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협업브랜드와 아리raM의 그룹화가 최우선 과제다.
* * *
일주일이 빠르게 흘러갔다.
F/W 시즌 의상 사전예약이 수천 건에 이르렀고 리미티드 형식의 가방들도 예약이 2천 건 이상 밀려들었다.
일부 잡지사 인터뷰와 화보 촬영에 눈코 뜰 새 없는 하루하루를 보냈다.
아직 밀려있는 일들이 많았지만 어쩔 수 없이 미국에 올 수밖에 없었다.
“퍼스트 클래스! 대박 정말 좋네요.”
“좋죠. 가격이 비싸서 그렇지.”
죽기 전 간혹 이용해본 경험이 있어서인지 류미리처럼 설레발칠 정도는 아니었다.
“비싸긴 해요. 이천만 원이라니… 이 돈이면 비즈니스도 몇 번을 탈 텐데.”
“뭐… 그 정도는 아리raM도 가능해요. 재정적으로 안정적이라서.”
“그런가요. 하하하”
타미의 배려로 퍼스트 클래스를 이용해 뉴욕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오랜 비행이 이어졌고 며칠 일에 찌들었는지 잠에 빠져들었다.
“사장님. 식사하세요.”
“아, 네.”
나는 빠르게 기내식을 흡입하고 다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한참 뒤 작은 목소리로 누군가가 나를 깨웠다.
“이쁘지 않아요.”
“그러네요. 저는 잠 좀 더 잘게요.”
“…아 네.”
“근데 안 자요? 한숨도 안 잔 거 같은데?”
“네…… 그냥 이런저런 생각 한다고.”
“일단 자둬요. 생각한다고 바뀌는 거 없으니까.”
내가 눈을 다시 감으려는 순간.
갑자기 기내에 불이 밝아지며 방송이 흘러나왔다.
“승객 여러분, 저희 비행기는 지금 착륙 중입니다. 좌석벨트를 매어 주시고 좌석 등받이와 테이블을 원위치로 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
.
.
.
피곤한 몸을 이끌고 출국장을 빠져나오니 어김없이 브레드가 공항 앞에서 우리를 기다려 주고 있었다.
“브레드!”
“차진혁 디자이너!”
브레드는 반갑다며 가볍게 포옹을 해왔고 잠시 후 내 옆에 서 있는 류미리를 보며 말을 이었다.
“옆에 미녀는 누구시죠? 설마 차 디자이너 여자친구?”
“아… 아니에요….”
“설마 했는데 아니네요. 하하하 둘이 걸어오는데 너무 선남선녀라서 오해했나 봅니다.”
브레드는 신지혜를 처음 볼 때와는 다르게 류미리를 스스럼없이 대했다.
격식을 차리기보다는 편안함으로 그녀를 대하고 있었다.
“아리raM 수석디자이너 류미리 씨에요. 그런 농담 하면 당황하니까. 그러지 마시고요.”
“제가 실수를 했네요. 하여튼 반가워요. 류 디자이너님.”
브레드는 커다란 손을 그녀에게 내밀며 환한 미소를 내보였다.
류미리도 환한 미소로 그의 환영 인사를 받아 주었다.
“차 디자이너님 바로 본사로 가실 거죠?”
“아니요. 잠시 들릴 때가 있는데 부탁 좀 그릴게요.”
“그럼요. 말씀만 하세요.”
“파슨스 디자인 스쿨로 가주세요.”
“네.”
류미리 디자이너는 일정상 바로 파슨스로 가서 수강을 신청해야 했다.
그리고 교육 전에 이루어지는 필요자료 인증과 몇 가지 교육도 이수해야 했기에 나와 일정을 함께 할 수 없었다.
“아쉽게 되었네요. 타미 씨랑 식사도 하면 좋을 텐데. 디자이너에게 새로운 영감을 주시는 분이라.”
“저도 안 쉽네요. 기회가 있겠죠.”
“그럼요. 오늘만 날이 아니니까요.”
공항에서부터 꽤 오랜 시간을 달려 파슨스 디자인 스쿨 앞에 세단이 멈췄다.
“혼자 가도 되겠어요?”
“그럼요. 제가 애도 아닌데요.”
“불안한데.”
“불안해하지 마세요. 저 애 아니거든요.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호텔이랑은 다 확인했죠? 조금 있다 거기서 만납시다.”
“네.”
나는 그녀를 배웅하며 브레드와 함께 타미힐의 본사로 향했다.
JK 앤더슨 2.
* * *
사무실에 들어가니 고풍스러운 소파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는 타미를 발견했다.
그가 고개를 살짝 돌려 나를 보며 말을 이었다.
“왔어. 먼 길 온다고 고생했네.”
“고생은요. 덕분에 편하게 왔습니다.”
“퍼스트 클래스가 편하긴 하지. 비즈니스 관계에서 무시 안 당하려면 첫 단추가 중요해 그게 바로 퍼스트 클래스야 그걸 알려주고 싶었어.”
“감사합니다.”
타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다.
퍼스트 클래스 사치스러운 항공권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 공간에서 작은 우연이 큰 기회로 만들어질 때가 많으며 출국과 동시에 그 나라 나를 평가하는 기준을 작은 항공권 한 장으로 결정짓는다.
마치 퍼스트와 비즈니스, 이코노미석의 등급을 나누듯이 말이다.
“그만 서 있고 와서 앉아. 머 마실 건가?”
“물이나 한잔 주세요.”
협업브랜드 런칭 행사는 일주일 뒤에 잡혀 있다.
브랜드명은 Jin&Korea Anderson으로 한국을 머금은 데님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미국의 상징적인 원단 데님과 한국을 상징하는 디자인, 공예를 이 브랜드명으로 표현했다.
‘타미 그룹은 더 커지겠지.’
타미 그룹은 타미, 캘빈, 진&진에 이어 JK앤더슨까지 데님 브랜드 4개를 구축하게 되었다.
중요한 사항이라면 이번에 런칭 할 JK앤더슨은 프리미엄 데님 브랜드로 그룹을 대표하게 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
“출하 준비는 끝났습니까?”
“물량 출하 준비는 끝난 상태고 이틀 안에 해외항공으로 수출될 거야. 런칭 행사 다음 날 전 세계 오프라인매장에서 물량이 풀릴 거고 온라인은 소호 패션에서 독점으로 해외 판매가 진행될 예정이니까. 걱정할 거 없어.”
“일사천리네요.”
“일사천리는 무슨! 이제부터는 네가 해야지.”
“네?! 제가요? 무슨 말이신지 모르겠네요.”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이때까지 타미가 다 해놓을 걸 저보고 날름 먹으라고요. 저는 싫습니다. 저 염치없는 사람 아니에요.”
“네가 날름 먹으라고 했냐. 네놈이 나랑 협업하기로 하고 바쁘니까. 내가 대신한 거지. 뭐 대신한 것도 없으니까 부담 갖지 마. 디자인은 어차피 네가 9할은 했으니까.”
“그건 그렇지만 타미가 100% 투자한 브랜드인데 제가 나설 필요가 있을까요?”
“나는 이제 늙었어. 타미 브랜드만으로도 벅차다고 이 브랜드는 자네가 이끌어 갔으면 하는데. 공짜는 아니야 지분율을 더 나한테로 조정할 거니까. 동의하면 넘겨받아.”
그는 많은 것을 나에게 주려 하고 있다.
왜일까? 왜 이런 배려를 거리낌 없이 하는지 항상 궁금했다.
“저한테 왜 잘해주세요. 비즈니스적인 관계에서 이런 건 독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게 말이야. 늙어서 감성적이야. 그러니까 타미 그룹 물려받으라고!”
“그건 안 된다니까요.”
“그냥 회사를 주려는 데도 싫다는 놈은 내 생전 처음 본다.”
“뉴스 보셨잖아요. 이제 아리raM도 그룹화가 진행될 겁니다.”
“그러니까 하는 소리야. 타미 그룹을 아리raM 계열사로 넣으면 될 거 아니야!”
순간 너무 당황스러워 말문이 막혀 버리고 말았다.
자신의 평생을 누군가의 아래로 넣는다는 말을 스스럼없이 하고 있었다.
‘거대한 타미를 아리raM에?’
“진심으로 하는 소리세요? 그렇게 되면 타미의 브랜드들의 위치가 희석될 겁니다.”
“희석은 무슨 나는 100년 기업 아니지, 200년 이상을 이 타미라는 브랜드를 알리고 싶다고 후대에도 평생 살아남는 회사로 말이야.”
“100년 기업이라….”
“그러려면 믿고 맡길 사람이 필요해. 그게 너라고 판단을 내린 거뿐이야.”
다소 낯간지러운 이야기지만 그는 나를 신뢰하고 있었다.
타미 그룹을 손안에 넣을 수 있다면 켈링그룹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시가 총액 8조 원 상당의 타미 그룹이라.’
내가 놀란 얼굴로 그를 빤히 바라보자.
헛기침하며 말을 이었다.
“믿는다는 거지 바로 준다는 소리는 아니다. 네가 하는 거 봐서 줄 거야. 그리고 내가 낸 문제에 답을 가져와야 해.”
“문제는 뭐고 답은 또 뭔데요?”
“일단은 JK앤더스를 얼마나 성장시키는지 보고 결정할 생각이니까. 시험이라고 생각해. 긴말하지만 나도 지치니까.”
우리 대화를 듣고 있던 브레스가 내 귀에 조용히 말을 이었다.
“타미는 차 대표를 진짜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으니까 잘해봐요. 처음 봅니다. 타미가 이렇게 마음을 주는 사람은.”
“아…….”
나는 브레드를 바라보며 고개를 살짝 흔들어 보였다.
“차후가 되겠지만 제가 인정을 받고 타미가 그룹의 계열사를 저에게 넘길 생각이 있으시면 정당한 방법으로 인수절차 밟겠습니다.”
타미가 평생을 가꾸어온 회사를 아무 대가 없이 받을 수 없었다.
“고지식한 놈. 네 마음대로 해! 하여튼 이제 일어나 의상들 확인하러 가자.”
“그래야죠.”
타미 본사 지하 특수한 방에 컬렉션 의상 전부를 보관하고 있었다.
이곳은 완성된 의상을 최상의 상태로 보관할 수 있는 시설이 완비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타미의 역사가 오롯이 담겨 있는 곳이기도 했다.
나와 타미, 브레드가 창고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내 눈에 눈부신 광량이 터져 나왔다.
‘오랜만이잖아.’
* * *
류미리는 파슨스 디자인 스쿨에 들어가 서류를 접수하고 교육 동영상 자료를 시청했다.
동영상 내용은 3달 동안 이어지는 일정과 진행될 커리큘럼 그리고 주의사항에 대한 공지였다.
“끝났네.”
그녀는 밖으로 나와 담당자에게 말을 이었다.
“이걸로 끝인가요?”
“네, 수고하셨어요. 3일 뒤부터 개강하니까. 그때 시간 맞춰서 오시면 돼요.”
“감사합니다.”
생각보다 교육이 빨리 끝난 그녀는 밖으로 나와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이곳이 뉴욕이구나.”
화려한 네온사인과 전광판 그리고 개성 있는 패션 피플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하염없이 걷고 또 걸어 나갔다.
“어떻게 해야…. 그 사람의 그림자라도 될 수 있을까.”
류미리는 신지혜도 다니엘도 아닌 차진혁이라는 디자이너 때문에 두려웠다.
같은 선상에서 함께 디자인하며 즐기고 싶다는 마음이 어느 순간 자괴감이 들면서 압박으로 느껴지고 있었다.
많은 노력과 끊임없는 고민을 해도 따라갈 수 없는 격차.
그 거리는 당최 좁혀지기는커녕 멀어질 뿐이었다.
천재 위에 더한 천재가 존재한다는 것에 회의감이 들었고 결론을 내리는 순간.
그의 그림자가 되기로 했다.
같이 걸어갈 수 없다면 한 걸음 물러나서 평생 그와 함께하기로 말이다.
“더 노력해야 해.”
류미리가 다짐하며 발걸음을 옮기려 하는 그때 누군가가 자신에게 다가왔다.
“꺅!”
* * *
신지혜는 노다 헤이치로의 부탁으로 에르맥스 타아르 에르메스를 만나기 위해 미국으로 향했다.
에르맥스의 딱딱한 벽으로 들어가는 거보다 우회해 접근하는 방법이 더 성공할 가능성이 크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중 가장 접근성이 편하고 말이 통할 거 같은 인물을 선점했다.
“이게 누구야. 켈링 회장님 아니신가.”
“예전처럼 대해.”
“예전처럼 대하면 너랑 말도 안 섞을 거 같은데.”
번지르르한 외모에 커다란 키 누가 보아도 프랑스 남자라는 걸 알 수 있는 깊은 눈매를 가지고 있는 타아르 에르맥스.
에르맥스 가문의 차남으로 현재 미국지부 전체를 관리하고 있다.
‘여전히 재수 없는 새끼네. 하지만 이놈밖에 없어.’
타아르 에르맥스는 그녀가 학창시절에 함께 디자인과 경영수업을 듣던 동문으로 재수는 없지만 딱 엄친아 같은 못하는 게 없는 그런 남자였다.
“넌 그때나 지금이나 나를 놀라게 해. 나 정말 놀랐다니까. 네가 파비앙의 딸이었다니….”
“뭐. 다들 그런 반응이지.”
“왜 학교 다닐 때 아무 말도 없었어. 진작 알았으면 우리 모임에서 같이 공부했을 거 아니야.”
“아…. 그 모임.”
그가 말하는 모임은 재벌들이 모여 만든 모임으로 디자인을 공부한다기보다 기업을 이끌어 나갈 차기들의 작은 정치판이었다.
그 당시에 그 모임을 보면서 환멸을 느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 여전히 재수 없는 소리만 주절거리네.’
“그러게 말이야. 그 모임에 들었으면 인맥이 좀 더 넓어졌으려나.”
“당연하지. 우리 모임에 내로라하는 그룹의 자녀들이 얼마나 많았는데. 근데 무슨 일로 나를 보자고 한 거야? 잘나신 켈링 회장님께서.”
“너한테 전할 말이 있어서.”
“나한테 할 말이 뭐가 있지. 나 바쁜데 긴 내용이야?”
신지혜는 정리해온 서류를 그에게 내밀며 말을 이었다.
“내가 조사해본 결과. 네 형이 곧 회장직에 올라갈 거 같던데.”
순간 그녀의 말에 타아르 에르맥스의 얼굴이 굳어졌다.
“네가 신경 쓸 게 아닌 거 같은데. 가족사에 남이 끼어드는 건 별로라서 말이야.”
“그건 그런데. 들려오는 소문이 많아서.”
그는 어금니를 강하게 깨물더니 말을 아꼈다.
신지혜는 그의 동요를 파악하며 더 치부를 긁어내기 시작했다.
‘욕심 많고 뭐든지 앞서나가야 하는 네가 자신보다 못한 형한테 밀린다면 분명 자존심이 상하겠지. 자존심 좀 긁어봐야겠네.’
“네 형 상당히 사고뭉치던데 그런 형한테 밀리다니 네가 알고 있던 타아르가 아닌가 봐. 그리고 미국지부를 담당한다는 건 경쟁에서도 밀린 거 아니야? 여긴 유럽과 아주 완벽히 떨어진 곳이잖아. 내가 틀렸나?”
“너….”
타아르 에르맥스는 손을 부들부들 떨며 신지혜의 얼굴을 뚫어지라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