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평한 평가를 위해 서로에게 의견을 물어보지. 어떻게 했으면 좋겠나?”
그때 가장 앞에 있던 바쟐이 손을 들고 말을 이었다.
“양심에 맡기도록 하죠. 좋지 않은 디자인을 선택하는 거면 그 디자이너도 그 수준일 테니까.”
바쟐은 자신감에 차 있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나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엄지손가락을 살짝 들어 올리며 환한 웃음으로 칭찬을 대신했다.
그 뒤로 여러 의견이 나왔지만 큰 틀에서는 같은 맥락의 평가 방법이었다.
“잠깐!”
그때 사람들 뒤에서 흰머리의 중년 여성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녀의 목소리는 여성이지만 중후했으며 힘이 느껴졌다.
“급할 거 없어 보이는데? 여기 모인 사람들 말고 고객들에게 평가 기회를 주는 게 어떨까 하는데요.”
그녀의 말에 발끈하며 준이치가 말을 이었다.
“누구야! 어디서 나타나서 의견을 내는 건데. 여기서 있던 일을 왜 외부에 알려야 하냐고.”
준이치가 소리치자.
옆에 있던 사람이 상대의 얼굴을 빤히 보더니 흠칫 놀라며 말을 이었다.
“샤네르….”
“뭐?”
“알베르 샤네르….”
알베르 샤네르, 현재 브랜드 샤네르를 만든 창업자의 차녀다.
“와우. 나를 알아보는 사람도 있다니 신기하네요. 고마워요.”
그녀는 자신을 알아본 사람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며 감사의 웃음을 지어 보였다.
“초면인 분들이 많네요. 알베르 샤네르입니다. 제가 좀 늦었네요.”
그녀의 한마디에 장내가 웅성거렸다.
샤네르는 자신들이 주최하는 파티를 제외하고는 어디에도 참여하지 않는 걸로 유명했다.
그런데 파리도 아닌 한국에서 열리는 아시아 그룹의 파티에 참여하다니 이례적일 수밖에 없었다.
“제 의견은 어때요. 타미!”
“뭐…… 의견이니까.”
타미는 그녀를 보더니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갑자기 알베르라니….”
“제 의견이 가장 공평한 거 같은데요. 아 그리고 저는 아직 선택을 못 했는데 어떻게 해야 하죠?”
“마음대로 해. 네가 언제부터 그런 거 따졌다고.”
“타미. 저 엄청 절차와 규칙을 지키는 스타일이에요. 뭐 저도 새롭게 선택하는 거니까. 여기 모인 사람들도 다시 선택하게 해주세요. 공평하게!”
타미는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나와 안드레스를 바라봤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포스 장난 아니네.’
알베르 샤네르.
총괄디자이너 당시 그녀를 본 적이 있었다.
샤네르를 책임지기보다는 패션이라는 큰 틀을 책임지는 파수꾼 같은 사람이었다.
그녀는 파리 상인회뿐만 아니라 뉴욕패션협회에서도 상당한 위치에 있다.
언론과 패션 시장에는 얼굴을 잘 드러내지 않지만, 그녀의 영향력은 패션 시장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럼 허락한 걸로 하죠. 모두 디자인을 봤으니 다시 선택하세요. 당신들의 선택에 브랜드의 미래가 달려 있답니다.”
마치 그녀는 계산이라도 한 듯 나타나.
이 무대를 휘어잡았다.
내 생각이지만 파리 상인회와 뉴욕패션협회의 간부급인 그녀는 유명 브랜드가 에르맥스 세계 대회에 참가하지 못한다는 것에 반기를 든 듯 보였다.
잘못하다가는 시장의 흐름이 크게 뒤바뀔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일지도 모른다.
“당했네…….”
타미는 조용히 그녀에게 한 방 먹었다며 인상을 찌푸렸다.
“다들 다시 선택해. 두 번은 없어!”
타미의 말에 사람들은 일사불란하게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
아까 전 본 영상처럼 사람들의 선택이 달라지고 있었다.
인드라를 선택했던 사람들이 아리raM 쪽으로 서서히 이동하기 시작했다.
안드레스의 표정은 서서히 굳어가고 있었다.
어느덧 선택이 끝나갈 무렵 타미가 한 사람을 지목하며 말을 이었다.
“자네는 어디야. 빨리 선택해.”
“아…… 네.”
에르맥스 패션 세계 대회 5.
* * *
타미는 허둥대는 준이치를 향해 소리 질렀다.
그는 인드라와 아리raM의 완성된 가방을 바라보며 고민에 빠져들었다.
“젠장!”
대결 전만 해도 인드라의 안드레스와 합작해 아리raM을 깔보고 있었다.
하지만 현재 완성된 가방을 보고 아리raM이 우세하다는 현실에 고민에 빠져든 듯했다.
타미는 그 모습을 보며 헛웃음 쳤고 그를 향해 윽박지르듯 소리쳤다.
“얼른 골라!”
“네… 네.”
준이치는 눈을 질끈 감고는 아리raM의 가방이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안드레스가 허탈한 듯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고는 조용히 읊조리듯 말을 이었다.
“비겁한 새끼!”
굴욕.
가장 적절한 단어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과는 다르게 눈에 띄게 아리raM을 선택한 관계자들이 많아졌다는 걸 그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그를 향해 말을 이었다.
“지금이라도 졌다고 인정하시죠. 괜한 감정 싸움에 브랜드에 피해를 주고 싶지 않습니다. 사과한다면 조건은 없던 걸로 하겠습니다.”
그는 잠시 고민하더니 나를 바라보며 콧방귀를 뀌었다.
갈 때까지 가보자는 것이다.
‘자존심이 뭐라고.’
인드라는 100년의 전통을 가진 명품 브랜드다.
그 말인즉 100년을 살아남은 몇 안 되는 패션 브랜드라는 소리이기도 했다.
현재는 매출과 인기 순위에서 많이 밀려 있는 인드라라 할지라도 자존심과 긍지는 어느 명품과 같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이유에 나에게 아니 아리raM에 고개 숙일 수 없는 것이다.
‘최고의 흥행작이라는 워터백을 가지고 지면 더 타격이 더 클 텐데.’
그 순간 알베르 샤네르가 말을 이었다.
“모두 선택이 끝난 거 같네요.”
낭창한 모습을 지켜보던 타미가 버럭 그녀에게 소리 질렀다.
“샤네르도 빨리 선택해.”
“타미. 저는 샤네르 소속이 아닌데요. 알면서 그래요. 그냥 이름만 샤네르일 뿐이죠. 저는 브랜드에 소속돼 있는 것도 아니라서 선택할 권리가 없을 거 같네요. 어쩌죠?”
“너…….”
“파티는 즐거웠어요. 결과는 따로 보고 받을게요.”
그녀는 천천히 나에게 다가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차진혁 디자이너. 파리에 올 일 있으면 한번 들려요. 제가 괜히 끼어들어서 많은 브랜드에 기회를 준 거니 아리raM에도 제가 보상할게요.”
“아… 네.”
그녀는 손을 흔들며 유유히 파티장을 빠져나갔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던 타미는 다시는 보지 말자며 그녀에게 소리 질렀다.
“하여튼 저놈의 집안은 다들 지 마음대로야. 아휴….”
“타미는 샤네르 가문이랑도 친분이 두터운가 봐요.”
“뭐, 두터울 게 있나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디자이너들이 대부분이니 오다가다 얼굴 보고 대화한 정도지.”
알베르 샤네르의 참견으로 인해 많은 브랜드가 아리raM으로 옮겨왔다.
그중에는 LVMH그룹의 펜디, 테이큰, 다올, 언브로와 푸라다, 탐 브라운, 알리모래 같은 유명 브랜드들이 대거 포함되었다.
‘아쉽네… 여기서 정리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는데.’
의류 전문 브랜드가 아닌 브랜드를 제외한다 해도 많은 수의 브랜드가 아리raM으로 발을 옮겨 온 것이다.
타미는 다시 마이크를 부여잡고 말을 이었다.
“그럼 1시간 동안 투표를 진행하지 그때까지는 파티를 즐기고 있으라고.”
타미의 말이 전달되고 마이크를 내려놓으려는 그 순간.
“잠깐! 할 말 있습니다.”
미유미유의 제작총괄이 손을 들고 말을 이었다.
“무슨 말인가? 시간 없으니 짧게 하게.”
모든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제작자로서 양심에 찔려서 말이죠.”
“그게 무슨?”
“모두 겉모습에 속고 있기에 제가 진실을 밝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완성된 워터백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저 변형된 워터백 무언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직접 만든 제 눈에는 이 가방이 에르맥스의 버킨백으로 보이거든요.”
순간 안드레스가 단상을 내려와.
미유미유 제작총괄에게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당신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제가 느낀 그대로를 모두에게 말해주려는 겁니다. 한평생을 제작자로 살아오면서 카피 제품은 만든 적이 없기에 오점을 남기고 싶지 않아서요.”
“당신 그 말에 책임질 수 있어? 당신 말에 브랜드 이미지가 완전 바닥으로 실추할 수 있다고 거짓이면 거액의 소송이 걸릴 거야!”
“각오하고 있습니다. 제 판단을 믿습니다. 분명 세련되게 변형된 워터백이죠. 하지만 저 가방을 만든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패턴을 만들고 가죽과 제작을 하는 과정이 버킨백과 너무 흡사했습니다. 그래서 양심고백을 하는 겁니다.”
순간 카르데나스가 안드레스에게 다가가 말을 이었다.
“에르맥스 최고 장인 카르데나스입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제가 가방을 봐도 되겠습니까. 확인한 후 원상태 그대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에르맥스의 최고 장인이라고 밝힌 카르데나스를 보며 모두 놀라워했다.
“뭐야… 에르맥스 최고 장인이 왜 여기에 있어.”
“그러게….”
“최고 장인….”
“그 사람 아니야?”
“아프로 디나스 제작자다!”
아프로 디나스 제작자라는 소리에 파티장이 흔들릴 정도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카르데나스….”
아프로 디나스.
아름다운 상징의 여신 아프로디테와 그리스어 태풍 디나스를 합성해 만든 이름으로 아름다운 바람이라는 네임드를 가진 가방의 일종이다.
아프로 디나스는 세계에 단 하나뿐인 가방으로 5캐럴 이상 다이아몬드 100개와 희귀광석 오팔이 들어간 걸로도 유명했다.
가죽도 죽은 알비노 동물의 가죽을 전세계에서 끌어모아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정말 그 아프로 디나스 제작자가 저분이라고요?!”
“젠장 에르맥스 최고 장인을 못 알아보다니.”
신지혜와 다니엘도 화들짝 놀라며 그에게 집중했다.
둘을 제외하고도 모두 이 상황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봤다.
안드레스는 에르맥스 최고 장인의 부탁을 거절도 할 수 없었고 받아들이지도 못한 채 머뭇거릴 뿐이었다.
거절했다가는 정말 100년의 기업이 타 브랜드의 장점만 빼내서 카피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꼴이었다.
그는 끝내 카르데나스의 부탁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죠.”
카르데나스는 단상 위에 올려진 가방을 가져와.
조심스레 실을 제거하고 가죽을 하나하나 분리시켜 순서대로 선반 위에 놓기 시작했다.
디테일이 필요한 분리 작업을 손쉽게 끝내며 그의 능력을 한 번 더 입증해 주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드디어 카르데나스가 말을 이었다.
“하… 어떤 면에서 본다면 카피가 맞습니다. 하지만 카피라고 하기에는 형태가 조금씩 다릅니다.”
그의 애매모호한 말에 타미가 말을 이었다.
“자세하게 말해보게 만약 카피라면 두고 보지 않을 테니.”
“아, 네. 잠시만요.”
카르데나스는 가죽 하나를 가져와.
구두칼로 그려 나갔다.
“이걸 봐주시죠.”
그가 순식간에 만든 건 버킨에 들어가는 앞머리 장식 부분이었다.
“제가 방금 만든 게 버킨의 앞 장식인 머리 부분입니다. 그리고 이건 인드라의 워터백의 앞머리 장식이죠.”
내 눈에도 매우 흡사하게 보였다.
“보는 사람 대부분이 흡사하다고 느낄 겁니다. 손잡이가 들어가는 홈과 크기 형태도 비슷하니까요. 하지만 조금 다릅니다.”
카르데나스는 버킨의 장식을 앞으로 워터백 장식을 뒤로하고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이렇게 보시면 더 큰 차이가 보일 겁니다.”
“와….”
모두가 탄성을 자아냈다.
분명 떨어져 있을 때는 같아 보였지만 붙어 있으니 너무나도 다른 디자인이지 않은가.
“하지만 완전히 다르다고도 볼 수 없습니다. 분명 이걸 만든 디자이너가 버킨의 디자인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카르데나스는 뒤이어 스트랩과 옆 판을 들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