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이치 디자이너는 카피로 물의를 일으키긴 했으나 패션 시장에서 나름 비즈니스를 인정받고 있는 디자이너이기에 재기한 듯 보였다.
“제 이야기가 길어진다고 좋을 게 없겠죠. 모두 파티를 즐겨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단상을 내려왔다.
진짜 비즈니스는 지금부터다.
이곳에 모여든 각 명품브랜드를 책임지는 CEO와 총괄디자이너 이들과 잘 어울린다면 협업이라는 좋은 발판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어이!”
계단을 내려와 바닥에 발을 내딛는 순간.
누군가가 나를 불러세웠다.
“어이?!”
내가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자.
역시나 그랬듯 안드레스와 준이치가 나에게 다가왔다.
분위기를 봐서는 절대 반갑다고 인사하는 모습은 아니었다.
그때 내 옆에 있던 정희정 디렉터가 손을 올려 나에게 말을 이었다.
“오른쪽은 인드라의 수석디자이너 안드레스, 왼쪽은 이번에 새롭게 취임한 인&아웃 총괄디자이너 준이치입니다.”
“네. 둘 다 안면이 있어서요.”
“그러십니까. 그럼 이야기 나누시죠. 잠시 물러나 있겠습니다.”
“네.”
정희정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둘이 나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이야기 잘 들었습니다.”
먼저 나에게 말을 이은 사람은 안드레스였고 적의가 확연하게 드러나 보였다.
인드라는 칼룬이라는 섬유회사에서 만들어진 의류 브랜드로 고품격 원단을 사용한 좋은 품질, 좋은 디자이너, 합리적인 가격으로 가성비 있는 명품이라는 칭호를 가지고 있는 브랜드다.
평판이 좋은 브랜드인 만큼 디자이너 역시 좋은 평을 듣고 있다.
“반갑습니다.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시군요. 제 친구가 무례했다면 사과드리죠.”
“아닙니다. 누구나 실수는 하는 법이니까요.”
“마음이 너그러우시네요. 제 친구의 실수를 대신해서 제가 한가지 충고해드려도 될까요?”
“네….”
“돈과 힘으로 만들어진 그 자리에 있다고 우리와 같다는 생각은 버리는 게 좋을 겁니다. 이 시장은 그런 걸로는 살아남지 못하거든요.”
조언은 빙자한 경고성 메시지.
나는 그의 말을 웃으며 받아들였다.
“하하하. 조언 감사드립니다. 근데 누구 생각인지 바보 같네요. 제가 돈과 힘으로 이 자리에 올라왔다니. 보는 안목이 영… 별로네요.”
순간 앞에 있던 둘의 인상이 찌푸렸고 성격이 불같고 행동이 먼저 앞서는 준이치가 소리치기 시작했다.
“누구긴 누구야! 여기 모인 사람들이지 어디서 근본도 없는 놈이 나타나서 네놈 때문에 우리가 귀찮게 여기까지 온 거잖아.”
“아르노 회장, 신지혜 회장, 타아르 지부장 때문에 온 건 아니고? 당신네들 브랜드 CEO들이 얼굴이나 트고 비즈니스 좀 하고 오라고 시켜서 온 거겠지. 아닌가?”
“무슨! 말도 안 되는….”
준이치는 얼굴을 붉히며 내 말에 반문했지만 당황스러워하는 모습에 내 말이 맞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새끼 여전하네 당황하면 귀 빨개지는 건.’
분명 이 자리를 축하해주러 온 인물이 반일 것이고 아르노와 신지혜가 참여한다는 소문에 의해 먼 길까지 찾아온 이가 반일 것이다.
언성이 높아지자.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고 그곳에는 바쟐, 신지혜, 레이첼, 타미까지 섞여 있었다.
나는 그들의 진심을 듣고 싶어졌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죠?”
내 질문에 안드레스가 말을 이었다.
“아까 전에 에르맥스 대회에 참여한다고 하더군요. 저는 반대합니다. 파리와 뉴욕 컬렉션에도 서보지 못한 아리raM이 참여한다는 건 격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는데요.”
‘격이라.’
모든 패션 브랜드가 참여할 수 있다는 전제가 있었지만, 이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브랜드의 계급을 매겨 참여를 못 하게 하고 있는 듯했다.
‘하여튼.’
“아리raM이 이외에도 우리가 용납할 수 없는 브랜드는 미리 차단하고 있습니다. 타아르 지부장이 승인했다 해도 파리상인회와 뉴욕패션협회 쪽에서는 승인하지 않을 겁니다.”
“왜죠?”
“왜라니… 아리raM이 우리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어깨라. 인드라와 인&아웃은 그럼 현존하는 에르맥스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브랜드입니까?”
“그건….”
그들은 주위의 시선을 느끼며 말을 흐렸다.
여기서 잘못 대답했다가는 뒷감당이 두려운 것이다.
“참여 조건은 모든 패션브랜드가 참여하는 거라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아리raM은 모든 조건에 충족합니다. 그래도 안 된다는 말입니까?”
“하하하. 듣도 보도 못한 브랜드가 우리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참여한다 해도 질 게 뻔한데 금전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손해일 텐데 일찌감치 포기하는 게 어때요? 아니지 뭐 돈이 많은 차진혁 회장님은 참여에 의미를 두시려나.”
안드레스는 비꼬듯 나를 몰아세웠고 내가 말을 이으려는 순간.
신지혜가 다가와 말을 이었다.
“오랜만이네요. 안드레스 디자이너.”
“…네. 파리상인회 회의 때 잠시 보고 처음이네요.”
“그런데 듣고 있으니 진실이 많이 왜곡되었네요. 언제 파리상인회에서 용납하지 않는 브랜드의 참여를 저지한다고 했죠?”
“그건… 루이바통과 다올 쪽에서 나온 이야기이고 회장님도 조건에 미달하면 안 된다고 합의하셨지 않습니까.”
“그건 조건에 미달했을 경우죠. 아리raM은 조건에 차고 넘치는데요. 브랜드 성장률과 아시아대회 참여 이력, 그리고 인원, 디자인 능력까지. 근데 왜 아리raM의 참여를 저지하는 거죠? 왜 인드라가 아리raM에 질 거 같아서요?”
“그게 무슨! 인드라는 준명품시장에서 상위 티어입니다.”
“그렇죠. 그건 박리다매니까요. 아닌가요?”
“그건… 브랜드 특성상.”
신지혜가 빡빡하게 몰아붙이자.
안드레스는 더 이상 말을 잊지 못하고 뒤로 물러났다.
나는 내가 주최한 파티가 망칠까 봐 그만두려 했다.
“신 회장님 그….”
여기서 일이 끝나나 싶더니 이제 모여든 사람들에게서 괴이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솔직히 아리raM이 명품브랜드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건 말이 안 되지!”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순간 여론이 반반으로 나뉘며 말싸움이 일어났다.
그때 참다못한 타미가 말을 이었다.
“다들 축하 자리에서 이게 무슨 실례인가!”
이곳에 모인 사람 중 타미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미국 패션의 전설이자 현재까지 패션 시장에 앞장서고 있는 사람이 바로 타미다.
“젊은 사람들 일에는 끼어들기 싫어 지켜보고만 있었지만 듣자 듣자 하니 너무 바보 같잖아. 하… 이렇게 싸우지들 말고 이건 어때?”
“네?”
“무슨?”
“패션대회 참여권을 가지고 대결을 하는 게 이곳에서 패한 사람은 에르맥스 세계대회에 참여할 수 없는 걸로 말이야. 그리고 반반으로 나뉜 거 같으니 한쪽 편에 선 브랜드들도 참여권을 박탈하는 걸로 말이야.”
타미의 파격적인 조건에 반문을 제기하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나는 아리raM에게 걸지. 타미 그룹 전체는 아리raM이 이긴다에 참여권을 걸겠네. 어때 아리raM이 진다면 그룹 하나가 빠지는 건데 우승이 앞에 보이지 않겠어?!”
그때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신지혜도 말을 이었다.
“저도 구짜의 참여권을 걸겠습니다.”
신지혜가 나서자 바쟐과 레이첼도 나서기 시작했고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한은샘 사장도 나에게 손을 들어주었다.
타미는 아까 전에 소리치던 사람에게 다가가 말을 이었다.
“자네는 어디 걸 생각이야.”
“아… 저는.”
사람들 사이에 있어 알아보지 못했지만 소리친 사람은 LVMH 그룹의 브랜드 제이콥스의 사장이었다.
“아르노 회장한테 전화해서 물어볼까? 어디다 걸어야 할지?”
“아닙니다. 회장님… 제가 선택하겠습니다.”
“그럼 빨리 결정해. 그룹의 CEO면서 그거 하나 결정 못 하나!”
타미가 몰아붙이자 제이콥스 사장은 손가락을 가리키며 안드레스를 지목했다.
“그럼 대결을 해야겠는데 뭐가 좋을까?”
타미의 질문에 모두가 숨죽였다.
그때 신지혜가 말을 이었다.
“안드레스 디자이너가 자신 있는 부분으로 하시죠. 그래야 군말이 없을 거 같은데요.”
“그런가. 그럼 말해보게 안드레스 디자이너.”
순간 시선이 안드레스에게 집중되었고 그가 말을 이었다.
에르맥스 패션 세계 대회 2.
* * *
지시를 받은 직원들이 일사불란하게 본사 건물로 행했다.
현재 이동이 가능한 아리raM이 보유하고 있던 장비들을 하나둘 옮기기 위해서였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보유하고 있는 가죽과 부자재, 소형 피할기, 타프미싱이 호텔 파티장 안으로 들어왔다.
“가방 디자인을 선택하다니….”
안드레스가 선택한 부분은 가방 디자인과 제작으로 나에게 상당히 유리한 조건이다.
신지혜와 나, 바쟐, 레이첼은 이 부분을 의아하게 생각했다.
“의아하네요. 제가 알기로는 안드레스 디자이너 전공이 의류 디자인 쪽일 텐데… 가방 디자인이라니 속내를 알 수가 없네.”
“나도 그래 저 친구 가방 디자인은 별로인데. 왜 불리한 걸 선택한 거야.”
“이유가 있겠죠. 긴장 풀지 마세요. 차 디자이너.”
안드레스는 프랑스 왕립 디자인 학교를 졸업한 디자이너로 왕립 디자인 학교는 경영과 의상 디자인이 주를 이룬다.
이러한 이유로 안드레스는 의상과 원단, 재료를 아주 잘 사용하기로 유명했다.
그런 그가 의상 디자인이 아닌 내게 유리한 가방 디자인과 제작을 선택한 것이다.
“무슨 꿍꿍이가 있겠죠.”
“그러고 보니 이번 인드라 가방 라인업이 곧 발표된다고 그랬어요. 그걸 미리 공개하려는 심산인 거 같은데.”
‘광고를 노린다는 건가. 너무 리스크가 크지 않나.’
가방 디자인 능력이 없는 디자이너의 새로운 디자인이라 도박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잘 만들어진 새로운 디자인이라면 엄청난 점수를 딸 수 있을 것이다.
“하이 리턴 하이 리스크인데.”
현재 가방에서 꽤 인지도가 높은 아리raM을 꺾었다는 이미지를 심어주고 싶을지도.
하지만 아리raM도 곧 새로운 가방을 출시하기 위해 만들어둔 초안이 있기에 나는 이걸 이 자리에서 공개하기로 결정했다.
“서로 새로운 디자인으로 싸우게 되겠어.”
모든 장비가 파티장에 세팅되었고 안드레스와 내가 중심점에 섰다.
그때 타미가 마이크를 들고 말을 이었다.
“모두 이번 결과에 승복하길 바랍니다.”
그의 묵직한 한마디.
한쪽의 패배에 자신의 브랜드가 피해를 입을 수 있는 상황이다.
세계 최초이자 최대의 패션 대회 에르맥스 세계 대회에 참여를 하지 못하게 된다면 해당 브랜드는 영영 명품시장의 뒷방 길로 밀려날지도 모르는 상황.
그러한 이유에 한쪽의 손을 들어준 브랜드 또한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한시간은 2시간, 시간이 짧은 관계로 피할과 제작은 해당 브랜드를 선택한 다른 브랜드로 위임하지. 인드라와 아리raM의 디자이너들은 담당자 1명씩 고르게.”
내가 고개를 돌려 인드라를 선택한 인원을 살피는데 그를 선택한 브랜드 중에서는 가방을 주력으로 하는 브랜드가 2곳이다.
하나는 브랜드 아르미르 그리고 다른 하나는 브랜드 미유미유다.
아르미르는 미국 전통 남성 가죽브랜드로 서류 가방을 주력으로 하고 있는 100년 이상 된 브랜드다.
이 회사의 슬로건은 한 가지 가방으로 평생을 함께한다로 슬로건에 맞게 아주 정교하고 튼튼한 가방을 만들기로 유명했다.
그리고 미유미유는 푸라다에서 파생된 가방 전문 브랜드로 세련되면서 브랜드 이미지 그대로를 디자인에 반영시키며 유명세를 타고 있었다.
‘미유미유겠군.’
아르미르는 CEO가 직접 파티에 참여했다.
그는 디자이너가 아닌 전문 경영인이다.
반대로 미유미유는 피렌체 출신의 가방 제작총괄이 이 파티에 참여했다.
“미유미유의 제작총괄을 선택하겠습니다.”
안드레스는 내 예측처럼 미유미유의 제작총괄을 선택했다.
나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그 자리에 있는 다른 브랜드의 장인을 선택해야 한다.
주위를 살펴보던 그때 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저는 저분으로 하겠습니다.”
허름한 정장에 중절모를 쓴 사내.
푸른 눈동자와 진갈색 빛 머리 색을 가진 중미의 혼혈인 에르맥스의 가죽장인 카르데나스였다.
그는 나의 사수이자 동료였던 에르맥스 최고 가죽장인이다.
내가 지목하자 카르데나스가 손을 걷어붙이고 걸어 나왔다.
“인원은 정해진 듯하니 이제 시작하지.”
안드레스와 나는 디자인을 그려 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이번에 출시할 가방 디자인 3종 중 메인 가방을 트레싱지에 얇게 초안을 본뜬 후.
디테일한 최종 디자인을 하나하나 섬세하게 그려 나가기 시작했다.
중간중간 수정할 게 있을 때는 과감하게 디자인을 변경했다.
‘비교가 불가능할 디자인이야.’
세계적인 패션 디자이너 칼라거펠트가 이런 말을 남겼다.
[비교가 끝나는 시점에 개성은 시작된다.]
이번 아리raM의 가방은 비교를 할 수 없는 디자인이라는 슬로건으로 시작해 가죽과 PVC 그리고 잉크, 플라스틱, 체인 등 전형적인 가방의 이미지를 벗어던진 개성 넘치는 새로운 가방을 탄생시켰다.
아리raM은 새로운 트렌드와 개성을 개척해 나아갈 것이다.
“핸들 부분은 천으로 할 거니까….”
핸들은 여러 색상의 실크와 명주 천을 선택해 만들 예정이다.
핸들에는 약간의 힘을 실어 줄 수 있는 보강재인 양면 SL 0.3T를 특수 제작해 심지로 사용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SL은 PVC 시트에 실을 촘촘하게 격자구조로 방직하여 늘어남을 방지해주고, 내구성을 더한 보강재로 스트랩에 가장 적합한 보강재다.
그러한 이유에 천의 중심에 붙여 내구성을 올릴 생각이다.
“일단 핸들부터 만들어주시겠습니까. 핸들은 적어준 규격 그대로면 됩니다.”
“오케이.”
그는 긴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 부분은 적혀 있는 색상으로 명주랑 실크를 섞어서 30mm 간격으로 박음질해 주세요. 크기는 가로세로 30cm 중심부에 보강재를 넣고 스크롤해야 합니다.”
“오케이.”
여전하네… 무뚝뚝하기는.
디테일한 부분까지 살려야 한다.
30mm 사선으로 박음질된 부분을 회오리치듯 일정하게 꼬아주어야 했고 박음질 기법에 따라 디자인이 변할지도 모르기에 상세하게 설명했다.
“변형을 시켜야 하는데.”
초안은 박스백으로 직사각형의 네모난 가죽 가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