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1화 (171/200)

“하아….”

시간이 지나 박종식과 함께 노다 헤이치로 회장이 머물고 있는 도쿄 인근의 별장으로 향했다.

“회장님 건강은 어떠세요?”

“도련님이 옆에서 계속 체크하고 계십니다. 곧 회사 일정 때문에 중국으로 떠나야 했는데 오늘 차진혁 디자이너님 보고 간다고 기다리고 계시고요.”

“그래요.”

고민 속에서 떠오른 인물 장료이.

노다 헤이치로 회장의 또 다른 피해자라는 생각을 했었다.

이일의 깊은 내막도 모른 채 자신의 아버지를 잃었고 사랑하는 가족들과 뿔뿔이 흩어져 지낸 세월을 생각하면 나와 비슷한 처지가 분명했다.

1시간 이상을 달려 산속에 있는 작은 별장에 도착했다.

“저는 차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이야기 나누고 오시죠.”

“감사합니다.”

별장에 올라가기 위해 계단 몇 개를 오르는데 발이 무겁게 느껴졌다.

짧은 시간이지만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고민하고 고민하며 발을 내디뎠다.

내가 계단을 모두 올라가니.

눈앞에 노다 헤이치로 회장님이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어서 오게. 차 회장.”

“회장이라니요. 말 편하게 하세요.”

우리는 인사치레를 끝내고 별장 거실로 이동했다.

“오호, 차 디자이너.”

장료이가 나를 보더니 손을 올리며 환한 미소로 다가왔고 가볍게 나를 껴안으며 이때까지의 고생을 이 포옹으로 대신하는 거 같았다.

하지만 나는 살짝 힘을 주어 장료이를 떼 내어 냈다.

“어?!”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장료이를 뒤로하고 노다 헤이치로 앞 소파에 자리했다.

“할 말이 많아 보이는군?”

“궁금한 게 많아졌습니다.”

“그럴 거라 생각하네.”

잠시의 정적이 흐르고 말을 이은 사람은 내가 아닌 노다헤이치로 회장이었다.

“문서는 찾았겠지?”

이 질문에 차가운 물로 식혔던 심장이 다시 뜨겁게 끌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게 가장 궁금하십니까?”

“그걸 위해…… 아니지 내 질문이 잘못되었네.”

“왜 저희를 속이셨습니까?”

내 이야기를 듣고 있던 장료이가 화를 내며 내게 말을 이었다.

“뭘 속였단 말이야. 너한테 모든 걸 다 주었는데 할아버지는 다 포기하셨어.”

“조용!”

순간 노다 헤이치로가 따져 묻는 장료이에게 호통치며 물러나게 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내 앞으로 다가왔다.

“미안하네.”

노다 헤이치로는 내 앞에 무릎 꿇었다.

“할아버지…… 왜 이러세요?”

“가만히 있거라.”

나는 그런 노다 헤이치로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 문서 때문에, 고작 돈 때문에 이 많은 일들을 벌이신 겁니까 회장님의 집안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네….”

“말씀해 보시죠. 진실을!”

노다 헤이치로는 잠시 천장을 바라보더니 생각을 정리하고 말을 이었다.

“장료이가 모르는 일이네. 정말일세.”

“할아버지….”

“그리고 만약 그곳에 문서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영영 없던 일로 하고 싶었네. 우리 가문과 내가 행한 모든 걸 묻어버리고 아르노에게 덮어씌우고 싶었네. 내 짧은 생각이 자네에게 상처가 된 듯해 미안하네.”

“진짜 악인은 자수장이었습니다. 그 사실을 회장님을 몰랐다는 겁니까?”

장료이는 내 말을 들으며 내 멱살을 잡아당겼다.

“이 새끼야. 말이 심하잖아. 무슨 소리야! 우리 집안 어른이 왜 악인이야.”

“이거 놔! 직접 들어 내가 왜 이러는지.”

장료이는 멱살 잡은 손을 풀지 않은 상태에서 자신의 할아버지를 바라봤다.

노다 헤이치로는 장료이의 눈을 피해 말을 이었다.

파티 1.

* * *

장료이는 차디찬 바닥에 무릎 꿇고 있는 할아버지를 측은하게 내려다보았다.

제발 무슨 변명이라도 해주길 바라는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할아버지 말 좀 해보세요. 이 새끼가 오늘….”

“자수장이셨던 할아버님은 그때 일을 죽기 전까지도 후회하셨네. 한순간의 충동으로 아니 일확천금에 눈이 멀어 잘못된 선택을 했다고 만약 그때 조용히 가족들과 조용히 사라졌다면 침선장의 집안과 대한제국이 많이 변했을지도 모른다고 말이야. 자신 때문에 많은 사람이 고통받게 되었다는 것에 오랜 시간 힘들어하셨지. 항상 제자리로 돌려놓고 싶어 하셨기에 나와 아버지는 그 뜻을 이어받아야만 했네.”

“할아버지….”

장료이는 내 멱살을 잡고 있던 손을 천천히 풀며 멍하니 노다 헤이치로를 바라봤다.

“아니죠? 지금 무슨 이야기 하시는 거예요. 그럼 아빠는 아빠도 이 사실을 아셨던 거에요? 저만 몰랐냐구요! 말 좀 해보세요!”

장료이는 분을 삼키지 못하며 할아버지에게 소리쳤다.

“미안하다. 네 아버지와 너만은 모르길 바랐다. 내 선에서 이 깊은 사연을 마무리 지으려 했어.”

노다 헤이치로는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근데 문제가 발생한 건 그때부터였네. 아르노와 나는 보물의 흔적을 찾을 수 없어 전전긍긍했네. 근데 그때 김서진 디자이너가 나타난 거지. 침선장의 유일한 핏줄이라 여겨지는 김서진이….”

“그게 무슨 말이죠. 형의 존재가 왜?!”

“김서진 디자이너는 엄청난 능력으로 세계 패션 시장에서 인정받기 시작했고 아르노의 눈에 들어오게 된 거야. 그 뒤로 김서진 디자이너는 그곳이 늪인 줄도 모르고 투자를 받게 되었지. 아르노는 김서진의 특출난 능력을 오랫동안 가지고 싶었기에 자네 형의 과거를 파헤치기 시작했네.”

“하…….”

‘모든 게 나로 인해 비롯되었다는 건가….’

노다 헤이치로의 말에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LVMH 그룹에 투자받기 위해 아르노를 처음 만난 날을 떠올렸다.

‘젠장!’

“내가 찾던 사람이랑 참 닮은 거 같네. 친근감이 들어.”

“그렇습니까. 그럼 투자해주시는 거로 알겠습니다.”

“물론이지. 자네 같은 인재를 놓쳐서야 쓰나. 근데 자네 형제가 어떻게 되나?”

“혼자입니다. 할아버지는 제가 유학을 오기 전에 돌아가셨거든요.”

“그런가….”

그날의 아르노는 모든 걸 알고 나를 떠보는 것이 분명했다.

‘내가 이 세계에 발들이지 않았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소리네.’

필연인지 운명인지.

패션이라는 세계에 물이 흐르듯 스며들어 갔다.

그렇게 성공이라는 달콤함에 취해 있었고 더 큰 꿈을 꾸기 위해 달려갔다.

그것이 문제가 될 줄 생각지도 못했다.

“아르노는 침선장의 핏줄이 가진 능력을 알고 난 이후 자네 형을 죽였고 자네까지도 죽이려 들었네. 내가 발견하지 못했다면 자네도 죽었을지 모르지.”

“그게 무슨?!”

노다 헤이치로는 내가 처음 진혁의 몸에 들어왔던 그 날에 관한 이야기를 전했다.

“술에 잔뜩 취한 자네에게 아르노의 부하들이 접근했었지. 기억나지 않겠지만 심장마비가 왔던 자네를 종식이가 구했었네.”

“그랬군요.”

분명 처음 깨어난 그 날.

가슴에 엄청난 통증을 느꼈다.

‘어쩌면….’

순간 이 몸의 주인인 내 동생도 죽음의 길을 넘었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이 몸에 들어오게 된 것일지도.

“이 말씀을 하는 건 저한테 용서를 받고 싶으십니까?”

“아닐세…. 용서를 바라는 게 아니야. 나를 평생 원망해도 좋으니. 내 손자인 장료이만큼은 미워하지 말아 달라는 부탁일세. 이놈은 아무것도 모르네. 모두 내 잘못이야.”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내 마음에 끓어 오르던 분노도 원망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고 멍하니 서 있는 장료이를 바라보니 측은한 마음만이 맴돌았다.

여기 있는 자수장의 집안의 사람 모두에게 화살을 돌려 원망하고 화를 낸다고 해도 달라지는 게 없었다.

“자네의 아버지도 어머니도 그리고 형도 잃었으니 벌은 달게 받겠네.”

노다 헤이치로는 눈물을 보이며 고개를 바닥으로 떨구었다.

그 모습에 장료이도 무릎을 꿇으며 나에게 사과했다.

“내가 사과할게. 우리 집안이 저지른 짓 내가 갚을 테니까. 제발 할아버지만은….”

나는 장료이를 뒤로하고 뒤에 있던 노다 헤이치로에게 말을 이었다.

“용서할 생각이 없습니다. 당신 집안과 아르노에게 제가 받은 투자금은 모두 사회에 환원하겠습니다. 처음부터 개인소유가 아니었으니까요.”

“그건 자네가 마음대로 하게….”

나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 별장을 빠져나왔다.

박종식은 그런 나를 보며 차에서 내려 말을 이었다.

“대화를 잘하셨습니까?”

“…….”

한층 더 무거워진 내 표정을 보며 박종식은 더는 말을 잇지 않았고 나는 무거운 마음을 안고 차에 올라탔다.

“하…….”

이 한숨에 모든 근심을 덜어내고 싶었다.

“저는 제가 가야 하는 길을 갈 겁니다.”

“그러실 거라 믿습니다. 호텔로 이동하겠습니다.”

나는 모든 갈등과 분노를 내려놓고 김서진이 꿈꿔왔던 일을 행해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아르노!’

나는 수화기를 들어 통화버튼을 눌렀다.

* * *

아르노는 익숙한 목소리에 순간적으로 화가 치밀어올랐다.

마치 승리감에 가득 차오른 듯한 이 말투에 화가 머리끝까지 솟구쳤다.

“네놈이 감히! 나를 속이다니.”

“회장님이 찾는 물건이 없어서 화가 나신 겁니까 아니면 문화재들이 짝퉁이라 화가 나신 겁니까?”

“네놈은 진짜 보물이 있는 곳을 알고 있었지. 살고 싶으면 어디 있는지 말해!”

“어이구 무서워라. 역시 그룹의 회장님이라 그런지 눈치가 빠르시네.”

“그 문서 당장 가져와. 아니면 네놈 가족들이고 노다 헤이치로고 다 죽여버릴 테니까!”

“이제 처지가 달라졌습니다. 제가 쉽게 당하지는 않을 거니까요.”

“이런 건방진.”

“근데 회장님. 저는 이 문서에 관심이 없거든요. 그래서 말인데 회장님에게 드리겠습니다. 어떠십니까?”

“네놈이 또 무슨 꿍꿍이를 부리려고!”

“꿍꿍이라니 속고만 사셨나.”

아르노는 진혁의 말을 들으며 순간 감정이 흔들리고 있었다.

“진짜 무섭네요. 순간 목소리가 벌써 기대하시는 거 같은데. 돈이 그렇게 많으신 분이 무슨 욕심이.”

아르노를 보며 사람의 욕심이 얼마나 커질 수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가지면 가질수록 더 많은 걸 누리고 싶어 하는 탐욕스러운 게 인간이라지만 아르노는 도가 지나칠 정도로 무서운 인간이었다.

“그냥 드리기는 그러니까 내기 한번 하시죠. 이기시면 드리겠습니다.”

“무슨? 내가 네놈 말을 어떻게 믿지.”

“믿는 건 자유입니다. 아니지 방법이 없는 건 아니죠.”

“말해봐.”

“회장님 그룹의 명품브랜드 5개를 에르맥스가 주최하는 패션 세계대회에 참가시키십시오. 그럼 제가 이 문서와 위임장까지 모두 부상으로 내놓겠습니다.”

나쁘지 않은 조건이다.

부상으로 내놓는다는 건 진혁의 손을 떠나 관리된다고 봐도 무방하다.

“세계대회라….”

“회장님에게 나쁘지 않은 조건인 거 같은데요. 세계적으로 능력 있는 디자이너 대부분을 LVMH 그룹이 소유하고 있으니까요.”

진혁의 말처럼 현재 능력 있는 디자이너 대부분이 LVMH와 켈링 그룹 소속이다.

그리고 LVMH는 오랜 세월 개인 브랜드들을 흡수했기에 디자이너 라인이 더 두텁다.

이 말은 대회에 참가하기에 가장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는 소리.

LVMH의 회장인 아르노가 이 사실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아르노는 한참 동안 뜸을 들이다 말을 이었다.

“문서의 진품 여부가 확인되고 주최 측에 문서가 전달된다면 생각해보지.”

“좋습니다. 곧 제가 파티를 주최할 겁니다. 그때 보고 뵙도록 하죠. 모두에게 알리겠습니다.”

통화가 종료되고 아르노는 쾌재를 부르듯 소리쳤다.

“멍청한 새끼! 그 돈이면 명품 브랜드 수십 개를 사 모을 수 있을 텐데. 경영팀에 전달해. 전 사 명품 브랜드들 모두 에르맥스 세계 패션 대회에 참가시키라고 우승하는 브랜드는 엄청난 혜택을 줄 거라고 말이야.”

“네, 알겠습니다. 바로 전달하겠습니다.”

질과 양 모두를 갖춘 LVMH 그룹이기에 아르노는 벌써 승리의 만찬을 즐기고 있었다.

“재미있어지겠네.”

* * *

에르맥스 타아르는 수화기를 들어 말을 이었다.

“오랜만입니다. 차 회장님.”

“회장이라니 어색하네요. 대회 준비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죠?”

“잘 준비하고는 있습니다. 일부 문제가 있기는 한데 곧 해결될 겁니다.”

“무슨?!”

“명품 브랜드 참여율이 너무 저조합니다. 자신들이 가진 기득권을 내려놓기 힘들겠죠. 명품이 아닌 브랜드들과도 겨루어야 하니까요. 강요할 수도 없는 일이라 고민 중입니다.”

“참여를 거절한 곳 리스트 받아볼 수 있을까요?”

“리스트라 할 것도 없습니다. LVMH 그룹 전체가 거절 의사를 표명했습니다.”

“그래요. 그 문제는 곧 해결될 겁니다. 그러니 시일 내에 대회가 열리도록만 해주세요.”

“그게 무슨?”

“곧 알게 될 겁니다.”

타아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알겠습니다. 문제없이 진행하겠습니다.”

“그리고 대회를 더 크게 키우고 싶은데요.”

“네?! 충분히 큰 대회가 될 텐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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