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0화 (160/200)

박종식은 어설픈 복수를 하고 여기서 생을 마감할 수도 있겠지만 이곳을 빠져나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다행히 하형선도 자신을 막을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퍽! 퍽!

박종식은 달려나가 한신회의 그림자 무리를 하나둘 쓰러트리며 그곳을 빠져나갔다.

* * *

박종식이 창고 앞으로 다가가자.

커다란 정문이 열려있었고 검정 정장을 입은 사내들이 주위를 훑어보고 있었다.

“젠장!”

그는 차에서 내려 앞에 있는 사내들을 제압하기 시작했다.

“저 새끼 죽여!”

다시 한번 혈전이 벌어졌고 긴 싸움이 시작되었다.

점점 흩어져 있던 놈들이 몰려들기 시작했고 그 안에는 노랑머리의 젊은 사내도 섞여 있었다.

“하하하. 기억났다. 형님이 왠지 대하는 게 다르다 했더니 너 그놈이구나. 자기 부모가 칼에 찔려 죽어가는데도 소파 밑에 숨어 있다가 나한테 잡혔던 그놈.”

박종식의 아픈 기억 중 하나 가장 숨기고 싶은 기억의 한 조각을 노랑머리가 말하고 말았다.

그날은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었고 박종식의 생일이었다.

두 부모님이 바쁜 시간을 쪼개가며 자신의 생일을 축하해주던 그 날 말이다.

박종식의 생일 파티가 끝나는 그때.

노랑머리의 사내와 검은 옷은 입은 남자 둘이 집에 침범했다.

“박 사장!”

“네놈이….”

“예의로 상대해줬는데 상대가 예의를 안 바라니까. 우리도 이렇게 대할 수밖에 없지 않겠어.”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서명하지 않겠다 하지 않았나. 그 지분은 내 것이 아니라고 몇 번 말해!”

“본인 거 아니니까 넘기라고 그럼, 일이 쉬워지지 않겠어요.”

“내 명의만 빌려준 거라고 몇 번 말하나 이건 내가 모시는 분이 잠시 맡겨둔 거라고.”

“우리 알 바 아니고 빨리 선택해. 서명하든지 죽든지.”

노랑머리의 사내는 칼을 들이밀며 박종식의 아버지를 협박했다.

“……절대 안 돼! 당장 돌아가.”

“말로 해서는 안 되겠네.”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뒤에 서 있던 남자들이 움직였고 박종식은 어머니에 의해 소파 밑에 숨겨졌다.

“형님. 여기 여자 있습니다.”

“잡아 와.”

소파 밑에서 박종식은 모든 장면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거칠어진 숨을 손으로 막아가며 자신을 숨기려 애썼고 몸은 마치 돌덩이처럼 무거워 움직일 수가 없었다.

“마누라 죽는데도 안 할래?”

“…….”

순간 박종식의 아버지는 고개를 떨구며 떨리는 손으로 펜을 들어 올렸다.

“하겠네.”

“좋은 생각이야.”

하지만 이 모든 일의 시작은 지금부터였다.

에르맥스 5.

* * *

모든 절차가 끝이 나고 노랑머리는 눈 깜짝하지 않고 아버지의 목을 베어버렸다.

그리고 어머니도 그의 손에 유명을 달리했다.

박종식은 그제야 멎을 거 같던 숨이 온전하게 돌아왔다.

“이 시X!”

그는 왜소한 고등학생의 몸으로 노랑머리에 달려들었다.

“뭐야. 숨어 있었던 거야. 병신같은 새끼 숨어 있을 거면 쥐죽은 듯이 숨어 있었어야지. 야 잡아.”

“네, 형님.”

박종식은 아무 힘도 써보지 못하고 그들에게 제압당했다.

무릎 굵고 앉은 박종식에게 노랑머리가 다가와 말을 이었다.

“재미있네. 방금 부모를 죽었는데 눈물 한 방울 안 흘리네.”

그는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박종식은 울지 않은 게 아니다 끓어오르는 분노와 차가워진 정신에 의해 눈물이 메말라버린 것이었다.

“살려주고 싶기는 한데.”

박종식은 노랑머리의 얼굴에 침을 뱉어버렸다.

“죽여!”

“이 새끼가!”

노랑머리는 발로 박종식의 얼굴을 걷어찼다.

그리고 들고 있던 칼로 박종식의 얼굴에 낙서하기 시작했다.

“아프냐.”

“윽!”

“새끼 잘 참네.”

한참 동안 고문 같은 상황 이어졌고 정말 죽고 싶을 정도로 괴로웠다.

하지만 그때 자신의 앞에 구세주가 나타났다.

“하형선! 개자식.”

이제야 모든 퍼즐이 맞춰지는 거 같았다.

주위에는 검은 정장의 사내들이 나뒹굴었고 박종식의 상태도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았다.

온몸에 피를 흘리고 있었고 잠깐만 정신을 놓아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이제 끝내자.”

노랑머리의 사내는 한마디 말을 뱉더니 안쪽 가슴 품에서 권총 한 자루를 꺼내 들었다.

“…….”

박종식은 짧은 순간이지만 생존본능에 의해 몸을 움직였다.

탕!

한 발의 총소리가 크게 공장 내부를 울렸고 누군가가 바닥에 피를 흘리며 쓰려졌다.

“끝인가….”

그 자리에 서 있는 사람은 박종식이였다.

“흑흑…. 어머니, 아버지.”

그때 흘리지 못했던 눈물을 이제야 솟구치듯 흘러내렸다.

“레예스….”

총알이 복부를 관통했는지 피가 주르륵 흘러내리고 있었다.

노랑머리가 총을 발사하려는 순간 파고들어 송곳날을 가슴에 쑤셔 박았다.

하지만 총알까지는 피하지 못했다.

정신이 몽롱했고 몸이 점점 차가워지는 걸 느끼고 있었다.

“하……. 여기서 끝인가.”

박종식은 겨우겨우 몸을 움직이며 이 층으로 걸어 올라갔다.

그리고 그녀가 있는 장소를 찾아 문을 열었다.

“뭐 하냐?!”

“…너. 어떻게 여기 있는 거야?”

레예스는 박종식의 상태가 그리 좋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설마 아까 그놈들 다 상대한 거야. 나 때문에….”

“닥쳐. 나도 왜 이러는지 모르니까.”

박종식은 그 말을 남기고 겨우 지탱하고 있던 몸의 중심이 무너졌다.

그녀는 달려나가 박종식을 안아 들었다.

“죽지마….”

레예스는 진심 어린 눈물을 보였다.

“병원부터… 아니야…. 어쩌지.”

그녀가 아래로 내려오니 주위는 온통 피범벅이었고 모두 자리에 쓰러져있었다.

다행히 모두 몸을 못 가누고 있었기에 쉽게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때 박종식의 휴대전화에서 낯익은 사람의 이름이 비추었다.

* * *

응급 수술이 진행되었다.

“다행이네요.”

“잘하셨어요.”

“노다 헤이치로 회장님한테 연락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제가 하겠습니다.”

박종식에게 아르노의 동향 감시를 부탁하기 위해 연락을 했는데 뜬금없이 울먹이는 레예스가 전화를 받았다.

“살려줘! 박종식이 죽어가.”

“네?!”

“박종식 좀 살려줘 제발.”

그녀의 목소리는 간절했고 나는 그녀에게 눈에 보이는 병원으로 이송하라고 전달했다.

“무슨 일이에요?”

“박종식 씨한테 무슨 일이 벌어진 거 같아요. 저 잠시 나가야 할 거 같습니다.”

“그럼 약속은 취소할게요. 저도 같이 가요.”

나는 아리raM과 그룹화의 홍보를 위해 신지혜에게 부탁해 가장 영향력이 있는 파리 패션잡지 인터뷰를 잡아놓은 상태였다.

다행히 일방적인 취소에도 신지혜가 한마디 하니 일정을 미룰 수 있었다.

우리는 다급하게 박종식이 이송된 병원으로 향했다.

총상과 검상까지 입은 박종식이 병원에 가면 분명 경찰과 다른 기관에서 조사가 나올게. 불 보듯 뻔하므로 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어느 병원인지부터 알아봐 주세요. 그래야 제가 힘쓸 수 있어요.”

“네.”

우리가 병원에 도착하니 다행히 박종식은 수술에 들어가 있었다.

“어떻게 된 건지 설명 좀 해주세요.”

레예스는 상당히 초조해 보였고 온몸에는 박종식의 피가 묻어있는 듯 보였다.

“그놈들이….”

“그놈들?!”

“한신회의 그림자 놈들 그리고 노랑머리 행동대장이요. 그놈들이 박종식을 저렇게 만들었어요.”

“그럼 그놈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정신이 없는지 너무 두서없이 말하고 있었기에 그녀에게 잠시 시간을 주기로 했다.

“하… 안정되면 생각 정리하고 말해주세요.”

“네… 죄송합니다. 그리고 감사드립니다.”

“하…… 저한테 감사할 일은 아닌 거 같네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아꼈다.

신지혜는 따뜻한 커피를 레예스에게 전달하며 살갑게 말을 이었다.

“이거 마셔요. 사장님 근데 노다 헤이치로 회장님 연락 없으세요?”

“전화를 안 받으시네요. 이런 적이 없었는데.”

항상 전화를 붙잡고 사시는 걸 알고 있기에 불안한 감정이 생겼다.

“이 상황을 빨리 아셔야 할 텐데요.”

“그러게요. 하형선 씨도 전화를 안 받네요. 두 분 다 뭐 하시는지?”

.

.

.

한참 동안 수술이 이어졌고 VIP 개인 병실로 박종식이 옮겨졌다.

“회장님. 아버님에게 연락받았습니다.”

병원장으로 보이는 사람과 박종식의 수술을 집도한 의사까지 병실로 찾아와 신지혜에게 고개 숙였다.

새삼 이런 장면과 상황을 지켜보니 그녀의 위치가 얼마나 상승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수술은 잘되었나요?”

그때 뒤에서 있던 집도의가 말을 이었다.

“총상 부위가 네 곳인데 총알 두 개를 빼냈습니다. 다행히 총알이 중요장기는 건들지 않았습니다. 근데 문제가 복부에 입은 자상에 의해서 배 대동맥이라는 대동맥에 손상을 입었습니다. 출혈이 심해서 쇼크를 받은 거 같습니다. 지켜봐야 할 거 같습니다.”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수술은 잘되었으니 큰 위기는 없을 겁니다.”

“네.”

신지혜는 그들에게 감사함을 표시하며 말을 이었다.

“오늘 일은 없던 일로 해주세요. 소문도 퍼지면 안 됩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벌써 지시해뒀습니다. 오늘 켈링 전 회장님께서 병원에 기부금까지 전달한다고 하시더군요.”

병원장은 쓴웃음을 비치며 자신이 받은 게 있으니 비밀은 보장될 거라며 말을 이었다.

“네, 차후에 저도 신경 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그들이 돌아가고 이제 다시 레예스에게 말을 이었다.

“이제 정리 좀 되었으면 어떻게 된 건지 말 좀 해주세요.”

“네….”

레예스는 하나부터 열까지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걸 나에게 말해주었다.

그가 복수를 위해 한신회 본거지로 쳐들어간 것과 자신을 구하기 위해 공장에서 싸움이 벌어진 거까지 말이다.

그 순간 나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그 장소 박종식 씨랑 주요인물들만 아는 곳이라고 했는데 어떻게 그놈들이 알 수 있던 겁니까?”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빠져나가려는 그때 그놈들이 쳐들어왔습니다. 제가 거기 머무는 걸 알고 있다는 듯이요. 저도 그게 의문인데. 누가 정보를 흘렸다고밖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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