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일부가 얼마인지나 알아? 1%로 적게 잡아서 10억 달러(1조 원)야. 개인이 보유한 현금으로는 어림도 없어. 회사 자금을 땅겨와서 사들인다고 해도 최소 켈링은 나서야 할 거야.”
“소식 못 들었어? 아리raM도 곧 그룹화될 거야. 아시아 패션기업과 체인 형태의 그룹화 그리고 막대한 자금이 유입될 예정이야. 그 크기가 우리 전체 그룹과 맞먹어.”
“뭐?! 아리raM이!”
에르맥스 타아르는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손들 들어 올리는 리액션을 취했다.
“졌다 졌어. 다들 대단해. 내가 여기 있어도 되나 싶네.”
“있어야죠. 당신이 곧 에르맥스의 주인이 될 텐데.”
나는 입에 발린 말로 그를 기분 좋게 해주었다.
하지만 그는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직 아버지가 건재하신데 무슨… 근데 체인 형태의 그룹화는 부작용이 많을 텐데 체인 형태의 그룹화로 망한 회사가 한두 군데가 아닌 거 아십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런 리스크는 없습니다.”
중국과 일본의 기업을 한국으로 옮기는 일이 복잡하게 되어 일단 브랜드 체인이라는 이름으로 그룹화를 진행 중이다.
분명 리스크가 존재하지만, 장료이와 이브 소유주인 노다 헤이치로가 리스크가 될 확률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에르맥스 타아르가 염려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럼 막대한 자본을 아리raM에서 대겠다. 그럼 주식의 소유는?”
“그건 당연히….”
신지혜가 그의 질문에 답하려는 걸 내가 말렸다.
“당신 소유로 해드리겠습니다. 그걸 원하시는 거 같은데.”
“그래도 되나? 내가 그 돈 먹고 나르면 어쩌려고.”
나는 서류 한 장을 들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문서는 어느 때보다 큰 힘을 발휘하죠.”
“하하하. 그렇지 그냥 해본 질문이었는데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마. 당신 소유로 해 나는 주식에 대한 욕심은 없으니까. 근데 그걸로 뭘 할 생각이야?”
“아무것도 안 할 겁니다. 보여주기식일 뿐이죠.”
“누구한테?”
“LVMH에게요.”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신지혜는 가방에서 빨간 줄이 나 있는 서류 하나를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진짜는 이거야. 네가 형을 몰아붙일 방법 그리고 이걸로 형의 주식을 가져와.”
“이게 뭐야?”
“보면 알 거야.”
타아르는 재빠르게 서류를 들어 올렸다.
그 서류는 아자르가 에르맥스의 가방을 빼돌려 물물거래 형태로 마약을 사들이고 각종 불법적인 일을 행했다는 증거들이었다.
“가방으로 돈세탁까지 아주 화려하던데. 미술품처럼 에르맥스의 가방을 초고가로 만들어서 돈세탁하셨더라고.”
에르맥스의 가방은 가장 싼 제품의 가격이 한화로 1천만 원 이상을 호가하며 특수가죽인 낙타, 악어, 뱀 가죽 같이 리미티드하게 주문 제작이 들어가면 2천에서 3천만 원을 호가한다.
아자르는 자신의 직위로 장인들을 회유시켜 가방을 회사에서 빼돌렸을 것이다.
“대단해. 가방이랑 마약을 엿 바꿔 먹다니. 그리고 현금화도 상당히 시켰던데.”
“현금화…….”
타아르는 자신의 형이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모르지만, 만약 아버지가 알게 된다면 이번만큼을 쉽게 넘어가지 않을 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가장 문제가 되는 부분은 밑에 부분이야. 자세히 봐.”
“…….”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주식 일부를 벌써 LVMH와 거래 했더라고 1.5% 정도 그 큰돈을 네 형은 어디에 썼으려나. 에르맥스 회장님이 아시면 참 기뻐하실 거야. LVMH라면 치를 떠시는 분인데 그 정보만이라도 차기 후계자 명단에서 아자르는 삭제될 거 같은데.”
벌써 두 번이나 LVMH의 공격을 받은 에르맥스다.
상당히 예민한 부분이라는 소리.
“이 미친 새끼가!”
“그 정도가 최근에 내가 알아낸 정보들이야. 더 파보면 많은 게 나올 거 같은데. 더 필요하면 말해.”
“아니… 더 필요 없어.”
자신 형의 치부는 곧 에르맥스의 약점으로 돌아올 것이다.
더 끔찍한 일들이 터져 나온다면 언론에서도 터져 나올 테고 그럼 그룹사 전체가 위험해진다.
“약속해! 여기서 더 알아보지 마. 만약 알아내더라도 나한테만 알려줘.”
“알겠어. 잘 막기나 해. 내가 아니라 다른 놈들도 벼르고 있는 거 같으니까. 그리고 이거 가져가.”
그는 신지혜가 전해준 서류와 백지수표 한 장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라운지를 빠져나가려는 그가 다시 우리에게 다가와 말을 이었다.
“이제 만나지 말자. 다시 볼 때는 너희가 내민 조건을 들어줄 때뿐일 거야.”
“바라던 바야.”
나와 신지혜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
“1년입니다. 1년 동안 더 거대하게 성장해야 해요. 올 한 해는 정말 긴 여정이 되겠어요.”
그녀도 고개를 끄덕이며 위스키 한 잔을 목에 털어 넣었다.
* * *
어둠이 짙게 깔린 파리의 외곽.
박종식은 창고 안 의자에 앉아 사색에 잠겼다.
텔레비전에서는 끊임없이 한 가족의 죽음을 다루고 있었으며 그 영상을 볼 때마다 죄책감이 밀려들었다.
죽임을 당한 가족들은 진혁이 지켜달라고 부탁했던 안델라와 델리였다.
영상에서 델리의 환한 미소를 볼 때마다 가슴속에 있는 화가 치밀어 올라왔다.
“내가 좀 더 관심을 가졌어야 했어. 내가 지켜야 했다고. 저 어린아이까지! 개X끼들….”
자신이 겪었던 일과 너무 흡사한 사건이기에 감정이 이입되는 건 당연했다.
‘그때 나만 살아남았어. 이제는 복수할 때야.’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잊히지 않는 그때의 일들 아니 시간이 지날수록 더 선명해지기에 미쳐버릴 거 같았다.
그가 자책하고 있자 의자에 묶여 있던 레예스가 말을 이었다.
“멍청이냐? 네가 한 짓도 아닌데 왜 그래?! 오버 아니야.”
“닥쳐! 네가 뭘 알아.”
“네가 왜 몰라. 나도 가족들 교통사고로 한 번에 다 죽었는데.”
일렁거리던 박종식의 눈빛이 조금 사그라들었다.
시선이 다시 텔레비전으로 향하는 그때.
그는 결심했다며 말을 이었다.
“레예스! 이제 때가 된 거 같아. 노다 헤이치로 회장님은 잠시 미루자 했지만 나는 그럴 수 없을 거 같아 다시는 저런 희생을 만들고 싶지 않아.”
“장소는 알려줄게. 나는 끌어들이지 마, 거기 가면 죽어! 너도 잘 생각하고 행동해. 괜한 오기와 분노로 불구덩이에 뛰어들지 말고.”
레예스는 적이지만 정이 참 많은 여자였다.
어느 때 보면 너무나 평범한 여자였고 사랑을 갈구하는 여린 마음을 가졌다.
“미친 갑자기 웬 걱정이야.”
“걱정은 무슨!”
한 달 가까이 레예스에게 많은 정보를 얻어냈다.
박종식은 그녀가 충분히 자신의 할 몫은 해주었다고 생각했다.
“넌 떠나라. 나는 내 갈 길 갈 테니까.”
“당연하지. 이번 일 끝나면 아무도 찾지 못하는 곳으로 떠날 거야. 돈이나 준비해둬.”
“나는 한 입으로 두말하는 사람 아니야. 노다 회장님도 그렇고 그건 걱정하지 마. 그리고 이제 나쁜 짓 하고 다니지 마라.”
“네가 신경 쓸 거 아니잖아.”
의자에 묶여 있으면서도 자기 할 말을 다 하는 레예스의 강단에 박종식은 웃음이 터졌다.
“참 악연인지 인연인지. 이상하게 밉지가 않단 말이야.”
“왜인지 알아?”
“응?!”
“너도 나랑 같은 종류의 인간이거든.”
“무슨 개소리야!”
“강한 부정은 긍정이라고 하던데 너도 알고 있잖아. 한번 손에 피를 묻혔으면 돌이킬 수 없다는 거.”
그녀의 말에 박종식의 몸이 먼저 반응했다.
마치 그녀의 대답이 정답이라는 양 떨림보다는 두근거림을 느끼고 있었다.
“개소리 작작 하고. 내일이면 오랜 시간 준비해왔던 모든 게 끝나.”
박종식은 다시 자리에 앉으며 맥주 한 잔을 따라 마셨다.
“어쩌면…….”
이제 생과 사를 넘나들 도박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노다 헤이치로를 따르는 오랜 시간 동안 늘 이 시간만을 기다려 왔고 목숨도 내놓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질적인 이 떨림을 무엇일까? 두려움일까? 삶에 대한 미련일까?
가족들이 자신의 눈앞에서 죽는 순간.
자신도 벌써 죽은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오늘따라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종식, 두려우면 도망쳐도 돼 아무도 너 욕할 사람 없어.”
“닥쳐라. 네가 뭘 안다고 나불대.”
“너 보스한테 복수하려는 거잖아. 그리고 그 새끼가 얼마나 악랄한 놈인지 너도 잘 알 거야.”
“그래서?”
“거기 간다고 달라질 거 없다고! 멍청한 새끼야.”
그녀의 말처럼 달라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가야 해.”
“네 마음대로 해! 멍청한….”
한신회의 그림자들이 모여 있는 집합장소는 아주 위험한 곳이다.
살인과 불법적인 일을 당연하게 하는 놈들이 모여드는 곳으로 그곳에 바로 한신회 그림자의 수장이 머물고 있었다.
‘자이언트 클럽이라.’
자이언트 클럽.
파리 정중앙에 있는 작은 호텔 지하에 있는 클럽으로 어느 누가 보아도 허름하고 평범한 클럽이다.
하지만 이곳은 재벌, 정치인, 유명인 할 거 없이 모두 선호하는 곳이다.
은밀한 위치에 독립된 방으로 형성되어 있는 형태였기에 파리에서는 보기 드문 비밀스러운 만남이 가능한 곳이었다.
그리고 한층 더 깊은 지하로 연결되는 통로를 지나면 마약, 살인, 폭력이 모두 허용되는 그들만의 세계가 펼쳐진다고 한다.
‘미친 새끼들.’
모든 사람이 지닌 억눌러진 본능을 그곳에서 풀게 해 그들을 관리하는 거다.
한신회의 수장은 범죄자들의 흉포함을 표출하게 해 자신의 편으로 만들고 있었다.
상당히 지능적이었고 나쁘게 본다면 사이코패스에 가까웠다.
“잠이나 자라. 나 잘 테니까 지역 방송 꺼라.”
“…….”
의자에 묶여 있던 레예스가 욕지거리를 뱉어내려다.
오늘은 억지로라도 말을 뱉어내지 않았다.
그에게 잠시나마 깊은 잠을 청하게 해주고 싶었기에.
‘살아서 보자.’
한 달 동안 레예스가 느낀 건 회개와 불안감이었다.
이때까지 자신이 얼마나 많은 나쁜 일들을 해왔고 자신이 해온 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고통받았는지 박종식을 보며 알 수 있었다.
그의 억눌린 분노를 느낄 때마다 온몸에 나 있는 털들이 솟구쳤고 분명 언젠가는 제2의 박종식이 자신을 노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빠져들었다.
‘살아서 나가면 죽은 듯이 살아야겠어.’
야전침대에 뒤돌아 누워있는 박종식을 쳐다보니 갑자기 코끝이 시려왔다.
레예스는 내일 그가 처할 상황이 너무 훤하게 보였다.
‘자이언트 클럽은 네가 상상하는 이상으로 위험한 곳이야… 절대 살아 돌아올 수 없을 거다.’
그녀는 알고 있다.
박종식은 노다 헤이치로를 위해서도 차진혁을 위해서도 움직이지 않는다는 걸 오직 자신의 복수와 신념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가족을 몰살시킨 한신회의 수장 단 한 명을 죽이기 위해 내일 그곳으로 향할 것이다.
“신의 가호가…….”
“자라. 시끄럽다.”
에르맥스 3.
* * *
* * *
자이언트 클럽 지하.
한신회의 우두머리와 밑에 부하가 말을 이었다.
“레예스가 저희 본거지를 실토하면 큰일이지 않습니까?”
“뭐가 큰일인데. 그깟 년이 나불대는 게 뭐가 대수라고.”
한신회라는 이름으로 움직이는 이들을 건드릴 사람은 단 한 명도 아무도 없다.
파리 내에 경찰과 정계에서조차 이곳만큼은 건드리지 않는 게 불문율이 되어 버린 게 현실이었고 모두 이들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이곳은 화약고 같은 곳으로 더러워서라도 피해야 하는 장소 중 하나다.
그리고 이들은 치밀하고 깔끔하게 뒤처리해버리는 통에 경찰들도 명분 없는 싸움을 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만약에 미친 노다 헤이치로나 박종식이 똘마니들 떼거리로 불러들이면 어찌하려고요.”
“야! 여기 파리 도시 한복판이야. 그게 가능할 거 같아? 생각 좀 해라. 경찰이나 언론, 정치인들까지 다 우리 눈치 보는데.”
“그건 그렇지만….”
“꺼져. 귀찮게 하지 말고.”
그의 성격을 빗대어 본다면 우두머리에 적합하지 않아 보였다.
그는 다소 젊은 나이에 갈색 머리를 하고 있었으며 동양인이었다.
왜소한 체격에 어울리지 않는 흉악한 얼굴을 지니고 있다.
“오늘따라 별것도 아닌 일로 신경 쓰이게 하… 아 맞다.”
돌아서려는 부하에게 질문을 던졌다.
“큰 형님이 시킨 건?”
“감시자 붙였습니다. 명령만 내리시면 바로 멱따겠습니다.”
“그래, 그놈만 잘 마크해. 안 그랬다가는 네 목이 날아갈 테니까.”
“알겠습니다. 형님.”
둘의 대화가 마무리될 때쯤.
우두머리가 앉아 있는 의자 뒤편 작은 문으로 키가 작은 동양인 한 명이 걸어 들어왔다.
“형님! 여기는 어쩐 일로?”
“왜?! 내가 못 올 때 왔어. 오랜만에 파리 온 김에 들렸어. 왜 내가 오니 불편해?”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합니까. 제가 형님을 얼마나 생각하는데요.”
“됐고. 애들 관리는 잘하고 있지?”
“형님! 안 그래도 할 말이 많습니다. 애들이 하루 멀다고 죽어 나가는데 미치겠습니다. 이탈하는 놈들도 발생했습니다.”
“이탈?!”
“네… 어찌합니까. 이러다가 힘도 못 쓰고 다 죽겠습니다.”
“어쩌긴 죽여야지! 이탈한 놈들은 모두 죽인다. 어디 배불리 먹여줬더니 배신을 해. 일할 놈들은 차고 넘쳐.”
한신회의 수장이라는 자가 상대를 큰 형님이라는 깍듯한 칭호로 부르며 대하고 있었다.
그는 평범한 비즈니스맨으로 보였지만 느껴지는 포스만큼은 남달랐다.
“이제 그런 일 없을 거다. 내가 잘 말해 뒀으니까.”
“그리고 레예스라는 년이 박종식이라는 놈한테 잡혔습니다.”
“그것도 알고 있어. 받아.”
동양인 사내는 작은 메모장에는 미국 외곽의 위치한 건물의 주소가 적혀있었다.
“이건….”
“그년 없애 바로!”
“예, 형님.”
한신회의 수장인 남자는 동양인 남자를 우러러보며 감격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고 있지만, 세상을 꿰뚫어 보는 천리안을 가진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