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3화 (163/200)

“…자네.”

“죄송합니다. 회장님. 이제 모든 걸 끝내야겠습니다.”

노다 헤이치로는 하형선의 대답에서 그가 배신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오랜 시간 자신을 속였다는 거까지 말이다.

“그럼 종식이는 어떻게 된 거야!”

“죽었을 겁니다. 지금 레예스를 구하기 위해서 달려갔거든요. 정말 웃기지 않습니까. 그놈은 예나 지금이나 정이 많아서 탈입니다. 저를 막아섰으면 회장님은 무사했을 텐데 멍청한 놈.”

“옳은 선택을 했을 거야. 종식이는 그런 아이니까. 거칠고 복수심에 앞뒤 분간 못할지언정 심성만은 고운 아이니까.”

“그렇습니까. 그럼 저는 어떻습니까?”

“…….”

“왜 말씀이 없습니까?”

“지금의 너는 내가 생각하는 형선이가 아니구나.”

“그렇습니까! 하하하.”

하형선을 반강제적으로 노다 헤이치로를 자리에 앉히고는 구상복 앞에 멍하니 멈추어 섰다.

“그렇게 찾던 보물의 흔적을 보시니 어떠십니까?”

“…….”

그는 노다 헤이치로를 농락하기 시작했다.

그때 닫혀 있던 사무실의 문이 열리고 낯익은 인물이 들어왔다.

“어이구 회장님. 어찌 이런 신세가 되셨습니까.”

“네… 이놈! 당장 나를 풀어주지 못해!”

노다 헤이치로 앞에 아르노 회장이 나타났다.

“이제 끝을 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이제 당신이 가진 모든 걸 내놓으시지요. 아니면 당신 손주고 며느리고 차진혁까지 모두 없애버릴 겁니다.”

“이제 나에게 남은 건, 이 한목숨밖에 없다. 그냥 죽여. 나로서 이 모든 걸 끝내란 말이야!”

“그럼 너무 재미없지 않겠습니까. 결말은 내되 찬란하게 마무리해야죠.”

베르나르 아르노는 드디어 자신의 승리를 확신했다는 듯 환하게 웃어 보였다.

“회장님. 조용한 곳으로 모셔.”

“네.”

하형선은 아르노의 충직한 개처럼 움직이고 있었고 노다 헤이치로는 그런 그를 가만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뭘 그렇게 멍하니 보십니까? 허무하신가 봅니다. 가장 믿고 있던 놈이 배신했으니 그럴 만도 하네요.”

“…….”

순간 노다 헤이치로 얼굴에 검은 천이 씌워졌고 눈앞이 암흑으로 변한 상태에서 어디론가 이동했다.

그의 옆에는 하형선이 지키고 있었다.

“네… 이놈! 내가 어찌 너를 거두었는데. 하문희 선생님을 생각하면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어머니는 좋아하실 겁니다. 회장님, 어머니가 왜 저를 거두고 회장님한테 보냈는지 아십니까.”

“그게 무슨?”

“어머니는 보물이건 상의원이건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아니죠. 반대로 증오했습니다. 그저 본인은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의 복수가 필요했던 거뿐이지요. 어머니도 회장님 이용한 겁니다. 자신들을 지켜주지 않은 자수장에 대한 원한 때문에 말이죠. 아 그리고 어머니와 베르나르 아르노 회장은 원래부터 알고 있던 사이였습니다. 두 분이 거래를 한 것이지요. 그러니 이제 단념하십시오.”

“어찌… 이렇게 얽히고설켰단 말인가…….”

노다 헤이치로는 이 악의 굴레가 어디서부터 엮인 것인지 무섭기 시작했다.

어쩌면 베르나르 아르노가 아닌 자신의 욕심으로 인해 계속 이어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때까지 정을 생각해서 나로 끝내게….”

“그렇게는 안 될 거 같습니다. 보물의 흔적은 모두 차진혁에게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제가 일기장을 해석했습니다. 새로운 걸 알아냈거든요.”

“그게 무슨?!”

“자수장의 일기장은 일기장이 아닌 기록장이었습니다. 두서없이 일어난 일들을 적어놓았고 시대적 배경도 조금씩 다르다는 걸 깨닫는 순간 짧게나마 봤습니다. 신기한 빛과 영상을 말이죠.”

“설마….”

그의 말에 노다 헤이치로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자신도 할아버지에게 듣기만 했던 침선장의 능력.

그것은 빛에 의해 명견만리[明見萬里] 먼 미래를 내다보고 길흉화복[吉凶禍福]을 점칠 수 있었다고 했다.

‘어째서 형선이에게….’

진짜로 이런 능력이 있다면 침선장의 집안사람이어야 한다.

그런데 어찌 하형선에게서 능력이 발했는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말입니다. 제가 침선장의 집안과 피로 묶여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때부터 욕심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나도 선택받은 인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말입니다.”

“설마… 보물을 노리고 있는 게냐?!”

“그러면 안 됩니까? 궁금해졌습니다. 왜 두 사람이 이까짓 옷에 한평생을 바치는지 그래서 저도 욕심을 조금 내보려고요. 제가 했던 모든 노력의 보상이라고 생각하십시오.”

“어찌… 이건 누구의 것도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역시나 말이 통하지 않는다니까.”

노다 헤이치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르노 회장이나 자네나 모두 욕심만 가득하구먼.”

“하하하. 회장님은 늘 본인만 착한 척하는 위선자입니다. 역겨운 노인네. 그렇게 말하면서 왜 계속 보물을 찾아 헤매시는 겁니까?”

“…….”

“그 보세요. 대답도 못 하는 주제에.”

“나는…… 조상님의 업보를….”

“닥쳐 위선자 새끼야. 조상은 무슨 네 욕심일 뿐이야. 차진혁도 이용하고 있는 거잖아. 꿀을 주고 더 큰 걸 취하려고.”

노다 헤이치로는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어쩌면 하형선의 말이 진짜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욕심이 생겨난 것인가….’

에르맥스 8.

* * *

* * *

챙겨온 보물의 흔적에서 검붉은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살짝 고개를 돌리니 일기장에서도 응축되어있던 밝은 빛이 뿜어져 나오며 순식간에 두 개의 빛은 한데 섞여 나를 집어삼켰다.

그리고 고풍스러운 궁궐의 일부가 나타났다.

“여기는….”

궁 안의 공방으로 보이는 협소한 공간.

이곳에는 낯익은 인물인 침선장과 자수장 그리고 휘하의 장인들이 한데 섞여 토론의 장이 이어졌다.

그 내용은 일기장 일부의 이야기였다.

― 세자의 안위가 걱정된 용상께서 나에게 왕가의 보물을 숨길 장소와 지도 제작을 맡기셨다.

‘침선장이 쓴 내용의 일부분인가….’

“이건 어떠한가. 자수로 지도를 만드는 걸세.”

“숨겨야 한다지 않는가. 자네의 실력이면 그리는 것보다 더 알기 쉬울걸세.”

“내 말을 끝까지 들어보게 자수를 완성시키는 게 아닌 미완성시킬걸세. 하지만 보이게 해야 되겠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구만. 미완성인데 어찌 보이게 한다는 말이야?”

“한번 보게나.”

어명에 따라 암호화된 지도를 만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하지만 좀처럼 일이 풀리지 않았다.

“전하의 의중을 알 수가 없구만.”

“세자 전하를 위한 것이지 않겠는가. 이런 시국에 세자 전하를 지킬 수 있는 건 왕가의 보물들 뿐이라 생각하는 거 같네만.”

꽤 오랜 시간 자수장의 자수가 이어졌고 하나의 예시가 완성되었다.

“한번 보게나.”

“그냥 자수인가?”

“그렇지! 조금만 더 기다려보게나.”

자수의 겉모습은 용 한 마리의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자수장은 그곳에 많은 이야기를 담아냈다고 말하며 침선장에게 자수를 건네었다.

자수를 건넨 자수장은 둥근 나무막대 하나를 가져와 끈목을 이래저래 엮기 시작했다.

그 과정도 매우 복잡했기에 모두 숨죽이며 그의 모습을 지켜볼 뿐이었다.

“보자. 여기는 요렇게 한 번 더 묶고 흠… 다 되었네. 이 뭉치로 끝을 용 꼬리에 맞춰보게.”

막대를 받아든 침선장이 의심 가득한 눈빛으로 실타래가 뭉쳐진 막대기를 자수에 가져다 댔다.

“흠…… 아무것도… 엇!”

침선장이 감탄사를 뱉어내며 말을 이었다.

“오호 신기하구만. 초점에 집중하니. 자수에서 보이지 않는 붉은 길이 흐릿하게 나타나는구만 어떻게 이런 걸 고안해 낸 것이야?”

“별거 아닐세 어린 날 호기심에 해봤던 일이지. 근데 이걸로는 숨기는 데 한계가 있을 것이네.”

“그렇지. 다른 방도가 하나 더 있네. 이건 속임수일 뿐이지. 진짜 길은 옷에 집어넣을 것이네.”

그때 둘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장인들도 자수의 비밀이 궁금하다며 너 나 할 것 없이 침선장이 들고 있는 실뭉치를 바라보고 있었다.

“침선장 어르신. 저희도 궁금한데….”

“옜다. 한번 보거라.”

웃는 얼굴로 침선장이 그들에게 막대를 건네었다.

그리고 모두 지도를 본 후에야 말을 이었다.

“대단하시오, 자수장!”

“그러게 말이요. 신통하오.”

“이런 비통한 능력이 있으시다니.”

내가 지켜본 이 방법은 매직아이와 같은 원리인 듯 보였다.

집중이 되는 부분에서 색의 변화가 나타나는 과학적인 원리였다.

“다들 내 이야기 들어보게.”

침선장이 말을 이었다.

“이제부터 자수장이 더욱 정교한 지도를 만들어 낼 것이네. 그럼 옥장은 이 막대의 역할을 할 수 있는 팔찌를 만들어야 할 것이고, 금속장은 의복을 담을 함의 열쇠를, 자개장은 의복을 담을 함을 만들어야 하네. 그리고 매듭장은 천년이 가도 썩지 않는 실과 매듭을 만들어야 할 것이며 여기 모인 모두가 내가 시키는 모든 일에 목숨을 바쳐야 할 것이네.”

“예, 침선장 어른.”

그곳에 모인 여러 사람들이 침선장의 말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함세.”

“예, 어르신.”

모두가 빠져나간 연구실에는 침선장과 자수장만이 남은 이 자리에서 둘의 대화가 이어졌다.

“설마 자네 능력을 여기 심어 넣을 생각인가? 전하께서도 윤허한 일인가?”

“그렇다네. 이 방법만으로는 그들의 눈을 속일 수 없을 거야. 지도가 심어진 자수에 흉이 되건 길을 되건 기억을 심어 넣을걸세.”

“자네…. 죽을지도 모르네. 저들의 감시가 나날이 심해지거늘.”

“어쩔 수 없네.”

자수장은 잠시 후 말을 이었다.

“자네가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숨겨둔 보물은 아무도 찾지 못할 것인데….”

“내가 없어지더라도 내 자손들은 항상 왕가의 옆을 보필할 것이니 길잡이가 되어줄걸세.”

“…그런가 나쁘지 않은 방법이긴 하네만 자네 집안 전체가 위험하지 않겠는가.”

“상관없네. 자네는 내가 만든 옷에 완성된 자수를 넣어주게나 부탁함세.”

“알겠네.”

둘의 대화가 끝남으로써 영상도 끝이 났다.

드디어 모든 물건의 용도를 알게 되었다.

둥근 팔찌 라인에 나 있던 수많은 홈을 따라 자수장의 얇은 바늘을 통과시켰다.

홈의 크기는 모두 달랐으며 작은 홈에서 큰 홈으로 바늘을 옮기는 단순하면서도 복잡한 방식이었다.

‘이게 진실일까?’

순간 영상 속 이야기를 다시 한번 떠올렸다.

“분명 이건 속임수일 뿐이라 했어.”

그렇다면 자수 자체가 함정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다.

진실은 침선장의 자손만이 알 수 있다고 했다.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겠네. 그럼 두 분이 없애지 못한 게 보물이 아닌 흔적이잖아. 그걸 찾아야 한다.”

분명 방금 왕가의 보물이라 했다.

그리고 그걸 숨긴 장소를 지도로 만들어서 숨기려 했다.

그럼 두 분이 없애지 못했던 그것 또한 보물이 아닌 보물을 찾기 위한 흔적일 뿐이라는 소리.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아… 아니야.”

“잠 좀 자둬. 오늘 길에도 잠 한숨 못 잤잖아.”

“그래야지.”

나는 생각을 정리하며 일기장을 다시 확인했다.

* * *

에르맥스 타아르는 형 잘못을 아버지에게 알렸다.

그 사건으로 장남인 아자르는 아버지에게 붙잡히듯 끌려왔다.

“회장님 도련님 모셔왔습니다.”

“데리고 들어와!”

“네.”

장남인 아자르가 문에 들어서는 순간.

딱딱한 물체가 날아와 그의 머리를 가격했다.

“어떻게 장남이라는 놈이! 회사를 팔아먹을 수가 있어 그것도 아르노라니 미치지 않고서야.”

“…….”

아자르의 머리에서는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고 그는 아무런 말도 없이 바닥을 바라볼 뿐이었다.

노여움이 가지지 않은 에르맥스 회장은 그의 대답을 재촉했다.

“말해봐. 나를 이해시키란 말이야! 그렇지 않으면…….”

“뭘 이해시키라는 건지 저놈이 전달한 그대로입니다. 회사를 팔아넘기려 했고 회사 자금으로 마약과 돈세탁을 했습니다. 됐습니까?”

아자르의 날카로운 눈빛이 아버지 옆에 있던 타아르에게로 향했다.

“역시 네놈이 내 뒤통수를 칠 거 같더라니. 천한 년의 자식새끼! 다 너 때문이야.”

“형님 아직도 그 소리이십니까. 에르맥스의 장남이면 장남답게 행동하십시오. 본인이 잘못한 걸 지금 제 책임으로 떠넘기시는 겁니까. 형님의 어리석은 행동으로 회사손실이 얼마나 큰지 압니까!?”

“뭐라고!”

“조용!”

에르맥스 회장은 둘의 언쟁을 단번에 멈추었다.

그리고 장남인 아자르에게 푸념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나는 어린 나이에 어미를 잃은 너의 아픔을 감싸 안으려 오랜 시간 노력했다. 이 자리도 더 능력이 뛰어난 타아르가 아닌 너에게 물려주려 했는데 어째서 이런 짓을 한 거야.”

“그냥 재미있지 않습니까. 아버지가 이렇게 성장시켜놓은 그룹을 남에게 넘겨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저놈의 애미랑 놀아먹는 아버지를 볼 때마다 역겨워서 바닥으로 떨어트리고 싶었습니다.”

“…….”

에르맥스 회장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내가 너를 잘못 키웠구나… 하.”

그는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 말을 이었다.

“오늘부로 에르맥스 아자르의 모든 권한을 회수하고 에르맥스가에서 퇴출한다. 모든 지분을 회수할 것이다.”

“…….”

“불만 없겠지?”

“없습니다. 이제야 이딴 집안과 연을 끊게 되어 되려 기쁩니다.”

아자르는 뒤돌아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에르맥스 회장은 한숨을 내뱉었다.

“너도 나가봐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