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6화 (176/200)

하지만 나는 아랫부분을 아치 형태로 바꾸어 바닥 전체를 투명한 특수연질 PVC로 만들 생각이다.

투명한 PVC에 아리raM의 로고가 들어간다면 한층 더 현대적인 느낌을 줄 거다.

“이 부분에는 나전이 들어가야 하는데…. 어쩔 수 없나.”

전면과 뒷면에는 디자인된 나전을 넣을 예정이었지만 현재로서는 제작할 수 없다.

“그렇다면.”

나전을 대체하기 위해 뱀 무늬 소가죽을 일정 부분 집어넣었다.

클래식 홀로그램 실버는 광택이 찐한 은색으로 가죽을 제작되었으며 중간중간 모자이크가 빛에 반짝거리기에 가장 나전의 느낌과 흡사했다.

그리고 전면과 후면의 가죽으로 푸라다의 사피아노 가죽을 채택했다.

사피아노는 미세한 사선으로 그어진 무늬의 가죽으로 현대미를 강하게 어필하며 도시적인 느낌이 강하다.

“끝이다.”

마지막 가방 디자인의 선을 긋는 순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은은한 빛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좋았어!”

빛은 서서히 내 눈을 집어삼키려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고 나는 그 빛을 겸허히 받아들였다.

“오랜만이네. 이 느낌은.”

현재 내 눈앞에는 내가 서 있던 장소 그대로가 나타났다.

하지만 주위는 수십 개의 검은색 마네킹과 흰색 마네킹이 한데 뒤섞여있었다.

“검은색 마네킹이 훨씬 많은데?!”

검정색과 흰색 마네킹들 모두 바라보는 장소와 몸이 향하는 모든 게 다르다.

분명 무언가를 의미할 거 같지만 아직은 알 수 없었다.

“어디로 가라는 건가?”

현재 마네킹이 서 있는 가장 중심에 내가 있는 듯했다.

나는 마네킹을 피해가며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 나가니 어느덧 가로막힌 높은 벽이 나타났다.

“전시장?”

전시장으로 천천히 걸어 나가자.

가방이 하나 놓여 있다.

“안드레스가 만든 가방 같은데.”

붉은색의 워터백.

형태는 많이 변형되었지만, 디자인 베이스만큼은 워터백과 아주 흡사하다.

워터백은 2002년 출시 당시 560억 원어치가 팔린 베스트셀러로 그 해에 20배의 경영성과를 낸 핸드백 디자인이다.

“이번 시즌에 이 가방을 판매할 생각이었군.”

성공한 디자인을 현대적으로 바꾸어 한 번 더 베스트셀러에 올릴 생각으로 보였다.

위험한 도전보다는 안정적인 매출을 확보하려는 속내가 비치는 대목이다.

그리고 왜 이런 내기에 가방 디자인을 선택했는지 알 수 있었다.

“워터백으로 날 이겨볼 생각이었구나.”

워터백은 시장바구니 모양에 양쪽에 가죽 손잡이를 단 가방 전형적인 핸드백이다.

하지만 입구를 덮는 문을 만들고 손잡이 부분을 도려내 깔끔하면서도 세련미를 강조한 핸드백으로 에르맥스의 가든 파티와 흡사한 모양을 가지고 있다.

“근데 아리raM이 아닌 왜 인드라의 가방이.”

분명 밝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아리raM과 나에게 나쁜 의미는 아닐 거라는 생각을 했지만 영상 속에서 인드라의 가방이 나타났다는 것에 의아함이 들기 시작했다.

“뭐가 다른 거지?”

나는 천천히 다가가 인드라의 가방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검정색 마네킹 수십 구가 고개가 일제히 나를 향해 돌렸다.

“아씨 놀라라!”

다행인 건 시선이 나를 향할 뿐 어떠한 액션도 취하지 않았다.

“소름 끼치네.”

마치 만지지 말라는 듯한 이 액션에 나는 워터백을 제자리에 내려놓았다.

“인드라가 흑인 건가.”

순간 떠오른 생각.

“그럼 내가 만든 가방도 있다는 소린데.”

나는 다시 한참 동안 마네킹을 지나가며 내가 만든 가방을 찾기 시작했다.

“내 예상이 맞다면 있어야 한다.”

그렇게 다시 막다른 벽에 멈추었을 때.

내가 만든 가방을 찾을 수 있었다.

“여기 있다.”

아까 전 인드라의 가방처럼 전시장에 고이 올려져 있는 아리raM의 가방.

내가 천천히 다가가 제작된 가방의 디테일을 확인했다.

내가 디자인한 그대로 완성된 가방.

현대적이면서 새로운 트렌드를 보여주는 훌륭한 가방 디자인이다.

“내가 만들었지만 훌륭한데.”

나는 무의식 중에 다시 가방을 들어 올리고 말았다.

그 순간 흰색 마네킹이 고개를 일제히 돌렸다.

“아… 소름 끼쳐. 적응 안 되네.”

두 개의 가방, 흑색과 백색의 마네킹.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는 없었다.

“뭘 의미하는 거지? 흑이 인드라고 백이 아리raM인 건 알겠는데.”

다시 가방은 전시장에 올려놓고 생각에 잠기던 그때.

마네킹들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그때.

“어?!”

백과 흑이 뒤섞이며 양쪽으로 갈라졌고 어느덧 다시 제자리에 멈추어 섰다.

“아리raM 쪽이 더 많아….”

그 순간 영상은 끝이 났고 내 눈앞에는 다시 호텔의 파티장이 나타났다.

“하… 대충 알 거 같은데.”

흑과 백은 현재 아리raM을 어떻게 생각하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마네킹의 수가 이 파티장에 모여 있는 사람들의 수와 흡사했고 아리raM에 적대하지 않는 사람의 수가 백을 나타내는 듯했다.

‘그렇다면 흰색과 흑색이 뒤섞여 선택했다는 것은 더 많은 사람들이 아리raM을 선택했다는 거네.’

“좋아!”

“응?”

“아니에요. 혼잣말이었습니다.”

“오케이. 근데 당신 내가 아는 누구랑 많이 닮았어.”

“그런가요. 제 형이 김시현 디자이너입니다.”

“…….”

그는 잠시 고개를 떨구더니 구두칼로 가죽과 PVC를 절단해 나갔다.

그리고 모든 작업이 마무리된 이후 말을 이었다.

에르맥스 패션 세계 대회 3.

* * *

카르데나스는 제단 작업을 마무리하고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살짝 닮은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말이야.”

그는 내 얼굴을 뚫어지듯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시현의 동생이라… 보고도 믿기지 않는군. 시현은 가족이 없다고 했는데.”

“네?! 아… 저도 최근에서야 알게 된 겁니다.”

“그런가. 뭐 비밀은 누구에게나 존재하니까. 형이랑 정말 안 닮았군.”

그는 나를 바라보며 황당한 말을 이었다.

“네?!”

“자네는 비현실적으로 잘생겼어. 솔직히 김서진 디자이너가 잘생긴 얼굴은 아니잖아.”

‘속마음이 그랬구나. 아오!’

나는 겨우겨우 표정 관리를 했다.

원래 같으면 헤드록이라도 걸었을 텐데 그럴 수 없었다.

“거기다 젊은 그룹의 회장이라 자네 형보다 더 대단하잖아.”

“그렇게 생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김서진 디자이너 정말 나한테는 고마운 사람이야.”

“그게 무슨? 그런가요.”

나는 그를 바라보며 살짝 미소 지었다.

그 순간 내 기억 속의 한 조각에서 카르데나스의 옛 모습이 그려졌다.

‘사회성 제로에 가죽이 전부인 사람.’

그는 나보다 5년을 먼저 에르맥스 장인으로 활동한 사람이다.

내가 처음 에르맥스에 부임하고 장인으로 활동하려는 첫날 그를 만났다.

그 시절의 에르맥스 최고장이 나와 그를 연결해주지 않았다면 그는 내 기억 속에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존재감이 제로였다.

“카르데나스 자네가 이 친구 적응할 때 동안 담당하게. 처음 부임한 거니 잘 알려주라고.”

“제가요?! 왜 저한테….”

“군말하지 말고 시키는 대로 해.”

“예…….”

그때만 해도 이 사람이 현 에르맥스 최고 장인이 될지는 꿈에도 몰랐다.

그 당시 에르맥스 내에 장인들은 아주 고지식한 집단으로 사내 정치와 파벌 싸움이 끊이지 않는 곳이었다.

그 안에서 서로를 평가하고 경계하기를 반복하며 싸움을 이어왔다.

이런 방식으로 몇 년 아니 몇십 년을 버티고 모든 파벌의 선택을 받은 사람 오직 한 사람이 최고 장인이라는 타이틀을 가질 수 있었다.

내가 나오기 전에 조금 바꿔놓기는 했지만 그래도 최고 장인이 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 기정사실이다.

‘신기하기는 하네. 최고 장인이라. 단 몇 년 사이에 최고 장인이 되었다는 소리잖아.’

그의 실력은 에르맥스 내에게서도 가장 출중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의 성격으로 카르데나스는 극강의 내성적인 성격으로 사회성이 완전히 결핍된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장인들은…… 흠… 하 설명하자니 어렵네.”

“대충 알고 있습니다.”

“미안하네. 내가 말수가 없어서. 저 사람이랑 저 사람한테 잘 보여야 해. 그리고 나를 멀리하는 게 좋아.”

그는 나에게 이런저런 충고를 해주었지만, 귀에 담지 않았다.

“잘 보일 생각 없는데요. 평가와 성과 결과는 언제 나옵니까?”

“그건 분기별로 시행하네. 성과는 대부분 일정하지만 평가는 최고 장인과 같이 일하는 장인 동료들이 서로에게 하지. 그러니 모두와 사이좋게 지내는 게 좋아.”

“그래요. 사이좋게라 그럼 카르데나스 당신은 어때요?”

“나?!”

그는 내 질문에 끝내 답하지 못했다.

주위를 한번 살피더니 그의 눈에는 자괴감이 가득 묻어 나왔다.

그런 그의 눈을 바라보며 나는 살짝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나쁘지 않네요.”

“뭐가?”

“저도 사내 정치할 생각 없거든요. 장인학교에서 그러더군요. 에르맥스에서는 사내 정치를 잘해야 한다고 하지만 저는 공예에 집중할 생각입니다. 실력으로 사내 정치를 뛰어넘을 자신이 있거든요.”

“그건… 불가능해. 무리하지 말게. 쉬운 길이 있는데 왜 어려운 길로 가려고 해.”

그는 자신이 걸어온 길을 부인하고 있었다.

분명 에르맥스에 들어온 카르데나스도 나처럼 생각했을 것이다.

실력으로 성과로 인정받겠다고 그럼 여기 있는 장인들도 인정하지 않겠냐는 생각.

하지만 그는 그러지 못했다.

모두 뛰어난 장인들이었고 간소한 차이로 서로를 평가하는 공간에서 그는 빛을 발하지 못한 거다.

그리고 내성적인 성격을 이용하는 인간들이 넘쳐났다.

말 그대로 착해서 당하기 일쑤였다.

“다들 자기 일은 자기가 해! 이 영감탱이들아. 아 그리고 파블로 얼마 전에 카일이 술 마시면서 너 욕하더라.”

“뭐!”

“아니 내가 언제 그랬어.”

“그랬잖아. 카일은 실력이 학생 수준이라고.”

나는 역으로 서로를 경쟁시켰고 이간질하며 사이를 멀어지게 만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서로 더욱 경쟁했고 중립인 나와 카르데나스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 결과 사내 정치가 더 개인적으로 변해가며 내 성과와 카르데나스의 성과가 커지기 시작했다.

‘그때 재미있었지. 역시 싸움 붙여서 구경하는 재미가 최고야.’

“형도 분명 카르데나스 씨를 좋게 생각했을 겁니다.”

“그랬을까… 나는 그에게 많은 빚을 졌어. 내가 최고 장인이 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시현 덕분이야.”

‘응?! 무슨 소리지.’

“자네 형은 나에게 항상 최고라고 해줬지. 실력만큼은 에르맥스에서 최고라고 최고 장인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이야. 그리고 최고 장인이 되면 자신과 같이 일하자고 자신도 최고의 디자이너가 되어 있을 테니 말이야. 그래서 서진이 파리로 떠나고 나는 최선을 다했네. 사람들에게 다가갔고 좋은 평가와 성과를 받기 위해 최선을 다했어.”

‘맞아. 내가 그랬었지.’

그의 말대로 그의 실력은 베스트 오브 베스트다.

나는 세계 최고라고 자부하는 에르맥스 장인들을 봐오면서 성장했다.

하지만 카르데나스만큼 실력이 끊임없이 성장하는 사람은 보기가 드물다.

눈이 자보다 정확했고 피할 기계가 없이 구두칼로 대량의 가죽 피할을 할 수 있었던 사람이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그가 만진 가죽은 어떤 가죽보다 광택을 일으켰다.

가죽의 결을 파악하고 그걸 아주 잘 사용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한 이유에 내가 파리로 떠나가는 날 그에게 말했었다.

“카르데나스 나는 이제 피렌체를 떠날 생각이야. 디자이너가 될 거거든.”

“응?! 무슨 디자이너는 아무나 되는지 알아. 그냥 장인으로 남아. 너 정도면 10년 안에 최고 장인이 될 수 있어.”

“최고 장인이라 나쁘지는 않네. 그건 네가 해라.”

“내가?!”

“그래.”

“내가 최고 장인이… 어떻게 돼!”

“그런가. 네 성격으로는 어려우려나. 그러니 노력해야지. 나도 런던에 있는 디자인 스쿨에 들어갈 거야. 노력할 거라는 소리지 그러니 너도 노력해! 내가 최고의 디자이너가 되고 네가 최고의 가죽장인이 되는 날 만나자.”

“최고의 디자이너와 최고의 가죽장인이라….”

“다음에 보자고 에르매스 최고 장인!”

그는 그 약속을 잊지 않고 그는 내성적인 성격으로 사내에서 동료를 사귀고 그들에게 평가를 받으며 최고 장인의 타이틀을 얻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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