초로 열리는 세계대회의 본선인 만큼 월드컵을 방불케 하는 기자단과 관광객이 두오모 광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브랜드 관계자들은 편의를 생각해서 일절 인터뷰를 받지 않았기에 대회 시작 전 어느 정도 휴식을 취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안내를 받아 개별 룸으로 준비된 브랜드의 대기실로 향했다.

“엄청 좋은데요.”

“좀 쉬는 게 좋을 거예요. 상황이 어떻게 달라질지 모르니.”

“네.”

현재 아림raM 팀은 총 10명으로 최대인원으로 구성했다.

총괄 – 차진혁, 디자이너 – 류미리, 구두 디자이너― 안정원, 가죽공예가 – 다니엘, 한명준, 의상제작 – 전미숙, 장복순, 김태순 구두제작자 –김형준, 디스플레이– 정희정까지 총 열 명이다.

대회 본선 인원을 최소 5명 최대 10명으로 구성을 짜야 했기에 10명을 가득 채우는 게 유리하다.

하지만 브랜드마다 비율을 달리할 수 있기에 서로 간의 패널티가 주어지는 것과 같고 주제가 발표되기 전 인원교체는 가능하나 공표 이후에는 인원 비율조절이 불가피하다.

일단은 임의로 파리지부에서 가죽, 의상, 액세서리 공예가까지 섭외해온 상태이기 비율은 완벽했다.

“주제가 뭘까요? 벌써 떨리네요.”

“알 수가 없어요. 다들 작은 힌트라도 얻으려고 노력했던 거 같은데 주최 측에서 보안을 철저하게 했나 보더라고요.”

“하…. 저희가 만든 디자인 중에 쓸 수 있는 게 있어야 할 텐데.”

“가능할 겁니다. 며칠 동안 밤새도록 만들었으니까요.”

즉흥적인 디자인보다 예시로 만들어둔 디자인을 변형하는 게 빠르다는 판단이다.

터무니없는 주제와 소재만 아니라면 충분히 우리가 생각했던 대로 흘러갈 것이다.

‘뭐 리스크는 모두가 가지고 있는 거니. 더 공평할 수도 있겠지.’

모든 시간이 흘러가고 드디어 본선의 개막이 올랐다.

두오모 광장에 무대가 마련되었다.

먼저 심사위원들의 소개가 이어졌고 패널 몇 명이 자리했다.

이들은 일부 심사와 논평을 책임질 것이고 디자인은 전 세계 사람들이 평가하게 된다.

“긴장되네요.”

사회자의 소개로 한 팀, 한 팀 무대 위로 올라왔고 뒤이어 인피니티를 소개했다.

파리소속의 브랜드 인피니티입니다.

와아!

모여있던 사람들 사이에서 박수 소리와 환호성이 들려왔다.

‘디자이너가 누굴까’

인피니티는 총인원 7명으로 10명을 채우지 못한 듯했다.

하지만 7명의 구성원 모두 알만한 얼굴들이었다.

“진혁 보고있지… 저 사람들.”

“어.”

한은샘은 포함 6명 모두 안면이 있는 얼굴들이다.

타파니 출신의 액세서리 공예가, 토즈 출신의 구두제작장인, 샤네르와 구짜 출신의 의상제작자, 루이바통 출신 가방 디자이너, 에르맥스 공방 출신 가죽장인까지.

어벤져스를 방불케 하는 팀구조였다.

모두 현직에 있던 사람들로 어느덧 인피니티 소속이 되어있었다.

“스카우트인가?”

“그렇겠지.”

인피니티의 브랜드 이미지가 상승함과 동시에 돈과 명예욕에 강한 사람들이 움직였다고 볼 수 있었다.

근데 의아한 점이 있었다.

‘없어….’

2차 예선 디자인은 이들이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이들에게 그만한 능력이 없으니까.

‘무슨 꿍꿍이야.’

분명 새로운 인물이 나타날 거라고 짐작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가는 듯 보였다.

“자 이제 마지막입니다. 브랜드 아리raM입니다.”

우리는 사회자의 소개로 무대 위에 천천히 올라갔다.

“사람들 엄청 많네요.”

류미리는 설레여하며 무대 아래를 바라봤다.

많은 대회를 치른 그녀이지만 개방적인 공간에서 관객을 마주하기는 처음이었다.

“집중하세요.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네!”

그녀는 기합이 가득 들어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무대 아래.

환하게 웃고 있는 인피니티 직원들을 보며 씁쓸한 미소를 짓고 있는 한 남성.

“젠장!”

에릭은 몇 년 전 일을 떠올리며 고개를 떨구었다.

어느 날 텔레비전을 보던 내 뒤에서 어머니가 철퍼덕 자리에 주저앉아 버리셨다.

나는 놀라는 마음에 어머니에게 달려갔다.

“왜 그래! 어디 아픈 거야?”

“아냐….”

“근데 왜 그래?”

어린 나이부터 자신을 혼자 키워오셨던 어머니.

아무리 힘들어도 눈물 한번 보인 적 없던 분이 어느 때보다 구슬프게 울고 계셨다.

나는 답답한 마음에 재촉하듯 말을 이었다.

“말 좀 해봐요. 왜 그러는지?”

“어떻게 이런 일이…….”

“왜 그래?!”

젊은 미망인은 뉴스를 바라보며 다시 한번 소리치며 눈물을 흘려보였다.

그리고 결심한 듯 나에게 말을 이었다.

“에릭… 잘 들어. 저 사람이… 저 사람이 네 아버지야.”

“저 사람? 김시현 디자이너….”

“맞아. 네 아버지이자 현재 최고의 디자이너로 알려진 샤네르의 김시현 디자이너.”

내가 17살이 되던 무렵의 야이기다.

어머니는 어린 날의 추억을 조금씩 떠올리며 아버지에 대한 추억을 이야기했다.

뉴스를 통해 흘러나온 저 사람의 꿈과 야망 그리고 자신이 방해가 될 거 같아 도망쳤다고 했다.

그리고 홀로 자신을 낳아서 길렀다고 고백 아닌 고백을 했다.

“나는 이때까지 아버지가 우리는 버리고 갔다고 생각했는데.”

“미안하구나.”

이제는 원망도 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

그렇게 며칠의 시간이 흐르고 어머니는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버렸다.

마치 그 사람을 따라 간 거 같은 느낌마저 들게 했다.

그리고 나는 멍하니 생각했다.

“어머니의 꿈과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버지의 꿈을 이뤄야겠다고.”

그때 누군가가 나를 찾아왔다.

인피니티 4.

* * *

에릭에게 여러 가지 고난이 뒤따랐다.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던 집에서 쫓겨날 처지에 처했다,

“에릭 집을 비워 줘야 할 거 같아. 미안하구나.”

“…네, 알겠습니다.”

그는 망연자실하며 아무도 발걸음하지 않는 아파트 건물 반대편에 쪼그려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겼다.

자신의 미래와 김시현 디자이너.

그에게 복수 아닌 복수를 하고 싶었다.

어머니와 자신을 나 몰라라 한 파렴치한 인간, 어머니가 그에게 비밀로 했다 한들 정당화될 수 없다는 생각이 머리를 지배했다.

그렇게 많은 시간이 지나고 어두운 골목길에 긴 그림자가 드리웠다.

“네가 에릭이냐?”

“누구시죠?”

에릭이 자신의 이름을 듣고 고개를 들어 올리자.

따뜻한 미소를 가진 노신사 한 명이 자신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그의 눈은 아득히 깊었고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마치 지배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게 했다.

그의 옆에는 덩치가 커다란 남성 둘과 깔끔하면서도 날카롭게 생긴 젊은 사람까지 총 셋이 그를 지키고 있었다.

순간 긴장감과 경계심이 든 에릭은 주눅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노신사는 에릭에게 조심스레 다가가 말을 이었다.

“자네 아버지의 동료라네 긴장할 거 없어. 내 투자로 김시현 디자이너가 회사를 만들 계획이었으니 한배를 탄 동료고 말고.”

“아버지….”

에릭은 아버지라는 단어에 가슴이 답답했다.

무관심한 그 사람 때문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무슨 아버지인가 그냥 남보다 못한 사이일 뿐이었다.

“아…… 근데 왜 저를?”

“자네가 아버지의 일을 이어서 해줬음 좋겠는데 나에게는 아주 중요한 일이라 말이지 그럴 능력도 있어 보이고 시간이 얼마나 걸리듯 좋아.”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저는 디자인에 대해 아는 게 없는데.”

“천재의 자녀이니 금방 깨달을 거야. 그리고 분명 김시현의 아들이면 그럴 거라 믿네.”

아무것도 남지 않은 그에게 선택할 권리가 있었을까?

상당히 매혹적인 조건이지 않은가.

에릭은 조심스레 아르노를 바라보며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그때의 에릭은 인생에 몇 번 찾아오지 않는 행운이자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순간 결심했다.

어머니에게 들었던 아버지의 꿈, 아버지라는 사람이 이루지 못다 한 꿈을 자신이 이룬다면 그보다 큰 복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뭘 하면 되죠? 뭐든지 하겠습니다.”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분명 아버지의 뒤를 이을 최고의 디자이너가 될걸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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