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9화 (179/200)

“이 부분은 모든 브랜드가 사용하는 부분이기에 카피라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부분이 문제가 됩니다.”

그가 가리키는 부분은 스트랩이 통과하는 타공 부분이었다.

“이 모양은 에르맥스 가방에서만 쓰이는 타공법입니다. 이 타공법에 의해 스트랩의 주름이 아름답게 잡히거든요. 이 방법은 에르맥스에 디자인 특허가 나 있기에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는 이 말을 마지막으로 단상에서 내려왔다.

고개를 숙이고 고민하고 있던 안드레스가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패배를 인정하겠습니다. SNS 투표는 없던 걸로 해주십시오.”

빠른 결정이었다.

이 공간 안에서만 공개된 것이기에 출시 전에 디자인을 수정한다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수많은 명품, 준명품, 의류 상위브랜드의 관계자들이 알아버린 현실은 참담할 것이다.

‘언론사도 가만히 있지는 않겠지.’

“패배를 인정한다라 더 중요한 것도 남은 거 같은데.”

내가 혼잣말하듯 흘리는 말에 안드레스는 어금니를 강하게 물고 몸을 돌려 나에게 다가왔다.

“죄송합니다. 제 행동이 너무 경솔했습니다. 차진혁 회장님에게 사과드립니다.”

그는 고개 숙이고 있지만 아직도 아리raM은 명품이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다.

나에게 중요한 부분은 아니기에 웃어넘길 수 있었다.

“사과는 받겠습니다. 하지만 인드라는 에르맥스 세계 대회 참여하지 못할 겁니다.”

“…….”

“그리고 인드라는 선택한 브랜드 또한 말이죠. 그 무게를 오롯이 견디세요.”

인드라를 선택한 브랜드들은 아직도 아리raM을 명품으로 인정하지 않은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그러니 자존심을 굽히지 않고 인드라를 선택했을 테니까.

자비로울 필요가 없었다.

나는 완성된 가방을 들고 단상을 천천히 내려왔다.

아리raM의 직원들은 나를 보며 말을 이었다.

“고생했어요.”

“고생했어.”

류미리가 말을 이었다.

“대표님 정말 최고예요. 아직 완성된 디자인도 아니었는데 단 몇 분 만에… PVC를 사용해서 완성시키시다니.”

순간 그녀 말에 모두가 놀라워했다.

신지혜와 바쟐, 레이첼에 이르기까지.

“뭐야. 그럼 그 짧은 시간에 바로 초안을 완성한 거였어?”

“급하니까 어쩔 수 없었던 거죠.”

“아… 누가 김시현 동생 아니랄까 봐. 대단하다고 해야 하나 과감하다고 해야 하나. 디자인 조금만 잘못되어도 완성본에서 이상해질 텐데 너무 완벽하잖아.”

레이첼이 말을 이었다.

“김시현 디자이너 형제 아니랄까 봐.”

“네?!”

“급할 때면 좋은 디자인을 뽑아내곤 했거든요. 일을 몇 달이나 미뤄놓고 급하게 처리하면서 좋은 디자인은 곧잘 만들어 내곤 했어요.”

“칭찬 맞죠?”

“그럼요. 그럴걸요.”

“아… 아니구나.”

레이첼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환하게 웃기 시작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이어가는 가운데.

“아 소개시켜 드릴 사람이 있어요.”

나는 카르데나스를 앞으로 데려와 모두에게 소개했다.

“이분은 에르맥스 제작 최고 장인인 카르데나스 씨입니다. 이제부터 우리 아리raM에서 함께 일하기로 했습니다.”

카르데나스는 중절모를 벗어 가슴 위에 얹고 모두에게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카르데나스라 합니다.”

“카르데나스… 영광입니다!”

다니엘이 그의 앞으로 다가와 공손히 손을 내밀었다.

단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기에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존경합니다. 선생님.”

“선생님이라니 가당치도 않습니다.”

다니엘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신지혜와 류미리도 신기한 표정으로 둘을 바라봤다.

“다니엘 씨 저러는 거 처음 봐요. 대단하신 분이긴 한가 봐요.”

“에르맥스 최고 장인이니까요. 세계 최고의 가죽기술자라고 보면 돼요. 그중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들 거예요. 아프로 디나스의 제작자라면.”

화기애애한 분위기지만 서로를 견제하는 이상한 기류가 맴돌았다.

모두 이제는 에르맥스 세계 대회를 준비할 때라는 걸 인지한 거다.

이제부터 새롭게 명품의 판도가 쓰여질 테니까 말이다.

거짓 1.

* * *

― 아리raM 에르맥스 세계 대회 참여!

― 인드라 안드레스 총괄 디자이너 사퇴.

― 에르맥스 세계 대회의 모든 것.

― 명품 패션의 판도가 뒤바뀔 것인가?

― 유일무이한 패션의 세계.

― 비밀스러운 대결. 그 승자는?

자극적인 보도에 점점 패션대회의 열기가 더해지고 있었다.

“드디어 시작인가.”

뉴스를 보고 있는 그때 정희정 디렉터가 다급하게 직무실로 찾아왔다.

“이거 한번 보셔야 할 거 같은데요.”

“뭔데요?”

“대회 주최 측에서 대회 일정을 보내왔는데 대회 방식이 아시아 어워드 때와는 달라서요.”

“그래요?”

나는 문서를 천천히 확인했다.

그리고 정희정의 설명이 덧붙었다.

“문서에 따르면 두 번의 예선 이후 20개의 브랜드가 본선에 올라간다고 합니다. 근데 전체가 붙는 게 아닌 거 같아요. 다음 장 문서를 보시면 알 거예요.”

내가 다음 장으로 넘기니 서류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

[계절, S/S시즌에 겹치지 않기 위해 빠른 방식을 채택할 예정]

“그 말을 보고 유심히 생각해봤는데 가장 빠르고 받아들이기 쉬운 방법은 토너먼트식밖에 없어요.”

내 예상이 빗나갔다.

패션은 의상, 가방, 액세서리, 신발에 이르기까지 종류와 분류가 수십 가지에 이른다.

이걸 모두 대결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생각은 했지만, 토너먼트식으로 대회가 치러질지는 몰랐다.

“정말 이 방식이라면 실수는 절대 용납되지 않겠네요.”

“맞아요. 토너먼트라 한번 패배는 탈락이라 봐도 무방합니다.”

“이렇게 되면 미리 많은 걸 준비해야 할 텐데….”

“얼추 최소 의류, 가방, 액세서리 분야별 각각 5가지 이상의 디자인을 준비해야 할 거 같습니다.”

본선 참여 브랜드 20개의 브랜드가 대결을 통해 결승까지 올라가기 위해서는 3번의 대결이 펼쳐져야 한다.

운이 좋아 한번 부전승으로 올라갈 수 있지만 그럴 확률은 희박하다.

“디렉터님 아리raM, 타이거, 이브 디자인팀 전체 회의 준비해주세요.”

“네. 전달하겠습니다.”

아직 확정된 건 아니다.

하지만 준비하지 않으면 대회에서 참패당할지도 모를 것이다.

“축구야 뭐야… 토너먼트라니.”

의상만 해도 수십 가지의 상황에 따라 디자인과 색상까지 모든 게 달라진다.

그리고 그 상황에 맞게 구두, 액세서리, 가방도 모두 달라져야 하기에 준비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

“역시 에르맥스도 바보가 아닌 건가.”

그룹들이 움직인다는 건 머릿수가 많은 쪽이 유리하다는 소리.

토너먼트로 이루어진다면 같은 그룹의 브랜드끼리 붙을 수도 있다.

“골치 아프네.”

작은 기업일수록 불리한 싸움이다.

공평하게 디자인으로 승부를 보려 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 * *

캘링, LVMH, 샤네르, 에르맥스에 이르기까지 모든 브랜드들의 신경이 대회에 집중되었다.

그리고 어두운 손을 내밀어 브랜드를 무너트리려는 계획을 짜고 있는 이도 있었다.

“회장님, 대리인입니다.”

“아… 네.”

“생각해보셨습니까. 거액의 투자금과 함께 브랜드를 파리와 뉴욕에 자리 잡게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원한다면 저희 그룹에 들어올 수 있게 힘써드리겠습니다.”

“그게…….”

이야기의 당사자는 회장의 비서가 내건 조건에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양심을 판다면 큰 이득이 거머쥘 수 있었다.

아니 자신이 꿈꿔왔던 이상적인 브랜드의 성장을 이룰 수 있다.

세계 최대 패션그룹 LVMH의 회장이 내민 조건이었다.

그의 한마디에 작은 브랜드 한두 개는 눈앞에서 사라질 수도 정상으로 올라갈 수도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거절한다면 사장님을 적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희 그룹의 적이 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아실 겁니다.”

회유가 아닌 협박에 가까운 이 한마디에 마음이 흔들렸다.

“하지만 제 말에 힘이 필요할 겁니다. 제가 무슨 힘이 있어서….”

“그건 걱정 마십시오. 적임자가 있으니까.”

“네?”

잠시 후.

호텔 라운지에 낯익은 사람이 걸어오기 시작했다.

“오랜만입니다.”

상대는 얼마 전 아리raM 파티에서 본 인드라에서 경질된 총괄 디자이너 안드레스였다.

“이 친구가 도와줄 겁니다. 나름 패션 시장에서 인지도와 신용이 두터운 친구니까. 충분할 겁니다.”

“아… 네.”

안드레스는 상대에게 손을 내밀며 말을 이었다.

“잘 부탁해요.”

셋은 함께 자리하며 계획에 대한 이야기를 이었다.

한 사람을 제외한 둘은 하나의 목표인 아리raM 무너트리기에 집념을 가지고 있었다.

“약속을 지켜주셔야 합니다. 이번 일이 끝나면 루이바통의 총괄 디자이너 자리 주시는 겁니다.”

“회장님은 약속을 어기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 일은 걱정하지 마세요.”

“뭐 저보다 이쪽 분이 잘해야겠죠. 저는 신용을 빌려드리는 거뿐이니까. 큰 타격도 없을 겁니다.”

상대는 커피잔만 매만지며 둘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하… 내가 왜 이 자리에….’

그는 죄책감과 자괴감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아닐 줄 알았지만 욕심이라는 감정을 종잡을 수 없었기에 이 자리에 찾아왔고 벌써 이들과 같은 배에 올라타 버린 것이다.

마치 악이 전염되듯이 말이다.

* * *

타이거와 이브는 화상을 통해 회의에 참여했다.

일정도 빠듯한 데다가 나라 간의 이동은 상당히 부담스럽다는 이유에서였다.

현재 타이거는 장료이가 디자인팀 전체를 이끌어 나가는 중이고 이브는 나나세가 CEO로 있을 당시의 수석 디자이너가 총괄할 예정이다.

아리raM 직원들은 디자이너팀, MD팀, 기획팀까지 모두 회의에 참석했다.

나는 모두를 향해 말을 이었다.

“에르맥스 대회의 지침과 새로운 정보를 규합해 전달하고자 바쁜 와중에 부득이하게 회의를 진행시켰습니다.”

내 말에 모두 긴장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만큼 이 대회에 얼마나 많은 공을 들이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정희정 디렉터님 회의 진행하시죠.”

“네, 현재 서류 내용으로 짐작건대 아시아 어워드 같이 시간을 주지는 않을 거라 예상합니다. 가장 중요한 본선 이후 대결방식이 토너먼트식일 것이라 가정하여 디자인 계획을 잡을 생각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방금 알게 된 정보인데 무대 디자인도 대회 채점에 들어간다는 이야기가 나왔다고 합니다.”

“무대 디자인이요?!”

“네, 그래서 모든 브랜드가 MD팀과 디자인팀이 함께 협업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무대 디자인 또한 패션의 일부분입니다. 의상에 맞는 무대를 위해서라도 꼭 협업이 필요합니다.”

“그렇겠네요. 시즌 준비 인원을 배제하고 디자인팀과 MD팀 인원 차출해서 TF팀 가동하세요.”

“네.”

“타이거와 이브도 이 점 유념해서 프로젝트 진행해주세요. 아… 골치 아프네 무대까지 건드리면 스케일이 너무 커지는데.”

“사장님 말대로 무대를 건드리는 이유가 있는 거 같습니다.”

무대를 공유하지 않고 브랜드에 맡긴다는 건 한 가지 의상이나 가방으로 평가하지 않는다는 소리다. 무대의 장소를 모두 따로 주고 개별적으로 평가한다면 하나의 의상으로만 끝나지 않을 게 분명하다.

한 번의 대결에서 준비한 디자인 모든 걸 공개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회의가 진행되는 가운데 총괄 디자이너 류미리가 말을 이었다.

“토너먼트 방식에 시간도 알려주지 않는다는 건 주제도 그 자리에서 공개한다는 소리죠?”

“그렇습니다.”

“그럼 그 자리에서 바로 디자인하는 건 무리일까요? 디자이너 수를 늘리는 방법도 나쁘지 않을 거 같은데. 규정에 인원수가 제한은 없잖아요.”

그때 내가 말을 이었다.

“디자이너 수를 늘린다고 질이 좋아지는 건 아니니까요. 분명 양으로는 최선의 방법이지만 디자이너가 많아질수록 통일성과 퀄리티가 떨어질 겁니다. 아리raM의 색을 온전히 가져올 디자이너도 소수고요.”

“그러네요.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주제 비공개, 토너먼트 그리고 브랜드별로 컬렉션을 연다면 최소 형식에 맞는 기초 디자인 10종 이상을 가지고 있어야 상황에 따라 변형 가능합니다. 무에서 유를 만드는 건 너무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유에서 유로 변형시키는 게 쉽죠.”

이야기가 깊어질수록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다들 좋은 의견 있으면 말해보세요.”

대회뿐만이 아니라 시즌과 계절 시장의 구두, 스니커즈, 의상을 함께 만들어야 하기에 노동강도가 극에 달할 것이다.

모두 근심이 가득한 얼굴로 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경험해 보지 못했기에 서로의 지혜를 한곳에 모아야 했다.

“다른 브랜드는 어떻게 할 거 같아요?”

갑작스러운 내 질문에 모두가 다시 생각에 잠겼다.

그때 다니엘이 말을 이었다.

“가장 우승 후보에 가까운 브랜드에 디자인을 몰아주겠지. 각 브랜드의 우수 디자이너들이 하나의 명품에 디자인을 몰아주는 게 최선이야. 무대 디자인이 들어가는 대결은 분명 스케일이 컬렉션에 버금갈 텐데 명품 브랜드라 해도 힘들 테니까.”

“나도 같은 생각이야.”

다니엘과 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장료이도 말을 이었다.

“나라면 버려진 디자인! 그걸 사용할 거 같은데 분명 또 다른 타개법이 될 거 같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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