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8화 (138/200)

신지혜는 친어머니가 당했던 많은 사건을 알고 나니 새어머니의 모습이 더 역겹게 느껴졌다.

“새어머니는 많이 늙으셨네요. 돈을 처바르는데도 늙어버리니 아버지가 싫어하시죠.”

“…….”

순간 웃고 있던 로쉘트 여사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화를 삼키려 하는 모습이 역력했고 어금니를 얼마나 강하게 깨물었는지 턱 근육이 삐죽삐죽 튀어나오는 게 보일 정도였다.

‘한 방 먹였네.’

신지혜는 셋을 옆으로 밀어내고 승강기에 올라탔다.

그때 쥴리아나 로쉘트가 서서히 닫히는 승강기 문을 잡으며 말을 이었다.

“지금 이렇게 나타난 거 보면 소식을 들은 거 같은데 너한테 떨어질 거 없으니 꿈도 꾸지 마라!”

“관심 끄세요. 떨어질 거 생각도 안 하니까.”

쥴리아나 로쉘트는 신지혜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신경전을 이어갔다.

“스위치 누르시지 교양 없게 승강기 문을 손으로 잡으세요. 저 이제 올라갈 건데 손 좀 놔주시죠.”

로쉘트는 꼭 신지혜의 대답을 들어야겠다는 눈빛이다.

신지혜는 그녀를 보며 씩 웃어 보이며 이렇게 말했다.

“제가 켈링에 관심을 가져볼까 하는데. 새어머니 두 아드님보다 제가 더 똑똑하잖아요.”

“그래?! 나랑 한번 해보자는 걸로 들리네.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한번 보자꾸나.”

“그럼 우리 이제 자주 볼 거 같네요.”

이 짧은 대화가 전쟁의 서막을 알리고 있었다.

쥴리아나 로쉘트가 비릿한 미소를 삼키며 승강기 문에서 손을 떼자 서서히 문이 닫혔다.

그 순간 주차장에서 악에 받친 소리가 들려왔다.

“저 시X년!”

“미친년!”

신지혜는 예전과 다르게 두렵지 않았다.

새어머니의 얼굴만 봐도 심장이 터질 거 같았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생생한 기억과는 다르게 편안하다.

그 순간 머릿속에 떠오르는 인물을 생각하며 신지혜는 피식 웃고 말았다.

“왜 사장님 얼굴이 떠오르는 거냐. 주책이다.”

그녀는 다시 한번 피식 웃으며 아리raM 직원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들과 함께라면 무슨 일이든 두렵지 않았다.

“다들 잘 지내려나.”

그들만 생각하면 좋은 추억밖에 생각나지 않는 그녀였다.

신지혜는 승강기에서 내려 사무실 앞을 지키고 있는 비서에게 말을 이었다.

“저 왔다고 말해주세요.”

“네…… 잠시만요. 회장님 막내 아가씨 오셨습니다.”

잠시 후.

“들어가셔도 될 거 같습니다.”

신지혜는 커다란 문 앞에 멈춰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 문을 열었다.

아리raM 그룹 2.

* * *

* * *

긴 비행을 끝으로 샤를 드골 국제공항에 발을 내디뎠다.

동생에 몸에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파리에 와서 그런지 감회가 새로웠다.

“이게 얼마 만이야.”

파리에 오기까지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집에도 한번 가보고 싶은데….”

좋은 추억들을 뒤로하고 그날의 기억이 잠시 스쳐 지나가는 순간이었다.

나는 수화물을 찾고 파리 시내에 예약한 호텔로 이동하기 위해 공항을 빠져나왔다.

마치 파리의 하늘이 나를 반겨주듯 정말 화창하기 그지없었다.

“날씨도 좋네.”

기분 좋은 하루가 시작될 거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 어어어.”

낯선 인물이 내 옆을 스쳐 지나갔다.

“레이첼….”

현재는 오픈 화이트의 수석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는 레이첼 디자이너.

바에서 술을 마실 당시 바쟐에서 그녀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아는 척할 수도 없고.’

김서진 일 당시 그녀는 샤네르의 수석디자이너로 나와 함께 오랜 시간 동고동락하며 샤네르 디자인팀을 이끌어 나갔다.

그녀는 디자이너로서 아주 완벽한 사람이다.

만약 아리raM에 어떤 디자이너를 영입하고 싶은지 물어본다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나는 레이첼을 선택할 것이다.

몸을 돌려 택시 승강장으로 캐리어를 끌며 이동하려는 그때.

누군가가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어?! 어. 레이첼.”

“어떻게 내 이름은…….”

“그… 그게 오픈 화이트의 수석디자이너라고 알고 있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놀라며 그녀의 이름이 튀어나와 버렸다.

“내가 그렇게 유명했었나. 여튼 아리raM 디자이너죠?”

“네.”

“아시아 패션어워드 재미있게 봤어요. 아리raM 디자인 정말 인상 깊었어요.”

‘웬일이지?’

레이첼은 내성적인 성격에 플러스로 남자 혐오증을 가지고 있으며 웬만해서 누군가에게 먼저 말을 걸지 않는다.

그리고 더 놀라운 건 그녀가 남자인 나에게 먼저 말을 걸어왔다는 거다.

“아, 네. 감사합니다.”

“정식으로 소개할게요. 오픈화이트 수석디자이너 레이첼이에요.”

‘내가 성격을 잘못 알고 있었나? 엄청 낯설게 느껴지네.’

몇 년 동안 함께했던 내가 모를 리가 없는데 오랜만에 만나서인지 너무 낯설었다.

“아리raM 총괄디자이너 차진혁입니다. 반갑습니다.”

“근데 저를 정말 알고 있었던 거에요? 얼굴 아는 사람 몇 없는데. 진짜 어떻게 알았어요?”

“사실 바쟐 디자이너에게 들었습니다. 유능한 친구가 밑에서 일해주고 있다고.”

“뱌쟐 씨가요? 그럴 리가 없는데.”

“네?!”

“아, 아니에요. 그런 게 있어요. 내일이 아시아 패션어워드 시상식이라 오셨나 봐요.”

“네.”

“일행분 없으시면 제 차로 가시죠. 제가 시내까지 태워 드릴게요.”

“저야 좋지만 괜찮으세요?”

“네?! 뭐가요.”

“차에 누구 태우는 거 싫어하시잖아요.”

“……그걸 어떻게?”

그녀는 순간 나를 경계하며 한 발자국 물러섰다.

‘아… 또!’

순간적으로 떠오른 기억을 말로 뱉어버리고 말았다.

‘긴장이 너무 풀려버렸네.’

“오해하지 마세요. 김서진 디자이너에게 들었습니다.”

“뱌쟐 씨야 심사위원이니까 안다고 쳐도 김서진 디자이너는 어떻게?”

“제 친형입니다.”

“네?!”

그녀는 내 말에 화들짝 놀라더니 내 얼굴을 유심히 바라봤다.

“자세히 보니까 닮은 것도 같고. 총괄님의 친동생이라니 말도 안 돼…. 몇 년 동안 함께해도 들어본 적이 없는데.”

“형도 몰랐을 겁니다. 저도 최근에 알게 되었으니까요.”

“우리 인연이네요. 저도 총괄디자이너님 밑에서 오랜 시간 함께 일했거든요.”

“그것도 알고 있어요. 전화를 자주 했거든요.”

“일단 타세요. 가면서 이야기해요.”

“네.”

그녀와 함께 주차장에 들어서자.

빨간색 포르쉐 스포츠카가 눈에 들어왔다.

‘내가 선물한 스포츠카를 아직도 타고 있네.’

이 포르쉐 스포츠카는 그녀를 샤네르에 꼬드기기 위해 내가 선물한 차량이었다.

“어서 타세요. 저도 빨리 회사 들어가봐야 해서.”

“네, 차가 좋네요.”

“그렇죠. 제가 사랑한 사람이 사준 거예요.”

“…컥 콜록!”

“괜찮으세요?”

“네. 괜찮습니다.”

순간 사례가 걸리고 말았다.

나는 내가 사준 차가 아닌지 유심히 바라봤다.

‘내가 사준 거 아닌가? 맞는데. 설마….’

“안 타고 뭐 해요.”

“타요.”

아까와는 다르게 분위기가 조금 더 무거워진 거 같았다.

하지만 레이첼은 호기심 가득하게 나를 바라보며 많은 질문을 쏟아냈고 나는 최대한 답변에 응해 주었다.

“그럼 서로가 친형제인지도 모르고 연락하고 지냈던 거에요?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저도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네요.”

“신기하네요. 바쟐 씨도 아직 차진혁 디자이너를 총괄님의 동네 동생 정도로만 알고 있겠네요.”

“그럴 겁니다.”

“회사 가서 알려줘야지. 난리 나겠어요. 총괄님이랑 바쟐 씨는 정말 친했거든요. 그리고 요즘도… 아니다 이건 말하면 안 되지.”

“무슨?”

“아니에요. 이건 못 들은 걸로 해줘요. 그럼 이제는 기억이 다 돌아온 거예요?”

그녀가 말을 하다 뚝 끊어버리고 다른 주제로 넘어갔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그녀의 질문에 대답해 주었다.

“그렇죠. 사실을 알고부터는 서서히 기억이 돌아오더라고요.”

“다행이네요. 총괄님이 살아계셨으면 더 좋았을 텐데.”

그 말을 끝으로 그녀의 우수에 찬 얼굴이 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아까 전 그녀의 말을 되뇌이며 질문했다.

‘설마… 아니겠지.’

“제 형을 좋아하셨나 봐요?”

“하하하. 그래 보여요.”

“농담이에요. 이렇게 미인이 형을 좋아할 리가 없죠.”

“형이 어때서요! 좋아한 거 맞아요.”

“진짜요!”

“그 사람 진짜 눈치 없는 인간이라 제가 좋아하는 것도 몰랐는데 동생은 바로 캐치하네요. 형보다 낫네요.”

나는 너무 놀라 그녀에게 다시 질문했다.

‘진짜! 내가 잘못 들었나….’

“진짜 좋아하셨어요?”

“사랑했죠. 짝사랑. 정말 멋진 사람이었어요. 늘 자신감에 차 있었고 디자인을 할 때는 누구보다 빛나 보였거든요. 제가 그렇게 다가오는 남자들 앞에서 차버리고 까칠하게 해도 정작 성격 안 좋다고 구박하던 사람이라.”

그녀는 웃으며 오랜 추억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 환한 웃음 속에는 후회와 슬픔이 함께 공존하고 있었다.

“우리 자주 봐요. 그리고 총괄님 이야기 더해주세요.”

“물론이죠. 제 연락처 드릴게요.”

“저야 좋죠. 아시아 패션어워드 시상식 끝나고 뭐 해요?”

“뉴욕에 갈 예정입니다.”

“뉴욕이라… 바로 가는 거 아니면 3일 정도 쉬다가요. 바쟐 씨랑 제가 맛집이랑 파리 디자이너들 소개시켜드릴게요.”

사실 신지혜의 일을 도와주기 위해 3일 정도 비워둔 상태다.

‘레이첼과 친해질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수 없지.’

“그럼 쉬다 가야겠네요. 너무 좋은 조건이라.”

“센스도 형보다 낮네요.”

* * *

비서가 전화를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회장님이 들어오시랍니다.”

신지혜는 커다란 문 앞에서 잠시 머뭇거렸다.

‘하…….’

너무 오랜 시간을 돌아온 거 같은 기분이다.

신지혜가 사무실에 문을 열고 내부에 발을 내딛자.

“네가 제 발로 올 때도 있구나. 무슨 일이냐?”

파비앙이 무뚝뚝하게 말을 툭 던졌다.

그런데 이전과는 다르게 신지혜의 반응이 이상했다.

늘 틱틱거리며 화를 내던 막내딸이 오늘따라 심각한 얼굴로 자신을 아련하게 바라보고 있는 게 아닌가.

“왜 그래 무섭게.”

순간 감정이 복받친 신지혜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파비앙도 흠칫 놀라고 말았다.

성인이 된 이후 이런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갑자기 왜….”

파비앙도 당황한 듯 자리에 일어났다.

“얼굴이 그게 뭐예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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