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당하던 아버지의 모습은 어디 가고 많이 지치고 외로워 보였다.
신지혜는 아무 말 없이 그에게 다가가 안겼다.
파비앙은 마치 어린아이들 달래듯 신지혜를 토닥이며 달래자 그녀는 더 큰 소리로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차진혁 그놈이 너 힘들게 하냐! 내가 이놈을!”
“이렇게 잠시만 있어요.”
파비앙은 더는 말을 잊지 않고 그녀의 등을 토닥여줄 뿐이었다.
“이게 얼마 만인지. 참… 죽어도 여한이 없다.”
신지혜는 오랜 시간 그의 품속에서 눈물을 보이고 있었다.
“진정해 지혜야. 무슨 일이니? 이 애비가 다 해결해 줄 테니까. 그만 울어. 차진혁 이 새끼 내가 당장 한국 가서 혼내줘야겠네.”
“아빠가 사장님은 왜 혼내요. 아… 흑흑.”
그녀는 아빠가 늘 슬픔만을 전해 주었다 생각했다.
하지만 되려 생각하니 늘 자신에게 밝은 등불이 되어주고 있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된 게 너무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신지혜는 겨우 마음을 추스르고 자리에 앉았다.
“이야기 다 들었어요. 엄마랑 아빠 사이에 있었던 일 그리고 지금 새어머니가 엄마한테 했던 짓까지도요.”
“그걸 어떻게?! 애비가 미안하구나.”
“왜 이때까지 숨기신 거예요. 제가 그렇게 원망하고 모질게 대했는데?”
“네가 힘들어할까 봐. 나만 힘들면 되지. 너까지 그럴 필요 있겠니. 그리고 네 새어머니랑 잘 지내길 바랬다. 너한테는 엄마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거든.”
신지혜는 아버지의 속내를 이제야 듣게 되어 가슴이 메여왔다.
이렇게 여린 아버지를 두고 늘 원망과 악담을 퍼부었던 자신이 정말 부끄럽게 느껴졌다.
“그래 그 일로 여기 찾아온 거야?”
“아니요.”
“그럼?!”
“이 회사를 지키려고 왔어요.”
파비앙은 그 뒤로 말을 잊지 못했다.
사실 자신의 막내딸만큼은 이 일에 연관시키고 싶지 않았다.
현재 켈링그룹은 진흙탕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때 파비앙의 마음을 들여다보듯 신지혜가 말을 이었다.
“저 다 알고 왔어요. 숨길 생각하지 마세요. 지금 회사 상황은 어떻게 흘러가고 있어요?”
“끄떡없다. 네가 걱정할 게 아니야. 너는 아빠만 믿고 앞만 보고 가면 된다.”
“아빠! 다 듣고 왔다고요. 그리고 저 바보 아니에요. 파리에 제 친구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러니 모두 말해주세요.”
파비앙은 잠시 머뭇거리다 어렵게 말을 이었다.
“사실 많이 어렵다… 로쉘트가 자금 켈링의 자금줄을 막아버렸다. 회사 자체가 흔들릴 판이야.”
“그럼 둘째 새어머니 쪽은요?”
“다행히 그쪽 지분은 내가 확보했다.”
지금은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한다.
둘째 어머니도 로쉘트보다는 못해도 어린 시절 자신을 핍박하고 혐오했었다.
자신의 자녀들에게 방해가 될 거 같았으니까.
하지만 파비앙한테 만큼은 정말 잘했고 존중하는 모습이 기억이 난다.
“둘째 어머니도 첫째 어머니에게 많이 당했으니….”
둘째 어머니는 가난한 집안의 장녀로 쥴리아나의 시중이나 다름없었다.
“지분율은요?”
파비앙은 책상 위에 있던 파일철을 가져와 신지혜에게 내밀었다.
“현재 내가 보유한 주식이다. 일단 메인 브랜드인 구짜와 생로랑 발렌시는 27% 이상 확보했고 보테가랑, 알렉산더, 매카트니는 15% 정도다. 쥬얼리 브랜드와 시계브랜드는 대주주의 주식이 높아 그 사람들의 손에 달렸다. 지금 목표는 메인 브랜드 구짜만 지켜내는 거야. 계열사 주식을 팔아서라도 구짜의 주식을 사들이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계열사는 다른 기업에 강제 M&A[기업인수합병]가 진행될지도 모르겠네요.”
“그렇겠지. 네 새어머니가 손잡은 기업에 넘어갈 거다.”
신지혜는 진지한 얼굴로 파비앙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아빠 저 믿으세요?”
그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리raM 그룹 3.
* * *
“아빠 저 믿으세요?”
“당연하지. 내가 얼마나 널 원했는데.”
“그럼 이 회사를 지키게 되면 제 소원 하나 들어주세요.”
“물론이지!”
“그럼, 여기요. 제가 움직일 수 있는 주식이에요. 확인해보세요.”
파비앙의 입장에서는 턱없이 부족한 지분율에 반쯤 포기한 상태였다.
“그때 네가 우겨서 너에게 주지 못한 게 한이다.”
“벌써 지난 일을 뭐하러 후회해요. 파일이나 확인하세요.”
파비앙은 쥴리아나 로쉘트의 의견에 못 이겨 자녀들에게 주식 증여한 걸 후회하고 있었다.
켈링 그룹 브랜드 계열사 지분은 대부분 자녀 넷에게 증여되었으며 그중 첫째와 둘째가 가져간 비율이 50% 이상이다.
이것도 모두 쥴리아나 로쉘트의 입김에 의해 벌어진 상황이다.
그 말인즉 현재 파비앙은 쥴리아나 로쉘트에 비해 주식 수가 현저히 부족하며 큰 자본을 가진 그녀에게 회사를 뺏길 위기다.
“이게 다…. 이 많은 주식이 어디서 난 거냐?”
“그건 차차 알려 드릴게요. 아빠 주식이랑 서류에 적힌 주식을 합치면 구짜 39% 이상 생로랑 45% 이상, 발렌시 55% 이상, 보테가 25% 이상, 알렉산더 대략 35% 이상이겠네요. 이 정도면 싸워볼 만하죠.”
“물론이지.”
파비앙은 그녀의 내민 서류를 눈을 비비며 다시 한번 확인했다.
이 서류에 적힌 주식의 수를 시세로 매긴다면 16조는 넘어갈 것이다.
파비앙과 로쉘트의 주식 경쟁으로 상승세가 이어지고 있었다.
“이제부터 아빠 구짜 지분율 0.3 이상 보유 주주들 모두 만나주세요. 저는 생로랑 보태가 쪽 맡을게요.”
“그래! 최선을 다하마.”
프랑수아즈 파비앙은 자신 딸의 눈빛을 보며 설레기 시작했다.
사실 조금 전만 해도 모든 걸 포기하고 주식을 넘겨버리고 싶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근데 아까 새어머니랑 개자식 둘은 여기 왜 온 거예요?”
“아…. 별거 아니다.”
“아빠!”
“아…. 뻔하지 뭘 물어봐. 주식 넘기라고 지금 시가에 1.5배 쳐준다더구나.”
“개자식들이 진짜.”
“너무 미워하지 마라. 그놈들도 제 엄마 등쌀에 그러는 걸 거다.”
신지혜는 뒷말을 잊지 않았다.
못난 자식이고 자신의 등에 칼을 꽂았다 해도 자식인 것이다.
“어휴…. 됐어요. 내일 이야기해요.”
“벌써 가게? 밥이라도….”
“그건 내일 아침에요. 인사드릴 분도 있으니까.”
“그래, 알았다. 조심히 다니고.”
파비앙은 돌아가는 신지혜의 뒷모습에서 오래전 자신이 사랑한 한 여인의 모습이 비치는 거 같았다.
“지영 씨 지혜가 이렇게나 커버렸어.”
.
.
.
다음 날 넷은 아침 일찍부터 호텔 라운지에 앉아 회의를 진행했다.
개방된 장소지만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기에는 그지없이 좋은 장소였다.
“아빠. 이쪽은 노다 헤이치로 JB그룹 회장님이에요.”
“JB? 네가 어떻게 이분을 아는 거냐?”
“말하자면 길고 일단 인사부터.”
“그래.”
파비앙은 공손하게 손을 내밀었다.
둘은 손을 맞잡고 눈인사를 한 후 자리에 앉았다.
“저번 주주총회 때는 감사했습니다. JB 회장님이시었는지는 몰랐네요.”
“그때는 신분을 알릴 수가 없었습니다.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별말씀을…. 그런데 제 딸이랑은 어떻게?”
“그건 차차 이야기하시죠. 긴 대화가 될 거니까요.”
파비앙은 궁금한 마음을 뒤로하고 신지혜를 바라보자.
“걱정하지 마세요. 분명 큰 힘이 되어 주실 분이니까.”
“그래.”
하형선의 분석한 데이터를 토대로 회의가 진행되었다.
파비앙도 켈링 그룹 비서실이 조사한 전략 자료를 내밀며 힘을 보태기 시작했다.
“여기서 마무리하죠. 내일부터는 발로 뛰어야 하니.”
노다 헤이치로가 회의를 마무리하려는 그때.
파비앙이 말을 이었다.
“저는 아직 조건에 대해 듣지 못했습니다.”
파비앙은 오랜 세월 대기업의 CEO에 있던 사람이다.
세상에 이치를 따지자면 그냥 얻어지는 선처는 없었다.
“조건이라…. 신지혜 양이 말하지 않았나 보군요.”
“네, 직접 말씀해주시죠.”
“조건이라기보다 바라는 바는 있습니다. 저는 신지혜 양이 파비앙 회장님의 뒤를 이었으면 합니다.”
“…그렇군요.”
파비앙은 아직 60대 중반의 나이이기에 은퇴라는 조건은 쉽게 받아들이지 못할 거다.
노다 헤이치로는 그의 표정을 보고 무엇을 걱정하는지 눈치챘다.
“미련이 남으시겠죠. 망해가던 구짜를 이 자리에 올려두고 그룹으로 키우셨는데요. 이해합니다. 완전히 내려놓으라는 건 아닙니다. 신지혜 양에게 회장직을 위임하시고 사외이사건 고문이건 조언자가 되어 주셨으면 합니다.”
“그런가요. 이 아이가 너무 어려서 걱정입니다.”
“제가 본 신지혜 양은 충분히 회장직을 수행할 능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제 부탁을 들어주시겠습니까?”
파비앙은 하늘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사실 계획대로 흘러갔다면 은퇴 이후 전문경영인으로 대체할 생각이었다.
안전을 위해 가족 경영을 고수했지만, 자식들에게 물려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힘든 일을 딸에게 맡긴다는 게 고민되네요.”
“신지혜 양도 그 힘든 걸 견뎌내기로 했습니다. 이제 선택권은 파비앙 당신에게 있네요.”
파비앙은 신지혜의 얼굴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노다 헤이치로는 그의 결심을 듣자마자.
하형선에게 지시했다.
“형선아 전해드려라. 확답을 들었으니 저도 선물을 드리죠. 대주주로서 모든 권한을 신지혜 양에게 인도한다는 주식양도양수서입니다.”
“감사합니다.”
“약속은 꼭 지켜주셔야 합니다. 그리고 신지혜 양도 나와 한 약속을 꼭 지켜주어야 하고요.”
“네. 당연하죠.”
넷은 다음 일정을 짧게 논의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파비앙과 하형선이 함께 팀을 꾸렸고 노다 헤이치로와 신지혜 그리고 파비앙 만큼 켈링을 잘 알고 있는 비서팀장이 합류하기로 했다.
“이제 3주 뒤면 구짜의 주주총회입니다. 최선을 다해야 할 겁니다.”
“네.”
* * *
아시아 패션 어워드 시상식은 오후 늦게 진행될 예정이기에 먼저 신지혜를 만나기 위해 그녀가 머무는 호텔로 향했다.
“사장님! 여기요.”
그녀가 밝은 미소를 머금으며 나에게로 달려왔다.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얼굴이 핼쑥해지셨네요.”
“그래 보여요. 하루가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르겠어요.”
“일은 잘돼 가고 있어요?”
“해보는 데까지 하고 있어요. 잘 풀리면 좋은데 어렵네요.”
내 질문에 썩 좋은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자세하게 설명해주세요. 그래야 저도 도움이 될 거 같은데.”
“일단 식당 가서 이야기하시죠. 아빠가 기다리세요.”
“네.”
신지혜와 함께 호텔 레스토랑으로 들어서자.
저 멀리서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파비앙을 발견했다.
‘나랑 원수지셨네. 레이저 나오겠어.’
“네놈이 여기는 왜 왔어.”
“아빠! 사장님한테 그러지 마세요.”
“괜찮아요.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회장님.”
나는 신지혜의 권유로 자리에 앉아.
음식을 먹으며 이번 일에 대해 의논했다.
“현재 구짜 주식 10%를 가지고 있는 투자기업이 중립을 유지하고 있어요. 그곳을 노려보는 수밖에 없을 거 같아요.”
“10%면 상당하네요.”
“네, 저희도 몇 번이나 접근했는데 만나줄 생각도 안 하네요. 그 투자회사의 주식양도양수서만 받아내면 구짜는 지켜낼 수 있는데.”
“발렌시는 벌써 주식 확보된 거고 문제는 구짜랑 생로랑 보테가네요.”
“그렇죠.”
“투자회사 이름이 뭐예요?”
“PXP라는 보험투자회사에요. 아시는 거 있어요.”
“네, 들어는 봤어요. 프랑스 10대 기업 중 하나잖아요.”
“맞아요.”
잘 알고 있는 회사다.
의류산업이 주축인 프랑스에서 명품 브랜드 여러 군데의 지분은 가지고 있는 기업 중 하나로 그 회사의 대표와 파티에서 몇 번 만난 적이 있었다.
‘사장이 미카엘 롱스이었던가?’
패션에 관심이 많은 인물로 디자이너들과 두터운 친분을 가진 사람이다.
그리고 확실하게 기억하는 건 공과 사가 아주 철저했다.
“저도 한번 알아볼게요. 주주총회는 몇 주 남았죠?”
“구짜 주주총회는 2주하고 3일이요. 생로랑이랑 보테가는 2주 뒤 발렌시는 1주일 뒤에요.”
“알겠습니다. 식사부터 하시죠.”
그때 한참 동안 우리 이야기를 듣고 있던 파비앙이 날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괜히 어설프게 접근하지 마라. 더 상황이 악화될지도 몰라. 네가 알려나 모르겠지만 미카엘 롱스 그놈은 욕심이 하늘을 찌르는 놈이다.”
“알고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큼.
“그리고 잔 마르크에 말해뒀다. 아리raM이 소호 패션과 이제 계약할 수 있을 거야.”
“아…. 우승하지 못했는데 괜찮으시겠어요?”
“우승?! 그래 말 나온 김에 물어보자. 우승할 생각은 있었던 거야?”
“뭐 신 디렉터가 파비앙에게 가는 걸 알았으니 그 내기는 없었던 거나 마찬가지였다고 생각했습니다.”
“뻔뻔한 놈.”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감자 샐러드를 수저 가득 퍼 올렸다.
‘미카엘 롱스라….’
그놈은 분명히 이 진흙탕 싸움을 관망하고 있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