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장 나가!”
“타아르. 그렇게 화내면 인정하는 거밖에 안 돼.”
“미친년이 갑자기 나타나서 켈링 그룹이 발아래 떨어지니 내가 만만해 보여!”
“역시 그래야 타아르지 넌 화낼 때가 가장 매력이 있어. 이제 본심을 조금 보이는 거 같은데 이제 대화 좀 해보는 건 어때?”
“뭐?!”
타아르 에르맥스는 마치 신지혜를 미친 여자로 보고 있었다.
화가 날 때로 난 자신을 보며 대화를 하자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래. 한번 들어보자 얼마나 대단한 이야기를 하는지. 별거 아니면 당장 경비원 불러줄 테니까!”
“에르맥스를 너에게 줄 테니까. 나를 도와줘! 어때 이야기할 맛 나겠지.”
“뭐?! 정신이 나간 소리를 하려고 나를 자극했다고.”
타아르는 혀를 차며 그녀에게 말을 이었다.
“똑똑히 들어. 에르맥스 지분의 50%를 우리 아버지인 회장님이 가지고 계셔 그의 선택이 곧 법이야. 알아들어!”
“그래서.”
“그래서라니….”
신지혜는 다른 방법을 사용할 것이다.
아무리 켈링의 힘을 움직인다 해도 가족경영으로 유명한 에르맥스를 바꿀 수는 없다.
하지만 타아르의 형은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
“네 형을 이용할 거야, 아자르 에르맥스를. 어때 나랑 거래할래?”
타아르 에르맥스는 자신의 의자에 앉아.
책상에 팔꿈치를 걸치며 고민에 빠져들었다.
사고뭉치인 형을 자신의 손으로 낭떠러지에 밀지는 못했다.
보는 눈이 너무 많았고 자신의 주위에도 아버지의 심복들이 차고 넘쳤으니.
‘다른 사람의 손을 빌린다면….’
신지혜의 힘을 빌린다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같은 계열의 재벌로 아자르와의 접점이 상당히 높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아버지가 눈치채는 날에는 이 자리도 지키지 못할 수 있다.
그때 신지혜가 한마디 더 보태어 그의 선택의 폭을 좁혀왔다.
“네 형이 에르맥스를 가지는 날이면 에르맥스는 LVMH에 먹혀버릴 거야.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거 네가 알 테니 긴말 안 할게. 에르맥스는 네가 지켜 내가 도와줄게.”
벌써 두 차례 LVMH가 에르맥스 전체를 먹으려 달려든 적이 있다.
그때마다 에르맥스는 가족경영으로 위기를 타개해왔다.
‘형이라면 네 말이 맞을지도….’
타아르의 눈에 비친 자신의 형 아자르는 욕심이 없는 탐욕가였다.
가족보다 자신을 중시하고 많은 부만 주어진다면 모든 걸 포기해버릴지도 모르는 자신과는 아이에 다른 종류의 인간이었다.
생각의 정리를 마친 에르맥스 타아르의 눈빛이 사늘하게 변했다.
결의에 찬 눈빛, 마치 악당에게서 가족과 가족의 모든 것을 지키려는 그런 눈빛 말이다.
“내가 어떻게 하면 되지?”
JK 앤더슨 3.
* * *
* * *
의상 보관실에서 광활한 빛이 뿜어 져 나오는 순간.
작은 간격도 없이 영상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밝은 빛의 느낌은 아주 따뜻하면서도 포근했다.
“…….”
내 눈앞에 단 두 번 영상으로만 만났던 긴 생머리의 아름다운 여성이 눈앞에 나타났다.
그런데 오늘따라 그녀가 낯설지 않게 느껴졌다.
“기분이 이상하네.”
항상 자신을 향해 웃어주던 그녀가 오늘은 슬픔이 가득 머금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어!”
영상 속 나를 인식하고 다가오는 순간은 단 한 번뿐이었다.
침선장이 죽음의 순간 자신이 고이 품고 있던 함을 나에게 전해주려고 했던 그때.
그런데 이제는 긴 생머리의 아름다운 여성이 나를 향해 걸어와 내 앞에 멈추었다.
“서진아.”
“어떻게 내 이름을….”
너무 당황스러운 순간이다.
생전 처음 보는 여자가 동생의 이름도 아닌 내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나는 경험해보지 못한 상황에 설렘과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지만 무섭다는 감정보다는 슬픔으로 가득 차오르는 느낌이다.
그리고 그 순간 내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슬픔도 기쁨도 아닌 알 수 없는 감정에 대한 몸의 반응.
“내가 왜 이러지.”
나는 눈물을 훔치며 생각에 잠겼다.
이 눈물의 의미는 무엇일까? 눈물을 흘리고 있는 당사자인 나 자신도 의아할 뿐이다.
그녀는 슬픈 눈빛으로 다시 한번 나와 눈이 마주치고는 자리로 돌아갔다.
내가 잡으려 해보아도 잡히지 않는다.
“누구야! 누구길래…….”
잡히지 않는 그녀를 향해 소리쳤다.
하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이 그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고 있었다.
“젠장!”
자리로 돌아간 그녀는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멋진 자세를 취하며 입고 있는 의상을 아름답게 표현해 줄 뿐 내 대답에는 답하지 않고 있다.
나는 눈을 돌려 주위 살피기 시작했다.
그곳에는 온통 데님 의상으로 가득했고 JK앤더슨의 새로운 의상도 함께 나열되어 있었다.
“저 여자는 누구일까? 이 알 수 없는 감정은 또…. 뭐냐고.”
내 머릿속은 온통 저 여성 한 명에게 집중되었다.
이제는 이 진실을 알고 싶었다.
“침선장은 내 증조부야. 그럼 저 여자도 어쩌면 가족일지도…….”
순간 떠오른 생각 단 하나 바로 가족이라는 매개체뿐이다.
수많은 영상 속에서 자신을 바라보며 다가오거나 시선을 주며 말을 걸어온 경우는 단 두 인물뿐이었다.
“미치겠네.”
내가 다시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는 JK앤더슨의 메인 의상 하나를 고르며 자신의 몸에 걸쳐보고는 다시 옷걸이에 거는 게 아닌가.
그렇게 한참을 뒤지더니 안쪽에서 데님 재킷과 데님 치마 하나를 꺼내 포근하게 감싸 안았다.
아주 마음에 든다는 표정으로 말이다.
“저건….”
그 순간 흘러나오던 영상은 끝이 났다.
내 눈앞에는 JK엔던슨 런칭 의상과 반대편에 전시되어있는 이때까지의 브랜드 타미가 발표한 모든 의상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둘은 남겨놓은 채 오래된 의상이 나열된 곳으로 발을 움직였다.
“이거야.”
나는 영상 속에서 그녀가 흡족해하던 의상 앞에 멈추어 섰다.
유심히 의상을 바라보니 그제야 서서히 빛이 사그라드는 걸 발견했다.
‘역시 빛이 여기서 흘러나왔던 거구나.’
1982년 타미의 데님 재킷과 데님 치마.
이 해에 타미힐피거라는 브랜드가 탄생했고 첫 컬렉션으로 대성공을 거두었다.
바로 그 컬렉션의 메인 의상이 바로 재킷과 치마다.
내가 멍하니 그 의상을 바라보고 있자.
타미가 내 옆으로 다가와 말을 이었다.
“추억이 담긴 의상이군. 자네가 이 의상을 알아보다니 기뻐.”
타미는 아련한 눈빛으로 의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쩌면 타미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지 않을까?’
이건 내가 만든 디자인도 아니었고 엄청나게 뛰어나 보이는 디자인을 가진 의상도 아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빛이 새어 나왔다는 건 다른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었다.
“타미.”
“왜?!”
“외람된 질문이지만 혹시 이 의상 입었던 모델 기억나세요?”
“그때가 언젠데….”
타미는 내 질문에 흠칫 놀라더니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흠…. 이 의상을 입었던 모델이라. 당연히 기억하고 말고 그 아름다운 여자를 어찌 잊을 수 있겠어.”
그는 잠시 추억을 회상하며 그날의 일을 나에게 전해주었다.
* * *
신지혜는 타아르 에르맥스의 사무실을 빠져나와 근처 공원을 하염없이 걸으며 생각에 잠겼다.
“에르맥스를 손아귀에 넣을 수는 없어. 그럼 약점을 잡고 흔들 수밖에….”
그녀는 내심 걱정이 앞섰다.
이 방법이 정당한지 안 한지에 관한 생각이 머리를 집어삼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참 고민을 이어가는 끝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때 낯익은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설마…. 아니겠지.”
그녀는 의심하며 그곳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한국에 있어야 할 사람이 여기에 있을 리가 없지.”
하지만 뒷모습이 영락없는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이다.
“저기요! 혹시.”
자신의 부름에 순간 고개를 돌리는 상대를 보며 신지혜는 상대를 강하게 껴안아 버리고 말았다.
“꺅!”
“저예요. 신지혜.”
“디렉터님…. 여기는 어떻게?”
너무 당황한 류미리의 모습을 바라보는 그녀가 살짝 웃음이 터트리고 말았다.
“아 미안, 미안. 나 때문에 많이 놀랐죠. 너무 반가워서 껴안아 버렸네.”
“조금 놀랐어요. 갑자기 누가 껴안길래. 치한인가 하고.”
“그랬겠네요. 미안해요”
“진짜! 근데 어떻게 여기서 만나요. 파리에 계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아. 비즈니스 차 들렸어요. 근데 류 디자이너는 무슨 일이에요? 한국에 있어야 할 분이.”
“저는 사장님 따라 왔어요.”
“그러고 보니 곧 협업브랜드 런칭 하겠구나.”
“네, 맞아요.”
“근데 왜 사장님은 안 보이고 류 디자이너만 여기 있어요?”
“아…. 그게.”
류미리는 신지혜와 함께 근처 카페로 향했다.
둘은 한두 달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공유하며 화기애애한 대화를 이어갔다.
“나도 구짜 한국지부 사람한테 듣기는 했어요. 아리raM F/W 컬렉션 정말 화려했다고.”
“네, 정말 대성공이었어요. 액세서리 문의도 계속 이어지고 있고 현재 의상이랑 가방 매출 상승률이 장난이 아니에요. 다니엘 씨는 맨날 죽겠다고 사무실 와서 사장님 데리고 내려가고 있고요.”
“다니엘 씨도 여전하네. 장인을 더 뽑지 혼자서 너무 고생하는 거 아니야.”
“안 그래도 지방에 공방 장인들한테 교육 중인 실력 있는 장인들 몇 명 본사로 올려보내 달라고 전달했어요. 다니엘 씨가 결정해서 몇 명 뽑을 거예요. 그럼 곧 좋아지겠죠.”
“잘됐네. 그럼 류 디자이너는 여기서 삼 개월 동안 지내겠네요.”
“그럴 거 같아요.”
신지혜는 잠시 고민하더니 말을 이었다.
“나도 당분간 여기서 머물 예정이라 숙소 정해야 하는데 같이 머물러요.”
“네?! 그럼 회사는?”
“아버지가 대부분 운영하세요. 저는 대외적인 업무만 처리하고 있고요.”
“아…. 그렇군요.”
류미리는 한가지 질문을 가슴속에 담아 두고 있었다.
너무나 궁금하지만, 그녀의 위치와 상황을 생각한다면 질문 자체가 실례될 거 같아 숨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자신의 마음을 눈치챘는지 신지혜가 되며 질문을 해왔다.
“류 디자이너 뭐 숨기는 거 있죠?”
“…….”
나름 오랜 시간 함께 일한 사이였기에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이 언니한테 다 말해봐요. 들어줄 테니까. 나 재벌이야. 하고 싶은 거나? 부탁할 거 있음. 다 말해봐요. 들어줄 테니까.”
“그런 게 아니라.”
류미리는 잠시 머뭇머뭇하다가 속에 있던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꺼내 들었다.
“신 디렉터님 이제 아리raM에 안 오시나요? 아니 못 오시겠죠.”
그녀의 질문에 신지혜는 살짝 당황했지만, 아직도 자신을 기다려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내심 고마웠다.
“저도 가고 싶어요. 류 디자이너랑도 다니엘 씨 사장님이랑 다 같이 일하면서 웃고 싶네요. 조금만 더 기다려 줄래요?”
신지혜의 대답에 류미리의 얼굴이 한층 밝아졌다.
거절이 아닌 보류였고 기회가 된다면 다시 그녀와 함께 일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다.
“얼마든지요.”
“고마워요. 일단 숙소로 가죠. 그리고 스위트룸 잡을 건데 같이 지낼래요?”
“좋아요.”
“그리고 이제 편하게 대화해요.”
“켈링 회장님인데 실례 아닌지 모르겠네요.”
“류 디자이너 립 서비스가 늘었어요. 하지만 이제부터는 언니로 합시다. 오늘 기분 좋은 날이니까 이쁜 언니가 밥 살게 가자!”
“그건 안 돼요!”
“응?!”
“사장님이 살 거예요. 오늘 완전 비싼 거 얻어먹을 생각이었단 말이에요.”
“너…….”
신지혜는 께름칙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 눈빛에 류미리가 살짝 당황했다.
“제가 무슨 실수라도….”
“아니, 아니. 하하하.”
신지혜는 손을 내저으며 말을 이었다.
“아주 좋은 생각이라고 차진혁 대표 지갑 털어버리자!”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