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지내시려나.”
* * *
신지혜와 함께 압구정 골목길 삼겹살집으로 이동했다.
고급 주정을 예약한다니 한사코 거절하고 회사 인근 삼겹살집으로 우리를 부른 것이다.
“비싼 술 대접한다니 싫으시데요. 이럴 때 한번 거하게 얻어먹지.
“그런 거 싫어하시잖아요. 한결같으셔서 기쁘네요”
우리는 골목에 들어서며 뭔가 모를 향수에 취했다.
“와 고기 냄새. 뭔가 이 골목 특유의 향이 느껴진다니까 진짜 오랜만이다.”
“그러게요. 그때 이후로 저도 처음인 거 같은데. 신 디렉터님 이제 말 편하게 하시죠. 제 밑에 직원도 아닌데.”
“이게 또 편해져 버려서. 또 다르게 생각하면 차 대표님 위치가 반말할 위치도 아니잖아요.”
“사석이잖아요. 편하게 하세요. 부탁드릴게요.”
“흠… 그럴까?”
“네. 훨씬 편하네요. 여기네요.”
대화를 하다 보니 금방 약속장소에 도착했다 우리는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삼겹살집에 발을 내디뎠다.
식당에 들어서자 맨 구석에 낯익은 남자 한 분이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때 신지혜가 가까이 가더니 술잔을 빼앗아버렸다.
“반칙 아니에요. 왜 혼자 먼저 마시고 있어요! 청승청승.”
“왔어. 오자마자 왜 잔소리야. 회사가 근처니까 빨리 와서 한 잔 먼저 했다 어쩔래.”
둘은 몇 년 만인데도 격 없이 티격태격하며 웃음을 자아냈다.
그리고 한은샘은 고개를 돌려 나에게 말을 이었다.
“어! 이게 누구야 아리raM 차진혁 대표님 아니십니까.”
“애 무안하게 왜 그러세요? 완전 꼰대라니까.”
나는 한은샘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며 말을 이었다.
“오랜만이죠 사장님. 회사 나가고 연락 한 번 못 드려서 죄송해요.”
“뭐하러 회사 키우기도 바빴을 텐데. 앉아. 오늘 못 들었던 이야기나 실컷 들어보자.”
“네. 좋죠.”
한은샘 사장은 우리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그의 성품과 우리를 믿고 아끼는 마음은 그대로인 듯 보였다.
“두 분 다. 패션 시장의 거물들이신데 저 같은 중소기업 사장과 이렇게 한자리해주시다니 영광입니다.”
“또 농담하신다. 브랜드Han 상장해서 투자금 엄청나게 들어온 거 제가 모를까 봐요.”
“아. 소문이 파리까지 났나. 하하하. 나쁘지 않은 성적으로 안착했어. 이제 투자금으로 확장할까 싶어. 둘한테 도움받을 거 있음 염치 불고하고 받을 테니 각오하라고.”
“그럼요. 누구 부탁인데요.”
모두가 자신의 자리에서 꿈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때 한은샘 사장이 고기를 한 점 베어 물더니 나를 보며 말을 이었다.
“내가 진짜 진혁이를 안 놓쳤어야 했는데. 내 인생 일대의 후회다.”
“저는요? 저 놓치고는 후회 안 하셨어요.”
“후회는 무슨 잘 됐다 싶었지 잔소리하는 사람도 없는데.”
“어련하시게요.”
“이제 진지한 이야기 좀 할까.”
“갑자기요?”
“그래. 이런 기회가 흔해? 세계 명품 그룹 회장이랑 아시아 최대 패션 그룹 회장이 삼겹살집에 있는데.”
한은샘의 이야기를 들으니 새삼 나와 신지혜의 위치가 많이 바뀌었다고 느껴졌다.
“사람들도 너희 알아보는데. 이 연기 가득한 삼겹살집에 있으니 아니겠지 하는 거야.”
“설마요….”
“진짜라니까. 진혁이 모자 안 눌러쓰고 나왔으면 고기고 뭐고 못 먹었어. 이놈 얼굴 너무 튀잖아.”
“그런가. 그래서 질문이 뭔데요?”
한은샘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던졌다.
자신이 개척하지 못한 미국, 유럽 시장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현재 패션 시장의 동향에 대해 깊이 알고 싶어 했다.
“미국 시장부터 진입할 생각인데. 어떻게 생각해?”
“그쪽은 차 대표가 더 잘 알아요. 저희는 대부분 백화점과 갤러리 위주라 답변드릴 게 없어요.”
한은샘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흠… 개척시장인 미국도 명품은 상당히 보수적이에요. 브랜드를 알리는 게 쉽지 않을 겁니다. 광고나 언론을 이용하기에도 상당히 큰 금액이 들어요. 성공할지도 모르고요. 제 생각인데 미국 시장 진출하실 거면 금액이 커지더라도 아울렛이나 대형쇼핑몰로 들어가는걸 추천드려요.”
“그래… 일리가 있어.”
“현재 기존 명품을 제외하고는 성적이 저조해요. 미국은 현재 SPA브랜드가 강세라서요. 경쟁력 차이가 상당히 벌어져요. 시간과의 싸움이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진지한 이야기를 꽤 많은 시간 이어갔다.
그렇게 대화가 마무리될 때쯤 신지혜가 질문을 던졌다.
“에르맥스 패션 대회 나가세요? 브랜드Han은 자격요건 충분히 통과할 거 같은데.”
“그럼. 당연하지! 꼭 나가서 홍보해야지 그리고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명품 브랜드 놈들 깔아뭉개고 브랜드Han을 세계로 알려야지.”
“저 있을 때 쫌 그러시지. 간이 콩알만 하셔서.”
“하… 그래 켈링 회장님이신데 어련하시게.”
대회 참여 요건.
모든 브랜드를 참여시킨다는 조항은 변함이 없으나.
여러 가지 충족되었을 때 가능한 이야기다.
첫 번째. 국가적 브랜드 가치 순위, 두 번째 연 매출, 세 번째, 디자이너와 제작자 수 그리고 개별적인 포트폴리오를 받아 심사한다.
이 심사 기준은 브랜드가 대회에 참가해 충분히 수행할 수 있는지를 보는 거다.
이건 에르맥스 타아르가 전반적으로 시간을 투자해 검토하고 있다.
“그럼 사장님, 이 주 뒤에 아리raM 본사 준공식 저녁
파티 때 참여하세요. 도움이 되실 거에요.”
“나야 좋지. 기대되네.”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우리는 긴 밤 동안 술잔을 기울이며 추억을 되새겼다.
이 시간이 지나가면 동료이자 적으로 만날지 모르지만 우리는 언제나 같은 팀이었다.
* * *
빠르게 시간이 흘러 2주가 순식간에 지나갔다.
드디어 오늘 이전한 아리raM 본사의 준공식이 열릴 예정으로 각계 인사들의 축하 메시지가 끊이지 않았고 아리raM의 본사 직원, 안산 직원, 지방의 가죽장인, 무형문화재 선생님들까지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일차적으로 준공식 행사는 아리raM에 속해있는 회사 식구와 가족이 함께 보내기로 되어있었고 2차 저녁 파티에는 해외 바이어와 언론, 브랜드관리자들을 초대했다.
내가 주위를 둘러보며 인사를 하고 있는 그때.
전문 사회자의 안내 메시지가 스피커를 통해 들려왔다.
“곧 커팅식이 있을 예정이오니. 커팅식 참여 인원은 입구 쪽으로 와주시길 바랍니다.”
사회자의 안내에 따라 각 부서의 팀장들과 어머니, 신지혜, 황의선 선생님, 한국 패션 협회 회장 안선영이 커팅식에 참여했다.
“여러분 아리raM 본사 준공식에 참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기다리고 기다렸던 커팅식을 진행하겠습니다.”
사회자의 안내가 이어지고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커팅해 주십시오.”
모두 가위로 형형색색의 띠를 커팅하는 순간.
팡, 팡!
폭죽이 터져 나왔고 모두가 손을 맞잡으며 서로를 축하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작은 공방에서부터 압구정 건물에 이어 높은 빌딩까지 한 회사의 성장 과정 전체를 함께했기에 의미가 남다른 거 같았다.
“우리 회사가 이렇게 크다니.”
“다들 고생했어요.”
“대표님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모두 좋은 덕담을 서로에게 건네며 기뻐하는 와중 내 옆에 함께 자리하고 있던 어머니는 눈물을 훔치고 계셨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어머니의 어깨를 감싸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
“기분 좋은 날인데 왜 울고 그러세요.”
“기뻐서. 네 아버지도 이걸 봤으면 정말 좋아하셨을 텐데.”
“아버지는 조금 더 회복하시고 오면 되죠. 오늘은 기뻐만 하세요.”
다행히 아버지의 의식이 돌아왔고 현재는 중환자실에서 일반병동으로 자리를 옮기셨다.
간혹 깊은 잠이 들기도 하시지만 일시적인 증상이라 걱정 말라던 담당 의사의 말이 떠올랐다.
나는 밖에 모여 있는 모두에게 말을 이었다.
“모두 이제 안으로 들어가시죠. 제가 만찬을 준비했습니다.”
만찬장은 1층에 위치한 대형 세미나실로 행사를 위해 임시로 파티장으로 꾸며놓은 상태로 최대 100명까지는 여유 있게 수용이 가능하다.
“어휴 힘드네요.”
“뭘 이 정도 가지고 저는 취임하고 행사 한번 갔다가 혼났어요. 지역 지부장들에 해외 파견 지부장들까지 얼마나 기가 세던지.”
나는 신지혜의 표정을 보며 얼마나 시달렸는지 알 거 같았다.
모두 파티를 여유롭게 즐기고 있었고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다들 좋아 보이네.”
신지혜와 이야기를 이어가며 휴식을 취하고 있는 그때.
나전장 신영길 선생님의 목소리가 큰소리로 들려왔다.
“차 대표 한마디 해. 오늘 같은 날 대표가 한마디 해야지.”
순간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고 나는 무거운 다리를 일으켜 단상 위에 올라섰다.
아리raM 직원들과 그의 가족들의 시선이 나에게 집중되었다.
“모두 준공식에 참석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자리까지 오는 데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앞에 있는 무형문화재 선생님들의 도움이 가장 크다고 생각합니다. 아리raM의 뿌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 회사 직원들 모두 고생했습니다. 아리raM은 지금보다 한층 더 성숙한 기업으로 성장할 겁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오늘은 노고를 감사드리며 제가 준비한 자리이니 많이 즐겨주세요.
내 연설이 끝이 나고 다시 한번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나는 모두에게 고개를 숙이고 단상에서 내려왔다.
파티 4.
* * *
준공식 행사를 마무리하고 장인분들과 직원 가족들 한 명 한 명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저녁 행사를 진행할 호텔로 이동했다.
“신 디렉터님 제 차로 가시죠.”
“아니에요. 저도 준비할 게 있어서요. 먼저 출발하세요.”
“그럼 조금 이따가 뵙겠습니다.”
“그래요.”
나는 차에 올라탔고 창밖을 내려다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도박과도 같은 일이다.
내가 원하는 꿈을 위해 역사 속에 묻어 두었던 엄청난 부의 가치를 조건으로 내건 것이다.
‘자책감이라고 해야 할까.’
이 알 수 없는 감정에 내 자신에게 물어봤다.
하지만 벌써 달리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고 나는 목적지로 향해야 한다.
‘우승으로 보답하겠어. 그리고 아르노를 이 대회에서 끝내야 해.’
LVMH 그룹을 무너뜨리려면 브랜드 가치를 떨어트려야 한다.
나는 아리raM만이 아닌 켈링과 에르맥스를 도와 정상으로 올라갈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차량이 멈추었고 내가 차에서 내리자.
먼저 도착한 정희정 디렉터가 다가왔다.
“회장님 옷 준비해 뒀습니다. 이동하시죠.”
“네.”
“팀장들은 모두 도착했습니까?”
“네, 도착해서 파티 준비하고 있습니다.”
나는 파티 계획을 들으며 안내를 받아 파티장 옆에 있는 대기실로 이동했다.
그곳에는 여러 브랜드의 의상이 가득 준비되어 있었다.
“준비한 의상입니다. 어떠세요.”
“다 신상품들이네요.”
정희정이 준비한 파티복은 여러 명품 브랜드의 의상으로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기선 제압이 필요하겠지.’
남성 파티 룩은 보통 정장이나 턱시도 그리고 한 벌 세트형식의 제품이 많다.
하지만 오늘의 파티에서는 틀에 박힌 딱딱한 스타일보다는 자신감과 활기찬 모습을 내비치고 싶었다.
“이거랑 이거. 그리고 이거.”
“회장님? 색상이….”
“잠시만요.”
정희정은 나를 신비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여러 브랜드의 스카프의 로고가 노출되게 묶어 벨트선과 허리 라인을 감아올려 새로움과 화려함을 극대화시켰다.
의상을 블랙 라인으로 골랐기에 스카프의 포인트는 더욱 돋보일 수밖에 없었다.
요즘 가장 화려하고 핫한 아이템인 다올의 스니커즈 그리고 상위는 구짜의 화려한 패턴 형식의 블레이저를 채용했다.
“너무 화려하지 않을까요?”
“여기서 밀리면 안 되거든요. 대회는 벌써 시작했다고 봐야죠.”
예전 일을 떠올렸다.
당시 샤네르 초청 파티가 있을 경우.
각 브랜드 디자이너들은 코디 또한 자신이 속한 브랜드의 디자인 경쟁이라는 걸 알았기에 타 브랜드의 의상으로 자신이 속한 브랜드의 색을 덧입히는 걸 즐겼다.
이 행동은 보란 듯이 너희가 만든 의상으로 나는 이런 아이디어를 낼 수 있다는 걸 공격적으로 보여주는 형태였다.
에르맥스 세계 대회라는 큰 행사가 있는 지금이 가장 그들에게 나를 보여줄 수 있는 기회일지 모른다.
“이제 가시죠. 손님들을 맞이해야죠.”
“알겠습니다.”
“명단 한 번 볼 수 있을까요?”
“네.”
나는 유심히 명단을 확인했다.
VOKE의 박무식, 엘리제의 김소연, 브랜드Han 한은샘, 샤네르 안토니오, 오픈화이트 바쟐, 타미 타미힐피거…….
내가 초대한 명단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명품 브랜드의 디자이너들과 경영진 그리고 메이저급 언론, 잡지사 총괄 디렉터들이었다.
전 세계의 패션 시장을 이들이 이끌고 간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으며 한국 최초이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역사적인 날이 될 것이다.
“모두 공항부터 픽업하셨죠?”
“네. 다니엘 씨가 직접 나가 계세요. 그리고 픽업은 호텔 쪽에 맡겼습니다.”
“잘하셨어요.”
다니엘은 프랑스어, 이태리어, 영어 모두에 능통했고 총괄팀장급의 인사이기에 그들을 마중 나간다는 자체만으로 인사치레가 될 것이다.
“참여 인원은 어느 정도죠?”
“현재까지 공항 도착 인원과 픽업 인원을 조사한 바로는 80%로입니다. 대리인을 보낸 쪽도 있어서 최대 85%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세계가 지금 오늘을 집중하게 만들 인원으로는 부족하지 않다.
이들이 수많은 소문을 만들어 줄 것이고 더욱 이 대회를 뜨겁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나는 LVMH의 민낯을 세상에 알릴 것이다.
* * *
파티장에 가장 먼저 도착한 사람은 에르맥스 타아르로 그의 옆에는 BCA 사장 미카엘과 상하이 지부장이 함께 자리했다.
“명단 확인하겠습니다.”
“에르맥스 타아르. 옆에는 BCA 미카엘.”
“확인되었습니다. 안쪽으로 들어가시죠.”
셋은 안내원을 따라 파티장으로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큰 문이 열리고 나를 발견했다.
“빨리 오셨네요.”
“사안이 사안인지라. 인사하시죠. 이쪽은 저한테 부탁했었던 BCA 미카엘 사장입니다. 회장님의 대리인으로 참여했습니다.”
갈색 머리의 돋보이는 골격이 순수 독일인이라는 걸 알 수 있었고 매서운 눈매와 쓸어넘긴 머리가 그의 이미지를 대변했다.
“초대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