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1화 (141/200)

“……뭐. 그럴 거 같아.”

장료이는 잠시 나를 바라보며 씁쓸한 미소와 함께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는 나에게 무슨 말을 전하고 싶지만 쉽게 이 감정에 대해 위로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는 듯했다.

“그 이야기는 그만하자. 이제 시작이잖아.”

“그래.”

“이제 시작하나 보다. 정말 하나도 안 아쉽냐.”

“나는 충분히 만족해. 이번 사건으로 더 값진 것들을 얻었거든.”

“그래. 그럼 된 거지.”

장료이와 대화를 끝으로 시상식이 시작되었다.

MC하경이 무대 위에 올라와 심사위원과 프랑스 패션협회 관계자 한 명, 한 명을 소개했다.

“모두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이제부터 시상식을 시작하겠습니다.”

무대 뒤 엄청난 크기의 검은 장막이 올라가고 최종컬렉션의 화려한 의상들이 전시된 디스플레이가 나타났다.

모두 자신의 나라의 전통의상으로 디자이너 각자의 색이 가득 담겨 있었다.

“3위부터 발표하겠습니다. 발표와 함께 시상자는 앞으로 나오면 되겠습니다. 발표는 엔젤링의 첸 디자이너가 맞아주시겠습니다.”

하경의 멘트와 함께 첸이 무대 뒤에서 나타났다.

“모두 고생했다는 말을 전합니다. 여러분들은 이제 패션 시장에 작은 산을 넘었다고 생각합니다. 더 많은 발전으로 함께 이 시장을 개척해 나갔으면 합니다. 발표하겠습니다.”

모두가 간절한 희망을 품으며 그녀의 발표를 기다렸다.

“3위는 러시아입니다. 축하드립니다.”

그녀의 발표와 동시에 디스플레이에 전시된 러시아 전통의상에 점등이 되어 들어왔다.

러시아 디자이너는 그 모습을 보며 뿌듯하게 첸 디자이너에게 다가가 트로피를 전달받았다.

뒤를 이어 첸 디자이너는 러시아 전통의상에 대한 설명을 곁들여 주었다.

“러시아의 전통의상 사라판을 아주 아름답게 표현해 주었습니다. 흩날리는 블라우스와 펑퍼짐함 멜빵 형태의 치마를 빈틈이 없는 원피스로 바꾸었고 사라판을 롱 점퍼로 변형시켰습니다. 아주 현대적인 전통의상의 탄생이었습니다.”

뒤를 이어 2위는 발렌시의 발란리아가 발표했다.

그도 우리에게 수고했다는 말과 함께 다음을 기약하는 말을 남겼다.

“모두 수고했어. 만약 기회가 된다면 파리 패션위크에서 만나자고. 발표하겠습니다. 2위는 인도입니다. 축하드립니다.”

아룬은 아쉬움을 뒤로하고 트로피를 머리 위로 올려 보였다.

나는 그를 바라보며 분명 얼마 가지 않아 4대 패션위크를 종횡무진으로 활약할 거물이 될 거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이룬 디자이너가 디자인한 전통의상은 사르와르 카미즈와 두파타를 하나로 합쳐 풍성한 아름다움과 색의 즐거움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그의 디자인은 항상 감성적이면서 색의 이해도가 높았으며 상업성이 뛰어나다는 판단이 섰다.

발란리아가 심사위원석으로 돌아가고 MC하경이 다시 한번 크게 소리 질렀다.

“모두 화면을 봐주십시오.”

우리가 서 있는 뒤편에서 영상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 영상은 각국의 디자이너들이 대회를 시작하기 전 녹화해놓은 인터뷰였다.

모두 강한 포부와 자신감을 가지고 대회에 참가했고 왜 디자이너가 되었으며 어떤 디자이너가 되고 싶은지 어떤 브랜드를 만들어나갈지 말하고 있었다.

“여러분 모두 저 초심을 잃지 마시기 바랍니다. 처음부터 지켜본 MC로서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1위 발표는 유영미 디자이너가 진행하겠습니다.”

유영미가 심사위원석에서 무대 아래로 내려왔다.

그런데 발표를 하지 않고 나를 빤히 바라보고 말을 이었다.

“누구라고 지목하지는 않겠지만 그분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합니다. 선배가 하지 못 한 일을 후배가 해주어 매우 고맙고 자랑스럽다고 전하고 싶었습니다. 제가 가슴속에서 그 사람이 1위입니다.”

그녀의 발언에 장내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1위 발표자로서 옮지 못한 행동이라는 걸 아는지 유영미가 모두에게 고개 숙였다.

“1위를 하게 될 디자이너에게는 미리 사과드립니다. 하지만 이 말을 남기지 않는다면 한국인으로서 선배로서 너무 부끄러울 거 같았습니다.”

나는 그녀에게 고개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주위에 있던 디자이너들은 우리 둘을 바라보며 손뼉을 쳐주었다.

이제 정말 1위 발표만을 남겨 놓은 상태다.

“이제 1위를 발표하겠습니다. 1위는!”

아리raM 그룹 5.

* * *

유영미 디자이너는 아시아 패션 어워드 우승자를 지목하며 큰소리로 외쳤다.

“1위는! 중국의 장료이 디자이너입니다. 축하합니다.”

큰 이변 없이 장료이가 우승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결과적으로 3차전 상위 그룹이 모든 상을 휩쓸었다.

‘역시 내 눈이 틀리지는 않았네.’

디자인을 판단하는 건 사람에 따라 다를지 모르나 좋고 끌리는 디자인은 모두가 똑같이 느끼는 거다.

시상자들은 그 부분을 잘 파악하고 있었고 절제된 미와 끌리는 디자인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갖춘 디자이너들이라는 소리였다.

“축하해요. 장료이 디자이너. 그리고 아까는 미안합니다.”

“괜찮습니다. 저도 진혁의 팬이거든요.”

“이해해줘서 고마워요.”

장료이가 커다란 트로피를 머리 위로 들어 올리자.

유영미 디자이너의 해설이 시작되었다.

“장료이 디자이너는 한푸를 한층 더 아름답게 표현해 주었습니다. 무대를 형형색색의 실크로 가득 메운 퍼포먼스에 마치 무대 자체가 한푸를 입은 거 같았습니다. 그리고 한푸와 현대의 드레스를 모티브로 한 디자인이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이로써 아시아 패션 어워드가 끝이 났다.

“장료이 축하해.”

“이걸 내가 받아도 될지 모르겠네. 분명 네가 받아야 할 상이었어.”

“무슨 소리 하는 거야. 그 상은 오롯이 너의 것이야.”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모든 디자이너가 장료이의 우승을 축하해 주었다.

그 뒤로 프랑스 패션 협회와 파리 상인회 연합의 관계자들이 내려와.

장료이의 브랜드 타이거의 파리 시장 진출권을 전했다.

“축하해. 그건 좀 부럽네.”

“부러워할 거 없어. 너도 곧 상인회에 들어오게 될 거야.”

“뭐?!”

장료이는 내 질문을 흘려버리고 몸을 돌렸다.

“싱거운 놈.”

그는 환한 웃음으로 모두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그리고 각국의 디자이너들은 서로를 격려하며 아시아 패션 어워드를 마무리했다.

“오늘은 파티다. 내가 쏜다!”

장료이는 자신의 우승을 기념해 한턱 크게 낸다며 주위에 모여 있던 디자이너들과 심사위원까지 모두를 초대했다.

“저놈의 붙임성은 누굴 닮은 거야.”

그를 보면 다니엘과 참 많이 닮아 있는 거 같았다.

“둘이 붙여놓으면 가관이겠어….”

절대 그런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하나로도 과하다는 생각에 고개가 절로 흔들렸다.

.

.

.

시상식을 마무리하고 시작된 파티에서 너무 과음했는지 속이 뒤집힐 거 같았다.

“아 죽겠네… 무슨 술을.”

내 옆에 있던 장료이 덕분에 술을 피하려 해도 그럴 수 없었다.

“완전 말술… 다시는 장료이랑 안 마셔야지. 아니다 술을 안 먹을 거야. 아 괴로워….”

나는 힘겹게 몸을 일으켜 샤워 부스로 이동했다.

“하….”

샤워기에서 뿌려져 나오는 미온수에 몸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느낌이다.

“아 살 거 같아.”

오늘은 노다 헤이치로를 만나야 한다.

JB그룹을 이어받은 장료이의 선택에 많은 것이 변화할 것이다.

셋이 모여 이제부터 더 정확한 길을 계획해야 했다.

“어떤 방식으로 이 일을 해결할 거냐. 너는.”

나는 분주하게 밖에 나갈 준비를 했다.

편안한 맨투맨과 청바지를 입고 문을 나서는데 어디선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내가 고개를 돌리자 밝은 미소로 나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는 불청객이 눈에 들어왔다.

“뭐야! 너 이 호텔에 묵는 거야.”

“그럼 어제 기억 안 나 내가 네 방에 데려다줬는데. 그건 그렇고 어디 가는데?”

“산책 좀 나가려고 했지.”

“그럼 나도 같이 가자.”

“사절이야. 혼자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치사하네.”

장료이는 입이 삐죽거리며 복도를 걸어 나갔다.

“나는 조식이나 먹으련다. 안 잊어버렸지 오후에 할아버지가 여기로 오실 거야.”

“그전에 돌아올 거야.”

우리 둘은 승강기에 몸을 실었고 서로 다른 층에서 헤어졌다.

“날씨 좋다.”

3월 중순의 파리 날씨는 서늘한 봄이다.

습한 감은 없지 않아 있지만, 기분을 업 시켜주는 효과가 있는 거 같았다.

“오늘이 아니면 시간이 없겠지. 가봐야겠어.”

나는 설마 하는 마음에 김서진 인생의 마지막을 달리한 집으로 향했다.

“택시!”

.

.

.

택시에 내려 주위는 살피는데 귀에 익은 기타 소리가 들려왔다.

“이 동네는 여전하네.”

아침마다 들려오는 로버츠의 기타 소리.

어쩌면 그리웠을지도 모를 기타 소리에 나는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델리 이리 와!”

그때 금발의 꼬마가 나를 향해 달려왔다.

“델리?”

우리 집 옆에 살던 꼬마 아가씨의 이름이었다.

“울보쟁이 델리?! 이렇게나 커버린 거야.”

내가 뱉어내는 말을 들은 꼬마 숙녀는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서진?”

“…….”

꼬마 숙녀는 자신의 엄마가 예전에 나를 부르는 방법으로 내 이름을 불렀다.

“난 진혁이란다.”

“서진.”

“서진은 내 형이야.”

“형?!”

꼬마 숙녀와 재미난 대화를 이어가는 순간.

어머니인 안델라가 나타났다.

“요 말썽꾸러기. 위험하다고 뛰지 말랬잖아!”

그녀는 자신의 딸을 혼내고는 나를 빤히 바라봤다.

“근데 누구? 동네에서 처음 보는 얼굴이네요.”

그녀는 의심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때 그녀의 다리품에 있던 델리가 내 이름을 불러주었다.

“진혁.”

엄마의 다리품에서 나를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내 이름을 불러준 델리를 보니 절로 환한 미소가 피어났다.

나는 안델라를 보며 정식으로 나를 소개했다.

“안녕하세요. 김진혁이라고 합니다.”

김 씨라고 소개했다.

괜한 오해를 사고 싶지 않았고 이곳에서는 김서진의 동생으로 소개하는 게 새로운 정보를 얻기에 좋다는 판단이 섰다.

“안델라라고 해요. 김진혁…? 설마 한국 사람이에요?”

“맞아요. 이곳에 살던 김서진 디자이너의 동생입니다.”

“oh my god! 서진 씨의 동생이란 말이에요.”

“네, 맞습니다.”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주위를 이리저리 쳐다본 후.

델리를 자신의 가슴 품에 번쩍 들어 올렸다.

마치 나를 경계하는 행동이었다.

“죄송한데. 형에 대해서 들을 수 있을까요?”

“아니요. 저는 몰라요. 이만 가보겠습니다.”

“네….”

순간 돌변한 목소리와 미세한 떨림이 그녀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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