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4화 (184/200)

“세계에 한국을 알린다는 모티브가 좋아 보입니다. 이번 기회에 한국에서의 입지를 더 굳건하게 굳히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모두가 말을 보태었고 나쁘지 않은 호응이 뒤를 따랐다.

그때 다니엘이 디자인을 유심히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나 할 말 있는데.”

“응.”

“디자인은 좋아. 네가 했으니 많이 신경 썼을 거야. 그리고 세컨드 스킨에 미술적 감성을 집어넣는다는 아이디어도 나쁘지 않아 근데 이 한국적 이미지만으로 예선전을 치러서 이길 수 있느냐가 문제 아닐까?”

다니엘의 말처럼 한국적 이미지를 가득 머금은 디자인이 대회 예선에 어떠한 변수를 줄지는 나 또한 알지 못한다.

그래서 확답은 내릴 수는 없지만 자신감은 있었다.

‘내가 걱정했던 부분이기는 한데.’

다니엘이 잠시 고민을 하다 다시 말을 이었다.

“또 다른 문제가 있어. 너도 알고 만든 거겠지만 세컨드 스킨에 화이트는 부담이지 않아?”

분명 부담일 수밖에 없는 컬러이긴 하다.

밝은 톤의 의상일수록 몸이 비대해 보이는 시각적 효과가 발생한다.

그 말은 몸에 밀착해서 입는 의상이기에 더 부각돼 보일 게 분명하다는 것이다

2차 예선 4.

* * *

2차 예선 심사가 오랜 시간 이루어졌다.

예심을 통과한 수많은 브랜드를 세부적인 심사를 하는 과정에서 꽤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고 그로 인해 심사위원 대부분이 지쳐갔다.

“힘드네요. 이제 끝이 보입니다.”

“그러게 3일 밤낮으로 심사하려니 곤욕이야.”

“본선 진출 브랜드 대부분 나왔으니 조금만 더 힘냅시다.”

“네. 위원장님”

심사위원들은 VOKE의 파리지부 편집장, 파리상인회 회장, 파리 왕립예술학교 교장 등 10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최대한 패션기업과 연결고리가 없는 사람들로 추스르려 했다.

나름 에르맥스 타아르의 공평한 심사를 위한 방책이라 볼 수 있었다.

그때 심사위원 중 가장 연장자이자 총괄 위원을 맞고 있던 파리상인회 회장이 말을 이었다.

“마지막 한 팀은 누구로 할 생각들입니까?”

“아직 결정하지 못했습니다.”

“저도요.”

현재 마지막 심사를 받아야 하는 브랜드는 단둘.

두 개의 브랜드 모두 디자인적으로 손색이 없는 데다가 콘셉트가 겹치기에 이들 사이에서 많은 논쟁이 이어졌고 잠시 미루어둔 상태였다.

“아리raM이 강수를 뒀군요. 세컨드 스킨이라 분명 마르센느를 겨냥했다고 보이네요”

“아리raM 디자이너도 무슨 생각인지?”

“최근 일 때문에 최선책을 생각했겠죠. 원조를 이겨보겠다는 심산 아니겠어요.”

마지막 본선 진출 브랜드는 마르센느와 아리raM 이 두 브랜드 중 하나가 될 것이었다.

VOKE의 편집자가 말을 이었다.

“세컨드 스킨의 원조는 마르센느잖아요. 고민할 게 있습니까? 창조와 카피는 엄연히 점수를 다르게 줘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아리raM은 독창적이라기보다 콘셉트를 똑같이 베낀 거밖에 되지 않는 거 같은데.”

그녀의 말을 반문하듯 왕립예술학교 교장이 말을 이었다.

파리 왕립예술학교는 전통이 깊고 뛰어난 인재들을 배출해내기로 유명한 학교로 파리에서도 최고의 명문으로 통하는 곳이다.

“제가 한 말씀 올리지요.”

“네….”

권위와 위치로 따진다면 파리상인회 회장에 뒤처지지 않는 사람이다.

여기 모인 사람들 모두 그의 말에 집중했다.

“저는 편집장님의 생각과 조금 다릅니다. 제가 학생을 가르칠 때 늘 하는 말이 있습니다. 카피를 뛰어넘은 디자인은 하나의 창조와 같다! 콘셉트는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소재의 하나일 뿐입니다. 디자인만 놓고 본다면 아리raM이 한층 더 성숙한 세컨드스킨의 아름다움을 끌어올렸어요. 이 부분은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의 말을 듣고 있던 9명의 심사위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 본선 진출팀을 정해야 하기에 모두 깊은 갈등에 빠져들었다.

“모두의 의견이 갈리니 다수결로 결정하는 게 좋겠습니다. 시간 관계상 더 지체할 수 없습니다. 30분 휴식 후에 결정하도록 하지요.”

“찬성합니다.”

“찬성이요.”

휴식시간이 지나가고 파리상인회 회장이 말을 이었다.

“모두 결정했으리라 생각합니다. 먼저 마르센느를 선택하신 분 손들어 주십시오.”

심사위원들 중 몇 명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소신껏 손을 들었다.

그리고 뒤를 이어 아리raM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손을 들기 시작했다.

“이 결과에 이의가 없길 바랍니다.”

“이의 없습니다.”

“저도요.”

그는 결과를 확인하고 마지막 본선 진출 브랜드를 만년필로 적어나갔다.

“대단하네.”

* * *

한은샘은 2차 예선 디자인과 의상 모두를 직접 파리로 가져왔다.

이상하리만큼 불안한 마음에 2차 예선 디자인과 의상을 제출하고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대표님?”

“어?!”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호텔로 바로 가실 거죠?”

브랜드Han의 총괄디렉터는 한국에서 출발해 지금까지 한은샘이 상당히 불안한 상태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기에 더욱 답답했다.

“대표님 무슨 일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저까지 불안합니다.”

“아… 미안하네. 별일 아니야 예선 디자인과 의상도 제출했으니 별일 없어.”

“아… 네.”

총괄디렉터는 괜한 걱정을 한 거 같아 그를 보며 살며시 웃어 보였다.

그때 한은샘이 말을 이었다.

“자네 먼저 들어가 봐. 나는 잠시 들릴 데가 있으니까.”

“어딜?”

“먼저 가 있어.”

“네.”

한은샘은 총괄디렉터를 뒤로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아르노 회장을 만나봐야겠어.”

한은샘은 아르노가 머물고 있는 LVMH 본사로 향하기 위해 택시를 잡아탔다.

“어디로 모실까요?”

“LVMH 본사로 가주시겠어요.”

“네.”

택시가 달려 15구역에서 LVMH 본사가 있는 3구역으로 이동하려는 그때였다.

끼익!

“무슨 일이에요?”

“갑자기 차가 끼어들어서.”

흑인의 택시 운전사가 자신의 차를 막아선 차에 다가가기 위해 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

윽!

뭉툭한 소리와 함께 택시 기사가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그리고 검은 옷차림의 남성이 한은샘을 향해 말을 걸어왔다.

“소란 일으키지 마시고 조용히 내리시죠.”

“당신들 누구야?!”

“조용히 따라가시면 아무 일 없을 겁니다.”

한은샘은 주위를 한번 살핀 후.

앞에 서 있는 사람의 말을 무시하고 반대편 문손잡이를 잡고 빠르게 몸을 이동시켰다.

하지만 반대편에도 또 다른 검은 정장의 사내가 떡하니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닌가.

“도망칠 생각하지 마시죠. 일단 갑시다.”

한은샘은 자신의 불리한 상황을 인지하고 고개를 떨구며 그들을 따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이곳은 한국도 아닌 파리였고 도망친다 해도 금방 잡힐 게 분명했다.

“누가 시킨 거요? 그것만 알려주면 조용히 따라가겠소.”

“가보시면 안다고 강제로 데려갈 수 있는걸 참고 있으니 조용히 따라와.”

한은샘이 그가 안내하는 차에 올라탔다.

검은 정장의 사내는 가슴 포켓에서 지갑을 꺼내 돈뭉치를 쓰러진 택시기사의 손에 쥐고는 자신의 옆으로 다가왔다.

“가자!”

* * *

2차 예선 심사 기간 2주가 흘러갔고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본선 발표가 다가왔다.

아침 일찍부터 아리raM 직원들은 노심초사 주최 측의 메일과 미디어를 확인했다.

“어떻게 됐어요?”

“아직이요. 파리 시간이 아직 밤이니까 오후는 돼야 메일 올 거 같아요. 긴장되네요. 잘되겠죠?”

“노력한 만큼 결과가 따르겠죠.”

류미리에게 툭 내뱉듯이 말을 건넸다.

나까지 긴장하여 분위기를 다운시킬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긴장한 티는 내고 있지 않을 뿐이지 떨리기는 매한가지다.

“악!”

그때 류미리 디자이너가 크게 소리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무슨 일이에요?”

“대표님! 인터넷에 뉴스 올라왔어요. 세계 패션 대회 본선 진출팀.”

나는 그녀의 앞에 있는 컴퓨터 화면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에르맥스 세계대회 본선 진출 TOP10이라는 제목으로 새로운 뉴스 정보가 올라와 있었다.

“VOKE 미디어에 올라왔네요. 심사위원 중에 VOKE 뉴욕 본사 편집장이 있다는 소리가 있었는데 빠르게 정보독점 했나 봐요.”

그녀의 말처럼 협회보다 빠르게 언론에서 먼저 움직인 것이다.

우리가 웅성거리고 있자.

근처에서 우리를 지켜보던 직원들도 우리에게로 다가왔다.

류미리는 모두가 모인 상태에서 마우스 볼을 천천히 내려가며 진출팀 명단을 확인했다.

총 10페이지의 긴 페이지로 한 장 한 장 본선 진출 브랜드의 설명과 디자이너를 소개하고 있었다.

첫 번째는 LVMH 그룹의 루이바통, 두 번째는 켈링의 발렌시. 세 번째는 LVMH 그룹의 다올, 네 번째는 샤네르, 다섯 번째는 중국의 엔젤링, 여섯 번째 에르맥스, 일곱 번째 일본의 그램다크, 여덟 번째는 처음 들어보는 브랜드인 인피니티, 아홉 번째는 미국의 박스밀러였다.

“아르노 회장 쪽 브랜드가 두 개나 합격했네.”

LVMH 그룹 브랜드 두 개.

켈링 그룹의 브랜드 한 개, 샤네르, 에르맥스 순으로 합격브랜드가 눈에 들어왔다.

모두 현재 최고 명품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브랜드가 주를 이루었다.

“인피니티?! 이런 브랜드가 있었나요?”

정희정이 신기하다는 말투로 말을 이었다.

“수백 개의 브랜드가 지원했을 테니까요. 예외가 존재하는 거죠.”

나는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많은 명품과 체계적인 공략법을 들고나오는 브랜드를 제치고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중소기업이 세계대회 본선 티켓을 거머쥔 것이다.

“중국이랑 일본 쪽도 대표브랜드들이 합격했네요.”

엔젤링과 그램다크 중국을 대표하는 디자이너 첸이 이끌고 있는 엔젤링과 일본을 대표하는 디자이너 차토세가 운영하는 그램다크가 본선 티켓을 거머쥐었다.

“류 디자이너님 빨리 다음 페이지요.”

“아… 네. 말이 길어져서.”

그녀는 재촉하는 팀원들에게 눈웃음을 건네며 마우스 버튼을 눌렀다.

페이지가 넘어가는 짧은 순간이지만 어느 때보다 길게 느껴지는 거 같았다.

모두가 손에 땀을 쥐며 화면이 눈앞에 나타나길 기다렸다.

“잠시만요… 하.”

그녀는 화면이 뜨는 순간 화면 창을 내려버렸다.

“떨어진다 해도 모두 실망하기 없기에요. 우리는 지금도 잘 해내고 있으니까.”

나는 그녀의 말을 듣고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한 팀을 이끄는 리더인 그녀의 모습에서 오래전 무대 뒤에서 울고 있던 어리숙한 여자의 모습이 비쳤기 때문이다.

그녀의 말처럼 우리는 잘 해내고 있었고 떨어진다 해도 좌절할 필요는 없었다.

‘떨어지면 안 되는데….’

모두가 모르는 꼭 붙어야만 하는 이유가 나에게는 있기에 더욱 손에 땀을 쥐고 있었다.

“켜겠습니다.”

그 순간 화면에서 아주 익숙한 로고 디자인이 눈에 들어왔다.

“아리raM이다!”

“대표님! 이거 보세요. 아리raM이 본선 진출했어요.”

나는 순간 긴장이 풀리며 숨을 내뱉었다.

“하… 그러네요.”

그때 총괄디렉터인 장희정도 내게 천천히 다가와 말을 이었다.

“방금 협회에서도 공문 날라왔어요. VOKE에서 깜짝 발표해버려서 급하게 보냈나 봐요. 본선 진출을 축하한다는 내용입니다.”

“그렇군요. 다행입니다.”

내 한숨 소리와 함께 양옆으로 함성 소리가 뒤섞이며 서로의 만감이 교차하고 있었다.

모든 직원들이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며 소리쳤고 그 소리가 건물 전체로 퍼져나갔다.

나는 모니터 화면을 바라보며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다는 희망과 오랫동안 꿈꿔왔던 꿈을 이룰 수 있다는 설렘에 가득 차올랐다.

“대표님 이 기사 한 번 보세요.”

“네?!”

VOKE의 본선 진출 브랜드를 공표와 함께 이어지는 기사들.

― 아리raM 카피를 넘어선 디자인 능력!

― 마르센느의 총괄디자이너도 인정한 아리raM의 2차 예선 세컨드스킨.

― 세컨드스킨의 새로운 해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