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5화 (145/200)

브레드와 몇 달 동안 있었던 일들을 공유하며 웃음꽃을 피워 나갔다.

“지금 협업 브랜드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죠?”

“순조로워요. 미국 대형 백화점들과 입점 계약도 마무리했고 타미 브랜드 매장 중 몇 군데를 선정해서 인테리어 시공도 들어갈 예정입니다. 한 달 뒤 컬렉션이 끝나는 시점부터 물량이 풀릴 거에요.”

“잘됐네요.”

“타미가 디자인에 대해서 말했긴 했는데….”

“어떻다고 하시던가요?”

“그건 타미한테 직접 듣는 게 좋을 거 같네요. 타시죠. 호텔로 가실 거예요 아니면 바로 본사로 가실래요?”

“본사로 바로 가죠. 기다리실 거 같은데.”

“네.”

브레드가 모는 세단이 고속도로를 가로지르며 달려 나갔다.

‘여기도 변함없네.’

잠시지만 창밖의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

공허한 느낌이 강하게 밀려왔다.

띠리링!

“누구지?!”

발신자가 명확하지 않은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내가 전화를 받으니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리raM 대표님 왜 전화를 안 주시는 거죠?”

“누구시죠? 목소리가 익숙한데.”

“나 잔 마르크입니다. 소호 패션 잔 마르크!”

“아 소호 패션… 어찌한 일로?”

순간 파비앙이 나에게 전해주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아… 연락해둔다고 했지. 깜빡했네.’

“죄송해요. 제가 방금 뉴욕에 왔습니다. 파리 일정이 너무 빡빡해서 미쳐 연락 못 드렸네요.”

“이제 곧 F/W 시즌 시작인데 이렇게 느긋느긋하게 할겁니까? 나는 아리raM을 입점시키려고 얼마나 고생하고 있는데.”

‘고생은 무슨. 이번 이슈로 한몫 땅기려는 속셈인지 모를 줄 알고.’

며칠 전 소호 패션의 카테고리에 작은 변화가 있었다.

아시아 패션 어워드 디자이너 브랜드 초청전.

그곳에는 5개의 브랜드가 존재했는데 가장 맨 위에서부터 아리raM, 타이거, 바이드, 임페리얼, 이브 순이었다.

‘허락도 없이 브랜드 이벤트를 걸어?! 너도 당해봐라.’

나쁘지 않은 조건의 이벤트인 건 알겠으나 정확한 계약도 없이 사전에 공지한 소호 패션의 잘못이 크다.

“죄송해요. 언제쯤 시간 되시죠?”

“지금 당장 만나야 할 거 같은데. 내일 밀라노 일정이 있어서 시간이 없어요.”

“지금이요?! 지금 안 될 거 같고 일주일 뒤에 어때요?”

“절대 안 됩니다. 일주일 안에…… 아니지 일단 오늘 만납시다.”

“안 됩니다. 끊습니다.”

“차진혁 디자….”

잔 마르크의 시끄러운 목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톰 브레드의 귀에 들어갔다.

“들어 본 목소리 같은데.”

“소호 패션의 잔 마르크 대표예요. 아실 거 같은데.”

“아 그 진드기.”

“진드기요?”

“그놈 그거 성공하기 전에는 얼마나 명품 기업들에 달라붙어서 다녔는지 대단했어요. 그러니 지금의 소호 패션이 있었겠지만.”

“그런 과거가 있었군요.”

‘세상에 공짜는 없다니까. 잔 마르크가 진드기라니.’

뒤를 이어 그가 명품의 큰 변화를 주었다는 이야기가 이어졌다.

“처음에 유럽 브랜드들은 미쳤다고 했었죠. 어떻게 명품을 온라인에서 파느냐고 고객들이 보지도 않고 그걸 구매하냐면서.”

톰 브레드의 말처럼 예전의 명품 브랜드들은 구시대적 사고로 가득 차 있었다.

명품이니까 이래야 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으니.

하지만 지금은 명품쇼핑몰의 매출이 오프라인 매출보다 훨씬 웃돌고 있기에 잔 마르크에 고개 숙이는 처지가 되었다.

“입점 건 때문에 전화한 거 같던데. 그렇게 끊어도 됩니까?”

“괜찮아요. 아쉬운 쪽이 손드는 거죠. 또 연락 올 겁니다.”

파비앙과 친한 잔 마르크가 내 사정을 모르지 않을 거다.

이제 선택권은 나에게 있다.

소호 패션에 입점하여 있는 켈링 그룹의 브랜드와 이브, 타이거까지 이제 내 손위에서 움직일 테니까.

“도착했습니다.”

“같이 들어가시죠.”

“아닙니다. 저는 할 일이 있어서요.”

“마중 나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연한걸요. 저희한테는 큰손님이신데요.”

“감사의 뜻으로 저녁 살게요. 조금 있다가 같이 식사하시죠.”

“좋습니다. 좋은 곳에 예약해두겠습니다.”

차에서 내려 타미 본사 건물로 들어가려는 그때였다.

“차진혁 디자이너!”

“아….”

멀리서 나에게 손을 흔들며 다가오는 사람이 보였다.

나는 빠르게 몸을 돌려 그를 피해 타미힐피거의 건물로 들어가 버렸다.

협업 브랜드 3.

* * *

타미의 사무실로 들어가자.

익숙한 고목 가구들이 뿜어내는 향기에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만 같았다.

“아니 어떻게 그렇게 모른 체하면서 가지. 와 배신감! 모욕감!”

“모욕까지는 아니죠. 그러니까 왜 여기까지 찾아오고 그러세요.”

“전화를 그렇게 끊어 버리는데 당연히 가만히 있을 수 있냐고 나 진짜 내일 밀라노 가야 한다고!”

“가시면 되죠. 밑에 직원들 있잖아요. 왜 여기까지 와서는 근데 제가 여기 있는지는 어떻게 알고 찾아왔습니까?”

“신지혜 양이 알려주던데 이쪽으로 왔을 거라고.”

마침 뉴욕 본사에 있던 잔 마르크가 씩씩거리며 타미힐피거의 본사까지 찾아왔고 우연히 나와 마주친 것이다.

그리고 현재 그는 나와 함께 타미의 사무실에 함께 와있었다.

“넌 왜 왔냐?”

“타미, 제 이야기 좀 들어봐요.”

“아 그만, 네 이야기 듣다가는 하루 다 가는 거 내가 아는데 우리 바쁘니까 조용히 있어.”

잔 마르크는 완전 찬밥신세가 되어 소파 끝에 쭈그리고 있었다.

나는 그의 모습을 보며 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다.

그렇게 콧대 높은 잔 마르크도 타미 앞에서는 그저 아이일 뿐이었다.

“그래 멀리서 온다고 고생 많았어. 안 피곤해?”

“아직 젊은데요.”

“좋네, 좋아.”

환한 미소를 머금은 타미는 자신의 테이블에서 두꺼운 서류뭉치를 내 앞에 내밀었다.

“최종 디자인이야. 오늘 안에 확인해주게. 내일 바로 생산에 들어가야 할 거 같거든 전 세계로 수출해야 하니 일정이 빡빡해.”

“네.”

새로운 브랜드의 디자인이라는 소리를 듣고는 잔 마르크가 조금씩 내 옆으로 다가왔다.

“같이 보시죠.”

“오… 고마워.”

“마실 것 뭐로 줄까?”

“저는 커피 한 잔 주십시오.”

“저도요.”

“네놈한테 물어본 거 아닌데.”

“타미 진짜 이러지 말아요. 나만 보면 그러시더라.”

“네가 우리 브랜드 입점 안 시켜 줘서 그렇지.”

“아… 그러니까. 미스타 패션에 입점시켜드린다니까 싫다면서요!”

“소호 패션에 입점시켜야지 미스타에 왜 입점시키나.”

“브랜드 성향이 다르다고 제가 몇 번을 말해요.”

둘은 또 티격태격하며 언성을 높여 갔다.

“두 분 잠시만 조용히 해주세요. 집중이 안 돼요.”

내 말에 둘은 서로를 째려보다 고개를 돌렸다.

‘타미의 감각이 엿보이네. 아주 좋아.’

새로운 브랜드는 한국의 미를 담은 데님이다.

예전 위안부 할머니들의 업그레이드 버전으로 우리는 오랜 시간 끌고 갈 디자인을 만드는 데 주력했다.

“80년대 느낌이 강해졌네요.”

“맞아. 처음 보내줬던 스키니한 부분은 모두 버렸네. 이 방법이 자네가 보내 준 디자인과 더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더군. 요즘 추세에도 따랐네.”

일자로 쫙 내려오는 낡은 느낌이 신선하게 다가왔고 무릎을 쪼여주고 발목을 넓힌 나팔바지 형태의 데님 또한 트랜디해 보였다.

그 시대의 오래된 디자인이 아닌 현대에 맞게 변화된 올드한 디자인이기에 새롭고 신선하게 다가왔다.

“와… 이 디자인 재미있는데. 청바지에 포켓이 포인트라. 카고바지인가?”

“카고와는 다릅니다. 그리고 보이는 게 다가 아니에요. 포켓이 포인트는 맞지만, 포켓 속에 들어 있는 명주 천과 자수가 디자인을 더 돋보이게 해줍니다.”

나는 다음 장을 넘겨 세부적인 디자인의 기록을 잔 마르크에 보여주었다.

지퍼와 벨크로 찍찍이를 사용해 탈부착이 되는 15X15 크기의 포켓은 내부에 명주 원단에 자수를 집어넣어 사람에 따라 스타일을 달리하게 했다.

한국의 장인들이 자수 디자인을 만들었고 미국에서 이루어지는 제작의 품질을 검수하기 위해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다른 것도 한번 보자고.”

다음으로는 맨투맨과 셔츠 그리고 재킷 라인으로 포인트가 되는 부분이 인상적이다.

왼쪽 앞을 시작된 화려한 명주 천이 반대편 끝부분까지 일체 되어 넘어간다.

여러 색상의 비단과 연청색, 진청색, 블랙청의 조화가 아주 아름답게 표현되었다.

“와… 다음 다음!”

“잔….”

“아… 미안 너무 흥분했어.”

그 뒤로도 천천히 디자인을 확인했다.

타미가 손을 댄 부분을 포함해 오류가 생긴 부분을 서로 논의해 나갔다.

“이 데님 패딩은 조금 수정해야겠는데요. 너무 enough[넉넉하다, 부하다]해 보일 거 같아요. 등과 팔 부분의 치수 조절하고 내부 보충제 양도 줄여야겠습니다. 디자인이 좋아서 많이 바꾸지 않는 편이 좋을 거 같습니다.”

“알겠네.”

“그리고 저번에 말씀하셨던 로고 부분 있잖아요.”

“그래. 로고 위치를 아직도 못 잡았어. 자네도 알다시피 로고가 어디 있냐에 따라 디자인이 많이 바뀌니까 고민되더라고.”

“제가 생각해봤는데.”

그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로고를 금속 형태로 제작해서 8cm 클립에 부착하면 어떨까 합니다. 옷깃과 목둘레 라인에 자유롭게 탈·부착하게끔.”

“오…. 좋은데 새로우면서도 트렌디하네. 근데 왜 하필 탈·부착이 돼야 하나? 그냥 부착시켜도 되잖아.”

“광고효과와 브랜드를 알릴 수 있을 겁니다. 지금도 타미가 만들었다면 분명 홍보가 되겠지만 그걸로는 부족합니다.”

“더 자세하게 말해보게.”

“탈·부착이 가능하다는 건 다른 의상에도 부착이 가능하다는 겁니다. 그럼 다른 브랜드의 의상에도 우리가 만든 브랜드 로고가 보인다는 거죠.”

“잘 이해가 안 되는구먼.”

나는 그의 말에 준비한 그래픽 자료 하나를 보여주었다.

“한번 보시죠. 제 생각을 이미지화한 파일입니다.”

“잠시만 있어 보게.”

타미는 자리에서 일어나 노트북을 가지고 와 내가 있는 자리에서 바로 파일을 열었다.

그때 가장 먼저 탄성을 지른 사람은 잔 마르크였다.

“미친 이런 생각을 어떻게 한 거야. 진짜 천재네.”

“이거 상당히 이슈가 되긴 하겠는데.”

내가 내민 파일에는 여러 브랜드의 의상에 새겨진 로고와 내가 만든 로고가 겹치면서 하나의 로고처럼 보였다.

순간 잔 마르크가 나를 보는 눈빛이 달라졌다.

“왜 그렇게 부담스럽게 봐요.”

“아니… 그냥 오늘따라 더 잘생겨 보여서.”

“아부성으로 들리는데.”

잔 마르크와 다르게 타미는 또 다른 시선으로 나를 바라봤다.

걱정이 담겨 있는 얼굴이었다.

“이렇게 하면 다른 브랜드의 로고와 비교가 될 수도 있어. 그리고 상대 브랜드에서도 좋아하지는 않겠지.”

“어쩔 수 없는 거죠. 어차피 시장은 경쟁이지 않습니까.”

타미가 걱정하는 게 무엇인지 알고 있다.

마치 타 브랜드에 기생하는 형태로 비칠지도 모르나 다르게 생각하면 그 옷을 로고가 집어삼킬 수도 있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 로고 디자인을 프리미엄 기성복에 맞게 캐릭터화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명품과 비교할 수 있으며 대립할 수 있는 로고를 만들었고 절대 뒤지지 않는 로고라고 자부할 수 있었다.

“자네가 그렇다면 말릴 수야 없지 나도 인정하는 바라. 그럼 이대로 생산하겠네.”

“감사합니다.

타미는 내 의견을 전적으로 받아주고 있었으며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자면 디자이너로서 나를 인정한다고 볼 수 있었다.

다음 페이지부터는 컬렉션의 피날레 의상 5가지로 가장 심열을 기우려 디자인했다.

“피날레 의상은 그대로네요.”

“손댈 곳이 없었어. 내가 손댈 능력이 안 되는 거 같기도 하고.”

타미는 손을 내저으며 디자인 회의를 마무리 지었다.

그리고 타미는 수정된 부분을 디자인 팀장에게 넘기고 이야기를 이었다.

“내 부탁은 고민해 봤어?”

“네, 많이 고민했습니다. 그건… 힘들 것 같습니다.”

“왜?!”

“제가 짊어지고 갈 게 많아졌습니다. 너무 좋은 조건이라는 거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말을 아꼈다.

그에게 말한다 해도 이해하지 못할 부분이기에.

“진짜 이해가 안 가는구먼 이 타미 그룹을 이을 후계자 자리를 걷어차는 얼간이가 있다니….”

타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잔 마르크가 커피잔을 떨어트리고 말았다.

“내… 내… 내가 잘 못 들은 거지?”

“뭘 잘못 들어! 저놈한테 내가 타미를 넘기려고 한다고 근데 안 받겠다잖아.”

“아니 왜?!”

잔 마르크는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당연한 소리다.

타미 그룹을 받는다는 건 엄청난 부와 명예를 함께 거머쥐는 거니 하지만 지금의 나는 타미 그룹보다 더 큰 걸 손에 거머쥐고 있었다.

“아…… 생각지도 못한 답변이라 할 말이 없네. 이유라도 들어 보자.”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이놈이!”

사실 내가 그의 권유를 거부한 건 가장 걸리는 조건이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체류 그리고 본사에서 함께 일을 해야 한다.

타미가 바라는 건 한국의 모든 걸 버리고 자신의 뒤를 따르라는 거였다.

내가 그걸 받아들인다는 게 더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그냥 이번 브랜드만 함께 만들어나가겠습니다. 더 큰 욕심은 없습니다.”

“하….”

“그리고 부탁이 있습니다.”

“네놈은 내 부탁 안 들어주면서 나는 들어줘야 하냐?”

“타미! 제 선택에 존중해주신다면서요.”

“아 그래 그놈의 부탁이 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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