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브랜드의 총괄 디자이너를 제가 선택하겠습니다.”
“네가 안 하고?”
“저보다 이 부분에서는 더 뛰어난 디자이너입니다. 절대 실망하게 하지 않을 거고요.”
“그래 누굴 그 자리에 앉히려는 건데?”
“오픈 화이트의 레이첼 수석디자이너를 추천하고 싶습니다.”
“레이첼…? 어디서 들어봤는데.”
“3년 전 데님 공모전에서 우승한 디자이너입니다.”
“아 기억났다. 시상식에 나타나지도 않은 우승자! 이놈이 진짜 나랑 장난하나.”
“장난 아니고 진담입니다.”
타미의 기억 속에 분명 안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참신한 데님 디자인에 목말라 있던 타미는 일회성으로 데님 공모전을 개최했다.
부상이 어마어마했기에 너 나 할 것 없이 참가했던 대회로 기억한다.
‘타미 디자이너 입사에 또 1억 상금이었지 아마.’
그때의 기억을 더듬어 보면.
“뭐하냐?”
“아 심심해서요. 어제 친구 만났는데 이거 한다고 저도 해보라고 하더라고요.”
“그게 뭔데?”
“타미힐피거에서 데님 디자인 공모전인데요. 상금도 두둑하고 금방 만들어서 내면 되니까. 해보려고요.”
“괜한데 힘 빼지 마라. 누가 널 우승시켜주냐.”
“김서진 디자이너님 님 빼고는 저보고 다들 천재라고 하거든요.”
“천재? 내가 잘못 들었나.”
“아오. 저걸! 내가 스포츠카에 넘어가서 이 치욕을 또 맛보네.”
“그러게 뇌물을 잘 살펴보고 받았어야지.”
“그럼 내기나 하시죠. 제가 우승하면 디자인팀 전체 웨스턴 호텔 코스요리 콜?”
“우승 못 하면?”
“다음 시즌 디자인 초안 제가 다 만들겠습니다. 콜?”
“콜!”
그런데 말도 안 되게 2달 뒤 연락이 왔다.
연달아 레이첼의 자리에서 벨이 울려대기 시작했다.
“어디 간 거야?”
나는 그녀를 대신해 수화기를 들어 올렸다.
“안녕하세요. 타미힐피거 경영팀입니다.”
“네, 샤네르 디자인팀입니다. 무슨 일로?”
“샤네르요?”
“네. 왜 전화하셨어요?”
“데님디자인 공모전 우승자분 전화번호가….”
“뭐요? 우승!”
“네, 레이첼 씨 바꿔주시겠습니까?”
.
.
.
“뭐에요?! 내 자리에서 전화를 왜 받고 있어요.”
“아니. 계속 울리길래.”
“표정이 왜 그래요. 뭐에 들킨 사람처럼.”
“별거 아니야.”
뚝!
그 뒤로 전화가 다시 걸려온 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녀는 공모시상식에 가지 않았던 거로 기억한다.
‘찔려서 밥은 샀지.’
“그래, 그럼 본사로 한번 찾아오라고 말해주게.”
“아직 확답은 못 받은 상태입니다. 곧 연락 올 겁니다.”
“참나….”
타미는 내 대답에 혀를 차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때 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잔 마르크가 말을 이었다.
협업 브랜드 4.
* * *
잔 마르크는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듯하더니 진지한 목소리로 타미와 나에게 말을 이었다.
“저도 할 말 있는데요.”
“네놈은 또 왜?! 가만히 있다가 저놈이랑 같이 나가.”
“저도 비즈니스 하러 왔어요. 시간을 축냈는데 소득은 있어야죠.”
“그래?! 들어나 보자. 되도 않는 말 하면 경비원 부를 줄 알아.”
“새로운 브랜드 소호 패션에 런칭하고 싶습니다. 어떠세요.”
타미는 잔 마르크에게 손을 내저으며 말을 이었다.
“마음대로 해라. 내가 네놈을 몰라. 떼쓰고 맨날 찾아올 거 내가 아는데 물어보긴 왜 물어봐.”
“그럼 허락하신 겁니다. 디자인팀이랑 홍보팀에 제가 연락하겠습니다. 자료 받아서 컬렉션 끝나는 다음날 바로 온라인 런칭하는 걸로 하죠.”
“그러시던지. 그 대신 수수료 최저로 측정해라. 소호 패션 요새 수수료 장난질한다고 말 많은 거 안다.”
“…….”
순간 잔 마르크는 움찔했다.
‘진짜 장난치려고 했던 거야. 너도 진짜 대단하다.’
“장난은 무슨 메인 배너에 이벤트까지 홍보 효과를 생각하면 그 정도 수수료는 감내해야죠.”
“그건 맞는데 우리한테는 해당 사항 없어. 메인 배너에 대한 수수료 없이 올려라.”
“하… 뭐 알겠습니다. 그 대신 독점으로 주셔야 합니다.”
“본사 온라인 판매 2주 미루면 되지?”
“좋습니다. 런칭 이후 일주일 가장 잘 보이는 메인 자리로 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차진혁 디자이너님도 이제 확답을 줬으면 좋겠는데.”
잔 마르크의 눈빛에서 간절함이 묻어났다.
파비앙의 말만 믿고 벌써 이벤트 배너까지 기재한 상태이기에 아리raM이 계약해주지 않으면 신뢰도에 금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좋습니다. 계약서 가져오셨죠?”
“물론이지.”
“계약 기간 5년 더 늘리죠.”
“……5년이나.”
“싫으시면 말던가요.”
“아… 알았어. 그렇게 하지.”
갱신 날이 길어질수록 기업의 성장과 가치에 따라 매겨지는 수수료도 함께 묶이게 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스케일 업과 그룹으로 성장할 아리raM의 계약 일자는 늘어날수록 이득이다.
“좋아. 오늘 두 건이나 했으니까 밥은 내가 사지.”
“네, 벌써 저녁 시간이네요. 타미 나가시죠.”
우리 셋은 본사 건물을 나오며 서로 다른 미래를 그려나갔다.
‘미국 진출도 순조롭겠어.’
협업 브랜드의 성공은 아리raM의 미국 진출에도 청신호다.
그 뒤로는 진출만 했지 자리 잡지 못한 이브의 성장과 중국에 자리 잡은 타이거의 유럽과 미국 진출과 성공을 만들어 낼 것이다.
현재 내가 생각하는 목표는 그룹의 성장으로 LVMH 그룹을 견제하고 더 나아가 매출 감소를 위해 노력할 것이다.
가장 단순하고 쉬운 방법이지만 가장 어렵기도 하다.
‘다른 방법은 떠오르지 않아. 실력으로 집어삼켜야 해.’
* * *
켈링 그룹 본사 회의실.
그룹을 새롭게 이끌어 나갈 회장을 다시 선출하기 위해 구짜의 주주들이 대거 모여들었다.
이 한 번의 결정으로 많은 것이 변할 거라는 걸 여기 모인 단 한 사람도 모를 리 없었다.
“안건 1032호 회장 선출안을 시작하겠습니다. 모두 자리에 앉아주십시오.”
사회자의 진행으로 회장 선출안이 시작되었다.
세계의 언론사와 패션 잡지의 관심이 이곳에 쏠렸고 그 안에도 많은 기자가 진을 치며 소식을 빠르게 전파해 나갔다.
“회장 후보 프랑수아즈 프라코스 다음으로 프랑수아즈 레아입니다.”
프랑수아즈 레아는 신지혜의 프랑스 이름으로 그녀가 파비앙의 딸이라는 걸 모두에게 알리는 하나의 방법이었다.
“먼저 프랑수아즈 프라코스의 연설이 있겠습니다.”
가장 앞자리에 앉아있던 프라코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연설대 앞으로 걸어 나갔다.
“반가워요. 프랑수아즈 프라코스입니다. 도전과 혁신적인 방법으로 그룹을 운영해 나갈 겁니다. 켈링은 만년 3위의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저라면 LVMH그룹을 뛰어넘는 기업으로 성장시킬 수 있습니다. 모두가 알다시피 어머니의 집안인 로쉘트 가문을 등에 업고 많은 투자를 받아낼 자신이 있습니다.”
프라코스는 자신의 연설에 매우 만족하며 연설대를 내려왔다.
뒤를 이어 신지혜가 연설대에 올라섰다.
“나의 아버지 프랑수아즈 파비앙이 이끌어 나갔던 형식 모두를 뒤바꿔 나갈 겁니다. 이제 혼자 달려 나가는 기업이 아닌 모두가 함께 걸어 나가는 그룹으로 키워나갈 겁니다. 세상이 바뀌었습니다. 절대 이래서는 최고라 부를 수 있는 에르맥스 그룹과 LVMH 그룹을 뛰어넘을 수 없습니다. 저는 새롭게 만들어질 패션그룹과 협업해 켈링 그룹을 이끌어 나갈 것입니다.”
어떻게 본다면 둘 다 비슷하면서도 형식적인 연설이었다.
세계의 시선이 집중된 만큼 실수가 섞일 수 있는 연설문을 모두 삭제시킨 듯 보였다.
그만큼 자극적인 느낌은 덜했다.
“자 이제 투표 시작하겠습니다.”
신지혜와 파비앙, 노다 헤이치로는 나름대로 안심하고 있었다.
구짜의 지분 50% 이상을 이미 확보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변동이 없는 건 아니다.
일부 투자자 중 손을 들어주는 척 돌아서는 사람도 있기에 방심은 금물이다.
“회장으로 선출되더라도 그룹의 힘이 많이 떨어질 거예요.”
“그거까지 생각할 거 없다. 어차피 저놈이 돼도 똑같아. 지금은 회장 자리를 지킨 거로 만족하자꾸나.”
“네….”
신지혜 측은 구짜와 생로랑, 발렌시 그리고 향수 브랜드 2개와 액세서리 브랜드 1개의 지분을 확보했다.
하지만 큰 매출을 차지하는 보테가와 액세서리 브랜드 티파니 그리고 정장 브랜드 1개를 빼앗길 처지에 놓여 있었다.
이 말은 신지혜가 회장직에 앉는다고 해도 계열사가 빠져나간다는 소리 그만큼 켈링 그룹의 힘도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투표가 한창인 그때 회의실의 문이 열리고 LVMH의 비서팀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주위를 살핀 후.
천천히 쥴리아나 로쉘트 쪽으로 걸어 나갔다.
“쥴리아나. 회장님이 보내서 왔습니다.”
“…….”
“이 서류 받으시죠.”
“배신자 새끼! 인제 와서 이걸 준다고 내가 반가워할 거 같아! 처음부터 이렇게 나왔어야지!”
순간 쥴리아나 로쉘트의 언성이 회의장을 울려왔다.
주위에 모여있던 주주들의 관심도 그녀에게 집중되었다.
“뭐야! 그 소문 사실이었어. LVMH를 등에 업고 회사를 집어삼키려 했다는 게.”
“진짜인가 보네.”
“소문이 사실이었네. 아르노 회장이랑 켈링 그룹 집어삼키려고 했던 게.”
“로쉘트 가문의 수치네그려.”
항간에 그녀가 꾸민 이야기가 퍼져나가고 있었다.
LVMH 그룹과 손잡은 켈링 그룹의 여왕이라는 자극적인 제목으로 말이다.
분노로 가득 찬 그녀가 전해 받은 서류를 비서팀장의 얼굴에 집어 던졌다.
“꺼져, 그리고 그 새끼한테 똑똑히 전해. 꼭 되돌려 받겠다고.”
“알겠습니다.”
처음부터 베르나르 아르노의 배신으로 많은 계획이 틀어지고 말았다.
분노에 차오른 쥴리아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소리를 질렀다.
“지혜야 잘하면 계열사도 지킬 수 있겠다.”
“네?!”
파비앙의 눈빛이 반짝였다.
언론과 이곳에 모인 주주들을 잘 이용한다면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룹에서 계열사가 빠져나가는 것도 일일이 주주들의 동의가 있어야 가능하며 대분류 격인 구짜에서 소분류인 기업들이 빠져나가는 건 다른 의미로 최악이다.
분명 주주들도 이 생각을 하고 있기에 쉽게 찬성하지 않을 테지만 분명 쥴리아나 로쉘트는 가문과 그녀가 만들어 놓은 신용으로 이 방법을 타개하려고 들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검은 속내가 언론과 주주들 귀에 들어간다면 분명 계획대로 흘러가지는 않을 것이다.
“지혜야 여기는 이제 네가 맡아라. 나는 이제부터 내가 할 일을 할 테니까.”
“조심하세요.”
“걱정하지 마. 아빠만 믿어.”
신지혜가 파리에 온 날부터 힘이 없던 아버지의 얼굴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마치 어린 시절 그 당당하던 모습을 다시 보는 거 같았다.
그리고 옆에 있던 노다 헤이치로도 자리에서 일어나 말을 이었다.
“형선이랑 함께 있어요. 나는 잠시 만날 사람이 있어서.”
그는 짧게 그 말을 남긴 채 자리를 벗어났다.
* * *
베르나르 아르노는 자신이 무엇을 위해 달려가고 있는지 되뇌고 있었다.
이 많은 재산과 힘을 물려줄 자녀도 가족도 없는 그이기에 간혹 회의감이 찾아올 때가 있었다.
아르노는 자신이 이러는 이유를 단 하나로 단정 내렸다.
“사람의 욕심이란….”
아르노는 자신이 욕심이라는 감정에 지배당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 욕심이라는 쉽게 놓을 수 없었다.
이 감정은 여자나 마약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달콤했고 자신을 발전하게 만드는 매개체라는 걸 알고 있기에.
“얼마 남지 않았어.”
아버지가 꿈꿔왔던 허황한 이야기를 이제 곧 자신의 손으로 이룰 수 있다.
“회장님.”
“들어와. 어떻게 되었나?”
“거절하셨습니다. 꼭 복수하겠다고 전해라 했습니다.”
“그래. 그래야 쥴리아나지 그건 되었고 한국의 일은 잘 처리되어가고 있겠지?”
“예, 필요한 도구가 무엇인지는 알아냈습니다. 그 시대 인물들 가운데 고종의 명을 받아 움직였던 5명이 가지고 있던 물건만 찾아내면 될 거 같습니다.”
“행방은?”
“그게… 알아본 결과 아리raM의 대표가 두 개를 들고 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리raM이라… 요즘 자주 들리는 이름이고만. 그럼 두 개는?”
“일본과 미국에 있습니다. 최근 일본 경매에 곧 올라온다는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그럼 미국은?”
“곧 찾게 될 겁니다. 역학조사를 통해 어떻게 미국에 흘러들어왔고 거래가 되었는지 찾고 있습니다.”
“그렇군. 꼭 찾아내게.”
“예.”
드디어 이 옷의 비밀을 풀어낼 도구가 무엇인지 한국의 옛 문헌에서 발견했다.
신기하게도 모두 의상과 관련된 사항들이었고 왜 할아버지가 이 명품 브랜드에 집착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비밀이 뭘까. 궁금하네.”
그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전면 유리에 전시된 보물을 바라봤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빛나 보이는 이 보물의 힌트를 보며 어금니를 강하게 깨물었다.
잠시 후 사무실에 또 다른 인물이 나타났다.
“이렇게 불쑥 나타나지 말라고 했을 텐데.”
“제가 못 올 데라도 왔습니까?”
“하… 무슨 일인가?”
“이제 꼬리들은 다 잘랐으니 그만하시죠. 더 이상 제 사람들 건드리시면 저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베르나르 아르노는 그의 말에 큰 웃음으로 대답했다.
“하하하. 네가? 정신 차려 네놈 한목숨 건사하기도 힘든 놈이! 내가 살려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해야지. 그리고 네놈이 나한테 이렇게 당당하면 안 되지! 일 처리나 제대로 하고 다녀. 듣기로는 김시현의 동생이 살아있다지. 벌써 없어져야 하는 놈을 살려두다니 멍청한 새끼.”
“그 일은….”
“명심해 네가 원하는 걸 얻고 싶으면 쥐 죽은 듯이 시키는 일이나 해. 그리고 사건 수습해!”
“……예.”
험악한 분위기 속 텔레비전에서 특보가 쏟아졌다.
매듭 패션 1.
* * *
나는 미국 일정을 소화하고 한국으로 귀국했다.
F/W 패션위크가 이 주일 남짓으로 다가왔고 최종 점검은 해야 하기에 밀린 업무로 밤을 지새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