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3화 (183/200)

“아웃웨어는 플로럴 패턴으로 제작할 생각입니다. 화면을 봐주시죠.”

화면 속의 의상은 여러 색의 비단을 잘라 꽃무늬로 만든 것이다.

아리raM의 색과 한국을 대표하는 브랜드라는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 선택한 원단이다.

제작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기는 하나 그만큼 아름다운 의상이 만들어질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패턴이라는 이름이 무색할 만큼 하나하나 다른 모양을 가지고 있기에 보는 이의 눈이 즐겁게 할 수 있었다.

“화려하네요. 화려함을 화려함으로 덮는다라.”

“저는 나쁘지 않은데요. 환경의 변화에도 신경을 쓴 거 같아 좋아 보여요.”

“저도요. 이미지처럼 제작되기만 한다면 상당히 반응이 좋을 거라 생각합니다.

“환상적이네요. 세컨드 스킨과 잘 어울려요.”

팀장들과 사원들 모두가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자신감을 얻은 류미리는 두 번째 의상을 소개하기에 앞서 내가 말을 이었다.

“두 번째 의상은 제가 소개할게요. 그리고 미리 말하지만, 선택은 다수결에 의해 진행될 겁니다.”

“네.”

두 번째 의상도 메인 코드는 역시 세컨드 스킨이다.

하지만 원단의 질이 조금 다르다.

그로 인해 오트 쿠튀르의 영역에 더욱 가까운 옷이라 할 수 있었다.

“이번에는 세컨드 스킨이지만 아리raM의 색을 더 가중시켰습니다. 화면을 봐주시죠.”

스크린의 화면이 바뀌며 직원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리고 직원들의 표정.

서로가 상반된 반응이 뚜렷하게 느껴졌다.

* * *

[전 인드라 총괄디자이너 안드레스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

[약물 과다 복용으로 인한 사망!]

[안드레스 자살에 가까운 약물 복용.]

[신성 100인 디자이너 안드레스 마약 복용으로 인한 사망.]

[에르맥스 세계 패션대회 1차 예선 통과 브랜드.]

[세계는 패션에 집중한다!]

[LVMH 그룹 모든 브랜드 세계대회 1차 예선 통과.]

아침 일찍부터 연일 특보가 터져 나왔다.

에르맥스 세계 패션대회 1차전 통과 브랜드가 공식적으로 알려지면서 여러 나라가 떠들썩했다.

1차전을 통과한 것만으로도 브랜드의 입지를 굳힐 수 있다는 희망과 자신이 속한 나라에서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 디자이너가 탄생할지도 모른다는 기쁨에 말이다.

월드컵이나 올림픽을 버금가는 관심이 집중되고 있었다.

그 와중에 인드라의 탈락과 함께 안드레스가 자택에서 숨졌다는 소식이 퍼졌고 대회와 함께 이슈가 되기 시작했다.

그때 가장 불안에 떨고 있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한은샘 대표였다.

“그럴 리가 없는데. 약물 중독이라니.”

3일 전만 해도 호화저택에서 자신에게 영상통화를 걸어왔던 사람이 안드레스였다.

성공과 미래를 갈구했지만 걱정 가득한 자신에게 세계시장에서 이런 일들은 부지기수라며 죄책감을 덜어주려 했다.

그리고 우리의 성공과 미래를 말하며 호탕하게 웃어 보였다.

그런 사람이 한순간 마약과 약물 중독으로 인해 죽었다니 믿기지 않았다.

“절대 약물 중독일 리 없어.”

2차 예선 3.

* * *

한은샘은 유학 시절 마약성 약품에 중독된 사람들을 많이 봐왔다.

그들의 하나같이 눈이 풀려있었고 정신이 온전치 않았다.

그리고 희망 또한 없기에 미래에 대한 갈망 또한 느껴지지 않는다.

“분명. 뭔가 있는데….”

그는 알 수 없는 두려운 감정에 사로잡혔다.

그때 머릿속에 떠오른 아르노의 얼굴이 스치듯 지나갔다.

그의 옆에 있던 비릿한 미소를 가진 비서의 얼굴과 함께 말이다.

“설마… 아르노 회장이. 아니야. 왜?! 그럴 이유가 없잖아.”

그의 바람대로 시킨 모든 일을 마무리됐다.

하지만 한은샘의 불안한 마음은 가시지 않았다.

손이 떨려오고 식은땀이 등줄기에 주르륵 흘러내렸다.

“아닐 거야.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그는 고개를 내저으며 땀을 닦아냈다.

그 순간 사무실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표님 안에 계세요?”

익숙한 목소리는 브랜드Han의 총괄 디렉터였다.

한은샘은 떨려오는 손을 책상 아래로 숨기며 대화를 이었다.

“어. 들어와.”

“의상, 가방, 구두, 액세서리 샘플 모두 도착했습니다. 확인 부탁드립니다.”

“알겠어. 금방 나갈 테니 기다려줘.”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 불안감은 자신의 예측일 뿐이었고 되돌릴 길은 없었다.

한은샘은 손에 힘을 가득 주며 떨려 오는 손을 억지로 멈추었다.

* * *

브랜드 마르센느와 차별화시킨 디자인을 떠올리자니 세컨드 스킨의 디자인이 너무 강렬했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방법은 섬유로 이미지를 바꾸어보는 것이었다.

“한지의 질감을 표현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순간.

한지장이신 이지석 선생님에게 연락을 드렸다.

그는 흔쾌히 나와 약속을 잡아주었고 나는 그의 공방으로 향했다.

“선생님. 건강하셨죠.”

“아이고. 차 대표 먼 길 오느라 고생했네. 어서 들어가자고.”

“네.”

선생님은 여전히 인자한 얼굴로 나를 반갑게 맞아주셨다.

“선생님 공방부터 가보고 싶은데요.”

“뭐 그리 급해. 숨넘어가겠네”

이지석은 웃으며 나를 집이 아닌 공방으로 안내했다.

“부탁드린 건?”

“자네가 부탁한 거 내가 만들어보라고 시키기는 했는데 말이야.”

그는 걱정스럽게 말을 이었다.

내가 부탁한 원단은 한지 원단과 탄성이 강한 폴리우레탄을 합성한 새로운 신소재 원단이었다.

만들 수만 있다면 탄성이 없는 한지 섬유에 탄성을 불어 넣을 수 있게 된다.

“한지 섬유가 탄성이 없어서 그런지 쉽게 찢어지기 일쑤야. 내구성이 좋기로 유명한데도 순간적인 탄성을 이기지를 못하네.”

“그랬군요. 흠….”

“근데. 저번에 말한 친구 있지 않은가.”

“네? 누구 말씀하시는지?!”

“한지가 좋다고 여기 와서 한지 섬유 연구한다는 친구 말이야. 그때 다시 찾아오면 소개시켜 준다고 내가 그랬잖아.”

“아.”

그러고 보니 예전에 소개시켜 주고 싶다는 사람이 있었다.

그때 공방의 문의 열리고 개량 한복을 입은 3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남성이 걸어 들어왔다.

“저놈도 양반은 못 되는 놈이네. 내가 소개해 주고 싶다던 놈이 저놈일세.”

“저분이 한지 섬유를 만드신 겁니까?”

“맞아. 저놈이 한지 섬유를 만든 놈이야.”

곱슬머리에 둥근 뿔테안경을 낀 사내.

얼굴은 평범했지만, 몸은 범상치 않았다.

마치 보디빌더가 걸어오는 거 같았다.

“운동선수였나요?”

나도 모르게 이지석 선생님에게 질문을 던졌다.

“아 하하하. 아닐세 이 촌구석에서 할 거 없으니 운동만 해서 그렇지 처음에 올 때는 얼마나 비실비실했는데.”

어느새 우리 이야기를 듣던 그가 내 앞에 다가와 말을 걸어왔다.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이은봉이라 합니다.”

“아… 네 차진혁이라 합니다.”

“부탁하신 일 때문에 오신 거죠?”

“네. 마음이 급해서요. 한지 섬유는 이곳에서밖에 만들 수 없어서 다른 곳에 부탁할 수도 없었거든요”

“그렇긴 하죠. 그럼 이쪽으로 따라오시죠.”

내가 이지석 선생님을 쳐다보자.

환하게 웃어 보이며 함께 걸음을 맞추었다.

“경상도 놈이라 그런가. 좀 무뚝뚝해.”

“고향이 경상도이시구나.”

그가 안내하는 방향으로 이동하니 문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작업실이 좀 더럽습니다. 저 혼자 쓰는 공간이라서.”

“괜찮습니다.”

“잠시만요.”

문을 열자 큰 공간이 나타났고 화학실을 방불케 하는 화학약품이 한가득 쌓여있었고 원단 제작 직물기도 나열돼있었다.

“무슨 장비들이….”

“구입하다 보니 많아졌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원단 종류도 한 공간을 한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때 그는 한참 동안 원단이 쌓여 있는 곳을 뒤지더니 원단 하나를 꺼내 가위로 재단했다.

“여기 있습니다.”

김은봉이 내게 내민 원단은 스판덱스였다.

“스판 원단이지 않습니까.”

스판덱스 1959년 미국 뒤퐁사가 만든 탄성 섬유로 우리가 흔히 스판이라고 말하는 원단으로 폴리우레탄이 정식 명칭이다.

신축성이 자유로운 합성 섬유로 고무와 비슷한 탄성을 지닌 특이한 섬유다.

면과 폴리우레탄을 합성한 합성 원단이 우리가 흔히 아는 스판기 있는 면바지나 셔츠가 되는 것이다.

“아닙니다. 스판덱스처럼 보이기는 하는데 폴리에스터에 가깝습니다. 탄성이 적거든요. 합성비율을 제가 조절해서 만든 신소재 원단입니다. 구조용 원단으로 판매해 볼 생각으로 만든 건데 어떠세요?”

“네!? 뭐가 어떻냐는 거죠.”

나는 원단을 만져보았고 그의 말처럼 확실히 탄성이 적었으며 스판덱스보다 폴리에스터에 가까웠다.

“근데 이걸 왜?”

“그 섬유에 한지 섬유를 합성하면 어떨까 합니다. 아무리 해도 한지 섬유는 스판덱스의 순간 탄성을 못 이겨내더라고요. 근데 그거라면 가능할 거 같습니다. 의상 디자인을 봤는데 충분히 그 느낌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느낌을 만들어 낼 수만 있다면…좋습니다.”

“그럼 바로 만들어 보겠습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최대한 빠르게 제작해주십시오.”

“빨라도 내일은 돼야 완성된 원단을 만질 수 있을 겁니다.”

그는 무심하게 툭 말을 던지고는 작업실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우리도 공방을 빠져나가 어디론가 향했다.

그때 이지석 선생님이 말을 이었다.

“저놈이 무뚝뚝하긴 해도 실력 하나는 대단해. 한국대 화학과 석사까지 한 놈이라.”

“아 그렇습니까? 인재네요.”

“그렇고 말고 저런 놈이 이런 데 있으니 내 속이 썩지 썩어.”

“관계가?”

“손주야. 손주. 하하하.”

“네?!”

“차 대표가 저놈 좀 데리고 가. 이 촌구석에 있기는 아깝다니까.”

대형 브랜드 3개와 런칭 브랜드 2개가 준비 중이기에 섬유 기업을 선별해 MOU를 체결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만약 섬유에 관해 해박한 지식과 기업을 운영할 능력이 있는 사람이 있다면 작은 섬유제작 회사를 키워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품질 좋은 섬유를 직접 생산하고 제작한다면 공급도 수월할 것이고 비용도 절감할 수 있을 것이다.

“제가 가자고 하면 가겠습니까?”

“이제 여기서 할 것도 없어. 한지 섬유 만든다고 기어들어 온 지가 몇 년인데 그리고 벌써 특허에 개발도 다 됐는데 여기 있어서 뭐해 이제 밖에 나가야지.”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한번 말해보겠습니다.”

“고맙네 차 대표.”

왠지 또 다른 기회가 찾아올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 * *

내가 만든 의상이 스크린을 통해 흘러나왔다.

“원단 소개부터 할게요. 한지 섬유를 합성 섬유로 만든 신소재 원단입니다. 보기처럼 한지의 질감을 살릴 수 있게 되어 저는 이 원단을 선택했습니다.”

내 설명을 들은 모두가 신기하다는 눈으로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림이네요.”

“네, 아리raM을 보여주기 위해 뭐가 좋을까를 생각했습니다. 아리raM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장인들이 빠질 수 없고 한국의 명품이라는 타이틀을 더 확실하게 자리매김하고 싶었습니다.”

모두가 내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 그림들 프린팅인가요?”

“아닙니다.”

내가 만든 디자인은 한국화가 들어간 세컨드 스킨으로 섬유 원단에 먹과 붓으로만 디자인을 새겼다.

“그래픽 작업으로는 표현할 수 없어서 제작까지 해봤어요. 원단이 만들어지는 그 날 한국대 지승학 교수님에게 직접 부탁했습니다.”

“지승학 화백이요?!”

내 말을 듣는 순간.

총괄 디렉터가 놀라듯 말을 이었다.

“그 한국화 명인 지승학 화백 말씀하시는 거 맞죠?”

“네, 맞아요.”

“그분을 어떻게… 대단하시네요. 예전에 신 디렉터님이 한번 섭외하려다가 실패했었는데.”

“운이 좋았습니다.”

지승학 화백은 현재 한국대 미술학과 한국화 전임교수로 재직 중이었고 패션디자인협회 안선영 회장을 통해 소개받았다.

그리고 내 뜻을 전달했고 그는 흔쾌히 내 뜻을 받아들여 주었다.

“지승학 화백님이 그렸다니 의상이 더 눈에 들어오는 거 같네요.”

“익숙한 그림이라 그럴 수 있을 거예요.”

한국 사람이라면 익숙할 수밖에 없는 그림을 의상의 앞과 뒤를 장식했다. 이중섭 화백의 황소를 변형시켜 여러 형상의 소를 그려 넣었고 김홍도 화백의 금강산도를 의상 전체에 그려 넣었다.

그리고 오른쪽 다리에는 풍경화가 지승학 화백의 화조화가 양쪽 팔에는 전각장이신 안유호 장인의 명필이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이 의상은 백과 흑으로만 만들어진 의상입니다.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 디자인이기에 고심 끝에 소개했습니다.”

이번 디자인은 컬러풀하지 않은 디자인이다.

하지만 가장 한국적이면서 아리raM스러운 디자인이다.

그때 류미리가 말을 이었다.

“저는 나쁘지 않은 거 같아요. 가장 아리raM스럽고 우리가 처음 회사를 만들 때 그 마음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류미리는 내 의중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가방디자이너 임해솔이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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