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0화 (150/200)

그녀의 등을 살짝 밀며 천령진을 내 앞으로 나오게 했다.

“이분은 대만에서 온 한인교포입니다. 현재 무형문화재 매듭장 김현숙 선생님의 제자로 있는 천령진 매듭 장인입니다.”

와!

내 소개에 다시 한번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고 그녀에게 많은 질문이 쏟아졌다.

“매듭은 언제부터 배운 겁니까?”

“아…… 어릴 적부터요. 할아버지가 매듭 장인이셨거든요. 아버지도 그랬고요.”

그녀가 속삭이듯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 소리를 들은 기자는 크게 소리 질렀다.

“그럼 3대째 매듭을 이어오신 거네요! 대단합니다. 타국땅에서 한국의 전통을 이어오시다니.”

“대단하네요.”

“모두 그녀를 위해 손뼉 쳐 줍시다!”

뒤로도 많은 질문이 쏟아졌지만 중요한 몇 가지만을 더 대답하고 그녀는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이어지는 질문은 모두 내 몫이었다.

“아리raM 대표님에게 질문 있습니다. 요새 들려오는 소식으로 아리raM에 큰 변화가 있을 거라던데 사실입니까?”

이 자리에서 아리raM이 얼마나 성장하고 어느 길로 나아가야 할지 말해주기로 했다.

어차피 알게 될 사실이고 숨길 생각도 없었다.

“맞습니다.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아리raM은 엄청난 자본을 이용해 일본의 브랜드 이브와 타이거 그리고 몇 개의 산업을 함께 인수할 겁니다. 그리고 켈링 그룹과 협업해 시장을 넓혀 갈 겁니다.”

“대박!”

“토픽감이잖아. 특종이야!”

내 발언에 장내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지금 내가 뱉은 말은 작은 기업이 대기업을 뛰어넘어 글로벌 브랜드가 된다는 의미였기에 기대에 찬 목소리와 우려의 목소리가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그럼 뉴욕이나 파리로 본사를 이전하실 생각입니까?”

“아닙니다. 우리 아리raM은 한국의 전통을 전 세계에 알릴 겁니다. 그러한 이유에서라도 절대 한국을 떠나지 않을 겁니다. 더 많은 한국의 장인들을 세계에 알릴 생각입니다.”

“대단하십니다.”

“오늘 올라온 액세서리와 악어가죽으로 만들어진 온리 원 백은 어떤 루트로 판매할 생각입니까?”

“런웨이에 올라간 물품은 모두 경매를 통해 처분할 생각입니다. 이 금액은 모두 기부할 예정입니다.”

하나의 질문이 끝이 나면 또 다른 질문이 쏟아졌다.

모든 질문과 대답이 특종감이었으며 한·중·일이 패션으로 하나가 되었다는 말까지 터져 나왔다.

“여기서 마무리하죠.”

나는 터져 나오는 박수 소리를 뒤로하고 무대 뒤로 돌아왔다.

* * *

베르나르 아르노는 화통하게 웃으며 상대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아쉽네, 그 영감 표정을 내가 직접 봤어야 하는 건데. 아쉽군.”

그는 이 모든 일을 즐기고 있었다.

마치 자신만이 인간이고 자신을 방해하는 사람은 벌레와 같았다.

그들이 큰 힘을 가진다면 자신은 더 큰 힘으로 맞서면 되는 것이기에 이러한 쾌감에서 노다 헤이치로를 가만히 두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때 사무실에 있는 스크린에서 특보가 흘러나왔다.

“대한민국의 아리raM, 일본의 이브, 중국의 타이거가 하나의 그룹이 된다는 소식입니다. 한국에서도 드디어 거대한 글로벌 패션기업이 탄생했습니다. 올해 안에 파리와 뉴욕, 밀라노, 런던에 이르기까지 4대 패션위크와 해외브랜드 런칭을 계획 중이라는 포부를 밝혔습니다.”

화통하게 웃고 있던 베르나르 아르노의 인상이 한순간에 굳어졌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 벌어진 거다.

“어째서 이브가 저런 놈 손에 넘어간 거야?!”

그의 질문에 옆에 있던 비서팀장에게 화를 내며 말을 이었다.

“헤이치로의 결정인 듯합니다. 헤이치로도 많이 늙었지 않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째서 저런 애송이한테… 설마 저놈이?”

“네, 맞습니다. 저놈이 김서진 디자이너의 동생입니다.”

“젠장! 김서진이고 차진혁이고 저놈들만 없었어도 벌써 일이 마무리되었을 텐데.”

베르나르는 믿어지지 않았다.

자신을 오랜 시간 견제해오던 노다 헤이치로가 모든 걸 놓아버리고 새파랗게 젊은 애송이에게 모든 것을 넘겼다니.

분노인지 실망인지 알 수 없는 감정에 짜증이 밀려왔다.

“저놈 어떤 놈이야?!”

“능력이 상당한 거 같습니다. 김서진보다 위라고 판단을 내렸습니다. 아리raM이라는 저 브랜드의 성장 속도가 비정상적으로 엄청납니다. 가만히 놔뒀다가는 언젠가 더 큰 화가 될 거로 생각합니다.”

“그 개자식이 일 처리를 똑바로 안 해서 이 사단을 만드는구먼.”

“제가 정리하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회장님.”

“그래 자네라면 믿을만하지. 그건 알아서 하도록 하고 이제 이 영감도 보내줄 때가 된 거 같은데. 네 생각은 어때?”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럼 그놈 시켜서 여기로 한번 초대하라고 해. 끝내도 내 앞에서 끝내야 재미있지 않겠어?”

“알겠습니다.”

베르나르는 이제 숙청을 시작하려 했다.

풀려고 하면 꼬여 드는 이 상황에 분노가 차올랐다.

자신도 노다 헤이치로처럼 늙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순간.

이제 이 모든 일에 종지부를 찍을 때가 되었다는 걸 직감했다.

JK 앤더슨 1.

* * *

올해 큰 성과를 거둔 패션 사업과 서울 패션위크를 성공리에 마무리한 패션 협회는 참여 브랜드 초청 행사를 개최했다.

아리raM 관계자들은 모두 격식을 갖추고 행사에 참여하였다.

내가 파티장에 들어서자.

낯익은 인물이 나를 보며 천천히 다가왔다.

“오랜만이네요. 차진혁 디자이너님. 아시아 패션 어워드 잘 봤습니다. 역시 아리raM이라고 생각했어요.”

“아… 네.”

사실 엮이고 싶지는 않은 인물 중 한 명인 YK어패럴에 몸담았던 이안섭 디자이너였다.

그는 YK어패럴을 빠져나와 독자적인 디자인브랜드로 새롭게 거듭나고 있었다.

요즘에 아리raM 다음으로 한국에서 가장 화젯거리인 브랜드를 뽑자면 바로 이안섭 하우스다.

현재 들려오는 소문으로는 미국 투자사의 투자를 받아 시장확장을 계획하고 있다고 알고 있다.

“아리raM도 곧 미국 시장 진출한다고 들었는데.”

“네, 매장은 벌써 오픈했습니다. 이제 투자를 통해서 자리 잡을 예정입니다.”

“이제 미국 시장에서 만나겠네요. 저도 곧 미국 진출할 생각이거든요. 다 대표님 덕분입니다.”

“아…….”

“안 좋은 쪽이 아닌 좋은 쪽으로 생각해주세요. 정말 차 대표님 덕분에 새로운 판단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해주신다니 마음이 편하네요. 일단 제가 직원들 좀 찾아봐야 해서요. 조금 있다. 다시 이야기 나누시죠.”

“네.”

그는 예전과는 다르게 호탕한 방법으로 나를 대했다.

선인지 악인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말이다.

‘뭐, 굳이 사이 나쁠 필요는 없지.’

조금 더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자.

나를 보며 환하게 손을 흔들고 있는 류미리 디자이너를 발견했다.

“빨리빨리 다녀라. 사장 놈아.”

“아직 시간 안 되었거든.”

내가 다니엘과 티격태격하는 순간.

부담스러운 눈빛이 느껴졌다.

“사장님 오늘 진짜 잘생겨 보여요.”

“그러게요. 오늘따라….”

류미리도 정희정도 주위에 모여 있던 여성들 모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네?! 안 잘생겼습니다.”

“본인이 이 빛나는 얼굴을 모르다니 참 신기하다니까.”

“그러게 말이에요.”

나는 그녀들의 말을 무시하고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따가운 시선이 계속 이어졌다.

때마침 사회자가 마이크를 들고 말을 이었다.

“협회장님 들어오십니까. 많은 환호와 박수 부탁드립니다.”

무대 오른쪽에서 안선영 협회장이 무대 위로 걸어 올라오고 있었다.

쏟아지는 박수 소리에 그녀는 고개를 잠시 숙여 보이고 단상 위에 올라섰다.

그 순간 아리raM 직원들의 관심은 그녀가 입고 있는 옷에 집중되었다.

“저거!”

“왜?”

“저 드레스 우리가 만든 드레스에요.”

“협회장님이 낙찰받았나 보네.”

“대박!”

그녀는 아리raM의 F/W 컬렉션 의상을 입고 있었다.

경매가 이루어진 의상으로 나는 전체 판매 금액만 확인하고 기부했기에 세부적인 판매 대금을 모르는 상황이다.

“왜 다들 놀라요?”

그때 류미리가 정희정 디렉터를 향해 질문했다.

“노을이 얼마에 낙찰되었다고 했었죠?”

총괄 디렉터 장희정이 말을 이었다.

“2000만 원이요. 측정된 판매가보다 900만 원 더 비싸게 팔렸더라고요.”

“비싸게 구매하셨네요.”

“경매는 경쟁이다 보니 그날 잡지사랑 해외구매자들도 대거 참여했다고 들었습니다.”

기성복 컬렉션이기에 시간이 지나면 측정된 정가로 판매될 예정이지만 한 달 이상 빠르게 입을 수 있다는 점에 경매에 참여하는 셀럽들이 많은 추세였다.

우리가 협회장의 플렉스에 놀라고 있을 무렵.

“모두 감사합니다. 올해는 대한민국 패션 시장에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시장 성장률 10%를 가져왔고 세계 패션 시장에 한국의 영향력이 얼마나 드높은지 확인했습니다. 이 기세를 몰아 더욱 전진하는 한국패션이 되었으면 합니다. 오늘 행사는 여기 모이신 한국패션을 만들어가는 분들을 위한 행사이니만큼 즐겁게 즐겨주셨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녀의 짧은 축하 메시지가 끝이 나고 다시 한번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제 식사하시죠.”

축하 공연이 진행 중이지만 뷔페식 식사를 이어갈 수 있게 만들어 놓았다.

옹기종기 모여 식사를 이어가는 와중에 류미리가 말을 이었다.

“사장님 언제 미국 가세요?”

“런칭 일정 맞춰서 가면 될 거 같습니다. 타미 회장님이 일사천리로 진행하고 있어서 제가 할 게 없거든요.”

“그래요….”

그녀는 잠시 말을 더듬거리더니.

“이번에 저도 데리고 가시면 안 될까요?”

“네?!”

왠지 그녀의 눈에서 작은 욕심이 느껴졌다.

마치 무언가를 갈망하는 강인한 눈빛이다.

‘자극이 되었나 보네.’

최근에 신 디렉터가 켈링의 회장이 되었고 다니엘도 누구나 인정하는 에르맥스 장인학교 출신의 수재다.

하지만 그녀는 지방대를 나온 디자이너라는 타이틀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니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리raM의 초창기 창립 멤버라 할 수 있는 류미리로서는 나름의 스트레스이자 콤플렉스일지도 모른다.

‘생각 정도는 들어보는 게 좋겠어.’

“미국은 왜요?”

“아… 그게….”

그녀는 주위에서 식사를 하는 직원들을 한번 훑어보고는 나에게 말을 이었다.

“파슨스 디자인 스쿨에서 현직 디자이너 대상으로 레벨 업 강좌가 있더라고요. 참여해보고 싶어요.”

MD팀 장희정 디렉터를 비롯해 디자이너 안정원과 김형준까지 먹던 식사를 멈추고 그녀를 멍하니 바라봤다.

“무리할 필요 없지 않나요? 지금도 충분히 잘해주고 있잖아요.”

나는 그녀의 의지를 확인하고 싶었다.

더 발전하고 싶은 욕심이 있는지 말이다.

만약 없다면 간다고 해도 얻는 게 크지 않을 것이다.

‘파슨스라… 이런 강좌가 흔하지 않기는 하지.’

파슨스 디자인스쿨.

세계 3대 패션 명문 스쿨로 유명 디자이너 다수를 배출해낸 곳이다.

분명 레벨 업을 넘어 디자이너로서의 자리를 굳힐만한 능력을 갖추고 올지도 모른다.

‘정기 수강만을 이어오는 파슨스에서 현직 디자이너를 대상으로 레벨 업 강좌라.’

예상하건대 분명 파슨스 출신 디자이너와 유명 디자이너들을 대거 초청해 특강이 이어질 것이다.

“저도 더 성장하고 싶어요. 신 디렉터님도 사장님도 다니엘 씨도 너무 제 앞에 아니 멀리 가고 있는데 저만 늦어지는 거 같아 불안해요.”

‘뒤처진 게 아니고 색이 다를 뿐인데. 뭔가 잘못 이해한 거 같네.’

나는 그녀가 잘못된 길을 선택해 지금 머금고 있는 디자이너 색을 잃어버릴까 무서워졌다.

“제 생각은 달라요. 뒤처진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만 류미리 디자이너만이 할 수 있는 게 많습니다. 저는 가는 건 찬성이에요. 하지만 그 색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녀는 세계적인 명문 스쿨을 졸업한 건 아니지만 어릴 적부터 한국 최고의 장인들에게 교육을 받은 수재다.

색이 다를 뿐이지 그녀는 우리가 해낼 수 없는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

“일정이 어떻게 되죠?”

“3개월이에요. 단기이긴 하지만 일정이 최대한 빡빡하게 짜져 있더라고요. 사실 걱정인 게 대중 여름 시장이 끼어 있어서….”

그녀는 자신의 몫까지 일하게 될 동료들의 눈치를 살피는 거 같았다.

“그건 걱정할 거 없습니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모두 그녀를 향해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 주었다.

류미리의 근심 가득한 표정이 한층 부드러워졌다.

“그리고 학비, 생활비, 숙식비 모두 회사에서 부담할게요. 회사의 수석디자이너가 레벨 업 하면 회사에서도 이득이니까요.”

“안 그러셔도….”

“그냥 받아요.”

“감사합니다.”

그때 밥은 먹고 있던 다니엘이 수저를 내려놓고 말을 이었다.

“나는 당부할 말이 있는데.”

“넌 또 뭐?”

“가방 라인 업 문제야. 이제 그룹화가 되면 가방 매출이 상당히 중요해져. 사치품 중에서도 고가 중의 고가야. 매출을 끌어올릴 필요가 있을 거 같아서.”

“아… 난 또 뭐라고 안 그래도 여행 가방 쪽으로 생각 중이야. 가장 고가사치품 중에 하나라.”

“나쁘지 않네. 휴가 전에 여행 가방 라인 업 시키면 매출에 영향도 클 거고. 보스턴이나 가죽 하드 캐리어도 좋을 거 같은데.”

“그건 조금 더 고민해보고 말해줄게.”

액세서리 런칭은 온라인으로 진행하기로 했기에 당분간 바쁜 일정이 없을 예정

류미리가 비운 3개월 사이에 많은 것이 바뀔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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