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0화 (180/200)

“버려진 디자인이라… 그것도 확률이 높겠네.”

일명 재활용이다.

매해 여러 시즌을 준비하며 만들어지는 디자인이 수십수백 가지다.

그 모든 디자인이 상품화되고 출시되지 않기에 데이터로 보관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그 많은 디자인을 활동한다면 분명 하나의 타개법이 될 것이다.

역사가 오래된 브랜드나 큰 규모의 브랜드라면 많은 양의 디자인 데이터를 가지고 있을 게 분명하다.

“우리들 같은 신생기업들과는 다르게 역사가 깊은 브랜드에 유리하겠네.”

“맞아. 이브 정도면 그래도 비벼볼 만하지 않겠어?”

우리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브의 총괄 디자이너가 말을 이었다.

“이브도 상당히 많은 디자인 데이터를 가지고 있기는 합니다. 근데 변형시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라서요.”

그때 그 말을 듣고 있자니 내 머릿속에 불현듯 무언가가 떠올랐다.

이브가 처음 생길 때 초대 총괄 디자이너.

“혹시 이브 창립 디자이너가 엘레나 아닌가요?”

“맞습니다. 어떻게 아셨어요. 현재 에르맥스 총괄 디자이너 엘레나가 이브 창립 멤버입니다. 일본계 영국인이죠.”

“그 데이터 바로 보내주시겠어요.”

“네, 알겠습니다.”

엘레나 일본계 영국인.

선과 곡선의 여왕이라는 그녀의 디자인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도 사랑받는 디자인으로 유명하다.

‘초창기 디자인이라 해도 쓸만한 게 많을 거야.’

이브도 내 브랜드나 마찬가지이기에 도움을 줄 수 있다면 최선을 다할 것이다.

“이 방법들은 급한 상황에나 사용되어야 합니다. 세 브랜드의 디자인팀들은 최대한 디자인 만들어주세요. 디자인 회의는 여기까지 하고 다음 안건으로 넘어가죠.”

정희정을 다음 회의를 진행시키려는 그때.

회계팀의 김상진 팀장이 회의실 문을 벌컥 열어젖히고 들어왔다.

“큰일났습니다!”

“무슨 일이에요.”

그는 태블릿PC 하나를 들고 와 프로젝터에 연결시켰다.

“현재 시간 아리raM 관련 기자회견입니다.”

“아리raM 관련?!”

“네!”

모두가 놀라며 화면을 바라봤다.

“아니 이게 무슨….”

“저분… 회장님.”

“잠시만요….”

거짓 2.

* * *

서울 밀레니엄 컨벤션 센터.

현재 이곳에 유명 신문사를 비롯해 패션 저널, 방송국 관계자들이 모여들었다.

“선배님 무슨 일이길래 방송국까지 나온 겁니까?”

“나도 모르지 국장이 가보래서 나온 건데.”

KTB 안혜진 PD는 제보박스가 종영되고 예능국에서 보도국으로 발령을 받았다.

그녀는 보도국장에 지시에 의해 급하게 카메라맨과 신입사원을 대동해 컨벤션 센터에 도착했다.

“미진 선배!”

그녀는 타 방송국에서 근무하는 아나운서에게 말을 걸었다.

“혜진아. 너도 취재 나온 거야?”

“네. 국장이 닥달해서요.”

“우리도 갑자기 연락받았거든.”

“무슨 일인데 그래요?”

“모르겠어. 들리는 소리로는 지금 세계적으로 에르맥스 패션 대회의 열기가 뜨겁잖아. 거기에 관련된 거 같은데. 패션 쪽 기자들 모인 거 보니까.”

“오호… 그래요.”

잠시 후 둘의 대화가 끝이 나고 중앙홀의 문이 활짝 열렸다.

“들어가자.”

“네.”

안혜진은 카메라 자리를 잡고 노트북을 열었다.

그때 커튼 뒤로 낯익은 사람이 걸어 나왔다.

“저 사람 브랜드Han의 한은샘 대표 아니야.”

“그러네… 무슨 일이야?”

“옆에 저 사람 인드라 총괄디자이너잖아. 얼마 전에 기사 뜬 거 봤는데.”

“뭐 브랜드Han에서 스카웃하는 거야?”

기자들의 추측성 발언이 터져 나왔고 한은샘과 안드레스는 기자들을 향해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들은 무거운 얼굴로 기자회견을 시작했다.

“얼마 전 있었던 일에 대해 억울하고 화가 나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기자회견을 열게 되었습니다.”

처음으로 입을 연 사람은 안드레스였다.

이곳에 모인 기자들은 암암리에 아리raM 창단 파티에 있었던 일을 모두 알고 있다.

그로 인해 안드레스가 인드라에서 경질된 것까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모두가 알다시피 제가 경질된 이유는 디자인 대결에서 준명품인 아리raM에게 패배했기 때문이라는 건 누구나 알고 있을 겁니다.”

안드레스의 말에 모여있던 기자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져놓고… 웬 기자회견?”

“지금 핑계 대는 거 아냐? 그리고 아리raM이 준명품이었어?”

“저 사람 그냥 자기 진 거 때문에 깔아뭉개려고 하는 거 같은데요.”

아리raM은 한국에서 상당한 인기와 인지도를 가지고 있으며 한국 전통을 계승한다는 이미지가 강하기 때문에 충성도가 높다.

그런 브랜드에 대해 외국인이 그것도 패배자가 말을 하고 있기에 모두 부정적인 표정으로 기자회견을 지켜봤다.

“모두 아리raM을 두둔할지 모르지만 아리raM의 디자이너 차진혁은 도둑입니다!”

“안드레스 디자이너 그 말에 책임질 수 있나요. 굉장히 파급력이 큰 발언입니다.”

“책임질 수 있습니다. 거짓이라면 명품시장을 떠나겠습니다. 아니 제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면 어떤 명품 브랜드도 저를 찾지 않을 겁니다.”

그의 확고한 대답에 시끄럽던 기자들도 조용해졌다.

그때 나름 차진혁과 친분이 있던 안혜진이 말을 이었다.

“KTB 안혜진 기자입니다. 제가 아는 차진혁 디자이너는 그런 인물이 아니에요. 누구의 디자인을 훔칠 위인이 아니라는 소리죠.”

“도둑이 어디 자신이 도둑이라고 하나요. 제 말에 증인이 되어주실 분이 있습니다.”

“그게 누구죠?”

“차진혁 디자이너의 전 직장 상사인 브랜드Han의 한은샘 대표입니다. 모두가 아시는 분이죠. 한국을 대표하는 10인의 디자이너 중 한 명이고 브랜드Han 또한 작은 기업이 아닙니다. 그만큼 신빙성이 있다는 소리입니다.”

“그럼 대결에 사용한 가방 디자인이 차진혁 디자이너가 누군가에게 훔친 디자인이라는 소리입니까?!”

“맞습니다. 그 일로 기자회견을 열게 되었습니다.”

안혜진은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

그녀의 기억 속의 차진혁은 절대 그럴 위인이 아니었고 능력 또한 인정할 수밖에 없는 천재였다.

그런 사람이 누군가의 디자인을 훔쳤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안드레스는 옆에 앉은 한은샘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리raM 창단 파티 때 저도 함께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제가 아끼고 사랑했던 차진혁 디자이너에게 뒤통수를 맞았습니다. 대결이 진행되는 과정 중 저는 불쾌함을 숨기지 못하고 파티장을 빠져나왔습니다.”

“무슨 말이시죠? 더 자세하게 말해주시죠.”

“아리raM 차진혁 디자이너가 안드레스 디자이너의 대결에서 사용한 가방 디자인은 원래 브랜드Han이 올해에 출시하려고 했던 가방입니다.”

“증거가 있습니까?”

“당연히 있습니다. 저는 성공한 차진혁 디자이너와 파티 이틀 전에 만나서 밥을 먹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 브랜드Han의 올해 시즌은 뉴욕과 파리 진출에 큰 영향을 끼치기에 꼭 성공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차진혁 디자이너에게 브랜드Han의 디자인을 보여주고 검증을 받고 싶었습니다.”

순식간에 돌변한 기자들은 플래시를 터트리며 질문을 쏟아냈다.

현재 한국 경제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 차진혁이었고 높게 올라있는 사람은 공공의 적일 수밖에 없었다.

최상위 사냥감을 손쉽게 사냥할 수 있다는데 어느 누가 덤비지 않겠는가.

한순간에 기자들은 사냥감을 놓치지 않기 위해 달려드는 하이에나로 변해 있었다.

한은샘은 하이에나 같은 기자단을 향해 자신의 안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이건 차진혁 디자이너와 그날 있었던 일을 녹음한 대화 내용입니다. 그리고 함께 찍은 사진도 있습니다. 증거물이 된다면 언론사에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옆에 있던 법률 대리인이 마이크를 잡고 말을 이었다.

“이건 한 달 전 취득해놓은 디자인 특허 증명서입니다. 아직 특허가 승인 나지 않았지만, 디자인에 대한 우선권이 주어지는 증명서입니다. 법적 효력도 발생합니다. 이것도 언론사에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가 들고 있는 서류에는 호텔에서 만든 아리raM의 가방과 매우 흡사한 디자인이 그려져 있었다.

옆, 앞, 뒤까지 모양이 매우 흡사했다.

그리고 한 장의 사진은 파티에서 완성된 아리raM의 가방이었다.

“이건 호텔에서 대결 당시 차진혁 회장이 만든 가방 디자인입니다.”

법률 대리인은 당당하게 두 개의 증거를 기자단 앞에 내밀었다.

“디자인을 잘 모르시는 분들은 의아해하실지 모르겠지만 가방 디자인은 한 치의 선에 따라 많은 것이 바뀝니다. 디자인의 세부적인 형태를 보시면 차진혁이 브랜드Han의 디자인을 카피했다는 걸 알 수 있을 겁니다.”

순간 기자들이 웅성거리는 소리와 타이핑하는 소리가 홀 전체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거짓이 진실로 둔갑하는 순간이었다.

* * *

에르맥스 세계 대회에 관련된 회의를 마무리했다.

속보가 흘러간 이후.

끊임없이 거짓 기사가 터져 나왔고 마치 눈덩이가 커지듯 거짓은 거짓을 덧입어 내 과거를 부정하고 있었다.

― 한국 전통을 이용해 성공을 노린 파렴치한 디자이너.

― 그의 실력은 진실인가?

― 아시아 패션 어워드 디자인은 모두 직원들의 피와 땀!

― 한국 TOP 디자이너 한은샘의 고백.

― 안드레스 디자이너 인드라 복귀.

― 아리raM의 진실 혹은 거짓.

― 카피 디자이너 차진혁.

기사들은 나의 과거와 현재까지 이루어온 성과와 능력 모두를 부정하고 있다.

언론과 시민사회는 내 진실은 중요하지 않았고 그저 정상에 오른 사람의 몰락만을 즐길 뿐이었다.

└ 뭐야 젊은 나이에 성공해서 멋지다고 생각했는데 카피하고 다른 사람 꺼 훔쳐서 성공한 거였어.

└ 아리raM 이제 끝났네.

└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 그 소문 못 들었어? 이때까지 성과 낸 거 다 밑에 직원들 꺼 훔쳐서 한 거라잖아.

└ 쓰레기네.

└ 역시 돈만 있으면 다 되는 세상이라니까. 직원들 돈 찔러주고 디자인 샀을 거 아니야.

‘젠장!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나는 망연자실하며 한숨을 내뱉었다.

“어떻게 사장님이 나한테…….”

동생의 몸에 들어와 처음 마주친 어른이자 존경할 수 있는 인물이라 생각했다.

그런 사람에게 배신당하니 감정이 추슬러지지 않는다.

현재 어느 누구도 나에게 진실에 대한 질문을 해오지 않았다.

변명이라도 할 기회조차도 주지 않으려는 것이다.

그저 비웃고 깔보며 이 상황을 즐기고 있을 뿐.

“언론사도 기자들도 아무도 접촉을 해오지 않는다. 너무 이상하잖아.”

한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마음을 조금 진정시켰다.

그리고 다시 모니터 화면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믿고 따르던 한은샘의 거짓으로 내 입장을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졌다.

“아르노 회장… 아니면 제3의 인물?!”

이런 야비한 짓을 할 사람은 아르노 회장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실력과 아리raM을 가장 적대하는 사람도 아르노.

하지만 아무런 증거도 없이 LVMH그룹 회장에게 잘잘못을 따져 물을 수 없다.

그리고 현재 아리raM을 못 미더워하는 사람들이 다수이기에 성급하게 움직였다가는 되레 당할 수 있었다.

“한은샘 대표를 만나는 게 최선인데.”

한은샘을 만나 거짓된 정보를 다시 진실로 바꾸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다.

하지만 그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기에 내 바람대로 움직여 주지 않을 것이다.

“안 만나주겠지. 아 골치 아프네.”

고민하고 있던 그때.

정희정 디렉터가 사무실을 찾아왔다.

“회장님.”

“네?”

“급한 일이 생겨서요.”

“무슨 일이죠?”

MD팀과 경영팀이 긴급회의를 제의했다.

나는 무거운 마음을 가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자회견 이후에 바로 주문 취소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판매된 상품도 반품 요청이 이어지고 있고요. 타격이 상당할 거 같습니다.”

“하… 생산 잠시 멈춰주세요. 공식 사과문 올려주시고요.”

“회장님 반대입니다. 사과문 자체가 잘못을 인정하는 겁니다. 우선 떨어진 이미지부터 회복하는 게 급선무라고 생각합니다.”

누누이 말했지만 패션 기업은 브랜드 이미지로 먹고산다.

한 번의 실수로 망해버리는 회사가 부지기수였고 그중에서 가장 큰 타격이 바로 디자인 카피다.

아리raM은 현재 여러 가지 거짓 구설수에 올라 있기에 하나하나 해명하는 데도 많은 시간이 소요될 것이다.

그때 경영팀장이 말을 이었다.

“저희도 기자 회견하시죠. 그리고 소송으로 맞대응하는 게 맞습니다. 진실은 언젠가는 밝혀집니다.”

“그 언젠가가 최소 2년입니다. 그 시간 동안 손가락만 빨고 지낼 수는 없지 않습니까.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해요.”

“제가 한은샘 대표를 만나보겠습니다.”

그때 정희정이 말을 이었다.

“브랜드Han에 연락했는데 일절 외부전화 연결 안 되더라고요. 한은샘 대표 전화도 꺼져 있고요. 작정했어요! 디자인 카피라니 말도 안 되는.”

여기 모인 모두가 얼마만큼 힘들게 그 가방 디자인을 만들었는지 알고 있었다.

절대 디자인을 훔쳤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수시로 디자인 회의를 거쳤고 모두가 용납할 만한 초안이 만들어지기까지 많은 절차를 거쳤기에 나올 수 있는 신뢰도였다.

“하지만 언론에서 너무 몰아붙이는 상황이라. 일단 회장님 기자 회견부터 하시죠. 저희도 입장 발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가만히 앉아 당할 수 없습니다!”

모든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내 생각에도 우리의 입장을 밝히는 게 우선이었다.

“좋습니다. 바로 준비해주세요. 다음 일은 그때 생각하죠.”

“네.”

이대로 멈춰있다가는 아리raM이 한순간에 무너질 것이다.

나뿐만 아니라 아리raM을 지탱하는 직원들을 위해서라도 독한 마음으로 달려나가야 했다.

거짓 3.

* * *

기자회견은 되려 독이 되어 비수로 돌아왔다.

메이저급 방송사와 신문사도 기자회견에 참여하지 않았는 데다.

작은 신문사들조차 싸늘한 반응의 연속이었다.

‘현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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