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4화 (154/200)

“신 디렉터님도 컬렉션에 참여하세요. 재능을 썩히기에는 아까울 거 같은데.”

“그런가요. 근데 회장이라는 자리에서 그런 것도 용납되지 않을 때가 많아요. 겉치레한 왕관이 그걸 막아서죠.”

“그런가요. 이제는 제약 없이 엄청난 규모의 컬렉션도 기획할 수 있을 텐데 아쉽네요.”

“……그렇죠.”

그녀는 내심 아쉬워하고 있었다.

한국에서 열리는 컬렉션은 장소와 무대의 한계가 있고 브랜드의 재정에 따라 기획을 축소하는 때도 많다.

그녀는 아리raM의 컬렉션을 준비할 때도 그런 부분을 아쉬워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그녀의 모든 걸 담지 못할 때마다 위로와 아쉬움을 전했었다.

그때 유심히 주위를 둘러보고 있는 나에게 신지혜가 어렵게 말을 이었다.

“만일인데…. 아리raM이 파리에서 컬렉션을 연다면 제가 기획을 해봐도 될까요?”

“네?!”

“좀 그렇죠…. 이제는 소속직원도 아닌데.”

말을 흘리는 그녀에게 내 마음을 전달했다.

“우리는 가족인데 당연히 가능하죠. 제가 부탁드리고 싶네요.”

“정말요! 그럼 꼭 저한테 맡겨주세요.”

“네.”

우리의 대화가 끝날 때쯤.

타미에게 전달받은 무전기로 컬렉션 시작 메시지가 흘러나왔다.

“이제 시작이네요.”

“네.”

JK 앤더슨 5.

* * *

거대한 홀 컬렉션이 시작한 순간부터 숨 막히는 무대가 이어지고 있었다.

터져 나오는 환호성과 플래시 샤워를 지켜보니 온몸에 전율이 느껴졌다.

그때 옆에서 이 광경을 함께 보고 있던 신지혜가 말을 이었다.

“뉴욕이 다르긴 하네요.”

“그렇죠. 그리고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해요. 30년 만에 미국 패션의 전설 타미의 새로운 브랜드 런칭이니까요.”

“사장님의 브랜드이기도 해요.”

그녀의 한마디에 내 몸속 어딘가에서 작은 떨림이 느껴졌다.

신지혜가 돌아오는 모델을 향해 손을 들어 올렸다.

모델이 입고 있는 의상은 색동저고리를 모티브로 하여 데님과 함께 가로 스트레이트로 박음질 된 드레스였다.

이음 부분에 JK앤더슨의 폰트 로고로 자수를 전체적으로 입혔다.

“전체적으로 데님의 색보다는 아리raM의 색이 더 가득 묻어 있네요.”

“그런가요. 대부분 의상에 자수가 들어가 있어서 그럴 수도 있을 거예요.”

“말씀하시니 그런 거 같기도 하네요. 근데 저 많은 자수를 기성복에 넣은 게 가능한가요. 자세히 보니까. 퀄리티도…. 분명 기계로 한 건 아닌 거 같은데.”

“기계로 했습니다!”

“네?!”

그녀는 고개를 돌려 나를 빤히 바라봤다.

신지혜도 아리raM에 있었기에 자수의 퀄리티 정도는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었다.

“기계로 저게 가능하다고요?!”

“네, 아리raM만의 기술이죠.”

나는 이 드레스를 만들기 위해 류미리 디자이너와 많은 상의를 거치고 보완했으며 우연한 기회에 새로운 제작 방법을 얻을 수 있었다.

그날을 회상하면 정말 운이 좋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F/W 컬렉션이 있기 2주 전 타미가 보내온 JK앤더슨 초안 디자인을 바라보며 고민에 빠져 있었다.

“초안을… 이런 식으로 보내시다니 나보고 다 하라는 거였네.”

타미의 초안 디자인은 낙서 덩어리였다.

디자이너마다 스타일이 천차만별이긴 하나 왠지 모르게 일부로 일을 떠넘기는 기분이었다.

나는 오랜 시간 투자해 디자인을 수정하고 만들어 가며 의상 전체를 손봤다.

“류 디자이너 35번 드레스 확인 좀 부탁할게요.”

“어떤 부분이요?”

“자수 부분이요. 이걸 다 집어넣었다가는 생산이 불가피해질 거 같고 다른 방법 없을까요? 자수를 대체할만한 거라던지.”

“당연히 자수를 대신 할 수 있는 건 없죠. 자수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름다움이 있으니까요.”

“그렇죠…… 대체할 게 없죠.”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 자수를 넣을 수는 있으나 드레스의 평균 가격을 고려한다면 수지가 맞지 않는다.

“이 방법은 어때요. 요즘은 자동으로 자수를 놓아주는 기계도 많으니까요. 그중에 하나를 골라서 제작해보는 게.”

“그 방법은 저도 알지만, 최신기계라 해도 퀄리티가 문제에요. 너무 단면적으로 마감 처리되더라고요.”

“그럼 더 좋은 거로 써야겠네요. 한 가지 방법이 있어요.”

류미리는 휴대전화기를 들어 어디론가 전화를 했다.

“선생님. 저번에 말씀하셨던 그분 연락처 알 수 있을까요?”

“저번이라니?”

“그 있잖아요. 선생님께 기계 만들 거라면서 자수하는 모습 좀 보여달라고 며칠을 구경하다 가신 분”

“아. 그 고얀 놈! 그놈 전화번호는 왜?”

“회사에 필요해서요.”

“그런 기계로 하는 건 자수가 아니야! 기계 따위가 사람의 숨결을 따라갈 수가 없다고 아리raM에서 그런 기계를 사용하는 건 장인으로서 반대야! 아리raM은 한국을 대표하는 장인브랜드라고!”

뚝!

“선생님?! 선생님? 끊어버리셨네. 아리raM 직원들보다 애사심이 더 두터우신데요.”

그녀는 갑자기 끊어버린 수화기를 바라보며 헛웃음을 내보였다.

“한명숙 선생님?!”

“네 맞아요. 저번에 얼핏 들었거든요. 선생님 자수를 몇 날 며칠 동안 보고 나서 얼마 뒤에 비슷하게 재연해 내는 기계가 있었다고.”

“네?! 그게 가능해요.”

“저도 정확히는 모르겠어요. 100%로는 아니지만 70% 정도는 재연해 낸다면서 선생님이 한숨을 내쉰 적이 있었거든요.”

“그럼 그분을 찾아야겠네요.”

‘선생님 눈에 70%면 일반인들 눈에는 무조건 좋은 자수로 보일 거야.’

“번호가 있을까요. 이렇게 거부감이 심하신데.”

“뭐라고 하셔도 한번 얼굴을 튼 인연은 이어가시는 분이시니까. 번호가 있었을 거예요.”

류미리는 다시 한명숙 장인에게 전화해 지금 상황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한참 설득이 이어졌고 겨우 우리에게 자수 기계 개발자의 번호를 넘겨주셨다.

“겨우 받았네요.”

“진짜 번호가 있었네요.”

“선생님이 속정이 얼마나 깊으신데요. 자수를 놓는 모습을 보여준 거부터 정이 들었을 거예요. 아니면 얼굴이 잘생겼거나. 관상을 보시는 분이시라.”

“아… 그랬죠. 관상을 보는 스타일이셨죠 한명숙 장인이.”

우리는 눈을 마주치며 크게 웃었다.

“전화는 제가 할게요.”

“네, 그러세요.”

그녀에게 받은 번호로 전화를 걸어 기계 제작자와 약속을 잡았다.

다행히 바로 다음 날 약속을 잡을 수 있었다.

내가 카페에 들어서자.

단 한 명이 후줄근한 복장으로 맨 끝 창가 자리에서 먼 산을 바라보고 있었고 나는 그가 자수 기계 개발자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선생님이 관상을 보신 건 아닌가 보네.’

“저기….”

“네?!”

“혹시 자수 기계 개발자이신가요?”

“네, 맞습니다. 혹시 아리raM 대표님?”

“안녕하세요. 아리raM 차진혁입니다.”

“아… 네, 박태식이라고 합니다. 앉으시죠.”

우리는 마주 앉아 음료를 주문하고 이야기를 이었다.

“제가 만든 기계에 관심을 두시다니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는 자신의 나이를 41세라고 소개했다.

‘상당히 노안이시네.’

나이가 무색할 만큼 상당히 노안이었고 오랜 시간 기계를 만진 손에는 기름때가 가득했다.

“한명숙 선생님도 기계의 자수를 보고 놀라셨다고 하더라고요. 관심이 안 가는 게 이상하죠.”

“과찬이세요. 제가 만든 기계는 장인의 자수 털끝에도 미치지 못했습니다. 10년을 자수장인들 눈칫밥 먹어가며 이 기계를 설계하고 수정해가면서 만들었는데 아직도 부족하네요.”

“말로 하는 거보다 보는 게 좋을 거 같은데 바로 볼 수 있을까요?”

내 물음에 그의 눈동자가 순간 흔들리며 눈물이 얇게 맺히는 거 같았다.

그렇게 이어지는 답변은 나를 당황스럽게 했다.

“그게…… 사실은 지금 당장은 곤란합니다. 제가 경제적인 상황 때문에 기계를 고물에 넘겨버렸습니다. 더는 버틸 자신도 없었고 먹고살기도 빠듯하더라고요. 지금은 작업실도 나가야 할 판이라서 보여 드리려면 제가 자금을 다시 빌려서 만들어야 하는데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추워진 겨울 날씨에도 얇은 점퍼 하나에 작업화 그의 모습을 다시 보는 순간.

그의 재정 상태를 어림짐작할 수 있었다.

‘기다리기에는 늦어.’

“그 부분은 제가 부담하도록 하겠습니다. 고물로 넘긴 기계를 찾아오시면 더 좋고요. 아니면 빠른 시일 내로 1대 제작해주세요. 만약 성능만 검증된다면 10대 이상 구매하겠습니다.”

“네?! 몇 대요?”

“10대라고 했습니다.”

“사장님… 아니 대표님. 이게 일반적인 자수 기계랑 달라서 가격이 상당합니다. 복잡한 코딩이 된 센서가 들어가는 거로 생각하시는 가격보다 훨씬 더 비쌉니다. 그래서 다른 브랜드에서도 꺼렸고요.”

그의 말처럼 아무리 성능이 좋다고 한들 브랜드에서 구매하지 않았을 거 같았다.

자수가 들어가는 브랜드는 한정적이고 훨씬 싼 가격에 만들어 낼 수 있는데 굳이 이 기계를 살 필요는 없을 테니까.

하지만 나는 퀄리티만 만들어 낼 수 있다면 수십억을 들여서라도 구매할 생각이다.

“그 부분은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1대분의 기곗값은 구매하지 않아도 지급하겠습니다. 그러니 이른 시일 내로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대표님! 꼭 이른 시일 내로 보여 드리겠습니다.”

그는 내 오른손을 두 손으로 꽉 감싸더니 고개를 연신 흔들어 댔다.

“감사합니다! 대표님 정말 감사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이내 실례했다며 다시 고개를 숙여 보였다.

나는 그런 그가 싫지 않았다.

“최대한 빠르게 제작하시려면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작업장만 남아있으면 2주면 가능합니다.”

“그럼 부탁드립니다.”

그로부터 2주가 흘렀고 류미리 디자이너와 함께 그의 작업실을 찾아갔다.

“와… 이게 뭐예요?!”

“자수 기계 같은데.”

우리는 앞에 보이는 기계에 탄성을 질러냈다.

“생각보다 크기가 크네요.”

“그러게요… 이 정도 크기면 공장을 하나 더 만들어야 할 거 같은데.”

가로 7m, 세로 2.5m의 규격을 가지고 있는 거대한 기계다.

일반 자수 기계와는 차원이 다른 크기였다.

이 모습을 보니 왜 브랜드들이 거절하였는지 알 거 같았다.

그때 탄성을 질러대던 우리 옆으로 박태식이 다가와 말을 이었다.

“크기에 놀라셨죠. 일반 자수 기계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쪽 내부에 보시면 다각으로 움직이는 바늘이 20개 이상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는 손으로 기계 내부를 가리키며 설명을 이어갔다.

그때 류미리가 궁금했는지 질문을 이어갔다.

“그럼 이 안에 20개의 바늘이 한꺼번에 움직이면서 자수를 한다는 말이네요?”

“네, 맞습니다.”

“그런 자수 기계 20개가 한꺼번에 움직이는 거랑 비슷하겠어요?”

“뭐 비슷한 원리기는 합니다. 20개의 출력을 낼 수 있는 모터 두 개가 들어갑니다. 말을 보태자면 제가 개발한 소프트웨어가 이 20개의 바늘을 장인들의 손놀림처럼 여러 각도로 움직이게 하는 거죠.”

‘만약 이 기계를 업그레이드해 가죽공예에도 사용할 수 있다면….’

박태식의 말처럼 다각으로 바늘이 움직일 수 있다면 정교한 새들 스티치가 가능하다는 소리다.

나는 그에게 질문을 쏟아냈다.

“만약 설정만 바꾸면 어떠한 형태를 가진 물건도 바느질할 수 있을까요?”

“연구를 더 해봐야겠지만 가능할 겁니다. 사람보다는 훨씬 빠르다고 자신합니다.”

그의 눈빛에 거짓이 없었다.

정말 가능하다면 엄청난 인건비 절감을 할 수 있다.

수제 브랜드인 아리raM에서는 사용할 수 없겠지만 가죽 전용 타프 재봉틀로 가방을 제작하는 타이거와 이브 그리고 저가 브랜드에 사용할 수 있다.

‘저가 브랜드의 퀄리티를 고가 브랜드만큼 만들 수 있다면… 대단하잖아!’

“일단 자수부터 한번 보죠.”

“네.”

“어떤 게 가능하죠?”

“뭐든지 가능합니다. 어려운 것도 문제없습니다.”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

옆에 보이는 강아지 사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설마 저런 것도 가능한가요?”

“그럼요. 문제없습니다. 그 대신 설정 시간이 오래 소요됩니다.”

“그럼 한번 보여주세요.”

“네.”

그는 한참 동안 기계에 부착된 컴퓨터를 조작했다.

그리고 얼마 후.

우웅!

커다란 소리를 내며 기계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천장에 달려있던 원단이 풀리며 기계 속으로 천천히 빨려 들어갔다.

“사장님 나와요!”

“벌써요?”

기계의 앞에 서 있던 류미리가 흥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대박!”

그녀가 보고 있는 곳으로 다가가 시선을 고정했다.

자수 기계에서 나오는 원단에서 사진에서 보았던 강아지 자수가 튀어나왔다.

마치 프린터기로 사진을 인쇄한 거처럼 말이다.

“류 디자이너 보기는 어때요?”

“좋아요… 선생님이 말한 거보다 더 좋은 거 같은데요.”

“기계로 이 정도 퀄리티라는 게 놀랄 만하네요.”

처음 볼 때는 정말 장인이 만든 거 같은 자수가 나와 놀랐지만, 자세히 바라 순간.

확실히 한명숙 장인보다는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자수는 정말 살아 숨 쉬는 거 같았으니까.

‘욕심이 과해.’

욕심이 불러온 잡다한 생각을 떨쳐버리고 자수가 수놓인 원단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정교하고 풀림도 없네요. 확실히 일반 자수 기계랑은 다르네요.”

“저도 놀랐어요. 이 정도면 고품질 자수예요. 최소 5년 이상 자수를 배운 사람 정도는 될 거 같아요.”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박태식이 옆에서 기뻐하며 살짝 눈물을 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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