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이후 박종식은 그녀에게 내민 대가와 자유를 주기로 했다.
“야 너 나가서 또 나쁜 짓 하면 그때 진짜 죽는다. 알아들어?”
“나도 안 해. 돈만 있으면 편하게 살 거야.”
“그리고 주기적으로 위치 보고해라. 안 하면 찾아간다.”
“개소리!”
“싫으면 여기서 죽던지.”
박종식은 장난스레 몸을 돌렸다.
“알았어. 알았다고 위치 정도는 알려줄 테니까. 약속 꼭 지켜.”
“내가 너냐. 약속은 꼭 지킨다.”
그는 그녀를 포박했던 끈을 풀어주었다.
레예스는 어젯밤의 기억을 떠올리며 욕을 내뱉었다.
“떠나는 마당에 보고는 무슨! 개똥이다 이 새끼야.”
풀어주지 않을 거 같아 순순히 그러겠다 했지만 절대 자신의 위치를 알릴 생각이 없었다.
“내가 왜?! 멍청한 새끼.”
박종식은 한신회의 본거지를 쳐들어가기 전.
약속했던 돈과 레예스가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신분증을 전해 주었다.
“가볼까.”
돈 가방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공장을 빠져나가려는 그때였다.
끼이익!
“아씨 문 엄청 안 열리네.”
창고의 커다란 정문이 열렸다.
레일형식의 문이었고 모터가 고장 난 상태이기에 열 수가 없었는데 그 문이 열린 것이다.
“…….”
박종식이라면 옆에 있는 작은 쪽문으로 들어왔을 것이다.
그녀는 안 좋은 예감에 일단 비품이 싸여 있는 곳으로 몸을 숨겼다.
“X발!”
순간 창고의 문이 활짝 열렸고 낯익은 얼굴들이 하나둘 비치기 시작했다.
“레예스. 나와라. 너 여기 있는 거 아니까.”
그녀는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노랑머리의 동양인 그는 한신회 수장의 정보통이자 이인자인 격인 인물이다.
한신회의 행동대장이자 가장 성격이 더럽기로 유명했다.
“여기는 어떻게?!”
그녀는 몸을 최대한 웅크린 채 그들의 시선을 피했고 주변을 살펴보며 도망칠 동선과 장소를 선점했다.
‘화장실… 화장실 창문이면 충분히 도망갈 수 있어.’
현재 위치는 창고의 1층으로 창문이 하나도 없는 밀폐식 공간이다.
이곳에서는 저들을 다 쓰러트려야 빠져나갈 수 있기에 포기했다.
도망칠 수 있는 장소는 창문이 나 있는 2층의 사무실과 화장실뿐이다.
그녀는 두어 달 여기에 머물렀기에 지리적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괜히 힘 빼지 말자. 너 우리한테서 못 도망쳐. 빨리 나와. 10초 세겠다. 하나! 둘! 셋……!”
그녀는 호흡을 가다듬은 후.
10초가 되는 순간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 앞에 서 있는 노랑머리의 동양인 남자와 눈이 맞추셨다.
“뭐야. 쥐새끼처럼 숨어 있었네! 진짜 있는지 몰랐는데. 하하하. 다들 뭐해 저년 잡아!”
“예, 형님!”
그녀는 놈들의 눈을 피해 전력으로 계단을 튀어 올라갔다.
그 순간 공장 안을 가득 울리는 총소리가 들려왔다.
“미친! 시X 진짜 죽일 생각이야.”
그녀는 욕지거리를 뱉어내며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멈출 수 없었다. 잠시라도 주춤하는 사이 총알이 자신의 신체 어딘가를 관통할 게 불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으악!”
“누구야!”
레예스는 빠르게 생각해둔 동선을 따라 화장실로 향했다.
근데 이질적인 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뭐지… 하 진짜 인생 X같다.”
그녀는 화장실로 들어와 창문을 활짝 열고 고개를 살짝 내밀어 바닥을 내려 보았다.
일반적인 2층의 높이가 아니다.
창고형태의 건물이기에 아파트 3층 아니 4층 정도의 높이였다.
“잡혀서 더 고통스럽게 죽는 거보다 났지.”
그녀가 창문을 열고 몸을 창문에 반쯤 걸쳤다.
그때 화장실의 문이 활짝 열리는 게 아닌가.
“그래 간다 가!”
그녀가 몸을 내 던지려는 순간.
“뭐 하냐?!”
“…너. 어떻게 여기 있는 거야?”
“닥쳐. 나도 왜 이러는지 모르니까.”
그녀는 창문에서 내려와 그에게 달려갔다.
* * *
박종식은 자신의 팔목을 잡은 사내의 얼굴을 바라보는 순간 놀라고 말았다.
“어째서 형님이….”
“하필이면 이럴 때 만나냐. 너도 진짜 운 없는 놈이다.”
박종식의 눈앞에 하형선이 서 있었다,
그리고 뒤에는 베르나로 아르노가 자리하고 있었다.
“설마… 형님이….”
“그래. 내가 한신회 그림자들의 수장이지. 내 지시에 한신회의 그림자들이 움직이고 있지.”
그때 쓰러져 있던 노랑머리의 사내가 턱을 매만지며 겨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X발 놈이!”
그는 넋 놓고 있는 박종식의 얼굴에 주먹을 휘갈겼다.
박종식은 바닥을 한 바퀴 구르고 넘어졌다.
하지만 그는 자리에 주저앉아 입속에 맺힌 핏덩이를 바닥에 뱉고는 하형선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X발 아프네. 형님… 어째서 여기 있느냐고요!?”
“종식아. 너는 우리가 바르다고 생각하냐. 나는 이제 끝내고 싶다. 지쳤어… 그래서 아르노에게 손을 들어주려고 네 생각은 어때? 형이랑 같이 움직이자.”
슬픔을 가득 머금은 하형선의 눈을 보며 박종식은 너무 당황스러웠다.
자신의 젊은 날에 보았던 사람이 아니었고 이 사람과 함께 보내며 배운 가치관과 옳고 그름이 모두 부정당하는 기분이었다.
그 순간 하형선이 이마를 짚으며 커다랗게 웃기 시작했다.
“아. 연기하려니 힘드네! 몇십 년을 연기했는데 오늘은 왜 이렇게 힘든 것인지.”
“그게 무슨….”
“하하하 멍청한 새끼. 근데 너랑은 같은 편 못하려나. 네 부모님 죽이라고 시킨 거 사실 나야.”
“…….”
박종식은 다시 한번 넋을 놓고 말았다.
옆에 서 있는 노랑머리의 동양인이 아닌 자신이 이때까지 믿고 따르던 놈이 진짜 원수라니.
“…….”
“넌 맨날 그랬지 왜 아무 죄가 없는 부모님이 죽었는지 왜 이딴 일에 휘말렸는지 말이야. 그럴 때마다 대답해주고 싶어 미치는지 알았잖아. 이제 말해줄게.”
그랬다.
박종식은 늘 의문이었다.
오랜 기억은 되짚어 본다면 자신의 부모님은 약간의 재력을 갖추고 있을 뿐 평범하기 그지없었다.
노다 헤이치로나 차진혁처럼 조상들의 업보, 보물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생각했기에 늘 궁금했다.
왜 부모님이 비참하게 죽어야 하는지 말이다.
그는 고개를 들어 올려 하형선을 바라봤다.
“네 부모님은 에르맥스의 주식 2%를 들고 있는 주주였거든 근데 어찌나 안 주려고 하던지. 병신들 그러니 진작에 사인했으면 이런 일 없었지.”
“……그래서 죽였다고 그까짓 게 뭔데!”
“그까짓 거라. 저분한테 물어봐라.”
하형선은 손으로 뒤에 앉아 있는 아르노를 가리켰다.
박종식은 혼란스러웠고 분노를 넘어서 이 상황 자체를 부정하고 싶었다.
“……다 죽이고 나도 죽자.”
박종식은 그 순간 결심했다.
이곳에서 정말 자신의 모든 걸 내려놓아도 전혀 아깝지 않았다.
부모님의 원한도 풀고 자신을 아껴준 노다 헤이치로에게 보답을 할 수 있는 기회라는 생각이 머리를 장악했다.
그때 하형선이 노랑머리에게 지시했다.
“너는 이제 레예스 그년 없애러 가 봐. 일 더 키우기 전에 개 같은 년 이 세상 사람 아니게 만들어 버려.”
“형님 저 새끼 처리하고 가겠습니다.”
“잔말 말고 시키는 대로 해. 여기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네…….”
박종식은 하형선의 입에서 튀어나온 이름에 다시 한번 몸을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건들지 마.”
“뭐라고?”
“내 주위 사람 건들지 말라고.”
“하하하 내 주위 사람?! 레예스한테 마음이라도 준거냐. 아니면 잤어?”
“뭐?!”
박종식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하형선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더는 역겨운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았다.
“종식아. 그래서 나한테 이길 수 있겠어?”
하형선은 손쉽게 박종식의 주먹을 걷어내 버렸다.
“내가 그랬잖아. 주먹은 간결하고 빠르게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잡힌다고.”
쾅!
하형선은 짧은 순간 박종식이 내지른 주먹을 흘려보내고 팔목을 잡아 바로 엎어 쳐 버렸다.
정말 안정된 자세로 박종식을 제압했다.
“윽!”
“너한테 싸움 가르친 게 나야. 백날 해도 나 못 이긴다니까.”
박종식은 이를 악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지 못하면 레예스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
“너도 한참 멀었어. 발전 없는 새끼야. 한번 넘기니까 좋냐?”
“하하하. 재미있네! 코흘리개 종식이가 많이 컸어. 들어와!”
박종식은 자신의 허리춤에 차고 있는 긴 송곳 하나와 사시미 칼 한 자루를 양손으로 빼 들었다.
험한 세상을 이겨내기 위해 생존 속에서 터득한 싸움의 기술을 이곳에 모두 퍼부을 생각이다.
“장난감 든다고 뭐가 달라질 거 같지.”
순간 하형선이 허리띠를 풀어 손에 칭칭 감기 시작했다.
그리고 버클을 짧게 잡았다.
챙!
그는 베어오는 사시미 칼의 날을 버클로 막아내며 박종식을 견제했고 순간순간 찔려오는 송곳의 날을 피하며 주먹을 내질렀다.
“이제 좀 상대할 맛이 나네.”
“그래, 많이 떠들어라.”
정말 숨 막히는 접전이 이어졌다.
박종식은 망설임 없이 칼을 들이밀었고 하형선도 한 치의 물러섬 없이 앞으로 다가갔다.
“더 빠르게 밀어붙여 보란 말이야!”
하형선의 도발에 박종식은 더욱 냉정하게 상대했다.
하지만 찰나의 순간.
“윽!”
둥근 버클이 박종식의 이마를 가격했다.
하지만 박종식의 칼날이 하형선의 허벅지를 깊게 파고들었다.
한 번씩 주고받은 듯 보였지만 하형선의 부상이 더욱 심각해 보였다.
“악!”
이 순간에도 박종식은 레예스의 안전이 걱정되고 있었다.
‘이래서는 끝도 없겠어. 빠져나가야 한다.’
그는 복수보다 한 사람의 생명을 살리고 싶었다.
더는 누군가를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슨 생각을 골똘히 해. 바로 내 목을 쳤어야지. 이 병신아!”
하형선이 악에 받친 듯 소리쳤고 박종식은 잠시 움찔했다.
짧은 순간 잡생각에 기회를 놓친 것을 후회했다.
“형님 아니…. 하형선 넌 진짜 운 좋은 새끼다.”
박종식은 한발 물러서 몸을 돌렸다.
조금만 더 했다면 그의 목에 상처를 낼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그와의 결판보다 더 중요한 게 남아 있었다.
“형님!”
그리고 숨어 있던 한신회의 그림자들이 우후죽순 나타났다.
“네가 더 운이 좋은 거 같은데.”
“이 빚 배로 갚아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