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1화 (181/200)

나를 보는 사회의 시선은 싸늘했고 활을 떠난 화살은 벌써 아리raM의 중심부에 꽂혀버렸다.

이대로라면 회생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까지 들게 할 정도였다.

우리는 기자회견을 마치고 도망치듯 회장을 빠져나왔다.

경영팀 팀장은 나에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잘 준비한다는 게 이렇게 되어버렸습니다. 다시 언론사에 연락하겠습니다.”

“아니에요. 팀장님의 문제가 아니죠. 사람들은 진실을 궁금해하지 않는 거 같네요.”

브랜드Han이 내놓은 디자인특허 증명서와 안드레스의 증언 이 두 가지가 시너지 효과를 내며 상당한 힘을 발휘했다.

그에 비해 우리가 보여줄 거라고는 말로 변명을 늘어놓을 뿐이었다.

팩트가 없었기에 관심이 없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도 디자인을 증명할 명분이 없으니.”

“억울합니다!”

파티에서 만든 가방은 초안을 보완해서 최종 디자인으로 만들었다.

“또 이런 실수를 하다니.”

대결이 벌어질지 몰랐기에 디자인특허 신청을 하지 않은 상태였다.

초안으로 하기에도 부적절하다는 생각에 차일피일 미뤄왔던 것이 독이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다른 방법 찾아보죠.”

“네, 알겠습니다. 회사 들어가서 바로 회의 진행하겠습니다.”

“부탁드릴게요.”

대화가 마무리되고 경영팀 팀장과 함께 로비를 빠져나가려는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내 귓가에 들려왔다.

내가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누군가가 나를 큰 소리로 불렀다.

“차진혁 디자이너!”

“앗! 안혜진 PD님 오랜만이시네요. 여기는 무슨 일로?”

“기자회견 초대해놓고 무슨 일은. 정신 차리세요. 대표님 힘! 힘내야죠.”

“반응들이 너무 싸늘해서 할 말이 없습니다.”

“증거가 없으니까요. 힘은 팩트에서 나오거든요. 진짜 뭐 증명할 거 없어요?”

“그렇게 되었습니다. 근데 저를 왜?”

“아… 기자회견이랑은 별개로 저랑 인터뷰 하나 하시죠.”

“네?!”

“오해를 풀어야 할 거 아니에요. 팩트가 없으면 팩트를 만들어야죠. 저는 차 디자이너 믿거든요. 그날 배 위에서 본 당신은 진심이었으니까요.”

내가 그랬던가 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아시아 패션 어워드 결승.

군함도에서 상황들이 너무 다급하게 흘러갔기에 촬영을 하고 있다는 생각도 잊어버렸다.

그만큼 절박했고 패션 하나로 어른들의 아픔을 달래드리려 노력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함정을 빠져나가려 변명만 늘어놓을 뿐이다.

순간 머리에 무언가가 번쩍였다.

“PD님 감사합니다.”

“그럼 하는 걸로 알게요. 스케줄 언제 가능하세요?”

“인터뷰 안 하겠습니다.”

“왜요! 이래 보여도 저 보도국에서 끗발 좋아요. 단독으로 뉴스 태워드릴 수도 있다고요. 펙트 만들어서 뿌리면 그쪽도 당황할 거라고요.”

“분명 좋은 조건이지만 펙트를 만든다는 게 저도 거짓말을 해야 한다는 거니 그리고 오늘 기자회견을 보고 느꼈습니다.”

“그거야… 상대도 거짓말하니까 그리고 이 상황에서 느낄 게 뭐가 있어요. 다들 냉랭하기만 하던데.”

“싸늘하긴 하죠 근데 인터뷰를 한다고 해도 믿어주지 않을 겁니다. 더 부정하겠죠. 핑계를 댄다고 생각할 테니까요.”

“하지만 가만히 두고 보는 것도 멍청한 거예요.”

“이 시련도 극복해봐야죠. 저는 디자이너잖아요. 그것도 실력이 아주 월등히 좋은 천재디자이너, 실력으로 그걸 증명할 겁니다.”

“하 고집은 여전하시네요. 그럼 도움 필요하시면 연락 주세요. 자 받아요.”

“네. 연락은 드릴게요. 다른 의미로.”

“그래요. 특종 있으면 바로 연락 주시고요.”

나는 안혜진에게 감사를 표시하고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말대로 작은 희망이라도 잡고 싶지 않은 건 아니다.

하지만 그것 또한 시련의 한 단계이고 한계에 도달할 것이다.

“회장님. 저 PD분 제안 나쁘지 않은 거 같은데 받아들이시지 그러셨습니까.”

“그렇죠. 머리는 하라고 하는데 마음이 그렇지가 않네요.”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아까 말했잖습니까. 저는 디자이너니까 실력으로 모두에게 증명할 겁니다. 그럴 자신도 있고요.”

경영 팀장은 나에게 고개를 살짝 숙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믿고 기다리겠습니다.”

“제가 할 소리를. 잘 부탁드립니다.”

아리raM은 나만의 브랜드가 아니다.

디자이너, 가죽 장인, 무형문화재 선생님들 그리고 국민들이 염원하는 한국 고유의 명품을 만들어 내는 패션 브랜드다.

나는 기자회견 동안 진실을 말하면서도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실이지만 핑계를 대는 것만 같았기에.

하지만 생각을 달리하니 더욱 떳떳하고 힘이 나기 시작했다.

나 혼자만이 아니다. 모두와 함께라면 이미지를 회복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보여줄게… 니들이 아무리 날 짓눌러도 너희들 위로 올라가는 걸.’

나는 굳은 결심을 다짐하고 기자회견장이 열린 센터를 빠져나왔다.

* * *

파리 상인회.

“에르맥스 타아르 님 도착했습니다.”

“들어오라 하게.”

“예.”

현재 파리 상인회는 긴급 안건으로 회의가 진행되었다.

생디카는 이번 안건을 중요하게 다룰 생각으로 주요 인사 모두를 소집했다.

그곳에는 생디카와 유럽 패션협회 브랜드 총괄 담당인 로버트도 참여해 있었다.

“오랜만이지. 앉아.”

“로버트 자네도 와있었나.”

“응, 뭐.”

타아르와 로버트는 비슷한 또래로 친하다면 친한 사이다.

에르맥스 타아르는 주변을 한번 훑어보고는 말을 이었다.

“근데 무슨 일이길래. 생디카의 주축들이 다 모이셨습니까? 지금 한창 바쁠 시기 아니세요. 브랜드들 컬렉션 장소섭외에 허가 낼 것도 많을 텐데.”

“당연히 바쁘지 근데 이번 일이 더 급해 그리고 자네는 뻔히 알면서 묻는 건가.”

“진짜 몰라서 물어보는 겁니다.”

타아르는 아무렇지 않다는 표정으로 그들을 대했다.

“일단 앉지.”

“네.”

주제는 당연히 현재 화두로 떠오르고 있는 아리raM의 에르맥스 패션 대회 참여다.

생디카에서는 이번 카피 논란으로 인해 아리raM의 참여를 거부하려는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이거 보여?!”

“그게 뭡니까?”

“생디카 소속 브랜드 모두가 아리raM 참여 거부 탄원서를 제출했네. 이래도 아리raM을 참여시킬 생각인가?”

“탄원서라니….”

‘아르노! 이 영감이 배신을….’

타아르도 심적으로 부담이 될 수밖에 없는 문서다.

생디카의 브랜드가 참여를 거부한다면 대회 시작부터 완전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아리raM과 함께 이번 대회를 주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기에 중간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신세였다.

‘중재를 해야겠는데.’

그때 타아르의 눈에 로버트가 들어왔다.

“자네 생각은 어때?”

로버트는 생디카와 유럽연합을 총괄하는 담당자로 자신과 비슷한 중간자다.

그리고 합리적이면서도 냉철한 판단을 하는 능력자로서 그의 대답에 따라 큰 변화를 줄 수 있다.

“기회를 주느냐, 아니면 뺏느냐의 문제지. 카피랑은 별개라고는 생각하는데 하지만 참여 브랜드 대부분이 탄원서까지 제출했다는 건 불만이 많다는 거겠지 만약에 참여를 거부한다면?”

“최악이지.”

“뭐 다르게 생각해서 주최 측에서 리스크를 감수한다면야. 나라면 말리지는 않겠어. 기회를 주고 싶거든.”

“리스크라.”

“중요 브랜드가 참여하지 않으면 대회가 흐지부지될 거야 그래도 괜찮아?”

에르맥스 타아르는 깊은 생각에 빠졌다.

‘참여 브랜드라… 중요 브랜드는 켈링과 LVMH, 미국의 타미 그룹과 마이쿱이야.’

켈링은 신지혜가 버티고 있는 한 대회에 참여할 것이고, LVMH의 아르노는 보물과 약속으로 인해 참여할 것이다.

그렇다면 더 이상 고민할 필요가 없다.

탄원서는 아르노의 장난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생디카의 가입 브랜드 40%가 LVMH 그룹의 브랜드다.

‘왠지 이번 일도 이 영감탱이 짓일 거 같은데.’

“참여시키겠습니다. 다들 바쁘신데 그만 일어나시죠.”

에르맥스 타아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회의장을 빠져나왔다.

* * *

타아르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방금 전 있었던 파리 상인회 긴급회의의 전말을 알려주었다.

생각 이상으로 상황이 심각하다는 걸 인지할 수 있었고 이번 일의 배후에 아르노가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생디카를 움직일 정도의 인물은 그를 제외한다 해도 손에 꼽을 테니까.

“역시 이번 일도 아르노 회장 짓이겠네요.”

“예측입니다만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가장 위험한 존재를 대회 전에 처리하고 싶겠죠.”

“이 영감이 가만히 있지를 않네!”

조용히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그때 타아르가 무거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차 디자이너. 미안하지만 1차는 정당하게 평가할 겁니다. 그럼 당연히 아리raM은 통과하겠죠, 하지만 2차 예선에서 확실하게 보여줘야 할 거 같습니다. 아니라면 본선 진출 어렵습니다. 보는 눈들이 많아서 확실하지 않으면…….”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저도 그럴 생각이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대회 전 마지막 연락이 될 겁니다. 행운을 빕니다.”

“알겠습니다. 연락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르노 회장의 입김이라 할지라도 아리raM의 참여를 꺼리는 브랜드가 나타났다.

“완전 공공의 적이네.”

생디카만이 아닐 것이다.

유럽연합과 미국패션협회에서도 분명 자잘한 불씨가 피어올라 아리raM 그룹 전체로 옮겨 탈 게 분명하다.

1차 예선은 브랜드 가치, 매출, 성장 가능성 등 여러 가지를 검증할 것이고, 2차 예선은 3종 파트의 디자인을 검증받아야 한다.

타아르의 말대로 눈에 띄게 뛰어나지 않으면 무조건 탈락할 게 뻔하다.

“2차전에 목숨 걸어야겠는데.”

근심거리를 가득 안고 개인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디자인팀 회의 준비하세요. 바로 2차 예선 지금부터 준비해야겠어요.”

“네, 알겠습니다.”

시즌을 잠시 미뤄서라도 2차 예선에 모든 인원을 집중시킬 생각이다.

“모두 모였습니다.”

“네, 곧 갈게요.”

나는 미리 준비해 둔 콘셉트와 정보를 가지고 회의실에 들어갔다.

디자인팀 인원은 10명으로 해외 디자인팀을 포함한다면 20명이 넘어간다.

규모가 커진 만큼 분할된 섬세한 작업이 가능하다.

안정원이 신발 전체를 맡고 있고 의류는 류미리, 제작은 다니엘, 가방은 임해솔이 전담하고 있었다.

임해솔은 국내와 해외 가방디자인 공모전 20회 수상자로 고액에 스카우트해 온 인재였다.

아리raM 런칭 이래 가장 강한 라인업이라 할 수 있다.

‘이 인원이라면 가능해!’

이들을 바라보고 있자 불안했던 감정이 추슬러지며 열정이 끓어오르는 거 같았다.

“이 자료를 봐주세요.”

나는 준비한 자료를 프로젝트에 띄웠다.

세컨드 스킨 Second Skin.

해석 그대로 제2의 피부라는 뜻으로 세컨드 스킨 톱이라는 기능성 신소재로 만드는 의상이다.

세컨드 스킨 톱은 신축성이 매우 좋고 몸에 밀착되는 맨들거리는 소재다.

하지만 단점도 존재한다. 소재 자체가 신축성이 있고 몸에 밀착되다 보니, 솔직히 디자인적으로는 표현해내기 여간 어렵다.

그나마 컬러와 패턴으로 그 브랜드만의 컨셉을 만들어 낼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어 아리raM만의 특색을 보여주기에 가장 적절하다.

“나쁘지 않네요. 근데….”

류미리가 말을 이었다.

2차 예선 1.

* * *

류미리는 내가 제시한 주제를 보며 의아한 표정으로 말을 일었다.

“문제점이 있어요.”

“말씀하세요.”

“혹시 아실지 모르겠는데. 참여 브랜드 중에 마르센느가 있어요. 세컨드 스킨을 만든 마르센느가요.”

“저도 알고 있습니다.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판단입니다.”

“네?! 문제가 안 되다니요. 이해가 안 됩니다. 브랜드 간 비교가 될 수밖에 없을 텐데도 이 컨셉트를 하실 거라는 말이죠?”

“네!”

브랜드 마르센느는 세컨드 스킨 [Second Skin] 디자인을 주력으로 하는 패션 브랜드다.

프랑스 출신의 디자이너 마르센느는 2018년 렌웨이에 기존 패션에서 전혀 보지 못한 스포츠웨어와 데일리 룩을 접목시킨 디자인을 선보였다.

이 디자인은 독창적이면서도 시그니처한 느낌으로 세계 패션계에서 이목을 끌었다.

이 디자인이 바로 세컨드 스킨의 시작이다.

그 이후 세컨드 스킨 룩은 더욱 발전하여 일상 데일리 룩으로 많이 애용되게 되었다.

세컨드 스킨을 떠올리면 브랜드 마르센느가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정도로 이미지를 구축하게 된 것이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많은 사랑을 받는 디자인으로 가장 무서운 점을 꼽자면 세턴드 스킨에 어울리는 수백 가지 패턴을 마르센느가 보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류미리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잘 알고 있으나 내 의사는 변함이 없었다.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마르센느가 아무리 세컨드 스킨에 특화되어 있다 해도 이기지 못할 상대는 아니라고 판단했습니다. 이긴 선례도 있구요. 특화되었을 뿐이지 독보적이지는 않아요.”

“그렇기는 하지만 이긴 브랜드라니… 지금 명품시장에서도 세컨드 스킨을 제작하는 데는 마르센느뿐일 텐데.”

“오래전 일입니다.”

마르센느 이후 보편화된 세컨드 스킨은 여러 브랜드에서 다루었다.

그리고 그중에서 마르센느를 누른 브랜드가 바로 샤네르였다.

독창적인 패턴보다 샤네르의 로고 패턴이 더 돋보였고 강했지만 이긴 이유는 여러 가지다.

강렬한 포인트, 크기 조절로 사람의 눈을 파고들었으며 부담스럽지 않았다.

세컨드 스킨은 몸에 딱 달라붙는 게 컨셉트이긴 하나 기성 고객들에게는 몸매가 드러나기에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샤네르는 그 점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라인을 만들어주면서도 세컨드 스킨의 장점을 부각시켰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

‘내가 만든 디자인이었어.’

모두가 함께 만들었다는 말이 정확하지만, 아이디어 대부분은 내 머릿속에서 나왔기에 수정을 통해 한층 더 업데이트된 디자인을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한 치도 물러설수 없다.

작든 크든 앞에 있는 상대 브랜드가 무슨 컨셉트를 가지고 나온다 해도 이겨 내야 한다.

그리고 2차전은 1차전을 통과한 브랜드의 디자인을 평가해 순위를 매기는 상대평가가 이루어질 것이다.

그렇다면 같은 컨셉트의 디자인을 가져온 브랜드들이 가장 눈에 띌 것이고 거기서 1:1로 승부를 보는 게 가장 적합한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화된 브랜드를 찍어 누른다면 아리raM의 디자인이 한층 더 돋보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수와 붙을 필요가 없다는 소리다.

1차전을 통과할 가능성이 높은 브랜드 하나를 찍어 누르는 게 더 편하다.

“의견이 그러시면 알겠습니다. 패턴이랑 이미지 자료 모아볼게요. 디자인 시안도 제작 들어가겠습니다.”

“네, 아리raM의 로고디자인 2가지 모두 패턴 작업하고 전통 누빔에 대한 정보도 상세하게 준비해주세요. 제가 만들고자 하는 디자인은 아리raM의 색을 입힌 세컨드 스킨이니까요.”

“그 점 명심하겠습니다.”

그 뒤로 가방디자인에 대한 의견을 이었다.

“가방 디자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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