켈링 그룹이 이 상황까지 왔다는 건 대외적으로 벌써 많이 알려졌다는 거고 투자지분이 많은 PXP는 더 이득이 가는 쪽에 손을 들어 줄 게 뻔하다.
일단은 PXP 대표를 만나는 게 우선이었다.
‘직접 찾아가는 건 역효과야. 파티에서 만나는 게 자연스러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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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패션 어워드 시상식이 열리는 장소로 이동했다.
주최 측에서 최대한 행사를 축소했고 브랜드 관계자들과 디자이너들만을 내부로 초청했다.
“방송녹화는 하나 보네.”
무대 아래에 방송용 카메라 여러 대가 설치되어 있었고 주위에는 많은 방송 스태프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대기실에 가서 좀 쉬어야겠다.”
아침 일찍부터 움직인 터라 피곤함이 밀려왔다.
끼익.
내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눈앞에 바쟐 디자이너가 팔짱을 끼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피곤한데 이 새끼는 왜 또 와있는 거야. 하….’
“바쟐 디자이너.”
“어, 왔어.”
“여기는 어떻게? 심사위원 대기실은 반대편 아니에요.”
“어떻게?! 뭐가 어떻게야 내가 얼마나 기다린 줄 알아.”
“무슨?”
“레이첼에게 들었어. 너무 놀라서 내 대기실은 가지도 않았다고 빨리 말해봐 어떻게 된 거야?”
“아…. 일단 앉아요. 급할 거 없잖아요.”
그와 함께 대기실 테이블에 마주 앉아 이야기를 이었다.
“제 기억이 잘못되었더라고요. 그리고 서진이 형도 그렇고.”
“상세하게 말해보라고 심장 떨려 죽겠네.”
“그게 어릴 적에 서진이 형은 할아버지에게 저는 친아버지의 친구였던 지금의 아버지한테 맡겨졌다네요. 근데 시간이 지나고 둘 다 기억이 틀어진 거 같아요. 정말 바보 같은 이야기라 부끄럽네요.”
“그럴 수 있어. 서진이 어릴 적에 큰 사고를 당했다는 거 들은 거 같아. 그래서 둘 다 기억이 잘못된 거 아니야?”
“그런 거 같아요. 그 뒤로 우리 둘이 헤어진 거니까.”
다행히 둘러댄 말에 바쟐은 믿어주고 있었다.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변명하기 매우 힘든 상황을 초래했을 거다.
“감사합니다. 믿어주셔서.”
“믿고 안 믿고가 어딨어. 둘이 얼마나 닮았는데 레이첼의 말을 듣고 보니 둘이 너무 닮았더라고 못 알아본 내가 바보였어. 서진의 동생이면 내 친동생이나 마찬가지니까. 이제부터 형만 믿어 내가 책임지고 뭐든지 도와줄 테니까.”
“서진이 형 덕분에 저도 좋은 형이 생겼네요. 하지만 도움은 거절하겠습니다. 혼자서도 잘 헤쳐나갈 수 있으니까요.”
“안 돼! 내가 다 해줄 거야.”
“뭐 그러시다면.”
‘그래…. 너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라.’
그는 나를 보며 진심으로 기뻐해 주었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갑자기 목소리 톤이 바뀌며 바쟐이 진지하게 대화를 시작했다.
“네가 친동생이라면 말이 달라져. 진혁아, 이제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서진이는 살해당했어.”
아리raM 그룹 4.
* * *
바쟐은 꼭꼭 숨겨 두었던 이야기를 나에게 전달했다.
김서진의 친동생이라면 당연히 알아야 하는 비밀이라며 말이다.
“네?! 무슨.”
“서진은 살해당했어! JB그룹 그 개자식들이 서진을 그렇게 만들었다고.”
‘어디서 이딴 정보를.’
“설마요… 살해라니. 자동차 사고였잖아요.”
나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태연한 척 연기를 시작했다.
그를 속이는 건 내심 찝찝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정말이야! 내가 알아본 결과 자동차 사고가 아니었어! 살인이었다고.”
“그럼 이유는요?”
“나도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 분명한 건 서진을 죽인 놈이 JB 회장이라는 거지. 회장 이름은 노다 헤이치로 네가 이제부터 기억해야 할 이름이야.”
바쟐은 단단히 잘못된 정보를 얻은 거 같았다.
내가 나서서 이 정보를 수정해야겠다는 생각이 들 때쯤.
‘누구한테 무슨 소리를 들은 거야?’
“내가 서진 앞에서 복수해준다고 다짐했다. 그러니 너는 알고만 있어 내 뒤에 꼭꼭 숨어있어.”
‘불안한데… 이 눈빛… 진짜다.’
바쟐은 이 거짓된 진실에 너무 확신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그에게 이런 거짓된 진실을 전달한 놈들이 누군지 말이다.
“바쟐 디자이너 혹시 그 정보 어디서 얻었는지 알 수 있나요?”
“……안 돼. 너까지 이 위험한 곳에 발 디디게 할 수 없어. 그럼 서진을 볼 면목이 없을 거 같아. 너는 모른 척하고 있어 복수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그놈 지금 파리에 있어! 내가 죽여버릴 거야.”
바쟐은 분노에 가득 차 있었고 나를 바라보며 더더욱 확신한 듯 주먹을 쥐어 보였다.
정말 가만히 두었다가는 큰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
‘노다 헤이치로가 파리에 있는 거까지 알고 있어. 분명 어떤 놈들이 정보를 흘려주고 있다는 소리인데.’
나는 더 악착같이 바쟐에게 부탁했다.
어떤 놈들인지는 알 거 같지만 확답을 들어야만 속이 후련할 거 같았다.
“형의 죽음에 대해서 그리고 그 정보를 준 놈들에 대해서 저는 알아야겠습니다.”
“안 돼! 저번에 네가 그놈을 살리지만 않았어도 깨끗하게 끝났을 텐데.”
“네?!”
“아… 아니다. 나는 이제 가봐야겠어.”
바쟐은 내가 위험해진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끝내 입을 열지 않고 꺼림칙하게 말을 더듬으며 자리를 피하듯 대기실을 빠져나갔다.
‘저번이라니. 내가 노다 헤이치로를 구했다고?’
순간 머릿속에 번득이는 기억의 한 줄기.
아시아 패션 어워드 3차전 주차장에 있던 노다 헤이치로가 내가 구한 적이 있었다.
‘설마 그걸 바쟐이 알았다고 진짜 골치 아프네.’
진실을 알리기 위해서는 노다 헤이치로와 바쟐을 만나게 하는 게 가장 빠르면서도 설득하기 편하다.
하지만 악감정이 쌓일 대로 쌓인 상태에서 만나게 했다가는 분명 큰일이 벌어질 거 같았다.
‘어쩌지….’
내가 잠시 고민하는 그때.
녹화 시작을 알리는 스태프가 대기실을 찾아왔다.
“곧 시상식 시작합니다. 준비해주세요.”
* * *
박종식은 N 비즈니스호텔 로비 앞에 서 있었다.
“나나세라고 여기 머물고 있는 거 맞나요?”
“고객님 죄송한데 투숙자 개인정보는 알려 드릴 수 없습니다.”
“친구예요. 1012호에 머물고 있다고 들었는데 확실한지만 확인하겠습니다.”
“아… 그러시군요. 잠시만요.”
호텔안내원이 명단을 확인했다.
“맞네요. 나나세 고객님 1012호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런데 1시간 전에 체크아웃하셨네요. 잠시 기다리셔야 할 거 같습니다.”
“그런가요.”
박종식은 입맛을 다시며 호텔 라운지 끝 테이블에 앉았다.
“어이가 없네.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년이 싸돌아다니고 있고.”
그렇게 많은 시간이 흘러갔다.
박종식은 나나세를 기다리며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는 그때.
낯익은 두 여성이 나타났다.
“소피아 레예스 네 짓이었구나.”
박종식은 들고 보고 있던 잡지로 얼굴을 가렸다.
“조금만 기다려라. 둘 다 즐겁게 해줄 테니까.”
그는 나나세와 레예스가 승강기를 타고 올라가는 순간 움직이기 시작했다.
현재 그들이 타고 있는 승강기가 5층을 향해가고 있는 순간.
반대편 승강기가 1층에 도착했다.
“오늘 횡재네.”
박종식은 기분 좋게 승강기에서 내렸다.
1012호 앞.
그는 천천히 손잡이를 아래로 내렸다.
덜컥.
그런데 힘을 들이지 않고도 호텔의 문이 열리는 게 아닌가.
박종식은 안 좋은 느낌에 호텔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젠장!”
그의 눈앞에 목에 칼에 찔린 나나세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박종식은 천천히 걸어 나가.
나나세의 코밑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 보았다.
“죽었네. 너무 쉽게 죽었네. 참 운이 좋은 여자라니까.”
그 순간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현관문 근처에 있던 화장실의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빠르게 그 장소를 벗어났다.
“미친년이 어디서 잔꾀를 써!”
박종식은 나나세를 죽인 범인을 잡기 위해 뛰기 시작했다.
다행히 승강기를 놓친 범인은 허둥대며 비상계단 문을 열고 도망치는 걸 확인했다.
“넌 뒤졌어.”
박종식은 비상계단을 뛰어 내려가 몸을 던져 난간을 잡았다.
“아씨 관절 아프게 하네.”
그렇게 난간을 잡고 한 층, 한 층을 순식간에 내려간 그가 어느새 범인 앞에 멈추어 섰다.
“레예스 네 손아귀에서 도망칠 수 있다고 생각했냐?”
“X발! 그때 죽여버렸어야 했는데.”
“그러게 말이야. 네 보스는 잘 있지?”
“보스를 볼 일 없을 거다. 넌 오늘 여기서 죽을 거니까.”
“오늘 나 죽인다는 놈들 많네. 오늘 무슨 날이냐?”
“닥치고 죽어!”
레예스는 피가 잔뜩 묻어있는 칼을 가슴 품에서 꺼내 박종식의 목을 향해 힘껏 찔러넣었다.
“그래서 죽겠냐?”
박종식은 복싱 스태프를 밝으며 뒤로 살짝 물러난 뒤 다시 전진해 레예스의 얼굴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윽!
순간 몸을 비틀거리는 레예스가 허리를 굽히며 입에서 붉은 핏물이 폭포처럼 토해냈다.
“야 그걸로 되겠냐고!”
박종식은 분노에 차올라 레예스가 들고 있던 칼을 오른발로 쳐낸 후.
몸을 360 돌리며 반대편 발로 그녀의 얼굴을 갈겨 버렸다.
퍽.
“아씨 힘쓰게 만드네…. 이걸 들고 가야 하나. 하….”
* * *
중앙 무대에 올라서자.
오랜만에 만난 10개국의 디자이너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때 아룬 디자이너가 나에게 천천히 다가와 말을 이었다.
“멋지던데. 대회까지 포기하면서 그런 당돌한 짓을 하다니 대단해.”
“기회가 그때뿐이라서… 앞뒤 생각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조국을 위해서라면 그래야지. 멋졌어.”
그 뒤로도 몇몇이 찾아와.
내가 화제의 인물이 된걸. 축하한다며 농담을 던졌고 의상과 군함도 컬렉션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때 멀찍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일본팀이 잠잠해진 틈을 타 나에게 다가왔다.
“일본을 대신해 사과드립니다. 정말 멋진 컬렉션이었습니다.”
“제가 더 감사드립니다. 이브가 일본 기업 최초로 강제 징용 노동자분들에게 사과와 배상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회장님의 지시이기도 했고 임직원들 모두 동의하는 사항이었습니다.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이브는 노다 헤이치로의 기업이었기에 기업 자체적인 사과는 당연하다 생각했다.
하지만 임직원들 모두가 강제 징용 노동자에게 미안한 마음이라는 말에 놀라웠고 이들이 대부분 일본인이라는 것에 나는 희망을 품을 수 있었다.
머지않아 일본이 크게 달라질 거 같은 예감이 들었다.
내가 일본 디자이너와 대화를 마무리하는 순간.
장료이가 중앙 무대 위로 올라왔다.
“친구!”
“장료이 왔어.”
“인기쟁이네. 차진혁 디자이너님 인기 부럽습니다.”
“인기는 무슨 장난치지 마. 오늘 1위는 장료이가 받으려나.”
“모르지 최종심사 기준이 엄격하기도 하고 점수가 커서 나도 확신 없어.”
장료이는 돌아가는 일본팀 디자이너를 바라보며 조용히 나에게 읊조렸다.
“나나세 소식 들었지?”
“들었어. 하… 왜 그런 선택을….”
그녀의 죽음을 노다 헤이치로를 통해 듣게 되었다.
아버지를 생각하면 분노를 하는 게 맞지만, 이상하게도 안타까움 마음이 드는 죽음이었다.
“범인은?”
“듣기로는 한신회의 해결사 중 한 명이라더라. 종식이 형이 나나세를 죽인 여자를 붙잡아서 조사하고 있는가 봐.”
“그렇구나. 조만간… 형의 죽음에도 근접할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